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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61화 (61/100)
  • 61화

    “네, 뭐라고요?”

    지금 카시스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 귀에는 각인을 없애고 싶지 않다 들리는데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

    아니야. 정신 차려, 아일라 아틀란! 원하지도 않은 각인이 생겼는데 없애고 싶지 않을 리 없잖아.

    아일라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좌우로 흔들리는 고개를 막은 것은 카시스였다.

    “지금은 이 각인이 없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그대가 제 옆에 있었으면 합니다. 그대와 함께 한 시간은 길지 않지만, 그대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런 말을 하면 기대하게 되잖아.

    “그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미칠 것만 같았고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왜 그래요? 카시스, 이상해요.”

    “그대에게 힘을 다루는 법을 알려 주라고 한 것은 접니다만. 함께 힘을 다루는 것을 연습하는 것을 볼 때면 저도 모르게 화가 났습니다.”

    “······.”

    “감이 좋다면서 그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합니다. 너무 둔감합니다.”

    “뭐라고요?”

    내가 둔감하다고? 내 어디가 둔감한데.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카시스가 제 마음은 이미 아일라에게 향해 있다, 좋아하고 아니,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건만 아일라는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저는 다른 자가 그대의 각인자로, 혹은 반려로 있는 것이 싫습니다. 제가 계속 그대와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말입니다. 계약이 아닌 그대의 진짜 각인자로서, 반려로 말입니다.”

    카시스는 재정비하듯 아일라에게 덮어준 이불을 매만져 주고는 방을 나갔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제대로 듣기는 한 것이 맞는 거야?”

    아일라의 방을 나온 카시스는 낮은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윌리엄이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마을은?”

    “웬만큼 정리됐습니다. 그리고 벨로체 자작이 도착했습니다. 지금 응접실에서 기다리는 중입니다.”

    윌리엄의 보고에 카시스가 걸음을 잠시 멈췄지만, 이내 다시 걷기 시작했다.

    “피해 사항 어느 정도 정리됐는지 이제키엘에게 인수인계하고 복구는 미카엘과 이제키엘어게 맡겨. 벨로체 자작을 만나는 것은 파르미온의 공주를 만나고 나서 가지.”

    “파르미온의 공주는 어쩌실 겁니까?”

    “모국으로 돌려보내야지. 폐하께는 내가 서신을 보낼 거다.”

    “그렇게 되면 파르미온 왕국에서 더 움직이기가 힘이 들 겁니다.”

    “상관없다. 카르마의 독이 어디서 나온 건지, 경도 기억하겠지?”

    어비스의 마왕 압바듐. 그자는 이 세계로 넘어오는 것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자가 남기고 간 피부 일부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나온 독기가 바로 카르마 독이다. 카르마 독은 등급이 있었다. 그나마 파르미온의 공주가 손에 넣으려고 했던 것은 등급이 제일 낮은 것이지만, 그것조차 중독이 되면 마비가 되면서 불구가 된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라 피부가 썩기까지 한다. 그 해독제를 만드는 데만 몇 년이 걸렸다.

    “등급이 높을수록 증상이 빨리 나타나기도 하지만 즉사도 할 수 있지. 그런 위험한 독을 내 연인에게 먹이려 했는데 내가 데리고 있을 이유는 없어. 파혼이 앞당겨지는 것도 당연한 거다.”

    그래도 곱게 돌려보내 줄 생각은 없다. 아일라가 오해하는 것처럼 저는 그렇게 착한 녀석이 아니다.

    “독을 함부로 쓰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 줘야겠지. 카르마 독을 길드에 가서 가져와. 아일라가 먹은건 해독제였지만 그 해독제가 아일라에겐 독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똑같이 당해야겠지.”

    “설마 카르마 독은 파르미온의 공주에게 쓸 생각인 거야?”

    “왜? 쓰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아일라가 죽을 뻔한 원인이 그 독 때문인데. 본인도 직접 독에 당해 봐야지.”

    아일라를 불구로 만들어 그녀의 앞에서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여 주고 싶다고 했었나? 바다속에 있는 아틀란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자신이 저지르려고 했던 일을 도리어 당해 봐야지 정신을 차릴 것 같으니 그 기대에 부응해 줘야겠지.

    “가져오라면 가져와. 난 여러 번 말하는 거 싫다.”

    자신이 쓰려고 했던 독에 어디 한 번 당해 보라지.

    카시스는 복도를 지나 크레타가 감금되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입니다. 공주.”

    “저를 언제까지 여기에 가둬 두실 거죠?”

    “공주의 처분이 결정됐습니다.”

    의논할 것도 없었다. 제가 결정한 사항이니 통보만 하면 되는 일이다.

    “지금 제게 처분이라 하셨나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처분이란 말을 하는 건가요?”

    “제 연인을 죽일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녀가 죽었다면 공주도 그 목숨을 보장 못 했을 겁니다.”

    “뭐라고요?! 저는 전하의 약혼녀예요.”

    “형식적인 것이지요. 공주를 파르미온 왕국으로 돌려보낼 겁니다. 물론 파혼과 함께.”

    카시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크레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 파혼할 생각 없어요.”

    “이건 통보입니다. 공주는 결정에 따르기만 하면 되고요. 그러게 제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얌전히 있었으면 좀 더 있다가 곱게 돌려보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먼저 일을 저지른 것은 공주였다. 아일라가 죽을 뻔했으니 저는 봐줄 생각이 없었다.

    “저는 동의 못 해요. 아바마마께서도 동의 안 하실 거예요.”

    “공주 공주 눈에는 내가 공주와 파르미온 국왕에게 동의를 받아야 할 입장으로 보이나? 공주가 동의를 하든 말든 그건 상관없어. 앞서 말했듯이 이건 통보다. 그리고 나를 화나게 한 대가는 받아야 할 거야.”

    카시스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고 목소리가 차갑게 내리깔렸다.

    “황제,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실 리가 없어요.”

    “글쎄, 과연 어떨까?”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파혼은 진행할 거다. 그리고, 제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파혼을 도와준다는 조건을 걸었었으니 제 파혼을 승인해주지 않을 수 없을 거다.

    “나는 공주를 더 이상 데리고 있을 수 없어. 내 연인에게 독을 쓴 여자가 내게도 독을 쓰지 않을 리가 없으니 말이야.”

    “저는 그 여자에게 독을 쓴 적이 없어요. 그런데 어째서 저를 모함하시나요? 그리고 제가 전하께 독을 쓸 리가 없잖아요!”

    “거짓말을 하는군. 마지막으로 하나 알려 주지. 공주가 독을 구한 그 길드의 주인이 바로 나다. 그러니 그대가 손에 넣었던 독이 어떤 것인지, 누구와 함께 길드를 찾아갔었는지 이미 나는 알고 있어. 독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사용하게 되면 어찌 되는지 교훈을 얻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군.”

    카시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아나스타샤가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다고.”

    * * *

    “오래 기다렸나. 벨로체 자작.”

    “아닙니다. 전하. 그동안 평안히 지내셨습니까.”

    응접실을 들어오며 건네는 인사에 아나스타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거짓말을 하는군. 오래 기다렸을 텐데.”

    “이 정도야 기다릴 수 있지요. 전하께서는 바쁘신 분이시고 큰일을 겪으셨다 들었습니다.”

    내가 큰일을 겪은 것이 아닌 것을 알 텐데.

    “앉지. 그래서 온 이유는?”

    “전하께서 이미 알고 계실 거라 사료되옵니다.”

    “아니, 전혀 모르겠는데.”

    “모른 체하시겠다는 것이군요. 폐하께서 전하의 마음을 붙잡으라 하시더군요.”

    역시나.

    “가능할 것 같나?”

    “아니요. 끊어진 인연의 실은 강제로 이어 붙인다하여 이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잘 알고 있군.

    “그런데도 온 이유는.”

    “폐하의 명이니 따라야지요. 황명을 거역할 수 없지 않습니까.”

    “여기에 경을 반길 사람들은 없어.”

    “그것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요. 하나, 이곳에 꽤 오래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전하. 양해 부탁 드립니다.”

    “방은 내줄 테니 쉬는 셈치고 편히 머무르다 가.”

    폐하께서 아나스타샤 벨로체를 제게 보낸 이유는 뻔하지만, 저도 그녀도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곤할 테니 쉬게. 지금 미카엘이 성 밖에 나가 있으니 다른 이에게 안내하라 이르지.”

    “전하.”

    카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아나스타샤가 그를 불러 붙잡았다.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무엇을 말인가?”

    “지금 전하 옆에 있는 연인에 대한 마음이 저 때와 같은 마음이십니까?”

    “같지, 않네.”

    “조금 서운하기는 하지만 그걸로 됐습니다. 전하께서 저와 지금의 연인을 대할 때 마음이 같다면 그 연인이 불쌍할 것 같았습니다. 같지 않다 하니 천만다행이지요. 전하께서 진심으로 마음을 주는 연인이 생겼다는 말이니 말입니다.”

    아나스타샤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누구에게도 마음을 줄 것 같지 않으신 분이었는데 마음을 주는 연인이 생겨서 다행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카시스는 아나스타샤를 조용히 바라보다 응접실을 나갔다. 그가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이 들어와 그녀가 머무를 방으로 안내했다.

    “나도 놀라워. 설마 내가 누군가에게 이정도로 마음을 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집무실로 돌아온 카시스는 서류가 쌓여 있는 책상을 등지고 커다란 창문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니엘과 같은 종족이라서 보호해 주고 지낼 곳만 마련해 주고는 각인을 해결할 생각뿐이었는데 언제 그녀를 향한 마음이 깊어진 것일까. 자신도 모르겠다.

    “언제 그녀를 향한 마음이 깊어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아일라가 아니면 안 되니까 곁에 둘 거다.”

    똑똑똑.

    “들어와.”

    “전하.”

    “카르마의 독, 가지고 왔나.”

    “가져오기는 했지만, 이것을 정말 파르미온의 공주에게 쓰실 생각입니까?”

    윌리엄이 들어오고도 돌아보지 않던 카시스가 그제서야 돌아봤다.

    “파르미온의 공주가 내 연인에게 쓰려고 했던 진짜 독을 내가 그 공주에게 쓰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입꼬리를 위로 끌어당기며 어디 있으면 말해보라는 듯 바라봤지만, 윌리엄은 더 이상 입을 열수가 없었다. 카시스가 진심으로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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