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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60화 (60/100)

60화

언제? 나는 그냥 한숨 푹 잔 것처럼 개운한 느낌밖에 들지 않는데. 그런데 잠깐만. 내가 언제 잠이 들었던 거지? 분명히 시녀장이 파르미온의 공주가 보낸 선물이라면서 차와 다과를 가져온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진짜 독이 아니라고 했는데. 설마, 진짜 독이었던 건가?

“하아! 진짜 독은 아니었습니다. 독의 해독제로 만든 약이었을 뿐.”

아일라가 대답을 요구하듯 카시스가 낮은 한숨을 내쉬더니 조금은 진정이 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에게는 해독제지만, 마린족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마린족에게 독이 될 수 있는 것?

“플라톤이 들어간 것을 먹었단다.”

“플라톤이면 촉진제 만들 때 쓰는 그거요?”

“그래.”

슬쩍 눈동자를 돌려 세레스에게 묻자 맞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그걸 먹었다고? 언제? 그 차구나. 그래서 내가 쓰러졌던 거였어.

“미안합니다. 지켜 주겠다고 그렇게 약조했는데 그 약조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아니, 왜 당신이 사과를 해요? 당신 잘못도 아니면서요. 그리고 당신은 몰랐잖아요.”

“몰랐다고는 하나 당신을 위험하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마신 거니까 제 잘못이지 카시스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말아요.”

그런데 이상하네. 플라톤은 그저 힘을 높여 주는 촉진제 역할만 할 텐데.

그런데 숨이 막히네.

“저기, 카시스. 그만 좀 풀어 주면 안 될까요?”

아니, 풀어 달라니까 왜 점점 힘을 주는데. 숨 막힌단 말이야.

“카시스 잠시만요. 힘 좀 조금만 풀어 줘요. 숨 막힌단 말이에요.”

“그대가 잘못되는 줄 알았습니다.”

“나 그렇게 간단하게 잘못되지 않아요.”

“잘못될 뻔하지 않았습니까.”

“살았잖아요.”

살았으면 된 것 아니냐는 듯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하는 아일라의 말에 살며시 떨어진 카시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어머니는 어떻게 여기 있는 거예요?”

“그대를 살리려고 저번에 만났던 마린족을 찾았는데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제이드와 멜로디가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고요?”

아일라가 고개를 돌려 세레스를 바라봤다. 세레스를 바라보는 눈에는 ‘어째서?’라는 의문이 들어차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길어지겠구나. 그리고 나만 와 있는 것이 아니란다.”

그거야 제이드와 멜로디가 함께 있었다고 했으니 같이 와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보다 아틀란에 계셔야 할 어머니가 왜 여기에 있는 건지 그것이었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야기를 하려면 길어질 것 같구나.”

네가 깨어나기 전에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잘 지낸 것 같아 기쁘구나.”

“카시스가 저를 많이 신경 쓰고 도와줬어요. 지켜 주기도 했고요.”

“그런 것 같구나. 지금까지 안전하게 지낸 것 같으니. 하지만 아일라.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을 거란다.”

세레스는 아슐레이가 제정신으로 돌아와도 이들의 관계를 반대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아일라를 지켜 줬다 하더라도 저 또한 인간과의 혼인은 반대였다.

아일라와 이 사람의 혼인보다 급한 건 그이를 제정신으로 돌리는 것.

“아일라. 네게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단다.”

아슐레이에 대해 말해야겠지.

“이야기할 생각이십니까?”

“제이드!”

아일라는 문 쪽에서 들리는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제이드를 보고는 반갑게 소리쳤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가출 공주님.”

“그 앞에 가출 자는 빼 줘.”

“가출 맞지 않습니까?”

“그거야, 아버지가 나를 감금하니까 그렇지?”

아버지가 내 말만 들어 줬어도, 악시온과 강제로 언약식을 치르려고 하지만 않으셨어도 내가 가출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아버지가 잘못한 거야. 아버지가 예전처럼 내 얘기를 들어 주셨으면, 슈레더 악시온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 들어주셨으면 됐다고!”

“슈레더 악시온.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었다 했더니, 보는 것만으로 화가 나던 이유가 그거였군.”

“네?”

“만났습니다. 그대가 말하는 슈레더 악시온과.”

아일라의 느릿하게 깜빡였다.

카시스가 슈레더 악시온과 만났다고? 언제? 어디서? 설마 나를 잡으러 직접 뭍으로 올라온 건가?

“그대를 데려가기 위해서 온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말입니다.”

나를 잡으러 온 것이 아니라면 누구를? 설마?

카시스가 세레스와 제이드를 힐끗 보자 아일라도 눈치챘는지 눈이 살며시 커지며 세레스를 바라보며 불렀다.

“어머니?”

“지금 깨어났으니 쉬는 게 좋겠구나.”

“잠시만요.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머니가 왜 여기 계신 거예요? 어머니께서는 아틀란에 계셔야 하잖아요. 네? 어머니.”

“네가 어찌 지내는지 궁금해서 직접 찾아보려고.”

“어머니. 저 어린아이 아니에요. 그런 말에 속지 않는다고요.”

어머니는 바다 신의 제단이나 아버지와 함께 바다를 둘러볼 때가 아니면 아틀란을 벗어나신 적이 거의 없으신 분이야.

“어미가 딸이 걱정되어 직접 찾으러 왔다는 것이 이상한 거니?”

“아니요,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제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려 주셨을 거예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니?”

“어머니께서는 제가 넘어졌어도 혼자 일어나기까지 항상 기다려 주신 분이니까요.”

어머니는 제가 혼자 일어날 수 있을 나이가 됐을 때부터는, 넘어져서 울어도 일으켜 주지 않으셨다. 주변에서 일으켜 주려고 하면 그들을 막고 제가 아무리 울어도 혼자 일어나서 오라며 근처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다리셨다. 제가 흐느끼며 일어나 다가가 안기면 잘했다면서 등을 토닥여 주고 달래 주시던 분이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께서 저를 기다려 주지 않으셨을 리가 없다.

무엇보다 아버지께서 어머니가 뭍으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해 주셨을 리가 없어.

“어머니. 아틀란에 계신 아버지께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아니, 아무 일 없단다. 정말 네가 보고 싶어서 직접 온 거란다.”

“거짓말 마세요. 아틀란에 아버지께 무슨 일 생긴 거죠? 그렇죠? 어머니.”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왕비님. 악시온이 아틀란을 장악했다고 말입니다. 숨긴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대답은 세레스가 아닌 제이드에게서 들려왔다. 그 말에 아일라는 제이드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 앞까지 다가가 그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틀란이 악시온에게 장악됐다니?! 그럼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는데, 무사하신 거야?”

“······.”

“대답해.”

“······.”

“대답해! 제이드 앤드류! 대답하라고!”

왜 대답을 안 해! 왜! 설마 아버지가 잘못되신 거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아버지는 바다에서 제일 강하시단 말이야. 그런 아버지가 악시온에게 당하셨을 리가 없어.

“아일라 진정하십시오.”

카시스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일라가 흥분하자 그녀를 붙잡으며 진정시키려고 했다. 이제야 의식이 돌아왔는데 이렇게 흥분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이거 놔 봐요. 제이드가 말을 안 해 주잖아요.”

“아일라 지금은 쉬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지금 쉬게 생겼어요? 말하라니까, 제이드.”

“아일라.”

카시스가 아일라를 잡아 제이드에게서 떼어 내 제 품에 가두었다. 그러자 세레스가 아일라의 앞으로 와 부드럽게 얼굴을 감싸며 그녀를 불렀다.

“어머니.”

“지금은 쉬는 것이 좋단다.”

“하지만.”

“네가 쉬고 나면 이야기해 주마. 걱정하지 말렴. 아버지는 괜찮으니.”

조종당하고 있지만 다친 곳은 없으니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네가 한숨 자고 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주마. 그리고 제이드 경. 경도 쉬세요. 그리 무리하면 안 되는 건 경도 마찬가지니.”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요, 경은 괜찮지 않습니다. 이건 왕비로서 내리는 명령이니 따르세요. 아일라가 무리하지 말고 쉬어야 하듯이 경도 마찬가집니다.”

제이드가 무리하고 있다는 건가? 제이드가 무리할 일이 뭐가 있다고.

“제이드가 왜요?”

“나도 나가 보마. 쉬렴. 따라 나오세요, 제이드 경.”

세레스가 지나치며 명령하자 고개를 숙인 제이드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대의 어머니가 하는 말을 들으셨죠. 그대는 지금 누워서 쉬는 겁니다.”

그들이 나가자 방에 남아 있던 카시스는 아일라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줬다.

“주무십시오.”

“저기, 시녀장은 어떻게 됐어요? 당신 뜻대로 쫓아냈나요?”

“그대에게 해를 입혔으니 당연히 감옥에 가뒀습니다.”

“그럼 당신의 약혼녀는요?”

“감금 상태입니다. 파혼하고 그녀의 나라로 돌려보낼 겁니다.”

“파혼할 수 있는 건가요?”

“제 연인에게 해를 끼치고 죽이려 했으니 당연히 가능합니다.”

그럼 우리 계약도 끝나는 건가?

“공주를 돌려보내고 그대를 진짜 제 약혼녀로 만들 생각입니다.”

“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그대를 제 진짜 약혼녀로 만들 것이라 했습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어.

나를 진짜 약혼녀로 만들겠다고? 나와 진짜로 연인 사이가 아니잖아. 각인도 원해서 생긴 게 아니었고.

내가 왜 각인을 없애고 다른 반려를 찾으려고 하는 건데. 이 사람이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원하지도 않은 약혼을 한 사람에게 각인 때문에 억지로 저와 혼인하고 제 옆에 있어 달라고 할 수 없어서였다.

“당연한 것인데 뭘 그리 놀라는 겁니까?”

맞다. 마린족은 각인된 상대하고만 혼인할 수 있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하지만 저는 각인 때문에 당신이 억지로 저와 혼인하는 것이 싫어요.”

“어째서 억지로 혼인할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그렇잖아요. 원해서 생긴 각인도 아니고요.”

“제가 그대를 원하면 이 각인을 없애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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