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뭐, 뭐 하는 거예요? 내 발로 걸을 수 있다고요.”
“방금 비틀거리지 않았습니까?”
“내려 줘요. 그건 갑자기 일어나서.”
“가만히 계십시오. 떨어지면 다칩니다.”
카시스는 아일라의 말을 자르며 고쳐 안았고, 내려 달라며 발버둥 치던 아일라는 그의 목을 꼭 끌어안고는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그대를 떨어트릴 일은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카시스는 아니라고 하지만 제가 볼 때는 카시스는 정말 친절해요.”
우뚝.
“저는 그리 친절하지 못합니다.”
“저에게만 이렇게 친절했으면 좋겠어요.”
“그대에게만 이러는 겁니다. 그 누구도 제게 이런 대접을 받고 안겨 간 사람은 없습니다.”
아나스타샤에게조차 이러지 않았다.
“거짓말.”
“제가 그대에게 왜 거짓말을 합니까.”
장담하건대 제게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는 건 아일라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누구에게는 상냥하고 자상하고 친절할 것 같단 말이에요.”
“하아-, 제발 그 인식 좀 고치십시오. 아일라. 그대는 처음부터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니, 내가 무슨 처음부터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예요?”
“기억 안 납니까? 잘생기면 착하고, 친절하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으-, 아니 그건! 그때는 정말 그런 줄 알아서 그런 거고요. 난 바깥세상에 처음 나왔었다고요. 그리고 당신처럼 잘생기고 친절한 사람을 만나면 처음엔 누구나 저와 같은 생각을 할 거라구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안겨 있어 시선을 피해도 머리가 따끔거릴 정도의 그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전부 아일라처럼 처음 만나 사람에게 그런 인식을 품게 되지는 않습니다.”
“알았으니까 그만해요.”
창피해.
“다 왔습니다.”
“그, 그럼 이제 내려 줘요.”
아슐레이와 세레스가 있는 방 앞에 도착하자 아일라는 그의 가슴을 밀어 냈다. 아일라가 품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카시스는 순순히 그녀를 내려 줬다.
똑똑똑.
“어머니, 저예요.”
“들어오렴.”
아일라가 카시스와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 누워 있는 아슐레이와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세레스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는요?”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단다. 분명 무리해서 버티고 있었던 것이겠지.”
“그래도 다행이에요. 아버지가 원래대로 돌아와서요.”
“그래, 아일라. 아버지를 아틀란으로 모시고 갈까 한다.”
세레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답답할 정도로 자신의 손목을 꽉 붙잡는 카시스를 아일라가 올려다봤다.
“아직 정신도 차리지 못하셨는데요?”
“그래도 아틀란이 편할 게야. 나도 그렇고.”
“하지만 아직 정리도 안 됐을 텐데요.”
“지내는 데 무리는 없을 테지. 아일라 너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무나.”
아일라의 마음을 읽은 듯 세레스가 말했다.
“언제 돌아가시려고요?”
“지금이라도 가고 싶구나.”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카시스와 헤어지는 것은 싫지만 지금 상태의 아버지와 어머니만 돌아가게 할 수는 없어.
아틀란도 걱정이고.
“아일라.”
“아, 카시스.”
어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방을 나와 생각에 잠긴 채 걷던 아일라는 저를 붙잡으며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정원?”
내가 너무 생각을 깊게 했나?
언제 정원으로 나온 거지?
“아일라.”
카시스의 부름에 고개를 든 아일라는 햇빛에 비친 맑은 호수 같은 그의 은청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카시스에게는 미안하지만 역시 두 분만 보낼 수는 없어. 나는 아버지, 어머니의 딸인걸.
“카시스, 나 아틀란으로 돌아갈게요.”
“저를 버리고 떠나겠다는 말입니까?”
“아니에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럼 뭡니까? 지금 각인자인 저를 두고 가겠다는 것 아닙니까?”
“돌아올게요. 저 반드시 돌아올 거예요. 아버지가 회복되실 때까지만요.”
지금 아버지는 업무를 보실 수 없으셔. 거기다 지금 아틀란도 엉망진창일 거다. 바이칼 악시온처럼 이 틈을 이용하려고 하는 자들이 나올지도 몰라.
어머니도 아버지를 간호하면서 정무까지 보는 건 힘들어. 내가 어떻게든 해야 돼.
내가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틀란을 지켜야 해.
“나는 반드시 돌아올 거예요. 내 반려는 당신이니까요. 저 강해져서 돌아올게요. 힘도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더 노력할 거예요. 그러니까 저를 믿어 줘요, 카시스.”
나는 카시스에게로 돌아올 거야. 각인을 끊을 생각은 없어.
카시스는 가만히 있다가 아일라를 끌어안고는 입을 열었다.
“제게 또다시 기억을 지우는 약을 먹이려 해도 소용없습니다. 통하지 않으니까.”
“먹이지 않아요.”
내가 기억을 지우는 약을 카시스에게 먹였던 이유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카시스가 나를 도우려다가 위험해지는 것이 싫었으니까. 페트라의 죽음을 본 후라 만약 카시스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고, 또 다른 이유는 제가 잘못됐을 때를 대비해서였다.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나는 어쩌면 무사히 돌아올 자신이 없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위험한 곳에 가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가 회복하실 때까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러 가는 거니까.
아틀란을 복구하는 것도, 아틀란의 시민들을 돌보는 것도 공주로서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카시스의 곁으로 돌아오면 된다.
아버지도 전처럼 강제로 언약식을 치르게 하지는 않을 거야. 이번엔 가출이 아니라 당당하게 오고 싶어.
아버지가 허락해 주지 않으신다 해도, 아틀란이 점차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 조금은 허락해 주지 않으실까? 내가 어느 정도 노력하냐에 달라지겠지만.
“반드시 돌아오겠다 저와 약속한 겁니다.”
“네, 약속했어요.”
“그 약속 꼭 지켜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저도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을 찾으러 가서 그곳을 엉망으로 만들지도 모릅니다.”
이거 농담인가? 농담치고는 너무 진지해서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물속에서는 숨도 못 쉬면서 어떻게 오겠다는 거지? 아틀란의 위치도 모르지 않나?
“아일라, 약속의 의미로 입 맞춰도 됩니까?”
아일라의 대답은 들을 필요 없다는 듯이 그가 고개를 숙여 단숨에 입술을 삼켰다.
* * *
“시스. 시스, 카시스.”
“부르셨습니까?”
카시스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고 킬리언을 바라봤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부르는데도 모르는 것이냐? 내가 몇 번을 부른 줄 아는 게냐?”
“왜 부르셨습니까?”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던 게냐?”
“별일 아닙니다.”
“별일 아닌 게 아닌데. 왜 그리 날을 세우는 것이냐?”
“날 세운 적 없습니다. 안 돌아가십니까?”
날을 세운 적이 없다고? 벌써 목소리가 다른데. 이 녀석이 기분이 안 좋은 이유가 뭘까?
“무슨 일인지 말해 보거라.”
“폐하께서 해결해 줄 수 없는 일입니다.”
“해결해 줄지 누가 아느냐? 네가 그러고 있으니 회의에 진전이 없지 않느냐?”
그 자리에는 킬리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윌리엄, 미카엘, 이제키엘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그러니, 왜 그러는지 말해 보거라.”
“아가씨께서 바다로 돌아가신다고 하셔서 기분이 안 좋으신 겁니다.”
미카엘이 대신 대답하자 카시스의 눈썹이 까딱였다.
“뭐?”
“좋아하지 마십시오. 돌아온다고 약조했습니다.”
“돌아온다고 약조했는데 왜 그리 기분이 안 좋아? 잘되지 않았느냐.”
잘됐다고? 무엇이?
“너도 파르미온 왕국으로 가야 하지 않느냐? 이곳에 공주를 혼자 두고 가면 걱정하느라 제대로 일을 못 할 것 아니냐.”
“저를 뭘로 보시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지금 네 상태를 보고 말하거라.”
미간을 찌푸린 카시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너도 황족이니 알 것 아니냐? 지금 왕이 저러고 있으니, 유일한 후계자인 공주가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거다. 돌아온다고 했다니 믿고 기다려라.”
안다. 저도 잘 알고 있다.
정신을 차린 마린족 왕이 아일라가 이곳에 돌아오지 못하게 할까, 그것이 걱정이 됐다. 어제만 해도 아일라가 가지 않겠다면 강제로 끌고 갈 것 같았다. 그래서 아일라를 감싸 안고는 뒤로 물러났었다. 마린족의 왕을 대하는 일이 쉽지 않을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인간에 대한 적대감이 크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죽일 것 같이 살의까지 느껴져서. 하지만 그렇다고 아일라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를 지어야겠군. 대공이 영 집중을 못 하니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여기서 끝내실 겁니까?”
“그래, 내일 마저 하지.”
킬리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카시스가 밖으로 쌩하니 나가 버렸다. 그 광경을 본 킬리언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저 녀석이 정말.”
그때 책상에 올려져 있는 통신구가 반짝였다.
카시스가 밖으로 나와서 향한 곳은 아일라의 방이었다. 아일라의 방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카시스는 노크를 하고는 안에서 대답이 들리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대답이 없다. 인기척도 없고. 잠이 든 건가?
“카시스.”
카시스가 다시 한번 노크를 하려고 손을 들어 올렸을 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일라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카시스가 그녀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디 다녀온 겁니까?”
“바람도 쐬고 제이드에게도 갔다가, 어머니께 아틀란으로 함께 돌아간다는 말을 하고 왔어요.”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카시스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러더니 카시스가 아일라의 손목을 잡고 방 안으로 이끌었다.
“잠깐만요, 왜 그래요?”
카시스에게 붙잡혀 방으로 끌려 들어간 아일라는 방문이 닫히자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카시스?”
역시 입맞춤만으로는 안 되겠다.
“아일라, 저와 하룻밤만 함께 자 주십시오.”
“네?”
“하루면 됩니다.”
“손잡고 제 옆에서 같이 잔 적 있잖아요. 새삼스럽게 왜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