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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는 밤-35화 (35/106)

35화

붉고 광활한 갈대숲 한가운데 오롯이 혼자였다.

눈앞에 보이는 좁은 길은 끝도 없었다. 빽빽한 갈대 사이로 디딜 곳은 오로지 외길뿐인데, 바닥에 촘촘히 박힌 가시가 의지를 좀먹었다.

젠장.

이까짓 거 날아가면 그만이건만, 어쩐 일인지 몸이 무겁다. 도무지 도술이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수도 없다. 저 길의 끝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 살려주세요! 아악! ’

한시가 급했다. 여자의 비명이 점점 힘에 부치고 있다.

마음이 바빠 할 수 없이 가시밭 위로 한 발을 디뎠다.

으윽.

발바닥 전체를 뚫고 들어오는 엄청난 통각에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숭숭 구멍이 뚫린 발바닥에 대번에 끈적한 혈이 맺혔다.

급기야 핏물로 발자국을 찍으며 또 한 발, 힘겹게 두 발.

대체 이 길의 끝은 어디인가.

아득한 길을 바라보며 몇 걸음을 뛰듯이 걷다가 그만 참지 못하고 다리에 힘을 놓았다.

무너진 무릎에 가시가 박혔다. 바닥을 짚어버린 손바닥을 뚫고 뾰족한 가시들이 우수수 손등을 뚫고 나온다.

이런 씹, 빌어먹을.

저렴한 욕지거리가 절로 입안에 씹혔다. 이렇게나 무기력했던 적이 없다. 몸을 날릴 수도, 무통의 도술을 부릴 수도 없으니 천하의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 꺄아아악! ’

잠시 힘을 잃었던 비명이 다시 솟구친 것은 그때였다.

목이 찢어질 듯한 절규, 하늘까지 치솟는 발악. 그것은 단말마의 비명이었다.

아아… 설마.

암흑과 같은 고요가 뒤따랐다. 음산한 기운이 너른 갈대숲을 빠르게 집어삼킨다.

오래지 않아, 저 먼 길의 끝에서 시꺼먼 까마귀 떼가 푸드득 날갯짓하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하아, 젠장. 결국 죽고야 만 것인가.

안 된다. 이대로 죽어버리면…. 절대로 이렇게는….

가시밭 위에 무너진 채 무기력하게 손만 뻗었다. 손에서 줄줄 흐른 피가 팔뚝을 적시고 바닥을 물들였다.

제 피로 물든 가시밭길 위에 힘없이 쓰러진 그는 꽉 막힌 소리를 근근이 뱉어냈다.

“…안….”

시야가 흐릿하다. 까마귀 떼의 날갯짓이 아득히 멀어진다.

“안 돼….”

점점 차오르는 핏물에 몸이 깊게 잠겨 들어갔다. 코로, 입으로 무자비하게 빨려 들어오는 피비린내에 숨이 막힌다.

“…님!”

적막한 사위로 익숙한 음성이 흘러들어온 건 그때였다.

“…월호 님! 월호 님!”

시뻘겋게 시야를 가린 핏물 속에서 난데없이 넙데데한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정신이 드십니까! 제 말이 들리십니까!”

사정없이 어깨를 흔드는 통에 어지럽게 시야가 흔들렸다. 하지만 여러 개로 흩어지는 커다란 얼굴이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묘흔.”

“예! 예, 접니다! 묘흔입니다, 월호 님!”

핏빛 세상이 걷히고 순식간에 시야가 환해졌다. 그 가운데 글썽이는 병천의 눈동자가 오롯이 각막을 파고들었다.

꿈이었던가.

아… 꿈을 꿔도 하필이면….

“괜찮으십니까!”

와중에도 격렬히 흔들어대는 녀석의 호들갑에 돌아온 정신도 나갈 판이었다.

승원은 칼칼하게 잠긴 목소리를 간신히 뱉어냈다.

“골 쑤셔…. 그만 좀 흔들어….”

“어쿠! 죄송합니다. 의식을 찾으신 듯하여 반가운 마음에 그만….”

냉큼 손을 떼어낸 병천은 몸을 일으키는 승원의 등 뒤로 재빠르게 베개를 포개 넣었다.

“통증은 좀 어떠십니까?”

힘겹게 몸을 일으킨 승원은 벽에 뒤통수를 기댄 채 신음을 뱉듯 겨우 대꾸했다.

“괜찮은데… 안 괜찮아.”

그보다 정확한 표현은 없었다. 사지를 쥐어짜는 통증은 여전하나, 이전에 비하면 그저 살 만한 정도.

괜찮은 듯한데 전혀 괜찮지는 않다.

병천이 삐져나온 눈물을 훔치고 부산스럽게 그의 몸에 얼음팩을 비벼댔다.

“아휴우…. 꼬박 8시간을 못 깨어나시기에 얼마나 걱정을 했던지 모릅니다.”

벌써 8시간이 흘렀던가. 증명이라도 하듯 창밖의 하늘엔 벌써 어둠이 내려있었다.

“범화 님의 신약이 그래도 확실히 효과는 있는 모양입니다.”

기똥찬 약을 만들었다며 그리 자랑을 하더니 어쩐 일로 썩 괜찮기는 하다. 그래 봤자 억지로 잠을 재워 잠시나마 통증을 잊게 하는 정도인 듯하지만.

전신이 후끈거리는 열감에 힘없이 늘어져 있던 승원은 고요한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서지안은.”

이리 통증에 몸부림을 치는데 병천이 그녀를 데려오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한데 어쩐 일인지 지안이 보이지 않았다.

“그… 그것이….”

병천은 송구한 얼굴로 눈치를 살피며 어렵사리 입을 뗐다.

“수아가 백방으로 찾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승원은 의아한 눈빛으로 한쪽 눈썹을 삐쭉 밀어 올렸다. 내내 곁에 붙어있었을 텐데 찾을 이유가 뭐가 있는가, 언뜻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찾고 있다니…. 어째서?”

통증을 삼키며 힘겹게 내뱉는 음성이 칼칼했다.

“저, 그, 그러니까 그것이….”

난감한 얼굴로 쩔쩔매던 병천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푹 떨궜다.

“어찌하다 깜빡 잠이 들어 지안 님을 놓쳤다 합니다….”

“…….”

승원은 잠시 말문이 막혀 느리게 눈만 깜빡였다.

놓쳐? 서지안을…?

뒤늦게야 병천의 말을 이해하고는 미간이 찔끔 경련했다. 창백한 관자놀이에 푸릇한 핏줄이 불끈 도드라졌다.

“뭐가 어째…?”

“지, 집안은 이상이 없었습니다. 짐을 싸들고 잠적을 한 것은 아니니 염려치 마십시오. 재즈바도 임시 휴업이 붙은 걸 보니 겸사겸사 잠시 바람을 쐬러 가신 모양입니다. 신약의 약효가 떨어지기 전까진 꼭 모셔올 테니… 어엇! 왜, 왜 일어나십니까!”

안심을 시키고자 재빠르게 늘어놓던 병천이 사색이 되어 그를 붙들었다.

열에 녹아 비틀거리는 몸으로 기어이 침대를 벗어난 승원은 순식간에 백발을 늘어뜨리고 본모습을 드러낸 채였다.

“아직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제가 나가서 찾아볼 테니….”

“쓰레기 위치부터 파악해.”

“예?”

검은 폴라티에 검은 바지.

눈 깜짝할 사이 온통 검게 변한 그가 회색빛으로 돌변한 눈동자를 섬뜩하게 내리떴다.

“지금 당장.”

그의 등 뒤로 시린 달빛이 들이쳤다.

캄캄한 하늘에 또렷한 모양의 그믐달이 음산하게 떠 있었다.

**

심장이 연방 낯설게 펄떡거렸다. 사지의 통증은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격렬한 박동이었다.

어쩐지 꿈이 지랄 맞았다.

불안감이라니. 그 오랜 세월을 살면서 이런 거지 같은 기분을 느껴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채진주 그 미친 계집만 아니었더라도 이런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진 않았을 텐데.

“42세 고상범. 키 163센티미터에 마른 체격입니다. 절도를 시작한 것이 열두 살 때인데, 그 후로 수년간 도박에 폭행에 미성년 강간, 살인까지…. 이놈에게 몹쓸 짓을 당하고 목숨까지 잃은 소녀가 자그마치 넷에, 성인의 여성도 여섯이나 된다 합니다. 여기저기 고시원을 전전하며 지내는 모양이고요.”

수아가 전해주고 간 보고서를 읊으면서도 병천은 내내 월호의 안색을 살폈다.

창백한 낯빛이 여전히 좋지 않다. 내색을 하지 않을 뿐, 신약의 약효도 점점 사라져 통증이 다시 시작되고 있을 터였다.

“현재는 범화 님 식당 인근의 고시원에 숨어들었다 합니다. 지금 그 인근에서 악취가 풍기고 있다 하니 아마도 그 동네에….”

결국 하던 말을 멈춘 병천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한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놈은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그냥 제게 맡기시고 쉬시는 것이 어떻….”

“넌 못 찾아. 내가 가야 한다.”

단호히 못 박은 월호는 병천이 들고 있던 장갑을 빼 들고 빠듯하게 손을 끼웠다.

“수아가 여태 못 찾고 있는 이유를 몰라서 그래? 너라고 다르지 않을 거다.”

“그래도 어찌 그 몸으로….”

지안이 삼킨 구슬은 주인의 의지를 100퍼센트로 발현시키는 힘을 지녔다. 그녀가 숨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수아와 병천의 미약한 도력으로는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오로지 월호만이 느낄 수 있는 기였다. 그 외에도 유일하게 가능한 존재가 있다면 지안이 내뿜을 음기만을 쫓는 악인뿐일 터.

반드시 그보다 먼저 지안을 찾아내야 한다.

승원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척하면 척, 그의 의중을 파악한 병천은 고상범의 사진이 담긴 휴대폰을 그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멀리서 찍어 좀 흐릿하긴 합니다만, 대충 고따위로 생겨 먹었습니다.”

흐릿한 사진 속에서 선명히 보이는 거라곤 통나무를 박아 넣은 듯 우뚝 솟은 콧대뿐이었다. 불명확한 실루엣이지만 과연 좆대로 생겨먹은 상판대기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왼쪽 관자놀이에 6센티미터가량의 창상도 하나 있습니다. 근방에 고따위로 생겨 먹은 낯짝은 하나뿐일 테니 아마도 금세 찾으실 겁니다.”

내내 근심 어린 얼굴로 한숨만 내쉬던 병천은 마지못해 차 열쇠를 집어 들었다.

“차로 이동하실 거라면 동행하겠습니다.”

“됐어. 차 끌고 갈 만큼 여유롭지 않아.”

병천의 미간이 걱정스레 좁아졌다.

“아직 기력이 회복되지 않아 순간이동을 하기엔 버거우실 텐데요.”

승원은 짐짓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괜찮아. 안 죽어.”

괜찮긴. 아직도 얼굴이 창백하신데….

“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백지처럼 하얀 그의 낯빛을 살피던 병천은 서둘러 집무실로 건너가 책상 서랍을 뒤적였다. 맨 밑 서랍의 구석진 곳에 적빛의 자개 상자가 놓여있었다.

“월호 그놈이 영원히 천하장사일성싶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여. 손꾸락 하나 까딱하기도 고단해 뵈거들랑 이거나 한 알씩 처먹여. 못해도 한 시진은 숨 쉴 만할 것잉께.”

언젠가 범화 님께 이 활력환을 받아올 때만 해도 정녕 우리 튼튼한 월호 님은 드실 일이 없으리라 장담했건만….

아아. 참으로 슬프지 아니한가.

콧대를 꾹 짚으며 북받치는 슬픔을 내리누른 병천은 둥근 환을 꺼내 들고 황급히 휴게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환이라도 하나 잡숫고 가시….”

텅 빈 휴게실을 향해 번쩍 내민 손이 무안하게 뚝 떨어졌다.

“아이고… 성질도 어찌 이리 급하실꼬.”

병천은 그가 누워 있던 자리를 돌아보며 착잡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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