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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6화 (6/163)

6화

하츠벨루아 공작가의 현재 가주는 루만이다.

그의 딸이 2황자인 데미안과 결혼을 하게 된다면 공작가의 힘이 당연히 데미안에게 몰릴 것이다. 파츠래리는 그걸 막고자 약혼녀를 메릴로 바꾸는 걸 허락했다.

물론 10년의 약혼 기간 동안 메이아는 자신을 곁에서 훌륭하게 보필해 줬다.

사교술도, 외교술도, 외국어도. 각종 악기 연주와 승마, 정치학과 군사론에 마법 재능까지 있는 인재 중의 인재였다.

“그렇지만…….”

“더는 말하지 마! 어머니도 하츠벨루아 공작의 힘을 얻기 위해선 메릴인가 하는 그 공녀와 약혼하면 된다 하셨어.”

앤디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더는 말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앤디, 어차피 약혼녀만 바뀌는 것뿐이고 달라질 건 없어.”

“알겠습니다. 그래도 메이아 공녀 얼굴을 보시고 파혼 이야기를 하시는 건…….”

“지금 내 앞에 쌓인 업무들 안 보여? 그녀라면 이해해 줄 거야.”

이때까지 파츠래리는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의 약혼녀가 될 메릴이 어마어마하게 개념이 없다는 걸. 그리고 그 사실을 곧 깨닫고 좌절하게 된다는 점도 말이다.

더불어 귀족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는 것 또한 예상 밖의 일이었다.

당연히 흔들리는 황태자 자리는 덤이었다.

*

눈을 뜨고 화장대 앞에 앉아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보았다.

은빛 머리카락을 곱게 틀어 올린 모습이 보였다. 거울 속에 비친 주위 사용인들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한가득 느껴졌다.

파혼이 결정되었다.

파츠래리와 황후에게선 단 한 통의 편지도 없었다.

“공녀님…….”

유디는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꽉 깨물며 분노했다.

“눈물 흘리지 마. 어차피 정략 결혼 관계였어. 부모님이 돌아가신 순간 이 상황들을 예상 못 한 건 아니야.”

“그래도 이건 너무한 처사입니다. 우리 아가씨께서 왜 물러나야 하는 겁니까! 흑흑.”

메이아는 몸을 살짝 틀어 유디의 손을 잡았다. 유디 또한 그녀의 손을 꽉 쥐어 잡으며 울분을 토해 냈다.

“우리 아가씨 어릴 때부터 얼마나 고생했는데…… 내가 그걸 옆에서 다 봤는데……. 흑…… 흑흑…….”

“아무도 원망하지 않아. 원망하게 되면 한도 끝도 없으니깐.”

메이아 뒤에 서 있던 시녀들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흐느꼈다.

“이럴 순 없습니다.”

“너무합니다.”

흐느끼는 사용인들을 다독이며 메이아는 말했다.

“다들 울음을 멈추고 티 파티 준비를 해.”

“예.”

시녀들은 흐르는 눈물을 훔쳐 내며 메이아 말에 따라 움직였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기품 있고 우아하게 꾸며 줘.”

오늘 열리는 티 파티의 콘셉트는 ‘감사’다. 꽃은 카네이션을 중심으로 라그나스와 사프란으로 꾸며질 예정이다.

마탑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티 파티가 될 것이다. 그러니 티 파티에 온 영애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할 수 있도록 아름답게, 그리고 의미 있게 준비했다.

여러모로 아주 의미가 깊을 것이다.

‘나의 부모님을 생각하며.’

똑똑.

“공녀님, 페르젠가의 올리비아 후작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셔 와. 그리고 다들 나가 봐.”

“네.”

메이아는 티 파티 열기 한 시간 전, 미리 올리비아를 자신의 방으로 먼저 초대했다.

어머님의 가르침 중 ‘내 편 만들기’의 심화된 가르침. 그건 바로 ‘적을 내 편으로 만들기’다.

<메이, 나를 미워하는 적과 아군은 종이 한 장 차이란다. 그렇지만 적이었던 사람이 내 편이 되는 것만큼 든든한 게 없으며, 내 편이었던 사람이 뒤돌아선 것만큼 무서운 게 없단다.>

눈을 감고 어머님의 가르침을 되새김했다.

노크 소리를 듣고 메이아는 눈을 뜨고 자신의 소파 앞으로 이동했다. 그러곤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으며 머리가 아프다는 듯 한쪽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문이 열리고 올리비아가 들어왔다.

그녀의 눈에 메이아가 이마를 짚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아파 보여 깜짝 놀라 순식간에 소파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메이아 님, 어머!”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힘겨워하는 메이아의 표정에 올리비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언제나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여유로웠던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아파 보이는 메이아의 모습은 처음 본다.

“괜찮으세요?”

“아……. 괜찮아요. 올리비아 영애에게 못 보여 줄 꼴을 보여 주었군요.”

메이아는 어색하게 굳은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앉으세요, 올리비아 영애.”

올리비아는 메이아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봤다. 눈가가 살짝 붉었다.

심지어 눈물 자국까지 보였다. 필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평소의 메이아 공녀님답지 않으세요. 그리고 저를 일찍 불러내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냥 부모님 생각이 나서 울었어요.”

“아.”

“어쩌면 오늘 티 파티가 공작가에서의 마지막일 수도 있어요.”

“마지막이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메이아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덤덤히 말했다.

“제가 올리비아 영애의 티 파티에서 소문에 대한 책임을 질 거냐 말했잖아요.”

“예.”

“소문이 사실이 되었어요.”

그 말에 앉아 있던 올리비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파혼되셨습니까?!”

올리비아를 올려다보며 메이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예, 파혼이 되었습니다.”

10년을 약혼녀로서 파츠래리에게 힘을 실어 주었던 메이아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제가 오늘 영애를 이렇게 일찍 부른 이유는, 이젠 메릴 언니가 사교계를 이끌어 가야 하니 올리비아 영애께서 많이 도움을 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 이 부탁을 드리려고 일찍 모시게 되었답니다.”

메이아의 말에 올리비아는 속이 답답해져 왔다. 이 와중에 카르펜 제국의 사교계를 걱정하다니!

설마 했는데 소문이 실제가 되어 버렸다.

메릴 하츠벨루아가 이미 말을 퍼뜨리고 다녔지만, 사람들은 설마 부모님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고 성인식도 안 치른 동생의 자리를 사촌 언니가 뺏을까 하고 다들 가볍게 생각했다.

루만이 메릴을 황후로 만들고 싶어 하는 욕심이 있다 치더라도 황실은 대체 왜 그런 걸까?

10년의 세월을 이리 우습게 끊어 낼 수 있는 것인가! 파츠래리는 대체 뭘 한 것인가!

“전 못 도와 드립니다, 메이아 님.”

올리비아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메릴은 사람들 앞에서 내숭을 떨고 있지만 올리비아는 은연중 자신을 후작가 영애라며 무시하던 메릴의 본성을 잘 알고 있다.

메이아는 표정이 좋지 않은 올리비아에게 다시 한번 쐐기를 박는 말을 했다.

“전 곧 공작저를 떠날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부모님도 잃어 슬픈 와중에 약혼녀 자리도 뺏기고 공작저까지 나간다는 말은 그녀에게 ‘약혼녀 자리도 쫓겨나는 마당에 공작저에서도 쫓겨나요’라는 말로 귀에 박혔다.

올리비아의 얼굴은 점점 창백하게 변해 갔다.

메이아 공녀가 싫은 건 아니다. 워낙 잘난 사람이라 질투를 심하게 했던 것일 뿐이다.

황후 자리를 욕심냈던 것 또한 맞다. 하지만 10년을 함께한 메이아를 이렇게 딱 잘라 버리는 황궁이라면 욕심내고 싶지 않다.

아니, 마음이 차게 식어만 간다.

그녀가 사교계의 꽃으로서 얼마나 많은 걸 공부하고 노력했는지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인정한 상대가 사라지는 것은 정말 원치 않는다.

메이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 있는 올리비아의 손을 잡고 그대로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제가 떠나기 전 올리비아 영애에게 꼭 말하고 싶었어요.”

“무엇을요?”

“저는 영애와 친구가 되고 싶어요.”

메이아는 수줍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진짜 친구가 되지 않을래요? 떠나기 전에 같이 드레스도 보러 가고, 연극도 보고요.”

“왜 저한테 친구를……. 전 그동안 공녀님한테 짜증도 부렸고…… 질투도 하고…….”

“올리비아 영애가 그럴수록 저도 저 자신에게 솔직해졌어요. 그리고 생각했어요. 지겨운 공부를 내려놓고 올리비아 영애와 차 마시고, 드레스도 보고, 놀고 싶다…… 라고.”

메이아의 말에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떠나기 전에 올리비아 영애와 그러고 싶어요.”

메이아의 말에 올리비아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공작저를 떠난다는 건 무슨 이야기예요? 쫓겨나시는 거 아니죠? 아니겠죠. 아니어야 합니다.”

메이아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신관이 신전에 있을 자리가 없다면 떠나는 게 맞는 것이죠.”

“이럴 수가.”

“떠나기 전 영애를 만나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저에겐 황태자비 자리는 버거웠어요. 하지만 부모님을 실망하게 해 드리고 싶진 않았어요.”

“메이아 공녀님.”

“우리 이젠 친구이니 애칭을 불러요. 제 애칭은 메이예요. 올리비아 영애는요?”

“비아예요.”

“예쁜 애칭이네요, 비아.”

메이아가 진심으로 좋아하며 웃는 모습을 보니 올리비아의 마음이 시큰거렸다.

파혼하고 괴로워 보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홀가분하게 보였다.

“이젠 제가 황후가 되더라도 기뻐할 부모님이 없기에 오히려 지금 홀가분해요.”

메이아는 덤덤하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걸 듣는 올리비아의 심정은 복잡해져만 갔다.

“이제 곧 티 파티 시작하겠어요. 눈가의 부기를 빼고 준비하고 갈 테니 먼저 티 파티 장소로 가 주시겠어요, 비아?”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아의 희고 긴 섬섬옥수 같은 손이 종을 들고 흔들자 종소리를 듣고 시녀 키라가 들어왔다.

“티 파티 장소까지 안내해 드리렴.”

“네, 공녀님.”

올리비아는 티 파티 장소로 가면서 키라에게 말을 걸었다.

키라는 지금 곁에 있는 이 영애가 메이아가 항상 칭찬하던 올리비아 페르젠 후작 영애라는 것을 알고 메이아가 평소 올리비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후작 영애께서 붉은색 드레스가 너무 잘 어울려서 넋을 잠깐 놓으셨다고 했었어요. 그리고 티 파티도 항상 감각 있고 우아하다 하셨고요.”

“그렇구나.”

올리비아 본인은 메이아가 질투가 나서 미웠는데 오히려 메이아는 자신을 칭찬했다.

“그리고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 하셨어요.”

키라라는 시녀의 얼굴엔 단 한 점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메이아는 절대 남들에게 남의 안 좋은 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말과 말 사이 옮겨 가는 것이 굉장히 무서운 것임을 철저히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 나도 그렇단다.”

올리비아 역시 메이아를 은연중 질투하며 미워했지만 한편으로는 메이아만 한 황후감은 없을 거라 인정했다. 그런 메이아가 떠난다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메이아가 사라지면 서로 사교계의 꽃이 되겠다고 말하는 영애들 사이에서 과연 메릴 하츠벨루아만큼 카리스마 있게 이끌어 나갈 사람이 있을까?

절대 무리다.

‘곧 사교계는 폭풍에 휩싸이겠구나.’

휘날리는 바람의 반대 방향을 바라보며 올리비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메이아와 진짜 친구가 되었음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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