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69화 (69/106)
  • 69.

    벤치에 앉아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는 단단히 결심에 찬 얼굴을 하고 있다.

    “단미 씨!”

    활짝 웃으며 다가오는 남자를 보고도 여자는 좀체 웃지 않았다.

    “오래 기다렸죠?”

    헉헉거리며 여자의 앞까지 달려온 남자는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내밀며 방긋 미소 지었다. 뱅글뱅글 예쁘게도 쌓아올린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자는 짐짓 냉담한 얼굴로 눈을 치떴다.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할 말은 아닌데.”

    머쓱해진 남자는 긴장한 얼굴로 여자의 곁에 쭈뼛쭈뼛 앉았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감돈다. 얼마쯤 침묵하던 여자는 먼 산을 바라보며 제법 강단 있게 말했다.

    “우리 말이에요. 이제 관계를 확실히 하는 게 좋겠어요.”

    이윽고, 남자를 향해 돌아 붙은 얼굴이 조금 속상한 듯 일그러졌다.

    “우린 대체 무슨 사이예요?”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남자는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쏟아지는 여자의 질문을 묵묵히 받아내고만 있다.

    “그쪽 친구들한테 나 애인이라고 소개해줄 수 있어요?”

    남자는 머뭇거리며 한숨을 삼킨다. 그리고 몇 초간의 정적이 깔린 후.

    “…컷! 좋습니다. 바스트 한 번 더 갈게요.”

    감독의 명쾌한 사인이 확성기를 타고 크게 울려 퍼졌다. 원테이크로 이어진 또 하나의 씬이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현장과 얼마쯤 떨어진 벤치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던 승원은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잘만 하면서.”

    이상하게 발음이 꼬인다며 지안이 내내 걱정했던 씬이었다. 저리 한방에 해낼 것을 무슨 엄살을 그리 피웠던지, 카메라가 돌던 순간부터 제가 더 긴장이 되어 혼쭐이 났다.

    오후 촬영은 휴식 시간도 없이 강행군이 이어질 거라고 했던가. 고비를 넘기는 것을 보았으니 이제야 마음 놓고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될 듯싶다. 종일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고 있었더니 좀이 쑤셔 죽을 판이었다.

    사우나라도 다녀올까…. 생각은 하면서도 차마 떠나지 못하고 지안을 말끄러미 건너다보고 있을 때였다.

    “입술 찢어지겠네.”

    까칠한 음성이 불쑥 왼쪽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하나 그는 미동도 않고 눈만 느리게 깜박였다. 이미 가까워져 오는 수국 향을 충분히 느낀 참이었다.

    승원의 곁에 다리를 척 꼬고 앉은 시호는 아니꼬운 얼굴로 그를 흘겼다.

    “그렇게 좋니?”

    가볍게 스트로를 물고 있는 입술은 말이 없다. 다만 식은 커피만 쪽 빨아당길 뿐이었다. 네 말 따위 대꾸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하.”

    헛숨을 내뱉은 시호는 사뭇 황당한 얼굴로 승원의 눈을 들여다봤다. 수백 년간 본 적 없던 눈빛이었다. 부드럽고 따스하고 다정하고 온화하고. 아주 그냥 온갖 닭살 돋는 것들은 죄다 박아놔서는, 보고 있자니 온몸이 간지러워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시호는 콧방귀를 뀌며 비아냥댔다.

    “노올랍다, 정말.”

    그에게 인간은 하찮은 미물에 불과했을 터였다. 고작 백 년도 채 살지 못하는 나약하고 별 볼 일 없는 존재. 하물며 그것이 여인이라면 음기만 뽑아먹고 내다 버릴 도구로 여겨왔을 그다.

    한데 그랬던 그가, 어떻게 인간 계집을 저런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한데, 보면 볼수록 말이 돼가니 배알이 꼴려 죽겠다.

    물론 처음 지안이 호인의 후손임을 알았을 땐 축배라도 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찌 됐거나 그가 끔찍한 괴수로 변모할 일은 없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저보다 먼저 지안이 그의 환상적인 양기를 맛보리란 사실이 샘은 났지만 괜찮았다.

    인간 계집 따위, 어차피 저주를 풀고 나면 하등 쓸모없는 쓰레기처럼 버려질 테니까. 저야 그 후에 기회를 잡아도 충분할 테니까.

    한데 저리 애정이 뚝뚝 떨어져서야, 버리기는커녕 계집의 운명이 다 해도 염력으로 깨워다 끼고 살 판이었다.

    생각할수록 짜증이 나 입술을 들썩대던 시호는 눈썹 머리를 바짝 좁히며 물었다.

    “진짜 저 계집을 연모라도 하는 거야? 오라버니가, 인간 계집을? 하… 진짜 이해를 못 하겠네.”

    혼자 묻고 혼자 열 내고, 저 홀로 사물놀이를 하던 시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휙 쓸어넘겼다.

    “아니, 대체 인간을 마음에 들여서 어쩌겠다는 건데? 설마 뭐, 사모紗帽쓰고 혼례라도 치르려고?”

    아무런 표정이 없던 승원의 미간에 결국엔 균열이 생겼다. 이미 다 비워버린 테이크아웃 잔을 들고 부질없이 공기만 빨아당기던 그는 그제야 귀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뭘 하든 너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관심 꺼.”

    휙 던진 빈 컵이 시호의 눈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벤치 옆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승원은 무심히 덧붙였다.

    “훔쳐보면서 낙엽 태울 시간에 대사나 외우고.”

    나는 네년이 한 짓을 알고 있다, 이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이 무엇이든 뒤통수에서 헛짓거리할 생각은 집어치우라는 고상한 경고이기도 했다.

    이를 앙다물고 콧바람만 쉭쉭 내뿜던 시호는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헛소리를 내뱉었다.

    “관심 꺼줄 테니까 나랑도 자, 그럼.”

    “…….”

    느릿하게 돌아간 시선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연갈색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앵돌아진 눈으로 얼마쯤 그의 시선을 받아내던 시호는 버럭 앙탈을 부렸다.

    “나랑도 떡 한 번 치자고!”

    “미친 소리 작작해.”

    단칼에 잘라버리는 음성이 낮고 차다. 그럼에도 겁 없이 그의 팔에 매달린 시호는 불쌍한 얼굴로 애원하듯 말했다.

    “양기 많이 안 뺏을게. 약속해. 동족 하나 살리는 셈 치고 한 번만 해주라. 응? 나 요즘 인간들은 통 맛이 없단 말이야.”

    팔에 볼을 비벼대며 아양을 떠는 얼굴이 영악스럽기 그지없다. 승원은 무감한 눈으로 누렇게 화장이 묻어난 제 검은 셔츠를 내려다보았다.

    “놔.”

    “아, 진짜 딱 한 번만. 두 번도 아니고 한 번인데, 것도 안 돼?”

    내리뜬 검푸른 눈동자가 시호의 눈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칼날처럼 뾰족해지는 동공의 변화를 눈치챘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곱게 말로 하니 내가 누군지도 잊었나 본데.”

    시호는 불시에 제 팔을 짓누르는 압각에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승원의 팔과 옆구리 사이에 꽉 끼여버린 팔이 속수무책으로 경련했다. 감각을 잃고 축 늘어진 손은 죽은 이의 것처럼 금세 새파래졌다. 하나 그는 평온한 얼굴로 파닥거리는 시호를 내려다봤다.

    “너 하나 소멸시키는 건 일도 아니야.”

    “끕…!”

    결국 엄청난 압착을 견디지 못한 뼈가 맥없이 똑 부러졌다.

    “아아아악!”

    그제야 그에게서 벗어난 시호는 부러진 팔을 부여잡고 볼썽사납게 바닥을 뒹굴었다. 그런 시호를 무정히 바라보던 승원은 제 셔츠에 묻은 시호의 흔적을 툭툭 털어내며 나직이 경고했다.

    “동족이라고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개수작 부리지 마.”

    매정한 걸음이 시호의 머리 위를 스쳐 갔다. 몇 걸음 채 딛지 않은 걸음은 이내 가을바람 속으로 홀연히 스며들었다.

    “으… 으읍….”

    길을 헤매던 낙엽이 그가 일으킨 바람에 휘날리다 시호의 곁으로 우르르 밀려왔다.

    “아흐씨, 짜증 나…!”

    팔뚝을 붙들고 신음하던 시호는 제 입술에 들러붙은 낙엽을 사납게 뱉어냈다.

    **

    초조한 걸음이 세 발짝을 채 벗어나지 못하고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숱한 걸음에 짓눌린 카펫이 그 자리만 닳고 닳아 구멍이 날 판이었다.

    “아이고… 이것이, 이것이… 아효….”

    주절거리다 한숨을 내쉬고, 또 무어라 주절대다 까득까득 손톱을 물어뜯고. 벌써 몇 시간째 부산한 움직임이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어허, 이거 참. 환장을 하겠구먼…!”

    결국 안경까지 벗어 던진 병천은 까칠해진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이내 흐릿해진 시선이 망연히 책상 위로 향했다.

    ‘?靈의 記錄’

    흐릿하게 먹이 벗겨진 누런 고서 한 권이 데스크 매트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하… 저것을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두어야 하나, 감춰야 하나 한참을 고심하다 올려두긴 했지만 도무지 발을 뗄 수 없었다.

    사실을 알게 된다면 월호 님은 어찌하실까. 지안 님을 향한 마음이 깊은 것은 분명하나, 그 깊이가 얼마만큼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으니 당최 판단이 서질 않는다.

    깊은 갈등에 연방 입술이 말랐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암… 힘드실 테지. 고민이 되실 테야…. 허나 본인의 목숨보다 중요하겠는가….

    아니, 혹여 모른다. 여태 누군가를 마음에 들인 것이 처음이니 절망은 무엇보다 더할 것이다. 길 잃은 신수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할 만큼 마음이 여린 분이 아니던가. 하물며 그러한데, 연모하는 이의 목숨이 위태롭다 한다면….

    “아아. 아니야. 아니 되지, 아니 돼.”

    부르르 고개를 턴 병천은 결국 재게 걸어 책상 앞에 당도했다.

    역시 안 되겠다. 아무래도 확신이 안 서니 모험을 강행할 수가 없다. 다급히 뻗은 손이 고서를 집어 얼른 재킷 안쪽에 쑤셔 넣었다.

    태우고 태워도 징그럽게 되살아나 꽂혀버리니 흔적을 없앨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것을 어디에다 숨겨야 하려나….

    제집 안방을 떠올리며 황급히 책상 모퉁이를 돌던 때였다.

    “허…!”

    철렁 떨어진 새가슴이 사정없이 발등을 내리찍었다. 양팔로 배를 꽉 감싸 쥔 채 붙박여 버린 병천은 막 서재 입구에 번쩍 나타난 그의 모습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쿵덕 쿵덕 뛰는 심장 소리가 귓전에서 미친 듯이 울려댔다.

    승원은 피곤한 듯 뒷덜미를 주무르며 파랗게 질린 병천을 의아하게 건너다봤다.

    “뭘 그렇게 놀라. 뭐 사고 쳤어?”

    그러며 대수롭지 않게 소파로 다가간 그는 등받이에 목을 기댄 채 손끝으로 눈두덩을 빙빙 문질렀다.

    하… 보지 못하신 겐가.

    병천은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쉬며 배를 안은 팔을 조금 더 꽉 조였다.

    “아, 아이쿠. 제가 어디 사고를 칠 위묘爲猫랍니까? 그것은 월호 님의 전문이지요.”

    평소처럼 농을 던져보지만 어색하기 짝이 없다. 제가 들어도 천자문을 읊는 양 어색한데, 그가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세우고 빤히 건너오는 눈빛이 농을 받아줄 기미가 전혀 없어 보인다.

    “근데 왜 식은땀을 흘려.”

    “……!”

    또 한 번 심장이 철렁 떨어진 병천은 냉큼 이마를 훔치며 부산스럽게 중얼댔다.

    “어, 어묵을 너무 많이 먹은 모양입니다. 복통이 어찌 이리 가라앉지를 않는… 억! 월호 님, 잠시! 하, 항문에서 신호가!”

    어차피 배를 움켜쥔 참이니 적절한 핑계였다. 한 손으로 얼른 궁둥이를 붙든 병천은 문을 향해 황급히 총총 내달렸다.

    쾅-! 쏜살같이 사라진 병천의 뒤로 서재 문이 떨어져 나갈 듯 굳게 닫혔다.

    “…….”

    얼마쯤 닫힌 문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승원은 병천이 서 있던 방향을 돌아보았다. 이내 그 앞으로 번쩍 자리를 옮기고는 책상 위를 유심히 훑었다.

    딱히 거슬릴 만한 변화가 없는 걸 보면 무엇을 건든 것은 아닌데…. 서랍 안을 대강 살펴봐도 역시나 손을 탄 흔적은 없다.

    아리송해진 그의 시선이 공연히 서재 안을 빙 휘둘러보았다.

    우리 고양이가 왜 갑자기 이상한 짓을 할까….

    가는 눈을 뜨고 시야를 흩트리던 그는 다시금 닫힌 문을 건너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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