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뜨는 밤-13화 (13/106)
  • 13화

    진심으로 감탄하여 헛숨이 터진 승원은 순간 할 말을 잃고 실소했다.

    “하. 기가 차네.”

    무당이 주워다 신기를 심었나. 어찌 이리 용하게 집어낼까.

    승원은 사뭇 흥미로워진 눈으로 지안을 마주 봤다. 지탱해줄 힘이라곤 자존심뿐인 여자는 그것이 억만금이라도 되는 양 빳빳이 고개를 세우고 천 년의 세월을 버텨온 초월적 존재를 감히 대차게 노려보고 있다.

    도대체 이 여자는 얼마나 지독한 삶을 살아왔기에 이 깊고 심오한 눈동자를 똑바로 파고들고도 홀리기는커녕 되레 속내를 끄집어내는가.

    볼수록 요망하고 괘씸한데 불쑥 흥미가 돋으니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피싯피싯 헛웃음만 던지던 그는 겹친 팔을 테이블 위로 걸쳐 올렸다. 좁혀간 거리만큼 가까워진 지안의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빤히 마주했다.

    “그래, 그럼.”

    선심 쓰듯 던진 추임새에 기꺼이 웃음이 감겼다.

    “사실대로 말하면 믿기는 할 겁니까?”

    드디어 의문을 풀어줄 생각인가. 내내 심드렁했던 다갈색 초점이 선명하게 눈앞의 남자를 담았다.

    “사실이라면 믿어야죠.”

    “하….”

    승원은 다시 등받이에 등을 기대앉아 거만하게 팔을 꼬았다.

    이 어리석은 인간이 진실을 알려준들 감당이나 할 수 있을까.

    얇은 시선이 정신력을 가늠해보듯 지그시 그녀의 눈 속을 훑었다.

    그래, 뭐. 감당을 하든 못하든 그것은 이 계집의 몫인 것을.

    말끝마다 받아치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무슨 핑계를 대든 씨알도 안 먹힐 듯싶고. 이미 안구조차 간파 당했으니 어쩔 수가 있나, 내 속이나 개운하게 다 꺼내놓을 수밖에.

    내가 진짜, 간을 빼먹어도 떠나는 저승길 충격이나 덜하라고 너른 마음으로 정체도 밝혀주지 않았던 구미호인데.

    이 단조로운 월요일 오전에 해장국 집에 앉아서 무려 살아있는 인간에게 이 설화 같은 이야기를 친히 들려줄 날이 올 줄이야.

    “말하자면 길고.”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혀 가볍게 던진 웃음이 나붓이 흩날렸다. 긴 검지로 뜻 없이 관자놀이를 긁어내린 그는 삐딱하게 고개를 세웠다.

    내리깔린 눈동자가 오롯이 ‘월호’의 눈빛으로 한낱 나약한 인간을 깔보듯 바라봤다.

    “핵심만 얘기해줄 테니 잘 들어.”

    존대조차 집어치운 오만한 입술이 차분히 호흡을 골랐다. 본 중 처음으로 초롱초롱하게 제게 닿은 여자의 눈이 기껍게 그를 부추겼다.

    999년의 세월을 단 몇 마디로 함축한 진실이 보따리 풀리듯 왈칵 풀어졌다.

    “내가 실은 인간이 아니라 999년 묵은 구미호야. 400년 동안 인간들 홀리고 간 뽑아 먹고 살다가 재수 없게 걸려서 신의 저주를 받았는데, 천 년을 채우기 전까지 호인의 후손에게 정기 채운 구슬을 받아야 해. 그걸 채우려면 인간이 100일간 구슬을 품어줘야 하고. 품은 동안 정기를 쌓으려면 성교는 필수야. 근데 하필이면 당신이 그 호인의 후손이라잖아. 하나밖에 안 남아서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먹이, 그거 맞아. 그러니까 그만 튕기고 협조 좀 해.”

    “…….”

    “…….”

    “…….”

    맴-맴-매앰….

    손님이 드는 틈에 문 사이로 시끄럽게 매미가 울었다.

    “어서오세요옹.”

    홀 아주머니가 특유의 몽글몽글한 목소리로 살갑게 손님을 맞았다.

    “우거지 두 개 주세요.”

    옆자리에 착석한 젊은 남녀의 주문이 이어졌고 테이블 위로 능숙하게 착착 반찬들이 세팅됐다. 언제부터 켜져 있었던지 교통 정보를 알리는 벽걸이 TV 소리도 이제야 또렷이 들려온다.

    이 모든 소란이 공간을 스쳐 가는 동안 눈이 시리도록 잘생긴 남자의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던 지안은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백지의 얼굴로 계산서를 쥐고 일어섰다.

    “이모, 여기 계산이요!”

    **

    끼익, 끽.

    지안은 힘주어 연 샷시 문틈에 고개를 빠끔 밀어 넣었다. 문 앞 마루에 놓인 목욕 바구니가 곧장 시선을 당겼다. 수월하게 챙겨가도록 코앞에 둔 모란의 센스에 핏 웃음이 났다.

    “할머니, 나 바구니 가져가.”

    문 곁에 계셨던 모양인지 드르륵 미닫이문이 바로 열렸다. 앉은 채로 치떠진 회색 눈이 지안을 향했다.

    “이바구는 잘했나.”

    지안의 가슴팍이 한숨을 담아 설핏 솟구치다 떨어졌다.

    “잘할 것도 없어. 정신이 좀 아픈 사람이야. 다음에 혹시 또 오거든 그냥 모른 척해요.”

    쿡, 주름진 잇새로 바람 같은 웃음이 날렸다.

    “와. 미친 소리 하드나. 멀쩡히 잘 생깄두만.”

    지안은 한숨처럼 실소를 뱉으며 목욕 바구니를 쥐었다.

    “그러게. 그 얼굴 아까워서 어쩌나 몰라.”

    바구니를 든 자리에 해장국 두 그릇을 계산하고 남은 거스름돈이 놓였다.

    “잘 먹었어요. 나 편의점 내려가. 사장님이 보름만 봐 달래. 끝나면 동한 선배 바에 바로 갈 건데, 반찬 좀 해놓고 가요?”

    “됐다, 마. 대강 물 말아묵으면 된다. 일 봐라.”

    늘 같은 대답이 건너올 것이 뻔한데 또 괜한 질문을 했다.

    “애호박만 볶아놓고 갈게.”

    지안은 옅게 웃으며 샷시를 닫고 옥탑으로 향했다.

    고쟁이 속에서 주머니를 끄집어 올린 모란은 가지런히 놓인 2천 원을 집어 꼬깃꼬깃 쑤셔 넣었다.

    “천 년이 다 되도록 헛살았는가베. 가시나 하나 꼬시지도 몬하구로.”

    모란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한참 머물렀다.

    **

    밤하늘이 유난히 맑았다.

    별빛은 보석처럼 반짝이고 둥근 달빛은 불 꺼진 거실을 환히 밝혔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해금연주곡이 유난히 어울리는 밤이었다.

    창가에 놓인 리클라이너 소파에 뻗어 누운 승원은 고요히 눈 감은 채 쏟아지는 달의 기운을 깊이 들이마셨다.

    혼자만의 고요. 이 얼마나 나른하고 여유로운가.

    따각, 도각, 따각, 딱딱딱.

    이 거슬리는 키보드 소리가 고요를 방해하기 전까진 참으로 아름다운 밤이었는데 말이다.

    “저는 이제 아무런 조언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 바라지 마십시오.”

    소파 테이블에 앉아 10분 동안 노트북만 두드리던 병천이 결국 입을 뗐다.

    잔소리가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던 모양인지, 굳이 이 야밤에 승원의 집으로 올라와 회사 업무를 보고 있던 그였다.

    팔짱을 끼고 누워 일언반구도 없던 승원은 동요 없이 눈 감은 채 말했다.

    “해달라고 한 적 없다.”

    어후우우…!

    턱 끝까지 치솟았다가 겨우 단전까지 밀어 넣는 병천의 울화가 보지 않고도 기로써 분명히 느껴졌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진득이 눈을 감았다 뜬 병천은 노트북을 소리 내어 닫고 결국 벌떡 일어섰다.

    쿵쿵. 풍채 좋은 고양이의 걸음이 대리석 바닥을 흠씬 울렸다.

    “아니 대체!”

    승원의 발끝까지 쿵쾅대며 다가온 병천이 답답한 얼굴로 불만을 토로했다.

    “저주를 푸실 생각이 있기는 하신 겁니까? 그리 여유 없다 닦달하실 때는 언제고, 어찌 도리어 일을 자꾸 그르치시느냔 말입니다!”

    그가 갑자기 계획에도 없던 식사를 하러 떠난 후, 슬렁슬렁 차로 뒤를 밟아간 병천은 해장국집 앞에서 둘의 상황을 지켜봤었다. 꽃다발은 실패했으나 어찌 되었든 겸상할 기회는 주어졌으니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던 참이었다.

    천리청의 능력으로 또렷이 들려오는 대화는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당장에 뛰어들어가 ‘이 녀석이 내 아들이요, 머리가 좀 아픈 녀석이니 딱히 여겨 좀 만나주시오.’ 소리라도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까지 했더랬다.

    “무턱대고 사실대로 말씀하시다니요. 그것을 어느 인간이 믿고 넘긴단 말입니까? 미친 자라 여길 것입니다. 앞으로 상대조차 않을 것이 분명하고요!”

    달의 기운을 받아 유난히 깊어진 검푸른 눈동자가 덤덤히 드러났다. 소파 위에 뻗어있던 두 다리가 고고하게 바닥에 내려섰다. 머리 하나는 더 위로 붙은 주인의 얼굴을 따라 병천의 갑갑한 눈동자가 힐끗 들렸다.

    “믿게 하면 될 일이다.”

    저를 스치며 태연하게 대꾸하는 소리에 병천은 한숨을 폭 내쉬며 그를 졸졸 뒤따랐다.

    “어찌 말입니까. 지안 님의 앞에서 염력이라도 쓰시렵니까? 설마 백발을 늘이고 본모습을 보이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못할 것도 없지.”

    “허어, 내 이런 참.”

    곧장 주방까지 앞서간 승원은 다관에 우려놓은 연잎차를 도자기잔에 졸졸 따랐다. 그가 선 쿠킹테이블의 맞은편에 통통한 뱃가죽을 들이민 병천이 테이블에 양손을 척 내리며 말했다.

    “백 년 전의 일을 잊으셨습니까.”

    그믐이었다. 터질 듯 꽉 차오른 욕정을 풀고자 흉포한 왜놈의 배를 가른 밤이었다. 그날따라 왜 그리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던지, 하나의 간으로도 부족해 무려 셋의 간을 뽑아 먹은 후에야 겨우 숨을 돌렸었다.

    그중 한 놈의 객식구가 뒤뜰에 몸을 숨겼다는 사실도 뒤늦게야 알았다. 무려 셋이었다. 그조차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 이성을 잃었던 날이었다.

    기겁해 소문을 퍼트리던 그자들은 되레 미친놈 소리를 듣다 진정으로 미친 자가 되었다.

    “그들이 모두 어찌 되었습니까. 실성하여 석 달도 안 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 어지러운 시대를 사는 인간의 정신은 그보다 더욱 나약함을 모르십니까. 지안 님도 실성하고 말 것입니다. 그리되면 월호 님께도 당연히 좋을 것이 없고요.”

    나약하기는 개뿔이.

    찻잔을 머금은 붉은 입술이 실소하며 길게 늘어졌다. 은은한 핀 조명을 내려받은 입술이 이 와중에 곱기도 하다.

    “어찌 웃으십니까?”

    저는 세상 심각해 죽을 맛인데 어쩜 이리 천하태평에 웃음까지 보이시는지. 병천은 기가 찬 얼굴로 미간을 빼쭉 모았다.

    달각, 받침대에 잔을 내려놓은 승원은 여전히 실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그 계집은 제 앞에서 간을 뽑아 먹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다.”

    병천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힘 빠진 모가지가 전의를 상실하고 툭 꺾였다. 아무리 기가 세다지만 눈앞에서 맨손으로 인간의 배를 가르는 광경을 보고 멀쩡할 리가 있겠는가.

    그냥 하는 소리임을 알면서도 이 상황에 속 편히 농이나 하고 계시니, 대체 어찌하려 이러시나 속에 천불이 난다.

    “아이고오… 저는 모르겠습니다. 이대로 저주를 풀지 못하고 괴수로 변모를 하셔도 저는 진정 모르는 일입니다.”

    병천은 도리도리 고개를 털며 돌아섰다. 힘없는 걸음이 조명이 닿지 않는 어둑한 거실을 지나 현관 밖까지 홀연히 멀어졌다.

    승원은 내려뒀던 잔을 들어 다시 입가에 가져다 댔다.

    조금 남은 차를 호로록 삼킨 입술이 시간이 갈수록 유연히 휘어지고 있었다.

    핏, 바람처럼 스쳐 간 웃음 뒤로 낮은 음성이 따라붙었다.

    “재밌는 계집이네.”

    어차피 진실을 얘기한들 당장 믿을 거라 기대치도 않았다. 하나 기대한 것이 있다면 또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내심 그것이 그리도 궁금했더랬다.

    냉큼 일어나 계산을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게를 나서기에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저 가는 길 앞에 휙휙 염력을 쓰며 눈으로 증명이라도 해 보일까, 고심하던 순간 지안이 뒤를 홱 돌아봤다.

    “혹시 또 오실 거예요?”

    “아마도?”

    어깨를 으쓱이며 답하자 한숨을 폭 내쉰 지안은 특유의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세요, 그럼.”

    그러든가 말든가 초연한 얼굴로 미친놈 가엽게 여기듯 돌아서 가는 모습을 가만 바라보는데, 왜 문득 웃음이 나던지.

    정체를 들킬까 걱정은 해봤어도 언제 눈치를 챌까 궁금증을 품으니 제법 색다른 기분이 새록새록 끓어오르는 게 아닌가.

    그리 오랜 세월을 살고도 죽음은 두려우나, 삶인들 그다지 즐거울 것도 없었거늘. 고 깐깐한 계집 하루하루 귀찮게 하며 결국 벗겨 먹을 생각을 하니 자못 짜릿하게 흥분도 되더랬다.

    내일의 해가 뜨면 또 어떤 모습으로 저를 자극할까. 생각만으로도 가슴팍이 간질간질한 것이 자꾸만 실없이 헛웃음이 감긴다.

    “어이가 없네.”

    언제는 궁상맞은 꼬락서니만 봐도 답답하고 짜증이 나더니 구미호 마음이라는 것이 참 요상하기도 하다.

    D-132

    인간 세상엔 그러한 속담도 있다 하지 않나.

    급할수록 돌아가라.

    “급하니까… 돌아가야지, 그럼.”

    천천히. 아주 질기게.

    당장 꽁지까지 바짝 따라붙을 것만 같던 시간이 생각을 달리하니 꽤나 여유롭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탁. 깨끗하게 비운 찻잔이 받침대에 놓였다. 실로 얼마 만인지 모를 가벼운 걸음이 주방을 지나 침실로 향했다.

    온기가 멀어지자 주방의 센서 조명이 어둠 속에 스며들었다. 들이친 달빛이 침실까지 늘어질 기세로 길게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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