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70화 (70/106)
  • 70.

    바람은 서늘하나 태양은 뜨거웠던 날이었다. 하필 야외촬영이 많았던지라 오늘은 땀도 제법 흘려 내내 찝찝했다. 드물게 자정을 넘기기 전에 촬영이 끝나 그나마 다행이었다.

    차에 오르자마자 클렌징 티슈를 꺼내어 무거운 화장을 닦아내던 지안은 그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친구요?”

    승원은 운전대를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우진을 먼저 보내고 그가 세단을 끌고 돌아온 참이었다.

    “이사님 친구분이면… 혹시 그분도 사람이 아닌 거예요?”

    너무도 당연했던 질문이었을까. 승원의 입술이 대답 대신 유연하게 휘어졌다. 지안은 별스럽지 않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이젠 그의 주변에 사람이 있다면 외려 신기하지 않을까.

    심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다 보니 뒤늦게 기분이 묘했다. 사람이 아닌 것은 둘째치고, 그가 대뜸 친구를 소개해주겠다며 덧붙인 말이 은근히 설렜기 때문이었다.

    ‘ 촬영하는 거 보니 그러던데. 친구들한테 애인이라고 소개해 줄 수 있냐고. 인간들은 그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가? ’

    드라마 속 제 대사 중 하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연애 경험이 없는 그녀로서도 딱히 와 닿는 대사는 아니었지만, 그는 내심 마음에 두었던 모양이었다.

    며칠 전엔 굳이 옆방으로 건너가 밤새 통화를 해보자 하더니, 요즘 그는 이렇듯 인간들의 평범한 연애를 공부하고 실천하느라 하루하루를 참으로 알차게 보내고 있다.

    그가 새삼 귀여워 웃음 짓던 것도 잠시, 지안은 이미 반쪽 화장을 지워버린 제 얼굴을 거울로 들여다보며 울상을 지었다.

    “아… 그럼 1분만 빨리 말해주지.”

    마침맞게 빨간 신호에 정차한 승원은 의아한 얼굴로 지안을 돌아봤다.

    “왜?”

    지안은 비포 앤 애프터의 조화가 아름답게 빛나는 얼굴로 그를 마주 봤다.

    “이 꼴로 어떻게 친구분을 뵈러 가요.”

    우습긴 한 모양인지 그는 숨김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머지 반쪽도 지워, 그럼.”

    “지우기야 하겠지만….”

    남은 반쪽도 얼른 닦아낸 지안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며 메이크업 가방을 뒤적였다.

    “그래도 초면에 쌩얼로 가긴 좀 그러니까 쿠션이라도 좀 발라야겠어요.”

    “초면 아니야. 너도 본 적 있어.”

    “응? 언제요?”

    “글쎄… 언제였더라, 그게….”

    가늘어진 그의 시선이 앞유리창 너머로 길게 뻗어 갔다. 이내 지안을 향한 그의 미소가 어쩐지 묘하게 휘어졌다.

    “얼굴 보면 알 거야.”

    그랬다.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좁고 어둑한 골목에 들어설 때부터 이미 설마 했던 차였다.

    그리고 낯설지 않은 단층 상가 앞에 다다른 순간, 그가 술에 잔뜩 취해 집으로 찾아왔던 지난날이 문득 스쳐 갔다.

    ‘ 범화가 줬어. 아… 막걸릿집 좆 떨어진 호랑이. …내 죽마고우. ’

    그래. 문제의 막걸리. 이제는 외려 감사해 마지않은 추억이 된 그 막걸리.

    “…….”

    지안은 제 앞에 턱을 괴고 앉아 웃고 있는 할머니를 긴장 어린 얼굴로 바라봤다. 씨익, 길게 늘어지는 입술 사이로 검은 치아가 싱그럽게 드러났다.

    “요로코롬 또 만난께 디지게 반갑구먼? 흐흐.”

    처음 왔던 그날엔 숨소리조차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었다. 해서 몸이 매우 편찮으신가, 하며 그저 숙연해졌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분이 999년 묵은 호랑이였다니…. 그냥 호랑이라 해도 놀라울 판에 무려 그와 같은 999살….

    기저에 깔린 맹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탓일까. 정체를 알고 보니 괜히 손바닥에 땀이 삐질 났다. 힘없는 노인의 외형을 하고는 있지만, 병천과 수아에게선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음산하고 거친 아우라가 물씬 풍겼다. 모란보다 더욱 괄괄한 말투와 사나운 눈빛 탓인지도 모르겠다.

    괜스레 마른침을 삼킨 지안은 애써 미소를 띠며 나름 살갑게 운을 뗐다.

    “할머니께서 이사님 친구분이셨을 줄은….”

    “아니제, 아니제.”

    대뜸 말허리를 잘라버린 호랑이는 검지를 좌우로 까딱이며 진지하게 미간을 좁혔다.

    “요것은 분맹히 짚고 넘어가자고.”

    그러며 테이블 위로 스윽 몸을 기대어 거리를 좁히고는 은밀하게 덧붙였다.

    “할망구로 보이겄지만 애석허게도 정체성은 할배여. 꼬부랑 말로 토란스잔더라 허든가?”

    “…네?”

    쏜살같이 흘러간 말을 제대로 담지 못하고 멍하니 되묻자, 곁에 앉아있던 승원이 혀를 차며 정정했다.

    “트랜스젠더, 멍청아.”

    “오냐, 그래. 늬 똥 가래떡이다, 새꺄.”

    수컷이 암컷이 될 수밖에 없었던 서글픈 옛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된소리가 난무했다. 신의 벌을 받아 대물이 잘려버린 호랑이의 현생에 놀라워할 새도 없이 오가는 욕설에 정신이 쏙 빠질 판이었다. 지금껏 그를 깍듯하게 대하는 이들만 봐와서인지 너무도 낯설고 신기한 광경이었다.

    한데 무엇 하나 살갑지 않은 눈빛과 말투에도 외려 친근함이 물씬 풍기니 희한한 일이었다.

    그와 숨 쉬듯 욕설을 주고받던 호랑이는 문득 지안을 돌아보곤 히죽 눈을 접었다.

    “뭐 어쨌까네 심심허던 차에 잘 왔고마잉. 또 만낸 것도 연인디 고량주 한 잔 꺾어볼텨?”

    “아….”

    “술 안 마셔. 곧 갈 거야.”

    행여 지안이 말려들세라 그가 미연에 차단해버리자, 범화의 눈꼬리가 까칠하게 찢어졌다.

    “곰방 갈 거를 머 땀시 야까지 데불고 왔냐?”

    눈치만 살피던 지안이 그 대신 상냥하게 답했다.

    “아, 얼굴 뵈러 왔어요. 이사님이 친구 소개해주신다고 해서.”

    다시 지안을 향해 히끗 구른 범화의 눈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친구…? 야가 나를 친구라 허든가?”

    미묘한 범화의 반응에 지안은 이마를 긁적이며 승원을 돌아봤다. 그는 어쩐지 멋쩍은 얼굴로 쩍쩍 갈라진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네… 제일 친한 친구분이시라고….”

    “제일 친… 크크큭.”

    새끼, 쑥스랍게 먼 고백질이여.

    내심 감동한 속내를 숨기고 대번에 웃음을 터트린 범화는 상기된 얼굴로 쩌렁쩌렁하게 목청을 높였다.

    “암만! 친구고 말고. 야가 내 죽마고우랑께! 어허허! 그런 으미에서 참말로 고량주를 한 잔 빨아야 쓰겄구만?”

    호쾌하게 테이블을 텅 내리친 범화는 얼른 굽은 몸을 일으켰다. 한숨 섞인 승원의 음성이 범화의 발을 붙들었다.

    “안 마신다니까.”

    “아, 새끼. 눈치도 허벌라게 없어브네. 기왕 온 김에 술이라도 진창 맥여블고 자빠뜨리믄….”

    사뭇 답답한 얼굴로 재잘대던 범화는 대번에 벌게지는 지안의 얼굴을 살피곤 허무하게 물었다.

    “머시여. 이미 박아브렀냐?”

    콜록! 먹은 것도 없이 사레가 걸린 지안이 시뻘건 얼굴로 기침을 토했다. 역시 여길 데려오는 게 아니었나, 뒤늦게 후회가 밀려온 승원은 지안의 등을 톡톡 두드리며 범화를 쏘아봤다.

    “말 좀 고상하게 못 해?”

    “고상허게 그람 뭐, 이미 떡을 치셨으요?”

    “하… 이 새끼가.”

    어째 오가는 말투가 또 곱지 않다. 곧 2차 욕판이 벌어질 듯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사레들린 목을 겨우 가다듬은 지안은 괜찮다는 듯 승원의 손을 잡으며 제법 당차게 말했다.

    “주세요, 고량주. 저 술 잘 마셔요.”

    “됐어. 무시해도 돼.”

    “한 잔인데, 뭘…. 그리고 내일은 밤 촬영이라 괜찮아요.”

    어쨌거나 그가 처음으로 친구에게 저를 ‘애인’이라 소개하는 자리였다. 모르긴 해도 이런 자리에선 응당 술이 빠질 수 없지 않을까. 어색한 분위기는 풀어지고 설레는 기분은 배가 될 테니 하등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독한 술에 놀란 구슬이 또 그의 품에 파고들어 주정을 부리도록 조종할지도 모르지만. 뭐 어때, 이젠 그마저도 충분히 괜찮을 사이가 됐으니까.

    시원시원한 지안의 반응에 범화가 만족스레 껄껄 웃었다.

    “그라제. 한 잔인디, 뭐! 아따, 고 딸랑구 맘에 쏙 드네. 쪼매만 기둘려 봐잉, 내 금방 내올랑게.”

    신나게 광대를 꿈틀거리던 범화의 몸이 눈 깜짝할 사이 휙 사라졌다. 이윽고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승원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고, 지안은 걱정 말라며 승원의 손을 꼭 잡고 발랄하게 흔들었다.

    “딱 한 잔만 마셔. 여기 있는 술은 보통 술이랑 다르니까.”

    “알았어요.”

    싱긋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있게 답하던 순간엔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에헤이, 정 없게 한 잔이 뭐당가? 우리네들은 예부터 삼세번을 아주 귀중히 여겼다 이거여. 그란께 두 잔만 더 받아보드라고, 잉?”

    그렇게 단 석 잔에, 이성이 완전히 빙빙 돌아버릴 줄은.

    **

    운전석 시트를 뒤로 눕힌 손은 놀랍게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술에 취해 늘어진 지안을 보조석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매주려던 순간, 게슴츠레 눈을 뜬 그녀가 입을 맞추며 그를 운전석에 밀어붙이고 순식간에 시트마저 눕혀버린 것이었다.

    “하….”

    숨만 겨우 토해내고 다시 기울어진 입술이 그의 입술을 황급히 덮쳤다.

    “숨….”

    나도 숨 좀 쉬자, 지안아.

    말도 못하고 다시 입이 틀어막힌 승원은 바쁘게 입안을 헤치는 작고 말랑한 혀를 정신없이 받아들였다. 운전을 하겠답시고 끝끝내 술을 거부했건만, 하염없이 혀에 감기는 알싸한 술맛에 결국 취해버릴 판이었다.

    “하아.”

    샘솟는 욕정을 어쩌지 못하고 산만하게 그의 얼굴만 더듬던 지안은 허겁지겁 승원의 셔츠 단추를 붙들었다.

    톡톡, 단추를 푸는 손이 어설프고도 다급하다. 결국 다 풀지도 못하고 성급하게 앞섶을 파고들고는 탄탄한 가슴 위를 더듬댔다.

    지안이 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두던 승원은 제 가슴 위에서 허우적대는 손을 붙들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겨우 떨어진 입술 사이로 뜨끈한 숨이 오갔다.

    “뭘 그렇게 찾아.”

    술에 취해 빨갛게 충혈된 눈이 자못 아쉽게 늘어졌다.

    “아… 너무 작아서….”

    연방 웃음을 삼킨 그가 지안의 손을 친절히 작은 돌기 위에 올려주자, 그제야 다홍빛 입술이 만족하며 호를 그린다.

    깔짝깔짝 손톱으로 긁었다가, 빙빙 손끝으로 굴려도 보고, 그가 그랬던 것처럼 젖꼭지를 희롱하는 솜씨가 제법 청출어람이다.

    무엇이 그리 신기한지 제 손가락 하나에 이리저리 굴려지는 돌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안은 열에 녹은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들도 여기 이렇게 만지면, 기분이 이상해요?”

    승원은 뜨끈하게 술이 오른 지안의 볼을 매만지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상해. 네가 만지니까.”

    “아니, 그냥 이상한 거 말구… 막, 흥분되고 그러나…?”

    남경이 묵직하게 부피를 키운 것은 이미 오래전이었다. 하나 발칙한 지안의 도발이 기가 막혀 자꾸만 웃음이 나니, 욕정을 오롯이 느낄 새도 없다.

    승원은 발그레한 지안의 볼을 슬쩍 꼬집으며 황당한 듯 물었다.

    “고량주 석 잔에 이래서 될 일이야?”

    입술을 불퉁 내민 지안은 그의 가슴에 볼을 비비며 늘어진 태엽처럼 중얼댔다.

    “하… 몰라요. 이상해, 나…. 왜 이렇게 몸이 뜨겁지….”

    “그러게 한 잔만 마시라니까.”

    “그래도 좋았는데, 난…. 애인이라고 소개도 해주구…. 호랑이 님도 너무 재밌으시구… 진짜 즐거웠는데, 난….”

    끔벅끔벅 무겁게 눈꺼풀을 여닫으며 종알대는 모습이 마냥 귀여워 죽겠다. 가끔 고량주 석 잔 정도는 먹여도 좋겠구나, 실없는 생각이 스치던 때였다.

    다정한 손길로 지안의 볼을 지분대던 움직임이 흠칫 멎었다.

    “손이 자꾸 어디로 가, 망측하게.”

    주절주절 입을 놀리며 관심을 앗아놓고는, 스멀스멀 아래로 떨어지는 손이 어디까지 갈 작정인지 야살스럽다.

    결국엔 바지 버클 아래까지 내려간 손이 불룩해진 앞섶을 슬그머니 덮었다.

    “애걔… 흥분한 거 맞네, 뭘….”

    어쭈. 이 여자 좀 보게…?

    헛웃음이 터져버린 승원은 기꺼이 백기를 들어주었다.

    “안 했다는 말은 안 했어.”

    얇게 접은 눈매와 시이익 찢어지는 입술이 어쩐지 요망하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눈꼬리가 이리 야릇해지나, 싶던 순간.

    달각, 버클이 풀리며 허리춤이 느슨해졌다. 이어 지이익 열리는 지퍼 소리가 좁고 어두운 차 안에 은밀하게 울린다.

    설마 했던 상황이 기어이 벌어지자, 승원은 헛숨을 터트리며 장난스레 경고했다.

    “너 그러다 오늘 잠 못 잔다.”

    하나 그의 경고 따위 귓등으로 퉁겨버린 그녀는 팽팽해진 드로어즈 위를 끈적하게 매만지며 얄상스레 물었다.

    “여기… 빨아줄까요?”

    “…….”

    순간 멎어버린 숨이 목 안에서 덩어리째 콕 막혔다. 할 말을 잃고 농염하게 풀어진 지안의 얼굴만 바라보던 승원은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헤드레스트에 뒤통수를 툭 놓았다.

    “하. 미치겠네.”

    끝났나 싶었던 도발이, 제대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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