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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9화 (9/100)

9화

“굉장히 무겁고 움직이기 불편해 보이네요. 벗기기도 힘들고요. 저번에 다친 곳이 있나 살펴보려고 벗겨 보려다가 실패했어요.”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굉장히 무겁고 움직이기 불편해 보인다고요.”

“아니 그다음 말 말입니다.”

그다음 말?

“다친 곳을 살펴보려고 벗기려 했는데 실패했다는 말이요?”

그렇다는 것은 단추에 걸려 있던 물빛 머리카락과 목걸이도 이 아가씨 것이라는 말이 되는군. 이걸로 더 확실해진 건가. 나를 구한 마린족이 이 아가씨라는 것이.

“마린족들은 갑옷을 안 입나 보군요.”

“어? 당신이 마린족을 어떻게 알아요? 나는 마린족이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제 입에서 마린족이라는 말이 나오자 놀란 것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는 것이 퍽 귀엽다고 카시스는 생각했다.

‘뭐? 귀여워? 내가 미친 건가?’

“마린족은 전부 머리색과 눈동자색이 물빛이라고 들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겁니까?”

“아니요. 제대로 알고 있어요.”

아니 물빛 머리와 눈동자색이 마린족의 상징이 맞기는 한데.

아일라는 그가 마린족의 특성을 알고 있으니 더 의아했다.

그런데 그걸 누구한테 들었다는 거지?

마린족은 전부 물빛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지니고 있고 물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타종족과 혼인하면 어떤지 모르지만 그녀가 알기로는 마린족은 단 한 번도 타종족과 혼인한 적이 없다. 같은 바다에 살고 있는 인어족과도 혼인한 적이 없었다. 여태껏 마린족의 반려는 오로지 마린족뿐이었으니까.

“내가 마린족 특징에 대해 어찌 아는지 궁금한 모양입니다.”

“당연히 궁금하죠.”

“내가 당신 이외의 마린족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이외에 다른 마린족이요? 저 말고 뭍에 올라온 마린족이 있다고요?”

“물론입니다. 나는 그와 꽤 가까운 사입니다.”

아일라는 저 이외에도 뭍으로 올라온 마린족이 누구인지 궁금하고 만나고 싶었다.

다니엘은 자신과 함께 지내고 제 일을 돕고 있으니, 가까운 사이라는 카시스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마린족과 가까운 사이라는 말에 어쩐지 얼굴이 밝아진 것 같은 아일라를 바라보던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목걸이를 꺼내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그가 내민 목걸이는 줄이 끊어져 진주가 많이 없어진 가운데에 조개 모양의 보석이 있는 목걸이였다.

“이 목걸이, 그대의 것일 것 같은데 아닙니까?”

“앗! 그 목걸이!”

“그대 것이 맞습니까?”

“제 거 맞아요. 그런데 그걸 왜 당신이 가지고 있어요?”

“내 갑옷 안에 들어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음, 그땐가? 어딘가에 걸린 머리카락을 잘라 낼 때. 잃어버린 줄 모르고 있었는데.

그의 말에 아일라는 머리가 걸려서 빠지지 않았을 때 제이드에게 단검을 빌려 걸린 머리카락을 잘라 냈던 것이 떠올랐다.

“전하!”

카시스와 아일라가 대화를 하는 사이에 기사들과 함께 돌아온 윌리엄이 그를 불렀다. 자신을 부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아일라에게 앉아 있으라는 말을 하고는 윌리엄과 기사들을 향해서 걸어갔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잘생기기도 했고. 아까 나를 잡으려고 한 사람들보다 더 반짝거리고 잘생겼어.

아, 그렇구나. 잘생겨서 착하고 친절한 거구나. 슈레더 말고 저런 사람이 내 반려여야 해.

아일라에게 잘생기면 무조건 착하고 친절하다는 잘못된 인식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아버지가 왜 그렇게 변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괜찮은 반려를 데려가면 용서해 주실 거야. 나는 최초로 동족이 아닌 인간과 혼인한 마린족이 되는 거야.

일단은 저 사람처럼 잘생기고 착한 사람을 찾아서 만나 봐야 하는데. 그러려면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설마 생명의 은인을 모른 체하지 않겠지.

그녀가 바라는 것은 강제로 바다로 돌려보내지 않고 자신이 반려를 찾을 때까지 지낼 수 있는 장소였다. 그걸 거절하고 자신을 바다로 강제로 돌려보내려고 하면 그녀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내가 구해 줬는데 그 정도 부탁은 들어주지 않을까.”

“무슨 부탁 말입니까?”

“-!!?”

까, 깜짝이야! 언제 온 거야? 분명 저만치 떨어져서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것 같은데.

“잠시 확인해 줬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뭘 확인하면 되는데요?”

“아까 분명 철창에 갇힌 뾰족한 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봤다 했는데, 그것이 저들이 맞는지만 확인해 주면 됩니다.”

아일라는 그가 고개를 돌린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까 그 뾰족한 귀를 가진 사람들 중 한 명 같은데요. 거리가 있어서 자세히는 못 봤어요.”

“그거면 됐어. 그럼 저쪽 무릎을 꿇고 있는 자들은 보셨습니까?”

“역시 얼굴은 자세히 못 봤어요. 하지만 체격은 기억해요. 저기 저 사람과 마른 체격의 사람이 당신이 타고 있던 것과 같은 동물에게 채찍질을 하고 있었어요. 채찍을 맞으면서 저 사람들이 앉아 있는 거대한 물체를 끌고 있었고. 저기 있는 뾰족한 귀를 가진 사람이 갇힌 철창도 끌고 있었어요.”

“내가 타고 있던 것······ 말을 말하는 겁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나요?”

“그렇습니다.”

말이라는 거구나. 바깥세상에 나와 처음 보는 생명체였다.

“사람들이 이동 수단이나 짐수레를 끌 때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동 수단과 짐수레를 끌 때 사용한다고? 해마 같은 건가. 우리는 큰 짐을 옮길 때 거대 해마를 사용하니까. 먼 거리를 이동할 때도 힘들이지 않고 편하게 이동하기 위해서 해마를 이용하고. 말이라는 것이 거대 해마와 같은 역할을 하는구나.

“정말이지 쓰레기 같은 것들. 쳐 내고 쳐 내도 어디서 자꾸 기어 나오는지 끝이 없어.”

“전하, 어찌할까요?”

“몰라서 묻나? 불법적인 노예 상인들은 엄벌에 처한다. 그것이 이종족 노예를 거래하는 자들이면 죄가 가중되어 더 큰 엄벌에 처한다. 하던 대로 처리해라. 흔적 남기지 말고. 폐하께 보고는 내가 직접 할 것이다. 엘프들도 풀어 주도록.”

“존명.”

깍듯하게 예를 갖춘 윌리엄은 뒤돌아 카시스와 아일라에게서 벗어났다.

“저기요. 제가 당신을 구해 줬잖아요. 그러니까 제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멀어지는 윌리엄을 보고 있던 카시스의 시선이 아일라에게로 향했다.

“나 지낼 곳 좀 마련해 주면 안 되나요?”

“지낼 곳?”

“네, 진짜로 지금은 돌아갈 수 없어요.”

“그대가 바다에 빠진 나를 구한 것은 맞습니다. 하나 나도 이번에 당신을 구해 줬으니 우리는 서로 빚진 것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

아일라는 카시스의 말을 듣고 나서야 도망치던 자신을 구해 준 것이 그임을 떠올렸다.

확실히 서로 한 번씩 구해 줬으니 그가 그녀를 도와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아일라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대로 강제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 슈레더와 강제로 언약식을 하고 혼인까지 할 생각을 하니 끔찍해. 악시온가는 나를 이용해서 왕위를 찬탈할 생각이야. 절대로 그렇게 두지 않아.

“그럼 마을까지만이라도 동행해 줘요. 그다음은 저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해 볼게요. 제가 바깥세상에 나온 건 처음이라 길을 몰라요.”

“인간 세상이 얼마나 험한지 알고 하는 말입니까? 그대에게는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처럼 잘생기고 착하고 친절한 사람을 만나면 돼요.”

카시스는 아일라의 황당한 말에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냥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잘생기면 착하고 친절하다는 황당한 인식은 어디서부터 된 건지 알 수 없군. 저 잘못된 생각을 고쳐야 할 것 같은데.

“누가 그리 말한 겁니까? 잘생기면 착하고 친절하다고.”

“당신이요.”

“제가 말입니까?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어? 안 했었나?

“하아-! 정말이지 위험한 발언을 하는군. 그런 말 함부로 하고 다니지 마십시오. 그대에게 잘생긴 것이 곧 착한 거면 사람들에게 잘 속아 넘어가겠군요.”

이 여인, 사람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어. 대체 어떻게 하면 잘생기면 착하다는 인식이 박히는 것인지.

“잘생기면 착하고 친절한 거 아닌가요?”

“절. 대. 아닙니다. 그러니 그런 위험한 생각은 하지 마시오.”

카시스는 ‘절대’란 말을 힘주어 말했다.

아니라고?

“그런데 왜 그렇게 돌아가기 싫어하는 겁니까? 인간 세상은 그대에게 위험한 곳인데 말입니다.”

“강제로 혼인하기 싫어서 가출했는데 당신이라면 순순히 돌아가겠어요?”

“지금 뭐라 했습니까? 가출?”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가출?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카시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미간에 주름이 가며 구겨졌다. 그가 되묻기는 했지만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분명 가출이라고 말했다.

아일라는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입을 가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지금 가출했다고 말한 것이 맞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일라는 입을 틀어막고 아니라는 듯 열심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대체 왜 자신이 이 사람 앞에서 열심히 부정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니 어쩐지 자신이 크게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말 가출한 겁니까?”

“아니에요. 잘못 들은 거예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 사람에게 이렇게 변명을 하는 거지.

적어도 이 사람에게 잘못한 것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아일라는 갑자기 기분이 상해 소리쳤다.

“그래요, 가출했어요! 그게 뭐요!”

나도 가출한 이유가 있다고! 이 사람한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비굴하게 굴 필요 없어. 안 도와주겠다면 다른 사람을 찾아보면 그만이야.

“제정신입니까?”

그녀가 가출했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당당해서 카시스는 더 어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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