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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는 밤-34화 (34/106)
  • 34화

    “아니, 수아 이것은 어찌 이리 전화를 안 받는 게야!”

    종료와 통화버튼을 반복해서 누르는 손이 몹시 초조했다. 벌써 스무 통은 족히 건 듯싶은데 도통 연결이 되지 않고 있었다.

    급한 대로 지안에게 곧장 연락해 봤지만, 설상가상 그녀의 휴대폰은 꺼져있었다.

    “어허, 이런. 어서 구슬의 치유를 받으셔야 할 터인데.”

    지금껏 구슬을 품고도 꼬박 사나흘은 생사를 넘나들었던 그였다. 신약을 먹었다곤 하나 분명 한계는 있을 테다. 구슬의 미약한 치유나마 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더 오랜 고통에 시달려야 할지 알 수 없는 일.

    그가 저주를 받은 이래로 구슬 없이 여인과 접촉한 일은 처음이었다. 대체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는지 막막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자리만 부산스럽게 종종거리던 병천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집무실 안을 들여다봤다. 귀를 쫑긋 세워봐도 휴게실 너머의 기척이 들리지 않는다.

    고통을 견디다 못해 실신을 하신 건가….

    행여 신경에 거슬릴세라 까치발을 들고 조심조심 휴게실까지 건너간 병천은 살짝 연 문틈으로 그를 살폈다.

    아니나다를까, 간이침대 밖으로 축 늘어진 팔만 봐도 그의 상태를 알만하다.

    조용히 안으로 들어선 병천은 늘어진 그의 팔을 단전 위로 올려주었다. 제 소매를 쭉 당겨 쥐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이고, 안색이 참….”

    가뜩이나 하얀 얼굴이 파랗다 싶을 만큼 창백해졌다. 까칠해진 입술 하며 힘없이 감긴 눈을 보니 주책없게 코가 다 찡해진다.

    애초에 신이 될 자로 태어났으니 날 때부터 천상천하 유아독존, 세상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는가.

    권력이 빚어놓은 어투가 별수 없이 괴팍하여 얄미운 적이야 많았지만, 이따금 이리 힘을 놓고 늘어져 있을 때면 그리도 마음이 아플 수 없었다.

    “부디 조금만 견디십시오, 월호 님.”

    후끈후끈 열이 오른 그의 손을 꼭 감싸 쥐고 콧물을 훌쩍이던 병천은 다시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가 다시 눈을 뜨면 극강의 통증이 시작될 터였다. 한시라도 빨리 지안을 데려와야 한다.

    “전화를 좀 받거라, 어서….”

    길어지는 연결음에 병천은 초조하게 손톱만 물어뜯었다.

    **

    “하아. 날씨 참 좋네.”

    지안은 억세게 쏟아지는 비 사이를 가르며 상쾌하게 심호흡을 뱉었다. 우산이 휘청거릴 만큼 얄궂은 빗물도 지금 이 순간만은 세상 아름다웠다.

    혼자만의 시간이 이토록 소중한 것임을 이전엔 왜 미처 알지 못했을까.

    꿀처럼 다디단 자유를 양껏 만끽하며 비탈진 길을 오르던 지안은 연방 뒤를 돌아다보며 걸음을 빨리했다. 수아가 깨기 전에 어서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설 생각이었다.

    물론 어디로 가야 할지 계획은 없지만 들통나면 금세 사라질 자유가 아니던가. 이대로 집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다.

    먼저 신월당에 들른 지안은 뻑뻑하게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들였다.

    “할머니, 식사는 하셨어?”

    반쯤 열어둔 미닫이문 너머에서 모란의 음성이 건너왔다.

    “오야. 목간 갔다 왔드나.”

    때 빼고 광낸 얼굴이 문에 가려 보이지도 않건만 참 용하시기도 하다.

    새삼 놀라워 탄식을 뱉은 지안은 웃으며 말했다.

    “응. 올라가서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나갈 거예요.”

    “비도 이마이 오는데 어데를 갈라고.”

    “그냥 오랜만에 서점도 좀 가고, 여기저기. 남는 시간 아깝잖아요.”

    금세라도 수아가 쫓아올 것 같아 마음이 급했다. 지안은 서둘러 인사를 건넸다.

    “그럼 쉬세요. 나 올라가!”

    문틈에 들였던 고개를 얼른 빼내던 때였다.

    “으야.”

    소리 높여 저를 부르는 소리에 지안은 다시금 문틈 새로 얼굴을 들였다.

    “응?”

    “여 와 봐라.”

    이런. 똥줄이 바짝 타들어 가는데 어찌 불러들이시는지.

    골목 아래를 살피며 후다닥 신월당에 몸을 들인 지안은 무릎걸음으로 마루에 올라섰다.

    “왜요, 뭐 해드려?”

    미닫이문 너머로 얼굴만 빼쭉 들이자 좌탁에 앉아 있던 모란이 무언가를 내밀며 말했다.

    “아나. 이 가가라.”

    빨갛고 납작한 무언가가 모란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빛이 잘 들지 않아 어둑하니 멀찍이 봐선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지안은 신을 벗고 온전히 올라서서 그것을 받아들었다. 손바닥만 한 빨간 봉투 안을 들여다본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웬 부적이에요?”

    “아무 데나 덜렁 쑤셔 넣지 말고 지갑에 딱 꽂아나라.”

    물음에 답은 않고 담배만 집어 무는 모란을 보며 지안은 아리송한 얼굴이 됐다. 간혹 삼재 부적을 챙겨주신 적은 있었지만 날짜도 시기도 뜬금없었다.

    아… 혹시.

    불현듯이 뭔가가 스쳐 간 지안은 모란의 앞에 앉아 좌탁 위로 바짝 몸을 기울였다.

    “할머니.”

    별안간 진지해진 눈동자에 은근한 기대감이 차올랐다.

    “혹시… 나한테 뭐 보여?”

    착착, 불씨가 붙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모란이 뽀얀 연기에 눈을 찌푸려 떴다.

    “뷔기는 뭐가.”

    “아니, 갑자기 부적을 주니까 뭐가 보이시나 했지. 그, 뭐… 동물 귀신… 같은 거나… 그런 거.”

    은근슬쩍 흘리며 괜히 뒷덜미를 문지르자 모란은 비스듬히 입꼬리를 기울였다.

    “와. 귀신 봤드나.”

    “어…? 아….”

    그러니까 그게….

    찰나의 순간 갈등이 스쳤다. 그냥 사실대로 말하고 도움을 청해볼까. 이보다 더 든든한 아군은 없을 텐데….

    하지만 모란이 믿는다 한들 과연 그들을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아무리 용한 무당이라도 아흔의 노쇠한 몸으로 신수를 셋이나 감당하기에는….

    하… 역시 안 되겠지.

    입술을 잘근 씹으며 고민하던 지안은 결국 내밀지 못한 손을 갈무리했다.

    “아니에요. 얼마 전에 가위를 엄청 심하게 눌려서…. 근데 이건 진짜 무슨 부적이래?”

    싱겁기는, 하며 웃어넘긴 모란이 공연히 부적을 눈짓하며 말했다.

    “니 시험 본다 안 했나.”

    “아아. 오디션?”

    결국 단순한 합격 부적이었던가.

    끝끝내 제 입으로 말할 용기는 없지만 내심 혹시나 하는 기대는 품었거늘 아쉽게 되었다.

    “인자 신문에 이름도 좀 나고 해야 안 되나. 아르바이트만 해가 언제 돈 벌어가 시집가노.”

    모란의 응원 아닌 응원에 지안은 괜히 입술을 삐죽대며 장난스레 말했다.

    “그러게 일찍 좀 써주셨음 좀 좋아? 데뷔 때부터 쥐고 있었으면 벌써 집 한 채는 장만했겠네.”

    곧장 지갑을 꺼내 꼼꼼히 부적을 챙겨 넣은 지안은 너스레를 떨며 일어섰다.

    “어쨌든 할머니 부적 덕분에 이번엔 찰떡같이 다 붙겠다. 고마워요, 할머니.”

    인사를 남기고 신월당을 나서는 지안의 등 뒤로 모란의 회색 시선이 질기게 따랐다.

    끼익, 끽. 문이 닫히고 텅텅 울리는 발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모란은 바람 같은 실소를 터트렸다.

    “가시나 깡도 좋네.”

    언제쯤 털어놓으려나 내심 궁금하던 차였다. 도움을 청해오면 굿하는 시늉이라도 해줘야 할까, 괜히 고민도 해봤었다.

    한데 저 속 깊은 것은 말도 않고 제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속앓이만 하고 있었다. 분명 얘기를 전해 들을 자신이 놀라 자빠질세라 걱정이 되는 걸 테다.

    저것을 기특하다 해야 할지, 미련하다 해야 할지….

    애초에 굳센 정신력이 깃든 사주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해서 월호의 짝으로 들여놓긴 했지만 심성까지 여리고 고우니 아무것도 모른 채 풍파를 맞은 지안이 괜히 가엽기도 하다.

    한들 어찌하랴.

    모란은 빗줄기가 억세게 부딪히는 창을 올려다보며 담배 연기를 천천히 흘려보냈다.

    “그저 운명인 것을.”

    희뿌연 연기에 실린 혼잣말이 신월당을 밝힌 촛불 속으로 가만히 스며들었다.

    **

    “헉!”

    가물거리던 시야가 번쩍 트였다.

    낯선 천장을 끔뻑끔뻑 바라보다 벌떡 몸을 일으킨 수아는 텅 빈 마사지실 내부를 휘둘러봤다.

    언제부터 혼자였던지, 지안이 누워있던 자리엔 온기가 완전히 사라진 채였다. 그제야 돌아본 한쪽 벽면의 시계는 3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헤엑!”

    세상에. 대체 몇 시간을 잔 거야?

    얼굴을 뒤덮었던 팩도 이미 걷어낸 후였다. 잠이 들어도 제 몸 건드는 기척은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그녀가 팩을 떼어내는 동안에도 잠을 깨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근래에 병천 대신 그의 모습으로 변하여 회사 업무까지 도맡아 하느라 쌓여있던 피로가 어마어마했던 탓이다.

    “미쳤어, 미쳤어.”

    황급히 일어나 마사지실을 나서자 탈의실 평상에 앉아있던 이모님이 수아를 돌아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아, 드디어 깼어? 공부하느라 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네.”

    수아는 주춤주춤 게걸음을 걸어 라커로 향하며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하. 하하…. 깨워주셔도 됐을 텐데….”

    “천장 무너지게 코를 골고 자는데 안쓰러워서 깨울 수가 있어야지.”

    “아이코, 저런….”

    넘치는 배려에 감사를 해야 할지, 원망을 해야 할지, 원.

    “저, 지안 언니는 나갔나요?”

    “한참 전에 갔지.”

    흐엉, 맙소사…!

    “저기 냉장고서 바나나 우유 하나 꺼내 먹어. 지안이가 학생 일어나면 주라고 계산도 하고 갔어.”

    도망가시는 길에 우유도 하나 던져두시고, 아이코 참 고맙기도 하여라.

    “못 살아, 정말.”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곁을 비우지 말라 하셨는데 이를 어찌한다.

    소리 없이 절규를 삼킨 수아는 서둘러 라커를 열었다. 그녀를 먼저 맞이한 것은 맹렬히 진동하는 휴대폰이었다. 병천의 발신 번호가 어쩐지 매섭게 번쩍이고 있다.

    “으악. 어떡하지.”

    설마 벌써 눈치채신 건가. 콩알만 한 토끼 심장이 바짝 쪼그라든다.

    수아는 양손으로 받쳐 든 휴대폰을 의기소침하게 귓가에 가져다 댔다.

    “네, 묘흔 님….”

    - 수아악! 너 이, 잇!

    “히익…!”

    연결이 되기 무섭게 수화기를 뚫고 나오는 병천의 고함에 수아는 화들짝 휴대폰을 떼어냈다.

    늘 점잖던 그가 목을 긁어가며 고성을 내지르니 가뜩이나 쪼그라든 심장이 덜렁덜렁 배 밖으로 튀어나갈 판이었다.

    - 대체 어찌된 것이야! 왜 이리 연락이 되질 않아!

    수아는 이마에 삐질삐질 흐른 땀을 닦으며 어깨를 옹송그렸다.

    “죄송합니다, 묘흔 님…. 제가 목간에서 깜빡 잠이 들어….”

    - 목간이라니! 네가 지금 한가하게 목욕이나 할 때더냐!

    “그, 그것이 아니오라, 지안 님이 목간에 들르자고 하시어 함께….”

    - 시끄럽다! 어쨌거나 혼은 나중으로 미룰 테니 지금 당장 지안 님을 뫼시고 회사로 들어오거라, 어서!

    “아, 아, 저, 저 그것이….”

    이 사이에 물린 손톱이 잘근잘근 씹혔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제자리를 종종거리며 더듬대자 병천이 버럭 성을 내질렀다.

    - 어허! 당장 오라는데 어찌 그리 뜸을 들여!

    “그, 그러니까 그것이! 지, 지안 님을… 놓쳐버렸습니다….”

    눈이 질끈 감겼다. 푹 떨군 고개가 발등까지 꺼질 기세였다. 마른 침만 삼키는 동안 수화기 너머의 호흡은 일순 멈춰 있었다.

    잠깐의 침묵을 깨고 낮게 침잠한 목소리가 무겁게 건너왔다.

    - 뭐… 뭣이 어째…?

    “흐힝….”

    수아는 절망 어린 얼굴로 라커 문에 이마를 쿵 찧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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