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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는 밤-93화 (93/106)
  • 93.

    “응?”

    왜 그러느냐 묻기도 전에 몸이 홱 돌려졌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어깨너머를 돌아보자, 그는 대뜸 원피스 지퍼를 끌어내렸다.

    “엇…!”

    헐거워진 원피스가 발등 위로 툭 떨어진 건 한순간이었다. 연이어 실크 슬립을 들추는 손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난데없이 속옷이 드러난 지안은 벌게진 얼굴로 바르작거렸다. 하나 지안의 등허리에 닿은 그의 시선은 여느 때보다 진지했다.

    역시 구슬 탓이었나. 시커멓게 타들어 갔던 호인의 표식이 확연히 옅어졌다.

    “여기, 이제 안 아파?”

    영문도 모르고 얼굴을 붉히던 지안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비틀었다. 아무런 흑심도 담기지 않은 올곧은 시선은 오로지 호인의 표식에 닿아있었다.

    나도 참. 이 와중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지안은 민망함에 한층 더 붉어진 얼굴로 등허리를 매만졌다.

    “아아… 이거….”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곧 죽겠다 싶을 만큼 극강의 통증이 몰아쳤던 그날 이후, 시련의 아픔에 허우적대느라 호인의 표식 따위는 돌아볼 정신이 없었다. 더욱이 까맣게 잊었던 이유는 그때 이후로 통증이 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게. 이제 안 아프네….”

    색도 다시 옅어진 거 같고….

    아니, 옅어지다 못해 애초에 푸르렀던 색조차 거의 남지 않았다. 나비 형상의 한쪽 날개는 자세히 들여다봐야 겨우 보일 정도였다.

    신기하네…. 이게 또 언제 이렇게 됐지?

    허리를 양껏 비틀며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들추었던 슬립을 놓아주었다.

    “됐어, 그럼.”

    그러며 한 손으로 용케 떨어진 원피스를 주워 올리곤 지퍼까지 단정히 채워준다. 음란마귀에 씌었던 여파를 아직 떨치지 못한 지안은 공연히 벌게진 얼굴을 손등으로 스윽 문질렀다.

    “근데, 나 여기 아팠던 건 어떻게 알았어요?”

    “…….”

    그는 말없이 지안의 눈을 바라만 보았다. 기력이 쇠한 탓인지 색이 조금 옅어진 회색 눈동자에 햇살이 스몄다. 흡사 구슬처럼 투명하게 보이는 눈동자는 힘을 잃은 와중에도 감탄스러울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어딘지 슬퍼 보이는 건 기분 탓이 아닐 테다.

    “…나 때문에 네가 아팠어.”

    두루뭉술한 대답을 곧장 이해하지 못하고도 울컥 목이 메었다. 파르르 흔들리는 지안의 눈망울 속에서 그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이미 사실을 들켜버린 후로도 내내 벽 하나를 세우고 있던 그가 이제야 숨겨둔 마음을 오롯이 내보인 것이었다.

    어느새 손이 다시 얽혀있었다. 월호는 제 손에 빠듯하게 깍지를 낀 지안의 손을 가만가만 엄지로 쓸었다. 좁아 드는 미간에 감정의 파고가 넘실댔다.

    “나 때문에 네가, 죽을 뻔했고.”

    “…….”

    일부러 언급을 피하며 주변을 빙빙 맴돌고만 있었던 주제였다. 차마 ‘죽음’을 입에 올리기가 두려워 그도 그녀도 이별이 닥칠 그날을 말하지 않았다. 한데 결국엔, 실없는 소리로 애써 슬픔을 감춰왔던 노력이 한순간에 스러졌다.

    지안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빠르게 깜박이는 눈에 금세 물기가 차올랐다.

    “그래서….”

    목소리가 제멋대로 떨려 곧장 말을 잇지 못했다. 크게 심호흡을 뱉은 후에야 애써 외면하려 했던 현실을 힘겹게 밀어냈다.

    “그래서 이제… 나 때문에 영감님이….”

    깍지 잡은 손이 가볍게 당겨졌다. 그가 당기는 대로 간격을 좁혀간 지안은 그의 품에 이마를 콕 묻고 입술을 사리 물었다.

    월호는 품에 안긴 지안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눈물 맺힌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너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네 덕분에 살다 가는 거야.”

    낮게 흐르는 목소리가 퍽 다정해서, 지안의 어깨가 크게 흔들렸다.

    “무슨, 그런 말이 어딨어….”

    혹여라도 부채감을 짊어질세라 달콤하게 속삭이지만 결국엔 죽겠다는 소리였다. 다정히 미소 지으며 한다는 소리가 겨우, 나는 이제 가겠노라 마지막 인사일 뿐이었다.

    그제야 피부로 덜컥 와 닿은 현실감에 머리끝까지 두려움이 차올랐다. 숨이 턱 막힐 만큼 급작스레 밀려온 감정이었다. 주르륵, 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월호의 품을 벗어난 지안은 별안간 다급해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냥 구슬 다시 주면 안 돼요?”

    “…….”

    막연히 정말 그러면 되지 않을까, 길을 찾은 사람처럼 젖은 눈망울에 희망이 떠올랐다.

    “오늘부터 다시 백 일 동안 내가 가지고 있다가 돌려주면 안 되는 건가?”

    “지안아….”

    “한 번만 해봐요. 혹시 모르잖아. 응?”

    서글프게 일그러진 그의 눈가는 부질없는 소리라 답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천 년.  이제 와 다시 백 일을 셀 수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정하고 싶었다.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 한들, 그가 저를 죽이고 본인이 살길을 택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억지를 부렸다. 할 수 있는 것이 그뿐이었다.

    잠시간 희망에 차올라 반짝이던 지안의 눈이 속상하게 일그러졌다.

    “왜애… 한 번만 해볼 수는 있잖아….”

    그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지안을 품에 당겼다. 어떠한 말도 해주지 못하고 머리칼만 쓸어내리는 손길이 애처롭다.

    지안은 그의 품에 갇힌 채 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엉엉 울고 말았다.

    이 남자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 살리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 그를 보내고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듯 막막해졌다.

    **

    지안은 사흘간 한시도 월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오른팔이 불편한 그를 위해 꼬박꼬박 밥도 먹여주었고, 그가 샤워를 하는 동안 꼼짝 않고 욕실 문 앞을 지키다가 꼼꼼히 옷도 챙겨 입혔다.

    밤이 오면 그의 침대에 폴짝 올라 품에 쏙 파고들었고, 그가 잠이 들기 전까지 재잘재잘 떠들며 웃는 얼굴을 가득 보여주었다. 그러다 그의 숨이 색색 고르게 번지면 여지없이 눈물을 훔치며 잠든 그의 얼굴을 하염없이 눈에 담았다.

    울다 지쳐 잠이 든 지안의 움직임이 멎으면, 잠든 척했던 월호는 그때야 눈을 뜨고 지안의 입술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별것 없는 날들이었으나 지겹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해가 떨어질수록 시간이 거꾸로 흐를 수는 없을까 아쉬움만 가득한 날들이었다.

    같은 날 속에 같은 실랑이는 변함이 없었다. 지안은 제 손으로 그를 씻겨주기를 원했고, 월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욕실 문을 단단히 잠가버렸다.

    그런데 오늘은, 어쩌다 지안에게 제 몸을 맡기게 됐을까.

    결국 지치지도 않는 고집에 지고 만 것이었다. 아니, 오늘이 마지막일 거란 생각에 그냥 뭐든 들어주고자 싶은 마음이었다.

    한데, 그녀가 욕조에 함께 몸을 담그리란 것은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예쁘기만 하네, 뭘.”

    월호는 제 품에 등을 묻은 채 신소리를 하는 지안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어제보다도 더 징그럽게 핏줄이 돋아난 팔을 매만지며 한다는 소리였다.

    “묘흔도 그러기에 입에 침이나 바르라 했더니 아주 질질 흘리던데.”

    “에이, 아니라니까. 진짜 다 예뻐요. 고양이 님도 진심이었을 거예요.”

    “퍽이나.”

    실상 이리 징그러운 것이 뭐가 예쁘겠는가. 그래도 얼굴은 아직 말짱하니 잘생긴 얼굴만 실컷 보라 해도 말도 참, 더럽게 안 듣는다.

    말리기를 포기한 월호는 찰랑거리는 물속에서 지안의 납작한 배만 어루만졌다. 말랑말랑한 젖가슴을 주무르고픈 충동이 들끓었으나, 죽을 힘을 다해 참느라 애먼 입술만 꾹꾹 깨물었다.

    한데 어쩌나. 젖가슴을 만지지 않는다 해서 설 것이 안 서는 것은 또 아니었으니….

    죽을 날을 앞두고 어찌 몸은 이리 정신과 따로 논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사내의 신체란 황당하고도 신비한 것이다.

    월호는 결국 난감한 얼굴로 물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뭐 얼마나 됐다고… 조금만 더요.”

    지안은 입술을 샐쭉거리며 그의 팔을 외려 품에 당겼다. 그 바람에 꼼지락거린 몸이 남경을 은근히 자극하니 절로 눈이 질끈 감긴다.

    “내가 지금, 몹시 곤란한 상태라 그래.”

    한숨을 폭 내쉬며 호소하듯 말하자 지안은 고개를 비틀어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동그랗게 뜬 눈을 맑게 깜박이며 묻는다.

    “왜요?”

    제 등허리를 꾹꾹 눌러대고 있는 그것의 변화를 그녀도 모를 리가 없을 것인데, 어쩜 이리 능청스러운지.

    월호는 눈썹을 까딱이며 얇게 저민 눈을 내리떴다.

    “알면서 묻는 거 상당히 티 나는데.”

    대번에 입술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니 역시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다. 별안간 상체를 돌려 오롯이 그를 마주한 지안은 얄궂게 눈을 접었다.

    “솔직히 말해 봐요. 죽는다는 거 거짓말이죠?”

    “하.”

    헛웃음은 터지는데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몸뚱이가 이 지경이 돼서도 요놈은 이리 말짱하니 순간 내가 진짜 죽기는 하려나, 본인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물론 죽음보다 더 끔찍한 몰골로 영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니 엄밀히 말하자면 완전한 죽음이라고 할 수는 없긴 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나 빨딱….

    “과연 누가 더 당황스러울까.”

    누가 봐도 수척해진 얼굴로 물어오니 이번엔 지안이 할 말을 잃었다. 꼬물꼬물 새우처럼 몸을 말아 그의 가슴에 볼을 기댄 지안은 사뭇 울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웃었다가 울다가, 지안의 감정은 하루에도 몇 번씩 널을 뛰었다. 물론 웃어도 웃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또 슬슬 기운이 없어지는 것을 보니 지금은 웃는 척도 힘들 때가 온 모양이다.

    월호는 힘없이 수그러든 지안의 턱을 붙들어 올리고 입을 맞추었다. 촉촉하게 물기가 서린 입술이 꾸욱 맞붙었다 떨어졌다.

    “안 운다며, 이제.”

    울다가 네 숨이 먼저 넘어가겠다며 그가 진심으로 걱정을 내비친 후론 호기롭게 약속한 일이었다. 그런데 시도 때도 없이 울컥거리는 마음은 자꾸만 의지를 배반하려 한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고 있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우울은 제멋대로 찾아드니 삐져나오는 눈물을 막기가 힘들다.

    “응. 안 울 거예요. 진짜.”

    이미 눈물을 매단 채로 천연스레 미소를 띤 지안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을 맞대었다. 촉, 촉, 온기만 맛보듯 붙었다 떨어지던 입술은 이내 진득이 맞물렸다.

    입술에, 혀끝에, 그리고 입안 깊숙한 곳까지. 지안은 꼼꼼히 그의 온기를 새겼다. 혹여라도 담지 못한 곳이 있을까, 커다란 몸 곳곳을 매만지는 손은 섬세하고도 애달프다.

    아주아주 오래도록 그를 품고 살았으면 좋겠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내 모든 감각이 그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

    부연 수증기를 밀어낸 호흡이 그의 입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마주한 시선은 시간이 멈춘 듯 흔들림도 없이 서로를 향해 있다.

    행여 잊을세라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꼼꼼히 눈에 새기던 지안은 그의 손을 이끌어 제 가슴 위에 올려두었다.

    “그냥, 만져줘요….”

    그녀가 손안에 바쁘게 그를 담는 동안 월호는 고집스레 지안의 등허리만 붙들고 있었다. 참고자 견디는 그의 마음은 힘이 잔뜩 들어간 손끝에 여실히 담겨 있었다.

    더 깊이, 더 진하게 그의 온기를 남겨두고 싶어 애가 타는데, 그의 손은 아쉽게 멀어졌다.

    “내가 널, 안을 수가 없어.”

    이 이상의 행위는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풀어주지도 못할 것을, 애초에 불을 놓지도 않겠다는 것이었다.

    남경은 눈치 없이 강건히도 섰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힘을 잃은 몸이 그도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짐짓 서럽게 입술을 꼬물거리던 지안은 포기 않고 월호의 손을 끌어왔다.

    “괜찮아요. 그냥 만져만 줘도 충분해.”

    다시 멀어지지 못하게 그의 손을 제 가슴에 꾹 누른 채 입을 맞추었다. 그럼에도 그가 뻣뻣하게 대고만 있자, 그에게 겹친 손을 움직여 유연하게 주물렀다. 제 손으로 젖가슴을 만지듯 묘한 모습이었으나 지안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마지못해 힘을 푼 그가 부드럽게 살덩이를 매만졌다. 덧그리듯 살결을 쓸던 엄지가 단단하게 여문 유두를 스치자 저도 모르게 신음이 툭 터졌다. 실로 오랜만에 닿은 감촉에 아찔하게 몸이 떨렸다.

    “하아.”

    성마르게 기울어진 입술이 그의 입술을 한가득 머금었다. 어느 틈에 그의 허벅지 위로 올라앉은 몸은 찰박이는 물살을 헤치고 그와 틈 없이 맞닿아 있었다.

    지안은 금세 끈끈하게 젖은 아래로 남경을 은근하게 문지르며 혀를 얽고 호흡을 삼켰다. 조금만 더 오래, 조금만 더 깊이…. 흐르는 1초가 아쉬워 숨이 가쁘도록 그를 머금고 삼키고 핥았다.

    욕조 밖으로 맑은 물이 넘실댔다. 가쁜 숨과 흐느낌이 뒤섞였다. 미간이 좁아들 만큼 꾹 감긴 지안의 눈꺼풀 아래로 눈물이 넘쳐 흘렀다. 촉촉이 젖은 회색 눈동자는 한순간도 그녀를 놓치지 않고 눈물에 젖은 얼굴을 담고 있었다.

    그의 호생 천 년이 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고작 6시간. 그와 그녀는 서로의 온기를 간절히 어루만지며 이별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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