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94화 (94/106)
  • 94.

    촬영을 마치고 곧장 펜트하우스를 찾은 수아는 울적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회사 일과 관련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일러주는 그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언제 이렇게 다 정리를 해둔 것인지, 중요한 기록이 담긴 여러 개의 USB와 서류 따위가 서재 책상에 가지런히도 놓여 있었다.

    초지일관 담담하게 정리를 이어가던 그는 마지막 서류를 덮으며 대뜸 말했다.

    “그리고, 초를 피우면 눈치챌 테니까 수면제로 좀 준비해. 지안이 아침까지 잠들 수 있게.”

    수아는 갑작스런 명에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예? 지안 님을 어찌….”

    서류 위를 의미 없이 두드리는 그의 손이 이제 완전히 검게 물들고 말았다. 몇 시간 후 맞닥뜨릴 마지막 순간엔 얼마나 더 흉측한 모습으로 변할지 그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멀쩡한 얼굴도 징그럽게 변해버리고 말겠지. 아니, 어쩌면 이 모습 그대로 천옥에 떨어진 후에나 변모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이대로라면 지안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은 분명할 것이었다. 구태여 마지막을 기억에 남기고 싶지 않았다. 지안의 남은 생이 조금이라도 덜 괴롭기를 바랐다.

    차라리 저와의 기억을 모조리 지울 수 있다면 좋으련만…. 상실초의 주술이 통하지 않는 호인의 후손에겐 소용없는 일일 테다. 마땅히 방법이 없었다. 해서 지안이 잠든 틈을 타 조용히 떠날 참이었다.

    “굳이, 보여줄 필요는 없잖아.”

    그 한마디만으로 그의 의중을 충분히 파악한 수아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수그렸다.

    “예에… 그리하겠습니다.”

    이만하면 모든 정리는 마친 셈이었다. 그래도 뭔가 허전한 마음에 서재를 휘둘러보던 월호는 문득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묘흔은 어디에 처박혀 있기에 코빼기도 안 보여?”

    지안이 찾아왔던 날 후로 녀석을 보지 못했다. 하루 이틀은 지안과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한데, 천 년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까지 나타나지 않으니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 그러게나 말이어요….”

    사실 묘흔의 행방을 몰라 답답한 것은 수아도 마찬가지였다. 율령을 찾아 나서신 거겠지, 막연히 짐작은 했으나 도통 돌아오질 않으니 그러잖아도 궁금하고 걱정이 되던 참이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율령 님을 찾아 떠나신 듯한데 돌아오질 않으셔요,’ 하며 근심을 안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아는 부러 가벼운 투로 말했다.

    “지안 님과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시려는 것이겠지요. 곧 오실 것이니 심려치 마시어요.”

    글쎄… 그렇다기엔 뭔가 석연찮은데….

    그가 아무래도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 기울이던 때였다.

    “쨘!”

    지안이 벌겋게 익은 얼굴로 서재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양손에 든 비닐봉지 속에는 다양한 종류의 아이스크림이 가득 들어있었다.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는 지안을 잠시 떼어놓고자 먹지도 않을 아이스크림을 사달라 부탁했던 참이었다.

    한달음에 다가온 지안은 책상 위에 비닐봉지를 내려놓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우, 숨차.”

    “뛰어왔어?”

    “아이스크림 녹을까 봐 후딱 왔죠.”

    나름의 핑계를 대지만 문을 연 순간 안도하던 기색이 스쳐 간 것을 그가 보지 못했을 리 없다. 집을 나설 때도 물가에 아이라도 놓고 가는 양 몇 번을 뒤돌아보더니, 행여 그가 사라졌을세라 쏜살같이 뛰어온 모양이었다.

    “뭘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종류별로 다 쓸어왔어요. 잘했죠?”

    양 볼에 시뻘겋게 열이 몰려서는 맑게 웃는 얼굴이 못내 안쓰럽다. 초조한 마음에 아무렇게나 주워 담고 달려왔을 모습을 생각하니 그는 입안이 썼다.

    월호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지안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잘했네.”

    히죽 접히는 눈꼬리에 물기가 서려 있었다. 아마도 혹시나 하며 달려오는 동안 바람에 눈물방울이 흩날렸을 터였다.

    “수아 님도 하나 고르세요.”

    “이잉. 이렇게나 많은데 두 개 고르면 아니 되어요?”

    “하하. 세 개 고르셔도 돼요.”

    “아싸!”

    소파 테이블로 자리를 옮긴 지안과 수아는 양손에 아이스크림을 쥐고 아이처럼 단맛을 양껏 즐겼다. 월호는 먼발치에 선 채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영감님, 얼른 이리 와요!”

    지안이 촉촉한 눈망울로 맑게 웃으며 손을 펄럭였다.

    “월호 님, 요거 증말 꿀맛이어요!”

    입가에 덕지덕지 아이스크림을 묻혀가며 충혈된 눈을 깜빡이는 수아는 얼마나 꿀맛인지 연방 엄지를 척척 세운다.

    슬프고도 어여쁜 광경이었다. 아무리 눈에 담아도 지겹지도 않을 모습이었다. 절로 입술이 휘었으나 미간은 조금 뻣뻣해졌다. 주책없게 눈물이 날 듯하여 부러 조금 더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죽기를 택하고도 단 한 번 생각지 않았던 바람이, 죽음을 눈앞에 둔 지금에서야 새싹처럼 찔끔 돋아났다.

    딱 하루만. 하루만 더, 살고 싶다.

    아니,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하나 초침은 야속하게도 제 갈 길을 간다. 더불어 넘어간 시침이 8에 닿아 있었다. 떠나야 할 시간이 4시간 앞으로 다가왔다.

    **

    달이 유난히 크고 밝았다. 덕분에 달빛이 내려앉은 지안의 얼굴이 환히 잘 보였다.

    조심스레 입술을 덧그리자 고르게 흩어지는 숨결이 손끝을 간질였다. 이젠 주먹을 쥐기도 어려울 만큼 완전히 힘을 잃었으나, 숨결이나마 아직은 생생히 느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둥근 이마도, 보송보송한 볼도, 오뚝한 코도, 차분히 손끝에 담아두고 목 끝까지 꼼꼼히 이불을 덮어주었다. 마지막으로 가벼이 맞댄 입술은 욕심껏 조금 오래 머물렀으나, 지안은 움찔하는 기색도 없이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잘도 자네.”

    일부러 잠을 재워둔 것이라지만 아주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지난 사흘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눈에 담았건만, 어쩐 일인지 그 예쁜 다갈색 눈동자가 선명히 기억나지 않았다.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다는 건 이런 기분인가. 하여튼 요 예쁜 계집 덕분에 별의별 감정을 다 느껴본다.

    “끝인가, 이제….”

    매끄러운 손등을 매만지다 답지 않게 힘없이 중얼거렸다. 다 내려놓았다 싶었던 미련이 이제 와 왜 질척이는 건지, 코앞에 닥친 운명 앞에선 저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쓴웃음을 삼킨 월호는 침대에 걸어앉았던 몸을 무겁게 일으켰다. 내심 저를 기다리고 있을 지기지우에게 마지막 인사라도 건네자면 이만 집을 나서야 했다.

    하나 그러고도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한 이유는 내내 하고 팠던 말을 결국엔 해주지 못했던 탓이었다.

    곁에 선 채 얼마쯤 뽀얀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는 지안의 귓가를 향해 깊이 몸을 숙였다. 따스한 숨을 남기고 다정한 미소로 마침표를 찍는 순간엔 생각보다 그리 아프지 않았다.

    눈을 떠 비어버린 옆자리를 보아도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젠 기다려도 오지 않을 나를 너무 오래 그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잠든 사이 몰래 떠날 수밖에 없는 내 마음을 부디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이 내 마음이 꿈에서라도 닿기를.

    미련에 짓눌리던 걸음이 그제야 단호히 돌아섰다. 단 한 번 멈추지 않고 문을 넘어선 발자국은 500년의 추억이 깃든 터와 연모하는 여인을 남겨둔 채 그렇게 멀어졌다.

    그가 떠난 침실엔 금세 고요가 찾아들었다. 그토록 밝게 스미던 달빛은 어느새 두툼한 구름에 가려진 채였다.

    어둠이 내린 침대 위에서 곤히 흐르던 숨이 어느 순간 파르르 흐트러졌다. 꾸욱 힘주어 감긴 눈매 끝에서 또르륵 눈물이 넘쳐흘렀다.

    ‘ 지안 님, 제가 만든 라즈베리 차인데 한번 드셔 보시겠어요? 향이 아주 좋답니다. ’

    수아가 내밀던 차를 삼키지 않았다. 그냥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일찍이 침대에 누워 제 가슴을 토닥이는 그의 행동에 직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알고도 잠든 척 숨을 고르게 뱉느라 무진 애를 썼다.

    울고불고 매달린다 해서 이미 운명이 정해진 그가 살지는 못할 것이었다. 정녕 그렇다면, 마지막 가는 길 마음이라도 편할 수 있기를.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그뿐임을 알고 있었다.

    검은 구름이 유유히 흘러갔다. 창을 두드린 달빛이 다시금 환하게 쏟아졌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끌어올린 지안은 입을 꽉 틀어막은 채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를 눌러 삼켰다.

    “흐읍… 흡.”

    혹여라도 그가 걸음을 늦출세라, 해서 제 울음소리를 듣고 발길을 돌릴까 봐.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미어지는 가슴을 퍽퍽 내리치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지안은 그가 제 귓가에 남기고 간 마지막 고백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 사랑해. ’

    참 다행이다. 그 마음 하나는 오롯이 품고 살 수 있게 되어, 참 다행이었다.

    **

    범화의 눈깔이 껄렁하게 뒤집혔다. 갈고리에 걸린 듯 마뜩잖게 치솟은 윗입술은 곧 쌍욕을 퍼부을 기세로 씰룩댔다.

    “긍께 시방… 내 눈깔 앞에서 뒤지겄다, 이 말이여?”

    물론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시간이 이제 3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죽마고우와 자그마치 천 년의 회포를 풀자면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해서 죽기 직전까지 말동무나 해 달랬더니 놈은 영 탐탁지 않은 모양이다.

    “늬놈 새끼 사지 틀어지고 눈깔 뒤집히는 꼴을 내 눈으로 똑똑히 봐라, 시방 그 말 아녀.”

    월호는 짐짓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왜. 뭐 어려워?”

    “촤하하! 참말로 돌아번지겄네.”

    파안대소를 터트리며 이마를 긁적이던 범화는 돌연 사납게 눈을 치뜨며 욕설을 지껄였다.

    “야, 이 미친 새끼야. 그라고 늬는 꺼져블면 장땡이다, 이거여? 내 대갈빡에 토라옴마라도 생기믄 우짤 것이여?”

    “트라우마겠지.”

    “아, 뭣이 중헌디!”

    테이블을 쾅 내리친 범화는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언성을 높이며 삿대질을 해댔다.

    “여 뒷골목서 늬 혼자 뒈지든가! 아, 나가 머 땀시 늬놈 뒈지는 꼴까지 봐줘야 쓰냐고! 에레이 씹, 악랄한 노무 새끼. 배려심이라고는 발톱의 때만치도 읎는 새끼. 늬가 참말로 내를 지기로 생각헌다면 요따구로 염장을 질러불믄 안 대제!”

    숨도 쉬지 않고 열변을 토한 범화는 콧바람을 쉭쉭 내뿜으며 펄떡 일어섰다. 순식간에 주방에서 술병을 쥐고 온 녀석은 주둥이에 벌컥벌컥 고량주를 쏟아부었다. 그러고는 서슬 퍼런 눈깔로 노려보며 매정히 쏘아붙인다.

    “아, 싸게 안 꺼지냐? 기언치 몸의 대화를 나나보자 이거여?”

    눈도 깜짝 않고 이 일련의 과정을 가만히 구경하던 월호는 사뭇 지친 얼굴로 한숨 쉬듯 말했다.

    “묘흔도 어디로 튀었는지 오지도 않고, 너 아니면 마지막을 함께해 줄 이가 없어. 그래도 명색이 천 년이나 묵은 구미호가 뒷골목에서 혼자 쓸쓸히 사라지는 건 너무 초라하잖아.”

    “…….”

    정지 화면처럼 우뚝 굳은 범화는 벌건 눈을 부산스레 깜박였다. 장장 천 년의 생을 지 잘난 맛에 살아온 녀석이 약한 소리를 내뱉으니 내심 당황한 것이었다.

    “…에이, 시펄.”

    결국 머쓱하게 욕설을 중얼거린 범화는 거칠게 의자를 끌어다 털썩 몸을 놓았다.

    “암튼지간에 언변이 청산의 유수여. 치사한 새끼….”

    월호는 피싯 웃으며 범화의 손에 들린 술병을 빼 들었다. 시원하게 술병을 기울이며 내리뜬 눈이 지기의 얼굴을 퍽 뿌듯하게 바라봤다. 하여튼 더러운 주둥이와는 어울리지 않게 마음은 또 은근히 여린 놈이다.

    후로 전의를 상실한 범화는 말도 없이 술만 홀짝거렸다. 천 년의 회포를 풀자면 할 말이 많을 것인데, 촉박한 시간에 쫓겨 조바심이 일었던 마음은 정적이 흐를수록 되레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래. 우리 사이에 딱히 무슨 말이 필요할까. 하나의 술병으로 주거니 받거니 같은 술을 마시고, 이따금 어색하게나마 시선을 맞추고, 실없이 피싯 헛웃음도 치고…. 이거면 되었지. 구태여 지난날을 돌이켜봐야 간지럽기밖에 더하랴.

    한데 이놈은 내내 그럴듯한 인사를 고민했던 모양인지, 10분을 남기고 느닷없이 아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늬 그거 아냐.”

    “어.”

    “암말도 안 혔다, 새끼야.”

    아련해진 목소리만으로도 이미 놈의 속말을 다 들은 듯하여 단칼에 잘라냈으나, 범화는 제 속내를 삼키지 않고 낯간지럽게 읊었다.

    “그려도 나가 늬놈 덕분에 여 골방서 수백 년을 버텼다. 답답허고 외로와도 늬놈이 한번씩 낯짝이라도 비챠중께 살만은 허드라고.”

    “…….”

    “요 주댕질이 좀 서툴러서 그라제. 여태 욕지거리 싸지른 거는, 뭐, 그… 다 애정에서 우러러 나온 거인께 몰랐으믄 알어나 주라고.”

    천 년 만에 처음 내보인 진심이었다. 이런 류의 대화는 나눠본 적이 없으니 무슨 말로 이 간지러운 분위기를 이어가야 할지 모르겠다. 그는 범화도 마찬가지인지라, 귀 끝까지 붉어진 얼굴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부탁이라도 하는 듯싶다.

    멋쩍은 얼굴로 슬금슬금 눈치만 살피던 범화는 아직 술이 찰랑거리는 술병을 들고 괜히 몸을 일으켰다.

    “에헤이, 술이 똑 떨어져븟네. 기둘리바. 한 병 더 내올란게.”

    무겁게 다물려 있던 월호의 입술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부탁이 있어.”

    어깨너머로 고개를 돌린 범화는 얼마쯤 바라만 보다 다시 의자에 몸을 놓았다.

    “그려, 뭐. 말이나 혀봐라. 일단은 들어보고 검토를 해볼란게.”

    시간이 다 되었나. 호흡이 조금 힘들었다. 별안간 시야가 흐려져 눈을 꾹 감았다 뜬 월호는 물에 번진 그림처럼 흐릿하게 보이는 지기를 어렵사리 바라보았다.

    “지안이 그 아이, 종종 찾아올지도 몰라.”

    필시 그러고도 남을 아이였다. 이 자리에 앉아 재잘재잘 떠들며 저를 추억할 지안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졌다.

    “그냥 잘 받아줘. 술은 먹이지 말고, 헛소리는 좀 작작하고.”

    “술도 안 맥이고 헛소리도 지껄이지 말라믄 나가 헐 수 있는 게 없는디?”

    놈의 군대답에 실소를 흘리다 고개를 떨구었다. 급작스레 목에 힘이 풀려 의지와 상관없이 그리되고 만 것이었다. 그저 웃는 줄로만 아는 범화는 무어라 재잘거리며 남은 술을 꼴깍 비우고 있었다.

    텅. 테이블에 내려놓는 술병의 마찰음에 머리가 우웅 울렸다. 분명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은데 간헐적으로 시야에 장막이 드리웠다.

    아… 결국 이렇게 끝나는 건가.

    혹시나 하여 손을 내려다보았다. 재가 되어 부서지고 있는 건지, 끔찍한 모습으로 손톱이 돋아나고 있는 건지, 확인을 하고 싶은데 시야가 흐릿하여 명확히 보이지가 않는다.

    “…얌마. 대가리 처박고 뭣허냐.”

    조금은 당황한 듯한 범화의 목소리가 바람에 흩날리듯 어렴풋이 건너왔다.

    “하….”

    무어라 대답을 하고자 입을 열었지만 제 것이 아닌 듯 낯선 호흡만 길게 뿜어져 나왔다.

    우당탕 쓰러진 술병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산산이 조각났다. 덜컥 겁을 집어먹은 범화가 테이블에 몸을 부딪쳐가며 황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온 탓이었다.

    “워, 월호야. 내 말 안 들리냐? 정신 좀 챙기봐라, 잉?”

    녀석이 어깨를 붙들고 사정없이 흔들어대던, 그 순간이었다.

    덜컹! 갑작스레 뒤통수를 후려치는 문소리에 그의 몸이 움찔 떨렸다.

    “허억, 허억….”

    등 뒤로 쏟아지는 가쁜 호흡이 누구의 것인지 돌아볼 힘조차 없었다.

    “뭐시여. 묘흔이 너, 꼴이 워째….”

    묘흔… 묘흔인가.

    “수아가, 월호 님이 여기, 계시다 하여… 헤엑….”

    시커멓게 타버린 다리를 질질 끌고 온 묘흔이 스러져가는 월호의 어깨를 품으로 이끌었다.

    “월호 님, 묘흔이 왔습니다. 들리시지요? 저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 염라께서 뫼셔 오라고….”

    들리지 않았다. 까무룩 정신이 흩어지고 눈앞이 빙글 돈다. 묘흔의 팔을 겨우 그러쥐던 손이 맥없이 툭 떨어졌다.

    천 년의 현생을 살아온 ‘호생’이 까만 연기 속에 아스라이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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