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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는 밤-14화 (14/106)
  • 14화

    “오전 3시부터 5시까지 우유배달, 7시부터 16시까지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그리고 21시부터는 재즈바에서 공연을 한다 합니다.”

    여느 때처럼 신문을 들여다보며 수아의 보고를 받던 승원은 한쪽 눈썹을 까딱 치켜들었다.

    “우유 배달에 공연까지?”

    “네. 재즈바는 고교 선배가 운영하는 곳이라 하는데, 여긴 평일에만 나가는 것 같아요.”

    “참 내. 별걸 다 하네.”

    새로운 작전에 돌입하기에 앞서 지안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라 지시를 내린 참이었다. 돈 나올 구멍도 다 막힌 처지에 뭘 믿고 그리 뻣뻣하게 구는가 했더니 그새 딴 구멍을 세 개씩이나 뚫어놨을 줄이야.

    앞길을 막아버려도 알아서 제 살길을 찾아다니니 이것 참 곤란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놈의 구멍들을 모조리 폭파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령 그런다 한들 또 금세 할 일을 찾고도 남을 여자가 아닌가.

    거참. 생활력도 더럽게 질기기도 하다.

    “그래. 수고했다. 계속 지켜봐.”

    “옛!”

    앙증맞은 토끼가 총총 집무실을 나선 후.

    촤락, 촤락 신문을 넘기던 승원은 별안간 얼굴을 구기며 책상 위로 신문을 던졌다.

    서지안만 생각하기에도 심중이 어지럽건만.

    저놈의 고양이 때문에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아주 신경이 쓰여 죽겠다.

    “넌 말도 않을 거면서 내 방에 죽치고 앉아서 뭐 하는 거야?”

    아침부터 이사실을 찾은 병천은 소파에 앉아 말없이 노트북만 두드려대고 있었다. 그의 펜트하우스에서 골이 난 얼굴로 키보드를 때려 부수던 때와 한 치의 오차 없이 같은 모습이었다.

    병천은 은색 안경테를 추어올리며 여상하게 답했다.

    “W의 대표로서 중요한 업무를 보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멀쩡한 대표실 놔두고 왜 여기서 난리냐고. 삐졌다고 시위하는 거야?”

    “예. 이리 눈에라도 박혀야 알아주시지 않습니까.”

    “하. 어쩌다 저런 깜찍한 놈이 들러붙어서.”

    이번엔 제대로 뿔이 난 모양인지 요 괘씸한 것이 그 후로 제대로 말도 섞지 않더랬다. 해서 언젠간 풀리겠거니 내버려뒀더니 결국 기어이 먼저 말을 걸게 만든 것이 아닌가.

    어처구니는 없는데 저리 주둥이 내밀고 눈앞에서 깔짝거리니 신경은 쓰이고.

    아아, 구미호 팔자가 어쩌다 개팔자가 됐나. 인간이고 고양이고 왜들 이리 못살게 구는지.

    “그저 저 홀로 서운해서 그러는 것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승원은 지끈대는 이마를 꾹 누르며 답답한 어투로 물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서운한데? 어쨌거나 네가 하란 대로 다 해줬잖아.”

    “무기만 쥐고 가신다고 다가 아니지요. 전술을 무시하고 무턱대고 전진만 하시니 속에 천불이 나지 않겠습니까.”

    “봐서 알잖아. 그 계집이 뜻대로 안 넘어오는 걸 어쩌란 거야?”

    “그리 떠밀려 나온 티를 팍팍 내시니 넘어오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요.”

    “아, 몰라. 지난 일로 피곤하게 꼬투리 잡지 말고 입 다물어.”

    짜증스레 혀를 찬 승원은 성질이 바득 오른 얼굴로 신문을 쫙 펼쳐 들었다.

    잠시 침묵하던 병천이 별안간 무거운 목소리로 운을 뗐다.

    “묘생 3백 년입니다. 제게 남은 인생은 아직 백 년이나 되고요.”

    승원과 달리 영생을 살지 못하는 고양이는 3백 년이 되는 해에 깨지 못할 잠에 든다.

    묘생의 3분의 2를 지나온 병천의 느닷없는 고뇌에 승원은 미간을 좁혔다.

    “그래서 뭐.”

    병천은 괜히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전에 없이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뫼시는 주인을 먼저 떠나보내는 불충은 저지르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

    “물론 싫다 하시면서도 실천은 해주시기에 은근히 재미를 느낀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만, 그 전에 우선되었던 깊은 진심은 그러했습니다.”

    제게 남은 시간 백 년.

    행여나 저주를 풀지 못하고 그가 지하 세계에 갇히게 된다면 주인을 모실 수 있는 시간은 이제 고작 130여 일.

    “이전에 월호 님을 모셨던 윗대 어르신들의 묏자리를 직접 봐주셨다지요.”

    병천 이전에 그를 거쳐 간 고양이는 총 다섯이었다.

    야생이 험난했던 옛 시절에는 늑대에게 잡아먹혀 주어진 생을 채 다 살지 못하고 간 녀석들도 있었고, 바닷물에 발을 헛디뎌 용왕의 품으로 보낸 녀석도 있었다.

    “월호 님이 저주를 털어버리시고 더 장수하시어 이놈 묏자리도 봐주시기를 진정으로 바라였단 말입니다. 괴수로 변모하여 이놈도 못 알아보시고 떠나실 것을 생각하면 흉통이 치솟습니다, 제가.”

    또 그 모습을 상상한 모양인지 병천의 눈가가 언뜻 붉어졌다.

    “한데 월호 님은 자꾸만 일을 그르치시고….”

    “…….”

    “여하튼 제 충심을 몰라주시는 것이 참으로 섭섭하고 서운합니다.”

    입 다물고 가만히 귀만 열어두었던 승원은 괜스레 멋쩍어진 시선을 신문에만 박아두었다.

    망할. 뜬금없이 웬 애절한 고백인지.

    진중한 소리라면 세상 간지러워하는 걸 알면서 일부러 저러는 게지. 요망한 고양이 같으니.

    괜히 혀끝을 퉁겨낸 그는 신문을 고쳐 들며 선심 쓰듯 말했다.

    “알았어. 하나만 말해 봐. 군소리 않고 전술대로 해줄 테니까.”

    “되었습니다. 아무런 조언도 드리지 않을 거라 하였습니다. 수컷이 두말하면 안 되지요.”

    “셋의 기회를 준다.”

    “참말 되었습니다.”

    “하나.”

    “되었다 하지 않습니까.”

    “둘.”

    “어허잇 참.”

    “세….”

    “댁으로 모시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 듯하니 월호 님께서 지안 님의 곁으로 가시지요. 그리고 범화 님의 도움을 얻으십시오. 범화 님의 묘약이라면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

    놓칠세라 속사포처럼 흘러간 목소리에 승원의 입꼬리가 피싯 볼을 밀어쳤다.

    “고얀 놈이, 하나만 말하랬더니 은근슬쩍 둘을 끼워 넣네.”

    “어느 것 하나 양보할 수 없는 비책인지라….”

    “하. 참 내.”

    하여튼 귀여운 놈.

    아무래도 저놈의 꾀에 넘어간 것 같다만 어찌하랴. 아홉 번을 얄밉다가 한 번을 저리 귀여우니 미워할 수도 없고.

    입꼬리를 씰룩대며 실소를 머금던 승원은 기꺼운 얼굴로 명했다.

    “그래. 어디 한 번 신명나게 준비해 봐.”

    그를 돌아보는 병천의 얼굴이 보름달처럼 휘영청 밝게 떠올랐다.

    **

    빵과 우유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 지안은 다시 바쁘게 집을 나섰다. 우유 배달을 마치고 돌아온 지 1시간 만이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각종 알바로 종종대는 지안에게 건호는 아침부터 또 잔소리를 해댔다.

    - 우유 배달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냐?

    연기만 보고 달려온 삶이었다. 부끄럽게도 그 외에는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써주기만 한다면 막노동 현장에라도 나가야 할 판에 우유 배달 자리라도 났으니 다행인 상황이었지만, 건호에게까지 구질구질하게 제 주머니 사정을 하소연하고 싶진 않다.

    “몇 번을 말해. 체력이 남아돌아서 하는 거라니까.”

    지안은 낮은 언덕길을 터벅터벅 내려가며 버릇처럼 신월당 문을 돌아봤다. 아직 주무실 시간이라 창 안은 어둑했다.

    - 남아도는 체력을 왜 굳이 우유 배달로 푸느냐고, 위험하게. 엊그제 보내준 그 영화, 프로필은 넣어봤어?

    배달 아르바이트까지 시작했다는 소리에 건호는 부지런히 오디션 정보들을 물어다 날랐다. 사실 혼자 된 밤이면 저 역시 인터넷을 뒤져 속속 수집했던 것들이었다.

    당연히 소용은 없을.

    휴대폰 너머로 졸졸 물소리가 건너왔다. 비척비척 일어나 세면대 앞에 서 있을 녀석의 모습이 훤히 그려졌다.

    “넣었어, 넣었어. 알아서 다 하고 있으니까 잔소리 그만하고 출근 준비나 해.”

    - 알았어. 어쨌든 딴 생각 말고 부지런히 오디션 챙겨. 오빠가 말 안 해도 알아서 척척 쫌. 어?

    “오빠는 얼어 죽을…. 편의점 도착했어, 끊어.”

    금세 큰 길가까지 내려온 지안은 편의점 문을 밀며 휴대폰을 갈무리했다.

    보름간의 아르바이트, 닷새째였다.

    “어? 일찍 왔네?”

    과자 상자를 뜯어 진열대를 채우던 사장이 반갑게 지안을 맞았다.

    “네, 집에 있으니 자꾸 퍼져서요. 어서 가보세요, 이건 제가 마저 할게요.”

    “에고. 아무래도 미안하네. 우리 지안 씨가 이런 데서 바코드나 찍을 사람이 아닌데 말이지.”

    사장은 안타까운 얼굴로 푸른 조끼를 벗어 내밀었다. 조끼를 받아 걸친 지안은 겸연쩍게 미소 지었다. 암담한 순간에 마침맞게 저를 찾아준 사장은 제겐 외려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저 요즘 정말 일 없어요. 일거리 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한 걸요. 잘 다녀오세요. 가게 걱정 마시고.”

    “그래. 고마워. 덕분에 마음 놓고 어머니 모셔. 그럼 수고해줘. 일 있으면 전화하고.”

    “네.”

    마흔이 넘도록 장가도 들지 않고 편찮으신 홀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셔온 효자였다. 최근 들어 병세가 악화한 어머니의 곁을 지키느라 사장의 눈 밑이 퀭했다.

    20대 초,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종종 뵈었던 그의 모친은 지안에게도 푸근하고 따스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가족을 떠나보낼 준비를 한다는 것이 아직 어떤 마음인지 언뜻 와 닿지 않지만, 지안은 초췌한 얼굴로 애써 웃는 사장을 볼 때마다 마음이 심란해졌다.

    오늘도 귀가하면 할머니 담배 좀 끊으시라 잔소리해야지, 어제와 같은 다짐을 또 하게 된다.

    무거운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던 지안은 얼른 한숨을 털고 과자 상자를 들었다. 남은 과자를 마저 올려두고 비어있는 음료도 능숙하게 척척 채워 넣었다.

    지난 아르바이트 경험 덕분에 그녀에겐 어렵지 않은 일들이었다.

    딸랑.

    “어서 오세요.”

    아침 7시.

    미처 말리지 못한 머리칼을 털며 들어서는 여자, 삐뚤어진 넥타이를 바로 잡으며 삼각 김밥을 쥐는 남자, 야근을 마치고 피곤한 모습으로 들러 담배 한 갑을 사가는 아저씨.

    이 시간이면 늘 그렇듯, 여럿의 손님들이 미완의 모습으로 문턱을 넘어선다.

    지안은 맑게 웃으며 카운터에 단정히 섰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사람들의 표정은 그다지 맑지 않았지만, 지안은 어쩐 일인지 기분이 좋았다.

    아침이면 버릇처럼 확인하는 포털사이트의 오늘의 운세가 전에 없이 좋았던 탓이다.

    「 더없이 길한 날이다. 다시없을 인연이 찾아온다. 운세지수 96%. 」

    휴대폰을 열어 부적을 보듯 다시 한 번 운세를 확인하던 지안은 조금 들뜬 마음으로 바코드를 찍었다.

    “3천 8백 원입니다.”

    신빙성 없는 활자 나부랭이라도 어떠하랴.

    이만한 설렘이라도 품어야 그나마 고단한 하루를 버틸 수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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