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86화 (86/100)
  • 86화

    “아!?”

    아일라는 갑자기 제 팔을 잡아 일으키는 손길에 놀라 뒤를 돌아봄과 동시에 카시스의 품에 갇혔다. 그것을 본 아슐레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장! 그 손을 놓지!”

    소리치는 아슐레이를 붙잡은 세레스가 그를 불렀고, 킬리언이 카시스의 앞을 막았다.

    “보호자끼리 대화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당신도 많이 다쳤고 부상자들이 많으니 일단 치료부터 하고 쉰 다음에 말입니다.”

    “누가 보호자라는 겁니까? 형님은 제 보호자가 아닙니다.”

    “일 크게 만들지 말고 가만히 있거라. 너는 그녀를 데려가려고 하면 막겠다고 싸우려 할지는 모르겠으나. 제 아버지와 네가 싸우는 것은 네 연인도 원하지 않는 일일 테니.”

    카시스가 힐끗 제 품에 있는 아일라를 내려다보았다. 아일라는 걱정과 불안, 슬픔이 섞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보내지 않아. 절대로 보낼 수 없어.

    “아일라를 여태껏 지켜 준 사람이에요. 그리고, 저 사람 말대로 지금 당신은 치료하고 쉬는 게 먼저예요. 걱정 말고 쉬어요. 그 누구도 당신에게 아무 짓도 하지 못하도록 제가 잘 지킬 테니 한 번쯤은 제게 보호도 받아 보세요. 그동안 나와 아일라를 지키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잖습니까. 게다가 저주로 인해 많이 약해진 상태에서 조종당하고 많이 지쳤을 거예요.”

    당신에겐 휴식이 필요해요. 세레스가 작게 말하며 아슐레이를 끌어안았다. 아슐레이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세레스의 품에서 편하게 잠이 들자 바이칼을 묶고 있던 힘이 풀리면서 그가 밑으로 떨어졌다. 이를 본 킬리언이 사라진 힘을 대신해 바이칼을 마법으로 묶었다.

    “그럼 다시 한번 신세를 져도 될까요?”

    “대공성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카시스가 눈짓하자 아키오스가 아슐레이를 부축하는 것을 도와줬다.

    “고마워요.”

    도움을 받아 이동하는 세레스를 보며 킬리언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왕비는 네게 적대적이지가 않구나.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겠구나.”

    “잠깐 이것 좀 놔줘요. 인어족들에게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오게요.”

    “······.”

    “안 떠나요. 아버지가 원래대로 돌아왔으니까 이제는 제 말을 들어주실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 말아요.”

    카시스의 손등을 살살 문지르며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 옆에선 킬리언이 ‘내가 볼 때는 아니던데.’ 하고 작게 말했지만, 카시스는 듣지 않은 채 아일라만 눈에 담았다.

    “인사만 하고 올게요. 인어족 왕께 전할 말도 있고요.”

    페트라가 죽었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다. 시신이 없어 가족의 품으로도 돌려보내 주지 못했다.

    그녀를 죽인 것은 아버지였다. 비록 아버지의 의지가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녀를 죽인 것은 아버지였다.

    사죄드려야 해.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돕는다 하지 않았더냐?”

    “그리고 죄송합니다. 따님은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시신도 남지 않아서.”

    눈가가 시큰거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알고 있다.”

    “네?”

    “아니, 언젠가는 죽게 될 거란 것을 알고 있었다. 말하지 않았더냐. 그 아이는 네 아비와는 다르게 원래대로 되돌아올 수 없었다. 그것이 금단의 힘을 손에 넣고 동족을 잡아먹은 죗값이다.”

    “하지만.”

    “네 아비도 원해서 한 것이 아닐 거다. 그러니 되었다. 네 아비가 아니었어도 마녀가 된 이상 누군가의 손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왕께 죄송하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고얀 것. 그런 말은 살아서 직접 할 것이지.”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인어 왕이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가 눈을 뜨면 내 말을 전해 주거라. 예전에 내 딸 목숨을 살려 준 값은 갚았다고 말이다.”

    내 아버지가 살려 준 딸의 목숨값. 전에 들은 그 일인가, 인어족 왕과 합세해서 죽음의 바다로 쫓아냈었다는 것.

    인어 왕께서는 이리 말했었지. 죽음의 바다에서도 살아남을 것 같았다고.

    카시스는 인어족의 왕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일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광경을 본 킬리언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쪽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바로 마법으로 만들어 낸 빛의 창을 날렸다.

    “쥐새끼가 있었군. 그런데 이거 놀라운데. 찾을 필요도 없이 직접 나타나 주다니.”

    “칫.”

    킬리언의 공격을 겨우 피한 여자가 혀를 찼다. 폭발음이 들리자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피부가 파란색.”

    “물빛 머리와 눈동자가 마린족의 특징이듯, 파란 피부와 흰 머리 그리고 마물을 조종할 수 있는 건 환영족의 특징이지.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환영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환영을 제 몸의 덧씌워 일반 사람처럼 보이게 하지. 보통 사람이라면 꿰뚫어 보기 힘들어. 그런데 환영이 아니라 진짜 모습으로 당당하게 나타나다니.”

    카시스는 아무 말 없이 검에 오러를 흘려 보냈다. 그리고 검을 감싸고는 검기를 환영족을 향해 날렸다. 상대는 가까스로 카시스의 공격을 피하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환영족? 우리와 같은 이종족인 건가? 하지만 카시스가 왜 공격을 하지?

    카시스는 여태껏 나를 지켜 주고 노예 상인들에게서 다른 종족도 구해 줬는데.

    “저 녀석들은 위험한 존재들이랍니다.”

    아일라가 의아해하자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아나스타샤와 라피스가 옆에 와 있었다.

    위험하다고? 왜?

    “저자들 때문에 제국 전체가 흔들리고 위험했답니다. 그걸 막은 것이 폐하와 대공 전하십니다. 평소에는 환영으로, 본래의 모습을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딱 한 분을 제외하고는 말이죠? 진실을 보는 눈을 지니신 황후 폐하만이 저들의 진짜 모습을 꿰뚫어 보십니다.”

    진실의 눈.

    “진실의 눈 앞에선 거짓된 모습은 통하지 않으니까요.”

    “황제와 대공.”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둘씩이나, 하고 중얼거린 환영족 주위의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곧 사라졌다.

    “이제키엘!”

    “그자가 나타났을 때부터 이미 추적 마법을 발동시켰습니다.”

    “이번엔 놓치지 마라.”

    “레안드로 경이 파르미온 왕국으로 가 있는데. 불러들이실 겁니까?”

    “아니, 그냥 둬라. 어디서 사라지는지 보자고.”

    파르미온 왕국에서 환영족이 종족을 감췄다. 그리고 거기서 레안드로가 마도구에 의지해 찾은 환영족을 놓쳤다. 이번에도 파르미온 왕국에서 행방이 묘연해지면 그것이 과연 우연일까?

    아니, 우연이 아닐 거다. 황궁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듯이 이번에는 파르미온 왕국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파르미온 왕국은 그냥 이대로 두실 겁니까?”

    “아직 확실하지 않은 것 아니냐? 기회를 줬으면 좀 더 지켜봐야지. 네가 파르미온 왕국의 금지옥엽 공주를 돌려보냈어도 말이다. 하지만 협조도 제대로 하지 않고 척만 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 환영족을 숨겨 주거나 돕는다는 것은 용인해 줄 수 없는 일이다.”

    “기사들 집결시켜 놓겠습니다.”

    “확신인 것이냐?”

    “아니라고 보십니까? 레안이 파르미온 왕국 내에서 두 번이나 놓쳤습니다.”

    “확실히. 우리를 속이고 기회를 저버렸다면 심판의 철퇴를 내려야겠지. 환영족이 얽힌 이상.”

    아일라가 카시스에게로 다가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부상을 입었으니 지금은 너도 쉬는 것이 좋겠구나.”

    킬리언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돌아섰다.

    디오스와 아키오스가 대공성으로 돌아가는 마차를 준비해 오자 아일라는 카시스과 함께 마차에 몸을 실었다. 성으로 돌아가는 길, 피곤했는지 아일라는 카시스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성에 도착한 줄도, 제 방으로 옮겨지는 줄도 모른 채 아일라는 다음 날 정오가 지나도록 깨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으음-.”

    “깼습니까?”

    “카시스?”

    침대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뒤척이던 아일라는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다.

    아침은, 아니네. 나 얼마나 잔 거야?

    해가 중천을 넘어선 것을 보며 멍하니 있자 ‘픽’ 웃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홱 돌렸다.

    “하루는 푹 주무신 듯합니다.”

    하, 하루? 하루라고?

    “카시스, 치료는 했어요?”

    갑자기 생각난 듯 벌떡 일어난 아일라가 그의 양팔을 붙잡았다.

    분명 저를 감싸다 다쳤는데. 그래, 은혼단.

    “뭘 찾는 겁니까?”

    “은혼단이요. 은혼단을 먹으면 금방 나을 거예요.”

    침대 위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아일라를 잡아 제지한 카시스는 저를 보게 만들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그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쯤은 얼마든지 다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건 아껴 두십시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아니면 그대가 먹든지 하십시오. 그대도 다치지 않았습니까.”

    “이런 가벼운 상처는 금방 나아요.”

    잔상처가 좀 많아서 그렇지 이런 건 은혼단을 먹지 않아도 금방 나을 상처들이다.

    “저도 금방 낫습니다. 치료도 잘 받았으니 걱정 마십시오.”

    카시스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아일라의 머리를 쓰다듬다 얼굴을 어루만졌다.

    “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은요?”

    “디오스와 아키오스는 치료받고 쉬는 중이고, 그대의 아버지와 호위라던 자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호위? 아, 제이드를 말하는 건가?

    “그자가 제일 부상이 심한 것 같기는 했습니다. 붙잡혔을 때 고문을 당했겠죠.”

    그럼 멜로디는 제이드 곁에 있겠구나.

    “그리고 그대의 아버지는 많이 지쳐 있을 겁니다. 조종당한 것도 있지만 저주에 걸려 있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

    “그렇게 깨물지 마십시오, 피 납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나 보다. 입술을 떼어 내는 그의 손길이 부드러웠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겠어요.”

    “좀 더 쉬었다 가십시오.”

    “아버지가 어떠신지 제 눈으로 확인해야겠어요.”

    아일라는 침대에서 일어나다 비틀거렸고 카시스가 그녀를 잡아 줬다.

    “붙잡아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카시스는 그런 아일라를 지그시 내려다보다 안아 들었다. 갑작스레 몸이 공중에 부유하자 놀란 아일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시스를 올려다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