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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는 밤-25화 (25/106)

25화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어떻게 좀 해 봐요!”

누군 심장이 벌렁거려 죽겠건만, 매사 태평한 이놈의 구미호는 꿈쩍도 하지 않고 눈썹만 치켜들었다.

“뭘 어떻게 해.”

“어디든 순간이동 그거 좀 해보라구요! 고양이랑 토끼님도 데리고, 얼른!”

탕탕, 발소리는 결국 근거리까지 왔다.

우뚝 멈춰버린 지안은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승원을 향해 오만상으로 찌푸려지는 얼굴은 빨리 꺼지라 종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태평한 얼굴로 창틀에 등허리를 기대섰다.

“호들갑 떨 거 없어. 어차피 저자 눈엔 안 보일 테니까.”

지안은 창밖을 향해 손을 펄럭이며 속삭이듯 내질렀다.

“뭐가 안 보여요! 저렇게 버젓이 보이는데!”

이 와중에도 병천과 수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커다란 대접에 백숙을 덜고 있었다.

단 몇 초 후면 건호는 저들과 맞닥뜨릴 것이다. 상황이 그려지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건호야, 인사해. 이분들은 너희 회사 대표님과 이사실 비서님이야.’ 하며 천연스레 소개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아오, 이게 또 무슨 대환장 파티냐고!

머리통을 움켜쥐고 발만 동동거리던 순간이었다.

“서지안! 안에 있냐?”

금세 문 앞에 당도한 건호의 인영이 불투명한 현관 창에 비쳤다. 화들짝 돌아간 시선이 창밖과 문을 바쁘게 오갔다.

병천과 수아는 여전히 상을 차리고 있고, 건호는 그들을 등 뒤에 두고도 별다른 반응 없이 저를 찾고 있었다.

마치 서로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 것처럼.

뭐야…. 진짜 안 보여?

놀란 얼굴로 승원을 돌아보자, 그는 싱긋 입꼬리를 올리며 소리 낮춰 말했다.

“거봐. 안 보인다니까?”

근데 왜 난 보이는 건데. 설마 초능력까지 생긴 거야…?

“서지안, 안에 없어?”

지안은 찰나로 어리둥절해진 정신을 서둘러 다잡았다. 어찌 됐건 한고비는 넘겼으니 제 눈엔 보이거나 말거나 그것은 나중 문제였다.

없는 척 시치미를 떼야 하나, 자다 깬 척 연기를 해야 하나, 생각이 꼬여 뭐가 최선인지도 모르겠다.

마른 입술을 축이며 문을 향해 주춤거리던 순간, 문손잡이가 조심스레 돌아갔다.

“어? 열려 있네?”

철컹,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벌어지는 문 틈새로 짙은 노을이 서서히 들이친다.

아. 젠장.

흩날리는 건호의 앞머리칼이 보일락 말락 하던 순간이었다.

방 한가운데 어정쩡히 서 있던 지안의 몸이 별안간 강한 힘에 붙당겨졌다.

“……!”

순식간에 승원의 품에 갇힌 지안은 널찍한 가슴에 콕 박힌 얼굴을 번쩍 쳐들었다.

“무슨…!”

그가 제 입술 위로 검지를 붙이며 속삭였다.

“쉿. 가만히 있어.”

발바닥에서부터 알 수 없는 열기가 느껴진 건 일순간이었다.

지안은 멀쩡히 눈뜬 채로 제 몸이 투명해지는 마법 같은 장면을 목격했다.

허. 미쳤어, 진짜.

간발의 차로 활짝 문을 당긴 건호가 방 안을 들여다봤다. 지안은 저를 품은 투명한 팔뚝 너머로 건호를 살폈다.

이게 대체 뭔 짓인지, 잘못도 없이 괜히 심장이 콩닥콩닥 뛴다.

“뭐야. 문 열어놓고 어딜 간 거야?”

그와 한데 묶인 저를 발견하지 못한 건호는 문을 붙들고 선 채 휴대폰을 들었다.

“네, 형. 스페어 키 있었나 봐요. 문 열려 있네요. 잠깐 나갔는지 집엔 없고. …아뇨, 외투도 있고 방 개판인 거 보니까 들어온 건 맞는 거 같아요. …예, 메모 하나 써두고 가죠, 뭐. 저도 외근 핑계 대고 온 거라 금방 가봐야 해요.”

이 자식이 괜한 걱정을 시켰느니 어쨌느니, 몇 마디 구시렁거리다 통화를 끝낸 건호는 방 안에 들어와 책상 위에 연습장 하나를 펼쳤다.

“아휴, 하여튼 서지안 이 꼴통. 사람 걱정시키는데 뭐 있다니까.”

무어라 끄적거린 메모 곁에 바에서 챙겨온 지안의 소지품을 놓아둔 건호는 공연히 빈방을 휘둘러보곤 집을 나섰다.

탕탕, 철 계단을 울리는 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행여 다시 돌아올세라 건호의 차 소리가 저 멀리 흔적을 끌고 갈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눈만 깜빡였다.

방안으로 완전한 고요가 찾아든 후에야, 지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풀썩 쪼그려 앉았다.

그녀의 전신을 휘돌고 있던 푸른 기운이 바람에 흩어지듯 사라졌다.

“하… 이게 진짜 무슨 일이야.”

내 정신이 내 정신이 아니다.

이들의 정체만 해도 충분히 버거운데, 이젠 하다 하다 투명인간까지 되다니.

반나절 만에 1년 치의 환장할 사건은 다 들이닥친 것 같다.

아니, 평범한 인생이라면 죽어서도 겪어보지 못할 일들이겠지.

나 이러다 정말 실성하는 거 아냐?

“아… 이건 아니야.”

절절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리던 지안은 승원을 올려다보며 애원하듯 말했다.

“배 안 가르고 구슬 빼는 방법 좀 찾아봐요. 나 이거 못 하겠어요, 진짜.”

순순히 그러리라 기대치도 않았지만, 그는 눈높이를 맞춰 앉으며 무신경하게 턱을 괬다.

“인간의 생은 한 번뿐이야. 살면서 이런 초능력을 경험해보기가 쉬운 게 아니라고. 영광스럽지 않아?”

영광은 지랄하고….

“다 들린다니까. 잊었나 본데, 내가 너보다 무려 971살이 많다고. 어디 예의 없이 그런 상스러운 욕을….”

“아, 아무튼 이런 능력 원한 적 없다구요, 난!”

“백 일 후면 아쉬워질 테니 실컷 만끽해.”

“아후. 무슨, 말이 안 통해.”

쾅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뭔가 답답한 울림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월호 님! 이제 이것 좀 풀어주시어요! 숨을 못 쉬겠어요!”

지안은 느닷없는 소란에 창밖을 건너다봤다. 어쩐 일인지, 병천과 수아가 괴로운 얼굴로 마임을 하듯 허공을 치며 소리치고 있었다.

“아이고, 나 죽네! 월호 님! 살려주십시오!”

병천이 쿵쿵 허공을 때릴 때마다 주먹 끝에서 미세하게 균열이 번쩍였다. 실눈을 뜨고 보면 어렴풋이 이글루 모양의 투명한 막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벌게진 얼굴로 고통스럽게 기침을 뱉는 그들의 모습에 지안은 놀라 벌떡 일어섰다.

“뭐예요, 왜들 저러는 거예요?”

덩달아 몸을 일으킨 승원은 뻐기듯 턱을 빗겨 들며 뿌듯하게 말했다.

“결계를 쳐서 그래. 네 벗이 저들을 볼 수 없었던 이유지. 아무나 안 보여주는 거니까 영광인 줄 알라고.”

“아, 자꾸 영광 타령하지 말고 빨리 풀어줘요! 힘들어하잖아요!”

괜히 자랑 한 번 했다가 혼쭐이 난 그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차곤 손가락을 퉁겼다.

그제야 결계에서 풀려난 병천과 수아는 평상에 철퍼덕 퍼지고 앉아 가쁘게 숨을 몰아 뱉었다.

덩달아 가슴을 쓸어내린 지안은 지끈대는 머리통을 붙들었다.

“아아. 정신없어 죽겠네, 진짜…!”

반나절 견디는 것도 이렇게나 힘든데 어떻게 저들의 틈에서 100일을 견디란 말인가.

게다가, 저 얼굴만 멀쩡한 자뻑 구미호랑 뭘 해야 한다고?

심란하게 홉떠진 눈이 어느 틈에 평상까지 날아간 승원의 뒤통수를 찌르듯 노려봤다.

지안에게 한 소리 들었다고 뿔이 난 어르신은 고통에 늘어진 부하들의 다리를 툭툭 치며 유치하게 화풀이를 하고 있다.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

“헤엑, 헤엑. 참으로 죽을 뻔하였습니다!”

“안 죽었으니 됐다.”

성공도 포기하며 8년을 꿋꿋이 지켜온 내 소중한 첫 경험을 구미호에게 바치라니.

끔찍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도무지 말도 안 되고, 감당할 수도 없는 일이다.

진정 이 망할 놈의 구슬을 뺄 방법은 없는 걸까.

어차피 저들도 귀신이라면 귀신일 터. 할머니한테 굿이라도 받으면 물리칠 수 있지 않을까?

아니야…. 괜히 걱정하실 테니 그냥 야반도주를 해버려?

“지안 님! 어서 와서 드시어요! 국물이 아주 끝내준답니다.”

억지로 밥상 앞에 끌려가 영혼 없이 닭고기를 씹으면서도 고민했다.

“수면에 좋은 초를 켜두고 갈 터이니 숙면하시어요, 지안 님.”

“오늘 하루 여러모로 지치셨을 텐데, 모쪼록 평안한 밤 보내십시오.”

깊은 밤 달빛 아래 누워 밤을 지새우면서도, 지안은 동물들의 소굴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가 터지도록 골몰했다.

그리고, 잠 한숨 자지 못하고 골몰한 결과는 무력하게도 ‘야반도주’ 뿐이었다.

“막걸리를 먹는 게 아니었어. 아, 짜증 나, 씨.”

청승맞게 눈물 콧물 훌쩍이며 할머니께 잠시 여행을 다녀오겠노라 편지도 써 놓았고, 짐은 작은 배낭에 필요한 것들만 단출히 챙겼다.

하루아침에 이상한 나라에 뚝 떨어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밤새 한숨만 짓다가 동트기 전 배낭을 둘러메고 목적지도 없이 집을 나섰다.

그리고 꼼꼼히 현관을 잠그고 뒤돌아 한 발짝 반.

“……!”

지안은 그 자리에 못 박혀 선 채 맞은편 건물의 옥탑방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봐야 했다.

“왜. 도망가시려고?”

창에 팔꿈치를 걸치고 곰방대를 물고 있던 백발의 구미호가 뽀얀 연기를 유유히 내뿜으며 사악하게 웃는다.

“안 될 텐데.”

“…….”

…어르신이 왜 거기서 나와요?

물어볼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지난 비 오던 날, 이 동네완 영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저 옥탑방으로 들어갈 때 스치듯 갸우뚱하고 말았던 기억이 빌어먹게도 생생했던 탓이다.

“뭐, 이왕 짐 쌌으니 시도는 한 번 해보든가.”

“…….”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시리게 파란 세상이 소름 끼치게 하얀 구미호의 얼굴을 조금씩 선명히 비추었다.

보이지 않는 족쇄가 철컹 철컹 발목을 옥죈다.

“아… 씨.”

고개를 떨구며 욕설을 삼킨 지안은 묵묵히 돌아서서 현관을 열었다.

쾅-!

세차게 닫히는 문짝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월호는 전에 없이 유쾌하게 웃으며 뽀얀 연기를 뿜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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