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24화 (24/106)
  • 24화

    지안은 창가에 앉아 흐리멍덩한 눈으로 먼 하늘을 바라봤다.

    노을이 드넓게 번진 붉은 하늘이 오늘따라 필터를 입힌 사진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지금, 자신이 처한 이 비현실적인 상황만큼.

    “쉽게 설명해 드리자면, 구미호도 계급이 있어요. 최상위 계급의 신神을 ‘호조사’라 하지요. 그 호조사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이를 ‘호인’이라 한답니다.”

    토끼의 등장에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고양이와 구미호는 소리도 없이 어디론가 훌쩍 사라졌다.

    배턴 터치하듯 제 앞에 다가와 앉은 토끼는 시종일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갖가지 설명과 당부를 읊으며 혼을 쏙 빼놓았다.

    “월호 님이 신의 저주를 받으신 후 지난 오백 년간 우리는 ‘호인의 후손’을 애타게 찾아왔어요. 이유는 이미 들어 아시겠지요?”

    호인의 후손만이 여우 구슬을 품어 구미호의 저주를 풀어줄 수 있다는 것.

    그래. 그 괴상한 소리를 분명 듣기는 했는데….

    “하… 이게 진짜 말이 되는 소리냐고….”

    어렸을 적, 모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들었던 설화 같은 이야기였다.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만으로도 당황스러운 마당에 저더러 ‘호인의 후손’이라니.

    대체 왜? 무슨 근거로?

    의문을 품는 지안에게 토끼는 말없이 전신 거울 앞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러고는 거울과 등을 마주하게 돌려세워 느닷없이 원피스 자락을 훌렁 들쳐 올리는 것이 아닌가.

    화들짝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토끼는 허리춤을 척 집으며 말했다.

    “여기, 이것이 바로 호인의 후손이라는 증거랍니다.”

    돌아본 거울 속에는 여태 흉측하다 여겨왔던 크고 검푸른 점이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제겐 그저 콤플렉스였던 등허리의 점이 호인의 후손만이 지닐 수 있다는 ‘신성한 문양’이라니.

    대체 이 흉한 점의 어디에서 신성함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어 빤히 들여다보고 있자, 토끼는 싱그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월호 님이 직접 확인해주셨지요.”

    저와 고통 없이 신체가 닿음으로써 증명이 되었다 했다. 호인의 후손이 아닌 인간 여자와 몸이 닿으면 그가 죽을 만큼의 통증을 느낀다나 어쩐다나….

    알면 알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허황하지 않은 소리가 없으니 어느 순간엔 그저 피싯피싯 실소가 비어져 나왔다.

    어쨌거나 저들의 주장에 의하면 제 몸에 구미호 신神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말인데….

    하. 세상에나.

    세계 어디를 뒤져봐도 이보다 충격적인 출생의 비밀은 없으리라.

    “자, 그럼 이제부터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할 테니 꼬옥 새겨들으셔야 해요.”

    그나마 안정을 되찾아가던 머리통에 해일이 불어닥친 것은 그때부터였다.

    초지일관 생글거리던 얼굴이 일순 비장해지니 괜히 심장이 철렁했다.

    뭔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하려던 찰나, 엄청난 활자들이 숨 쉴 틈 없이 줄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우 구슬은 태아처럼 아주 섬세하고 예민한 신물이랍니다. 지안 님의 몸은 이제 태아를 품은 모체와 다를 바 없다 생각하시면 되어요. 모체의 건강은 태아의 건강과 직결된다는 거 아시죠? 이른 새벽 우유 배달은 위험하니 그만 두시는 것이 좋겠어요. 업체 측에는 제가 이미 말씀드렸으니 걱정하실 것은 없답니다. 그리고 앞으로 백일 간 하루 세끼는 거르지 말고 반드시 잘 챙겨 드셔야 해요. 인스턴트는 가능한 피해주시구요. 음주도 물론 좋지 않지만 가끔 막걸리 한두 잔 정도는 무리 없으실 거예요. 아! 월호 님은 그간 막걸리만 드셨기 때문에 아쉽게도 그 외의 술에 대한 반응은 파악하지 못했답니다. 그러니 다른 술을 드신다면 여우 구슬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저도 알 수가 없네요. 뭐, 통증은 있을 수 있으나 사망에 이르진 않을 것이니 너무 염려치는 마시어요.”

    임신은 고사하고 남자와 잠자리 한 번 가져보지 못한 사람에게 태아를 품었다 생각하라니.

    주머니 사정과는 별개로 인스턴트를 끊을 수 없는 이유는 ‘아는 맛’이기 때문인 것을, 장장 백일 간 그 ‘아는 맛’의 행복도 포기해야 한다니.

    삶의 낙은 자고로 얼린 컵에 가득 따른 소맥 한 잔이거늘, 아프기는 하겠지만 죽지는 않을 테니 걱정은 말라니…!

    “아니, 남의 몸에 허락도 없이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요!”

    잠자코 듣자 하니 문득 설움이 북받쳐 버럭 성을 내질렀다. 여태 황당해서 나오지도 않던 눈물까지 찔끔 나더랬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항이 남아 있답니다. 화는 잠시만 미루어주시어요.”

    매정한 토끼는 연방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남은 어처구니를 몽땅 앗아갔다.

    “구슬은 이제 지안 님의 몸에 흡수되었지만 혼의 일부는 여전히 월호 님의 심장에 남아 있답니다. 두 분은 구슬의 기로써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고로 월호 님이 아닌 다른 이성과의 성교는 반드시 피해주셔야 해요. 타인의 양기를 빨아들인다면 구슬이 거부 반응을 보일 테니까요. 이 경우에는 안타깝게도… 목숨이 무사하리란 장담은 드릴 수가 없어요.”

    “뭐 이런 씨….”

    의도치 않게 된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연애조차 내 마음대로 해선 안 된다는 소리가 아닌가.

    물론 팔자 좋게 연애나 할 처지는 아니라지만, 그게 무엇이건 말리고 막아서면 더욱 욕구가 분출되는 것이 인간의 습성인 것을.

    괜한 반항심에 울부짖어 봤지만, 토끼는 못 들은 척 검지를 척 올리며 해맑게 제 할 말만 늘어놨다.

    “구슬의 정기를 모으자면 월호 님과의 성교는 필수랍니다. 이제 매달 그믐달이 뜨면 성욕은 배가 될 것이어요. 그때가 바로! 정기를 끌어모으기엔 적기인 셈이지요.”

    “하. 미친….”

    진정 개소리의 완결판이 아닐 수 없었다.

    “아오, 머리 아파.”

    세차게 고개를 턴 지안은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푹 파묻었다.

    과부하에 걸린 머리가 뜨끈했다. 충격과 혼란과 절망이 난잡하게 뒤섞였다. 하루아침에 이상한 나라에 뚝 떨어진 기분이었다.

    “하아… 이게 대체….”

    부정해 봐도 소용없는 현실을 미약한 한숨으로 밀어내던 때였다.

    별안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꾹 감겨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고요했던 심장에 찌르르 낯선 전류가 흐른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여우 구슬인지 뭔지, 그것 하나 심장에 박혔다고 보지 않고도 느껴지다니.

    그와 기로써 연결되어 있다던 말이 영 헛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냥 받아들여. 그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니까?”

    지안은 등 뒤에서 불쑥 날아온 음성에 다시 눈을 꾹 감았다. 심장이 기척을 먼저 느끼니 이젠 갑작스러운 등장이 놀랍지도 않다.

    다만, 순간이동이란 것을 여러 번 실제로 접하니 그저 기가 막힐 뿐.

    지안은 여전히 무릎에 이마를 푹 박은 채 까칠하게 대꾸했다.

    “역지사지 몰라요? 내 입장이 돼 봐요.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구요.”

    그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주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멘탈을 가루로 만들어놓고 웃음이 잘도 나오네. 하여튼 저 얄미운 인… 아, 인간도 아니지, 참.

    더럽게 적응 안 되네, 진짜.

    “난 못해요. 그러니까 구슬인지 뭔지 다시 가져가요, 빨리.”

    사뭇 억울한 목소리로 내뱉자 그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안타깝지만 이미 각인이 시작돼서 백 일이 지나기 전엔 못 빼. 물론 억지로 뺄 수야 있겠지만 네 목숨이 끊어질 텐데 그래도 상관없다면 배를 갈라서라도 빼주고.”

    “…….”

    잔잔한 강물이 흐르듯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소리가 배 갈라 죽이겠다는 말이라니.

    농담이라 치부하기엔 빌어먹게도 직감이 위험을 감지했다.

    사람도 사람을 죽이는 마당에 저들에게 인간의 목숨이 얼마나 하찮겠느냔 말이다.

    젠장.

    끙끙 앓는 소리를 삼키며 머리칼을 쥐어뜯던 지안은 무심코 욕실을 돌아봤다.

    마지막 남은 방법은 역시 그것뿐인가.

    울음을 콧물처럼 삼키며 은근슬쩍 욕실로 향하던 때였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변이나 구토로 나올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괜히 헛수고는 하지 마.”

    “…….”

    싱겁게 계획을 들켜버린 지안은 앵돌아진 얼굴로 그를 홱 쏘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좌식 화장대에 걸터앉은 커다란 남자가 밉살맞게 어깨를 으쓱인다.

    어우, 울화통 터져…!

    “진짜 뻔뻔한 거 알아요?”

    승원은 비스듬히 입매를 휘며 말간 얼굴로 말했다.

    “그게 내 매력이라던데, 명월이가.”

    “명월이는 또 누구야….”

    “있어. 저주받기 직전에 간 빼먹었던 기생.”

    “…….”

    미친. 기생이래. 현실 타격 어쩔 거야, 이거.

    “그러고 보니까….”

    헛웃음 치며 찰나로 고개를 돌린 사이, 코앞까지 불쑥 날아온 그가 느닷없이 목전에 얼굴을 들이댔다.

    흠칫 등을 물린 지안은 가늘게 접히는 검푸른 눈을 떨떠름하게 마주 봤다.

    눈, 코, 그리고 입술. 별안간 간지럽게 얼굴을 훑어보던 그가 비뚜름히 고개를 기울였다.

    “좀 닮았네, 명월이랑.”

    “…….”

    붉은 노을이 스민 검푸른 눈동자가 오묘하게 반짝였다. 가까이 두고 보니 속이 비칠 것 같은 투명한 피부는 모공조차 없다.

    그저 특출나게 잘생긴 건 줄 알았더니….

    정말 인간계 미모가 아니었던 거구나.

    새삼스러운 자각에 느닷없이 목이 탔다. 계속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눈알이 빨려 들어갈 것 같아 시선을 돌려버렸다.

    망할 여우 구슬 같으니.

    제 주인 바짝 다가오니 반갑다고 발광이라도 하는 건지, 뭔지.

    지안은 급작스레 열이 오른 기색을 감추려 부러 퉁명하게 말했다.

    “그 기생 언니 되게 예뻤나 보네.”

    그의 입술이 조금 더 길게 늘어졌다.

    “농담도 할 줄 알아?”

    빗뜬 눈으로 가늘게 흘기던 지안은 성가신 듯 팽 돌아앉았다.

    “아, 좀 내버려 둬요. 혼자 있고 싶으니까.”

    “혼자 내버려 둔 지 2시간 47분 지났어. 이만하면 충분히 혼자 놀았잖아.”

    “내가 지금 놀고 있는 거로 보여요?”

    “어쨌거나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냐. 그만 일어나. 너 하나 먹이겠다고 저렇게들 정성인데.”

    승원은 노을이 쏟아지는 창밖을 턱짓했다. 힐끗 뒤를 돌아다본 지안은 한숨을 터트렸다.

    대체 언제까지 죽치고 있을 작정인지.

    또 어디서 닭 모가지를 비틀어 와서는, 수아와 병천이 평상 앞에 쪼그려 앉아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날 먹이기는 무슨…. 말은 바로 해야지.

    “섬세하고 예민한 태아 같은 구슬을 위한 진수성찬이겠죠.”

    “뭐, 그거나 그거나.”

    말이라도 부정하는 법이 없으니 얄밉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있나.

    “고집부리지 말고 일어나, 어서.”

    “됐어요. 배 안 고파요.”

    “안 고프기는. 꼬르륵거리고 난리 났는데.”

    “아니거든요?”

    어디 하란 대로 순순히 해줄 줄 알고?

    사실 종일 미음 몇 숟갈 채운 배가 등가죽에 붙을 판이었지만 고집스럽게 버텼다. 할 수 있는 반항이 고작 이것뿐이라 통탄할 따름이다.

    먹니 마니 한참 쓸데없는 소모전을 펼치던, 그때였다.

    “할머니, 계세요?”

    반대편 창 너머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에 지안의 귀가 쫑긋 섰다.

    “형. 할머니도 안 계시나 봐요. …아! 부산 가셨나 보다. 이맘때쯤 절에 가시잖아요.”

    가만히 듣던 지안은 벌떡 일어나 창밖을 내려다 봤다.

    휴대폰을 든 채 신월당 문 앞에 서 있는 건호의 정수리가 보였다.

    맙소사. 정신이 없어 깜빡 잊고 있었다.

    동한의 가게에 소지품을 다 놓고 나온 후로 본의 아니게 잠적했으니,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되어 찾아온 걸 테다.

    “혹시 모르니까 올라가 볼게요. 전에 화분 밑에 스페어 키 두더라고요. 일단 걱정 말고 오픈 준비해요, 형. 찾아보고 다시 연락할게요.”

    통화를 끝낸 건호가 대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허! 어떡해.”

    다급해진 지안의 시선이 평상에서 열심히 저녁상을 차리고 있는 병천과 수아에게로 향했다.

    어떡하지? 저 광경을 어떻게 설명하냐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 좁은 방안을 종종거리는 사이, 철제 계단을 밟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어느 틈에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던 승원은 마냥 태평할 뿐이다.

    지안은 다급하게 승원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