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정신을 잃어 가는 그를 뒤로하고 바닷가로 가서 바다로 들어가려는데 그가 달려와 붙잡았다.
“어, 어떻게······.”
어떻게 된 거야? 왜 카시스가.
아버지를 구하고 그 사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저를 떠나겠다는 겁니까? 누구 마음대로.”
그가 나를 보내 주려 하지 않는다. 인어족의 왕이 준 기억을 지우는 약을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차와 다과에 타서 먹였다. 그런데 어째서 이 사람이 여기에 있는 걸까.
“저를 너무 우습게 봤습니다. 제가 괜히 마검사가 아닙니다.”
“나를 놓아줘요. 제발······.”
“잘 들어. 나는 당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이제 원하는 것을 갖지도 못하고 잃는 것은 지긋지긋하니까.”
놓아달라는 내게 그가 으르릉거리듯 일갈했다.
“내 기억 멋대로 지우고 버리겠다고? 웃기지 마. 그럼 처음부터 육지로 나와서 내 눈에 띄지 말았어야지. 내게 멋대로 이런 걸 만들지 말았어야지!”
카시스가 한 손으로 아일라의 손목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이마에 맑은 은청색의 각인이 드러났다.
“내 마음을 가져가 놓고 이제 와서 버리겠다고? 누가 그렇게 놔둔다고 했나.”
아일라는 흔들리는 눈으로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의 오른쪽 허벅지에 동여맨 천에 붉은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다리 왜 그래요?”
“절대로 놓지 않아.”
“이것 좀 놔 봐요. 분명 멀쩡했던 다리가 왜 이러냐고요?”
제가 나오기 전만 해도 멀쩡했는데 언제 다리를 다친 거야.
“나를 걱정하는 건가? 그러면서 혼자 가겠다고 이런 짓을 해? 별거 아니야. 정신 좀 차리려고 단검으로 찌른 거니까.”
지금 그러니까, 부러 자신의 다리를 칼로 찔렀다는 거야?
“미쳤어요!”
“그러니까 왜 그런 짓을 해. 차에 뭔가를 탔다고 의심하고는 있었지만 설마 내 기억을 지우는 약일 줄이야. 내가 그대에겐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었나? 내게 정말 마음 한 톨도 없었나. 그래도 상관없어. 내가 그대를 놓지 않을 거야.”
“그런 게 아니에요. 당신도 저한텐 소중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런 당신이 나 때문에 아버지와 싸우다 조금이라도 다치면, 위험한 상황이 되면 나는 대체 어떡하란 말이에요. 말했잖아요. 저는 제 아버지와 당신이 싸우는 걸 보고 싶지 않다고.”
내게는 가족도 카시스도 모두 소중한데. 차라리 제가 가는 게 나았다. 그럼 아버지와 카시스가 싸우는 건 보지 않아도 되니까.
“이거 꺼내서 먹어요. 은혼단이에요. 그 정도 상처는 말끔히 낫게 해 줄 거예요.”
아일라가 잡히지 않은 손으로 품을 뒤져 은혼단이 들어 있는 병을 꺼냈다. 하지만 카시스는 그걸 받지 않고 그런 아일라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손목을 잡아당겨 제 품에 가두었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아일라가 그런 카시스의 가슴을 팡팡 때렸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이내 아쉬운 탄식과 함께 떨어졌다. 그러고는 엄지로 아일라의 입술을 쓸며 말했다.
“선택해요. 나와 함께 가든가, 나를 죽이고 가든가.”
“네?”
순간 무슨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제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으니까.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그대가 가면 나도 갈 테니, 같이 가지 않을 거면 나를 죽이고 가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왜 말이 안 됩니까? 당신은 내 기억을 멋대로 지우려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기억을 지우느니 죽이고 가라고 말하는 건데.”
그럼 카시스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기억을 지우느니 죽이라니? 이게 어떻게 말이 되는 소리야.
“그대가 내 기억을 지우면 나는 또다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살았을 때로 돌아갈 테니까. 차라리 죽이고 가란 말입니다. 왜? 못 하겠습니까?”
“어, 어떻게 어떻게 내게 당신을 죽이란 말을.”
“왜 못 합니까? 제 기억도 지우려고 했으면서.”
“기억을 지우는 것과 죽이는 게 어떻게 같아요!”
“제겐 똑같습니다. 아일라. 그러니 선택. -!!?”
갑자기 말을 끊은 카시스가 아일라를 감싸고 모래사장을 뒹굴었다. 그리고 그 둘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물줄기가 그대로 꽂혔다.
“가만히 계십시오.”
아일라를 밑에 두고 상체를 들어 올린 카시스가 바다를 노려봤다. 카시스가 바라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슐레이가 물 위에 서 있었다.
“아, 버지?”
콰앙!!
카시스는 일어나 검을 발검하여 제게 날아온 물줄기를 막아 내다, 밀어 튕겨 냈다.
“아버지가 왜 이곳에.”
분명 처형장에 계실 것이라 생각했는데.
카시스는 제 쪽으로 날아드는 공격을 검에 오러를 싣고 휘둘러 갈랐다.
“앗, 카시스 다리. 아직 은혼단을 먹지 않았는데.”
안 돼. 바다로 끌려 들어가면 카시스가 불리해.
여러 개로 갈라진 물줄기의 끝이 날카롭게 변하더니 카시스를 집중 공격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아일라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일어나 양팔을 벌리고 카시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일라!”
카시스가 놀라서 소리쳐 부르자 아슐레이의 공격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슐레이가 다시 공격을 하려 하자 아일라는 바닷물을 끌어모아 원형의 방패를 만들어 아슐레이의 공격을 막아 냈다.
안 돼. 아버지가 너무 강해. 내가 아버지 공격을 버틸 수 있을까?
정신 차려, 아일라. 아버지도 카시스도 포기할 수 없잖아. 어떻게 해서든 아버지를 멈추게 해야 해.
“아버지! 아버지! 저예요, 아일라라고요!”
멈칫!
어? 저번하고는 다르게 반응하셨어. 저번엔 내가 불러도 모르시는 것 같았는데.
하지만 점점 강해지는 회오리 채찍에 아일라의 방어막은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곧 깨져 버렸다. 그 탓에 아일라는 회오리 채찍에 제대로 맞고 날아갔다.
“꺄악!”
채찍에 맞아 날아가는 아일라를 잡은 카시스는 검에 오러를 실어 검기를 날려 공격을 쳐냈다.
“아일라,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제가, 그대의 아버지와 싸우는 것이 싫다고 했습니까? 그런데 저는 그대의 바람을 이루어 줄 수 없습니다. 그대를 지켜야 하니까.”
“카시스.”
“미안합니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못해서.”
콰앙!
“전하!”
“미안해, 아일라. 너를 걱정하다가 일찍 잡혀 버렸어.”
“멜로디.”
이제키엘이 마법으로 아슐레이의 공격을 막아 내고 카시스를 불렀다. 그에 이어 얼마 전, 자신의 미끼가 되어 주었던 멜로디의 목소리가 들렸다. 앞을 보니 아슐레이는 여러 개의 물줄기에 묶여 있었다.
“전하, 아가씨.”
파앙!
아슐레이가 자신을 묶은 물줄기들을 없애 버리며 풀려났다. 그사이 아일라는 카시스의 품에 안긴 채 은혼단을 꺼내 카시스의 입 속으로 쏙 넣어 줬다.
“큰일이군요. 왕께서 절대복종을 사용하셔서 저도 내 동생의 각인자도 힘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공주님이라면 절대복종에 저항하고 대응하실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아버지의 딸이라서 왕족이라서. 그렇다면 역시 아버지를 막는 건 나여야 한다는 거구나.
하지만 나는. 아니야, 왜 계속 약하게 마음을 먹는 거야. 아버지가 내가 부르는 소리에 반응하셨다니, 아직 희망은 있어.
“다니엘, 부탁이 있어요. 아버지는 제가 막고 있을게요. 그러니까 멜로디와 함께 제 어머니와 당신의 가족들을 구하러 가요.”
“······.”
“구하고 싶잖아요? 인어족들이 도와줄 거예요. 인어족 왕이 제게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가라, 다니엘. 아일라는 내가 지킬 거다. 그리고 너는 내가 보호받을 실력이 아니란 걸 알고 있지 않나.”
다니엘이 저를 바라보자 카시스가 일어나면서 말했다.
“시간 없다. 곧 정오가 될 거다. 가서 네 진짜 가족을 구해 와라.”
“멜로디, 가서 나 대신 제이드를 한 대 때려 줘. 무사히 내 어머니도 지키고 같이 돌아온다고 했으면서 약속 안 지켰으니까.”
“알았어. 고마워, 아일라.”
다니엘과 멜로디가 바다로 뛰어드는데, 그 순간 아슐레이가 두 사람을 공격했다. 하지만 아슐레이의 공격은 두 사람에게 닿지 못했다. 이제키엘이 보호 마법을 시전했고 카시스가 검기로 아슐레이의 공격을 잘라 냈기 때문이다.
“아버지, 저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고 마음먹어 놓고는 아버지와 싸울 수 없어 도망쳤어요. 하지만 아버지를 되찾기 위해서라면 지금 아버지와 맞서지 않으면 안 되겠죠. 저는 아직 힘을 잘 다루지 못하고 아버지처럼 강하지도 않아요. 그래도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정말 사랑해요. 그러니까 이런 아버지 모습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
아일라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자 아슐레이 발밑의 바닷물이 요동치더니 그의 몸을 감으며 올라갔다. 아무런 감정도, 초점도 없는 눈동자가 아일라에게로 향했다.
“디오스, 아키오스.”
아슐레이가 저를 휘감고 올라오는 물줄기를 파했다. 이를 본 카시스가 아일라의 허리를 감싸 제 쪽으로 당기며 디오스와 아키오스를 불렀고, 두 기사는 즉시 카시스와 아일라의 앞을 막아섰다.
“마린족의 왕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왕도 너희도 다치지 않게 주의해라.”
“형님 전하께서는 정말 불가능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아키오스가 날아오는 물줄기를 잘라 내자 다른 물줄기가 검을 휘감았다. 아키오스가 검을 당기며 버티자 디오스가 공격을 막고 아키오스의 검을 휘감은 물줄기를 잘라 내며 답했다.
“저희가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소드마스터도 되지 못했습니다. 전하.”
그러니 양쪽 다 다치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더욱이 저희가 마린족의 왕에게 상처를 입힐 수나 있으려나 모르겠다.
“다니엘 말대로네.”
다른 마린족이라면 절대복종을 사용하는 아버지 앞에서 힘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거다. 하지만 저는 달랐다.
아슐레이가 자신을 붙잡는 힘을 파했지만 아일라는 다시 바닷물을 조종해 아슐레이를 묶어 두려고 했다. 그것을 눈치챈 아슐레이가 아일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역시 진심으로 아버지를 공격할 수는 없어. 하지만 붙잡아 두는 것이라면. 아버지가 정신을 잃게 할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