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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10화 (10/100)
  • 10화

    “전 지극히 제정신이에요. 제가 가출한 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라고 이러는 거죠?”

    왜 저렇게 화가 난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지 이해가 안 가.

    이유는 말해 줄 수 없지만 나도 사정이 있어서 가출한 거란 말이야.

    “하- 일단은 다니엘이 오거든 상의해 봅시다.”

    “다니엘? 그게 누군데요? 그리고 제 일을 왜 그 사람과 상의를 해요.”

    “내가 마린족과 가깝다고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물론 기억하고 있다. 그 말을 들은 지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았으니까.

    다른 마린족이 누구인지 궁금하고 만나고 싶기는 하지만, 제 일을 왜 그 마린족과 상의한다는 말인가.

    “그게 왜요? 그 말은 왜 내가 모르는 사람과 내 일을 상의해야 되느냐는 것에 대답이 될 수는 없어요.”

    “될 수 있습니다. 같은 마린족이니 이야기를 해 보라는 말입니다.”

    “뭐라고요?”

    그녀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듯 카시스는 단호한 말로 쐐기를 박았다.

    “같은 마린족끼리 이야기를 나누어 보란 말입니다. 하루 이틀쯤이면 그가 우리가 있는 곳에 도착할 겁니다.”

    저는 이 여자에게 왜 이리 신경을 쓰는 것일까. 그녀가 그를 구해 줘서? 아니면 다니엘과 같은 마린족이라서? 그것만 가지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도대체 이 감정이 무엇인지, 뛰어난 마검사인 그로서도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음 느끼는 생소한 감정이었다.

    카시스와 아일라가 만났을 시간, 아틀란 왕좌에 앉은 아슐레이 앞에 제이드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대체 경비는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아일라가 빠져나가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냐!”

    “송구합니다.”

    “설마 빠져나가게 부러 빈틈을 만든 것은 아니겠지?”

    “무슨 말을 그리하시오, 악시온 경.”

    “이상하지 않소, 앤드류 경? 그대의 아들이 매번 공주님이 빠져나가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된다 생각하시오!”

    그러자 맞은편에 서 있던 중년의 남자가 화가 난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아니 그렇습니까? 왕이시여.”

    “그대 말이 틀리지 않군, 악시온 경. 부러 그런 것이냐? 제이드 앤드류.”

    아슐레이는 악시온의 편을 들어주고는 제이드에게로 시선을 옮기고는 물었다.

    “아닙니다. 제이드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대에게 물은 것이 아니오. 제랄드 앤드류! 짐은 지금 경비 대장인 그대의 아들에게 묻는 것이야!”

    아슐레이가 분노 어린 목소리로 제랄드에게 소리쳤다.

    “왜 대답이 없는 것이냐? 대답해 보거라!”

    “······아닙니다. 경비를 소홀히 한 적 없습니다.”

    “한데 공주가 빠져나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매번 공주를 놓치고 물 위로 올라가는 것을 모르고 있었지. 그게 말이 되는가! 바다를 뒤져도 없다는 것은 바깥세상으로 나갔다는 말이거늘 이를 어찌 책임질 것이냐!”

    “그것이 경비 대장만의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슐레이 옆에 앉아 걱정스레 제이드를 바라보던 세레스가 입을 열었다.

    “왕비님, 지금 무슨 말씀이십니까. 왕비님이 나서실 자리가 아니십니다.”

    “무엄하군요. 바이칼 악시온 경. 지금 감히 왕비인 내게 내 딸 일에 나서지 말라 그리 말하는 겁니까?”

    “그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왕비마마.”

    “그것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오!”

    “왕비, 바이칼 경의 말이 맞소. 그대가 나설 자리가 아니오.”

    “당신······.”

    아슐레이의 말에 놀란 왕비가 옆을 돌아봤다.

    “당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아일라는 제 딸이기도 해요. 그런데 지금 어미에게 딸이 연관된 일을 참견하지 말라 말하는 건가요?”

    “그런 말이 아니지 않소. 지금은 경비 대장이자 아일라의 호위인 제이드 앤드류의 책임을 논하는 자리요.”

    “하나, 아일라가 거론된 이상 어미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어요.”

    “시끄럽소! 여기서 나가시오! 당장!”

    “당신······ 정말······.”

    “나가라 했소!!”

    “당신이 나가라고 하니 나가겠어요.”

    자리에서 일어난 세레스는 옆문을 향해 몇 걸음 걸어가 멈춰서 뒤를 돌아봤다.

    “당신, 아일라 말대로 정말 이상하게 변한 것 알고 있나요?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던 딸의 말뿐만 아니라 이제 저나 앤드류가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고 있어요. 자꾸 변하는 당신을 보기 힘들어지네요. 저는 이대로 당신이 자기 자신을 잃지는 않을까 걱정이에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겨 회장을 나갔다.

    회장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에게 쫓겨난 세레스는 복도에 창가로 다가가 벽을 짚고 밖을 내다봤다.

    아일라······.

    언약식 때까지 딸을 가둬 두려는 그의 행동에 화가 났다. 그래서 집무실로 찾아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보고 잘 이야기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대화가 자꾸 겉도는 것 같고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바이칼 악시온이 아틀란의 왕인 그를 쥐고 흔들려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그의 손을 들어 줬다.

    일 년 전, 갑자기 쓰러져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기 전하고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언제나 악시온를 멀리하던 그가 어느새 악시온을 가까이 두고 있었다.

    남편을 설득하지 못한 그날 밤, 그녀는 자신의 딸이 아틀란을 빠져나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딸의 방 창가를 멀지 않은 곳에서 지키고 있는 병사들을 더 멀리 물린 것도 바로 그녀였다.

    그러면서 모른 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렇게 원치 않는데 강제로 반려를 정해서 언약식을 치르게 할 수 없었으니까.

    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자신의 남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세레스는 슬픈 눈으로 회장을 바라봤다.

    왕비인 세레스가 쫓겨난 회장 안에는 더할 나위 없이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공주의 친우라 해서 내 너를 너무 많이 봐준 듯싶구나. 한 달의 말미를 줄 것이다. 그동안 아일라를 찾아 데려오거라. 오지 않겠다면 강제로라도 끌고 돌아와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가문은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공주님이 나가신 것은 제게만 책임을 물어 주십시오. 가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오라고 왕명을 내리는 것이다. 명심하거라. 한 달이다.”

    “아뢰옵기 황송하지만 한 달은 너무 짧습니다.”

    “너무 짧다?”

    아슐레이의 미간이 꿈틀댔다.

    “공주님이 멀지 않은 곳에 계시면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오나 그렇지 않을 경우 한 달의 기간은 너무 짧습니다. 공주님이 계시는 소재지를 파악하는 것만으로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겁니다.”

    “시간이 더 걸린다? 그래서 시간을 더 달라는 말인가?”

    “공주님께서 근처 인간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없을 경우를 감안해 주십시오.”

    제이드의 말에 아슐레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제이드를 바라보던 바이칼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왕이시여. 앤드류가의 충정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리고 제이드 앤드류의 능력을 알 수 있기도 합니다. 제이드 경은 천재라고 불릴 만큼 자신의 힘을 빨리 터득하고 제어해서 어린 나이임에도 지금 경비 대장의 자리에 앉아 있죠. 공주님의 친우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어렸던 앤드류가의 첫째 아들 샤우드 앤드류를 보는 것만 같지 않습니까.”

    “이보시오! 악시온 경! 그 아이가 이 자리에서 왜 거론되는 것이오!”

    바이칼의 말에 제랄드가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제 하나 남은 자네를 잃고 슬퍼할 아버지의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살아남아야지, 아니 그런가.”

    제랄드의 분노 어린 목소리를 무시하고 제이드 앞까지 다가온 바이칼이 말했다.

    “겁 없는 자네 형이 바깥세상으로 나가 변을 당했을 때 자네 부모가 얼마나 슬퍼했나.”

    제이드는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고개를 숙인 채 부르르 떨었다.

    “자네를 아끼던 왕께도 실망을 안겨 드려야 되겠는가. 아니 그렇습니까.”

    바이칼이 몸을 틀어 허리를 과하게 숙이고는 왕좌에 앉아 있는 아슐레이에게 말했다.

    “좋아, 시간을 더 주겠다. 하나, 시간을 더 주는 대신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야. 반드시 아일라를 데려와야 할 것이네.”

    “예······. 명 받들겠습니다.”

    “그만 물러들 가게.”

    아슐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회장을 나가자 하나둘씩 사람들이 회장을 나갔다. 마지막에는 무릎을 꿇고 있는 제이드와 그의 아버지 제랄드만 자리에 남았다. 제랄드는 조용히 자신의 하나 남은 아들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괜찮은 것이냐?”

    “······괜찮습니다.”

    “제이드, 무리할 필요는 없다.”

    “형은 저보다 뛰어났죠. 형이 살아 있었다면 지금 제 자리에 있는 것은 형이었을 겁니다. 아니, 저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었겠죠.”

    “제이드, 너도 내 아들이다. 하나 남은 너까지 잃고 싶지 않다.”

    “죽지 않습니다. 그자 뜻대로 죽어 줄 생각 없습니다. 전 죽지 않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살아남으려면 가출한 공주를 먼저 찾아서 잡아 와야 한다. 정말이지 잘도 빠져나간단 말이야.

    제랄드가 일어나라며 제이드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제이드는 그 손을 잡지 않고 일어나 먼저 회장을 벗어났다. 회장을 나온 제이드는 왕비 세레스와 마주쳤다.

    “제이드 경,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네.”

    “왕비마마. 저와 말입니까?”

    “그래.”

    “제게 명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일라. ······그 아이를 찾으면 내게 제일 먼저 알려 주게나.”

    “왕비님께 말입니까?”

    세레스의 의중이 무엇인지 몰라 무례하게 빤히 바라본 것으로도 모자라 조금 늦게 대답도 아닌 질문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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