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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84화 (84/100)

84화

아일라가 온힘을 다해 물을 조종하며 아슐레이를 붙잡아 두려 했다. 그러자 아슐레이의 몸을 감아 오르던 물이 그의 얼굴을 스치며 상처를 냈다.

“아.”

아슐레이는 초점 없는 눈동자로 무심하게 제 얼굴에 난 상처를 손으로 쓸었다. 그리고.

콰앙- 쾅-!!

“으윽! 젠장!”

“전하! 아가씨!”

공격이 거세지자 먼지가 일어났고, 카시스가 달려와 아일라를 감쌌다. 먼지가 가라앉으며 아일라를 감싼 카시스와 모습, 그리고 공격을 전부 막거나 피하지 못해 부상을 당한 디오스와 아키오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콜록! 전하!”

“카, 시스?”

“괜찮습니까? 다친 곳 없습니까?”

제게 다친 곳이 없느냐 물어보는 카시스를 멍하니 바라본 아일라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카시스의 왼쪽 어깨가 꿰뚫리고 양다리에는 피가 나고 있었다. 게다가 다친 곳은 어깨와 다리뿐이 아니었다. 아일라는 놀라서 소리쳤다.

“카시스!!”

지금 다친 건 자기면서 나한테 괜찮냐 묻는 거야?

“괜찮으니 걱정 마십시오.”

괜찮다고? 이렇게 다쳤는데? 괜찮을 리가 없잖아.

“괜찮지 않아요.”

“어디 다친 겁니까?”

“나 말고 당신이요!”

“제가 분명 지켜 준다 하지 않았습니까?”

나 때문에 카시스가 다쳤어. 나를 지키려고 하다가. 이럴 줄 알고 혼자 가려고 했던 거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닐 리가 없다. 아무리 강해도 다치지 않을 리가 없고, 다치면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아직도 어리광을 부리고 있던 거야. 보호받으려고 하고 있던 거야.

“울지 마요, 아일라. 정말 괜찮으니.”

양손과 무릎을 땅에 댄 채 아일라를 내려다보던 카시스는 한 손을 들어 검지로 아일라의 눈가를 쓸었다.

내가 울고 있나?

“울지 마십시오. 그대가 울면 제 마음이 아픕니다.”

“전하!!”

“안 돼!!”

카시스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자, 그의 뒤로 양단이 날카롭게 변한 수십 개의 회오리 채찍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 아일라가 비명을 질렀다. 아일라는 카시스를 밀쳐 내려고 했지만 뒤를 힐끗 본 카시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카시스!!”

콰앙-!! 쿠아앙-!!

아일라의 비명 뒤로 폭발음이 들렸다.

폭발로 먼지가 다시 한번 일어났다 앉았다. 순간 느껴져야 할 고통이 느껴지지 않음에 의아해하던 카시스가 제가 잘 알고 있는 이들의 인기척이 느껴지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킬리언과 윌리엄이 함께 서 있었다.

“정말이지, 내 아우님은 뭐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폐하야말로 뭐 하시는 겁니까? 왜 여기 계시는 겁니까?”

“느낌이 좋지 않아 와 봤더니만 그게 무슨 꼴이냐? 마검사가 되고 생전 다친 적이 없던 녀석이.”

“왜 다친 적이 없습니까? 칼립스를 상대할 때도 다쳤습니다.”

카시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 말하며 일어났다.

“마린족의 왕이라. 아무리 인간들에게 좋은 감정이 없다고 하나, 남의 동생을 죽이려 들면 쓰나.”

“이 정도로 안 죽습니다. 윌리엄, 이제키엘과 함께 아일라를 지켜.”

킬리언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반박한 카시스는 윌리엄과 이제키엘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 꼴로 지금 누구를 지키라는 겁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그 꼴이 되었는데도 제 연인이나 지키라고 말하고.”

윌리엄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 섞인 목소리 다음으로 킬리언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 저보다 강한 형님을 지키라고 합니까?”

“윌, 들었나?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래 봬도 황제이고 동생을 걱정하는 하나뿐인 형인데. 말하는 것 좀 보게. 말로만이라도 지켜 주라고 하면 어때서.”

“형님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곳에 황후 폐하께서 계셨으면 저보다 황후 폐하를 지키셨을 분이니 말입니다.”

“두 분 다 똑같습니다.”

본인 걱정은 안 하는 것은.

“그러니 그만들 하십시오.”

“그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지. 너희는 물러나 있어라. 방해되니까.”

킬리언이 디오스와 아키오스를 향해 말했다.

“골치 아프군. 물을 다루는 일반 마린족이어도 골머리 아픈데, 그들의 왕이라.”

“죽이지 마십시오. 제 연인의 아버집니다.”

“쯧, 혼인도 하지 않았으면서 벌써부터 연인의 가족까지 챙기느냐?”

킬리언이 손을 앞으로 내밀자, 마법진이 생겼다. 그리고 나타난 여러 개의 불기둥이 아슐레이의 물줄기와 부딪히며 치지직 소리와 함께 연기를 피어 올렸다. 그 광경은 마치 속성이 다른 여러 마리의 뱀들이 서로를 물어뜯는 모습 같았다.

“불로는 끝이 없겠군. 아니, 밀리려나. 바닷가라 물이 넘쳐나니 말이야.”

“이제키엘, 나는 됐으니 폐하와 아일라부터 지켜라.”

카시스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는데 아일라가 그의 손목을 양손으로 꼭 잡았다. 얼마나 파들파들 떠는지, 그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져 카시스는 마치 그녀가 아닌, 자신이 떨고 있는 것이라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안 돼요. 다쳤잖아요. 죽는다고요.”

“안 죽습니다. 그리고 그대의 아버지도 기절만 시키겠습니다.”

아일라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더니 한 손으로 은혼단이 들어 있는 병을 다시 꺼내 내밀었다.

“이건 아껴 두십시오.”

“아직 많이 있어요.”

카시스는 아일라가 내민 병을 밀어 내고 여기 있으라고 말하고는 다시 돌아서서 검을 오러로 감쌌다.

“카시스.”

나를 감싸다 다쳤으면 왜.

“그건 전하께서 아가씨를 그만큼 많이 좋아한다는 이야기겠죠.”

“아나스타샤 경.”

“폐하께서 저를 보낸 이유를 알겠어요. 이종족 아가씨를 좋아하게 된 아우가 걱정이 되겠죠. 하지만 저도 전하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답니다. 우리가 서로를 대했던 마음은 친구였다는 것을요. 이젠 더 이상 친구도 아니지만요.”

슬퍼 보여.

“카시스를 좋아해요?”

“강하고 멋진 분이죠. 좋아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좋아하는 감정하고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이제 확실히 알 것 같아요. 좋아했지만 이성으로 좋아했던 것이 아니란 것을요. 전하께서도 당신을 만나고 깨달았을 거예요. 저를 이성으로서 좋아했던 것이 아니란 걸요. 그리고 저희는 가문끼리 서로 적이기도 했고요.”

“적?”

카시스의 적.

“벨로체 자작, 노닥거리지 말고 돕는 것이 어떤가?”

“폐하, 노닥거리다뇨. 저보다 강하신 분들이 계셔서 나설 수 없을 뿐이랍니다.”

킬리언의 말에 아나스타샤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가씨.”

“이봐, 공주.”

아일라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킬리언과 디오스 그리고 아키오스를 지나쳤다.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일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역시 아버지를 공격할 수는 없어. 하지만 카시스가 저로 인해 다치는 것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내가 아버지를 공격할 수는 없어도 묶어 두는 건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아버지의 딸이기 때문에 다니엘의 말대로 절대복종을 거스를 수 있어. 마린족의 일인데 뒤에서 구경하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

아일라는 앞으로 걸어 나가 양손을 아슐레이를 향해 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앞으로 바닷물이 모이며 점점 커져 갔고 거대한 구체가 되었다. 구체에서 여러 개의 물줄기들이 뻗어 나가 아슐레이를 향해서 날아갔다.

집중해. 집중해야 해. 이번에도 엉뚱한 데로 방향이 틀어지면 안 돼.

지금까지는 집중을 해도 제멋대로 방향이 틀어져 엉뚱한 데로 날아가고는 했지만 이번엔 그러면 안 된다. 제대로 제어해야 해.

아슐레이는 제게 날아오는 물줄기들을 막아 내다 카시스가 가까이 다가온 것을 느끼고는 손짓 한 번으로 물의 장벽을 이루어 카시스의 공격을 막아 냈다. 하지만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던 아슐레이의 미간에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파앗!

순간적으로 힘을 끌어 올린 아슐레이는 카시스를 쳐내고 거대한 수룡을 만들어 내 아일라를 향해 쏘았다.

“아일라!”

“이런!”

“아가씨!”

카시스, 킬리언, 디오스가 소리쳤다.

“꺄아악!”

“아일라!!”

“위험합니다. 전하.”

거대한 수룡에 휩쓸린 아일라를 구하기 위해 그 안으로 뛰어들려는 카시스를 윌리엄이 막아섰다.

“비켜.”

“진정하십시오.”

“비키라고 했어!”

카시스를 향해 날아오는 물줄기들을 마법으로 막아 낸 킬리언이 카시스를 붙잡았다.

“진정하라고 하지 않느냐.”

“놓으십시오.”

아슐레이의 공격을 막아 내며 킬리언과 윌리엄이 카시스와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아일라를 가둔 수룡은 거대한 물회오리로 변해 있었다. 회오리 속에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아일라의 몸에는 빙글빙글 도는 물에 의해 잔상처들이 생기고 있었다.

아파. 눈을 제대로 못 뜨겠어.

겨우 실눈을 뜬 아일라의 눈앞에 제가 갇힌 회오리 안으로 들어오려는 카시스와 그를 막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카, 시스.”

말하는 게 힘들어. 숨도 막히는 것 같아. 마린족인 내가 물속에서 숨을 못 쉴 리가 없는데.

이게 아버지의 힘.

“카시스 들어······.”

카시스, 들어오면 안 돼요.

다시 눈이 감긴 아일라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야.]

누구?

[아이야. 네게 내 힘을 빌려주마.]

누구야?

[아무 걱정 말고 잠시 쉬고 있거라. 깨어나면 모든 것이 끝나 있을 거란다. 나는 네 힘에 조금만 힘을 실어 줄 뿐이다. 네가 깨어났을 때는 지금보다 힘을 더 다루기 쉬워질 거란다. 아무래도 왕비는 네 아비가 네게 걸어 놓은 봉인을 완전히 풀지는 못한 것 같으니, 내가 그 봉인을 완전히 풀어 주마. 잠시 자고 있거라.]

슈아앙- 파아앗-!!

아일라가 눈을 뜨면서 그녀를 가두고 있던 회오리가 사라졌다.

“아일라.”

물회오리가 사라지자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아일라를 바라봤다. 아일라를 부르며 다가가던 카시스가 멈칫했다. 물회오리가 사라지면서 공중에서 사뿐히 땅에 착지한 아일라가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세 개의 거대한 물회오리가 아슐레이의 주위를 감싸 좁혀 가며 그를 가두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새 아일라를 가뒀을 때보다 거대한 회오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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