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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74)화 (174/174)
  • 174화

    “악룡 크립소를 저지하는 데 많은 수고를 한 제프리 콜먼을 우리 듀아나 신전의 이름을 걸고 신전 소속 명예 기사로 임명하는 바입니다.”

    제프리는 황실과 듀아나 신전의 주최로 열린 기사 서임식에 참여하게 되었다.

    우선 신전 측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이례적으로 성기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전의 기사직을 받게 되었다.

    바론 대주교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는 제프리에게 듀아나 여신님을 의미하는 문양이 새겨진 검을 하사했다.

    제프리는 경건히 바론 대주교가 건네는 검을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바론 대주교는 제프리의 머리에 손을 얹고 여신님을 대신하여 축언을 읊었다.

    성스러운 신력이 대주교의 손에서 희미하게 빛이 났다.

    그건 내가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릴 때 썼던 것과 무척이나 흡사했다.

    마침내 빛이 사그라들었다.

    바론 대주교는 제프리의 머리에 얹었던 손을 회수하고는 푸근히 미소를 지었다.

    제프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론 대주교와 듀아나 여신님의 석상을 향해 정중히 인사한 다음 몸을 돌려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검을 들어 보였다.

    동시에 주변 이곳저곳에서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나 역시 제프리의 모습을 확인하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일제히 울리는 박수는 가슴을 묘하게 들뜨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제프리 콜먼, 가지 말고 거기서 대기하십시오.”

    라이넬 사제가 제프리를 향해 조언했다. 제프리는 바론 대주교에게 받았던 검을 잠시 라이넬 사제에게 맡기고 그 자리에서 대기했다.

    곧 황제가 천천히 단상에서 걸어 나와 제프리의 앞에 섰다.

    시종장은 들고 왔던 양피지를 펼쳐 황제를 대신하여 내용을 읊기 시작했다.

    “제임스 콜먼은 이번 악룡 부활 사건에서 성녀의 보좌를 맡아 악룡 크립소의 등장에도 용기를 잃지 않고 맞서 싸운 점, 그리고 악룡을 처단하여 제국의 안녕에 이바지한 점을 높이 사 금화 백 닢의 포상과 함께 자작의 작위를 이 제국의 황제 제임스 바젯 카스트로의 이름으로 하사하노라.”

    시종장이 양피지에 적힌 내용을 모두 읽고 나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 한 명이 귀족 작위 증명서와 금화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들고 왔다.

    제프리는 시종으로부터 작위 증명서와 포상금을 건네받았다.

    다시금 이곳저곳에서 커다란 함성이 들려왔다. 나는 조용히 제프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크립소와 관련된 사건으로 이미 추모식까지 끝마친 이후였다. 제프리에게 상을 주려 했다면 그때 해야 옳았지만, 그때까지는 이게 얼마나 중요한 절차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나나 신전에서는 어차피 포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번 일에 대한 포상을 받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물론 처음에는 제프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그의 용병단이 황성으로부터 적절한 보수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것은 받지 않겠노라 선언한 상태였다.

    용병은 용병으로서 남는 게 제격이라고 판단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내게 청혼한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제프리가 뭐라도 명성을 얻어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고, 나아가 작위를 얻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건 크라이튼 대공과 브라이언, 엄마, 그리고 제국의 황제께서 결정한 사안이었다.

    적어도 크라이튼 대공가의 손녀이자 듀아나 신전의 성녀인 나와 결혼시키려면 어쩔 수 없는 절차라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그렇게 이번 일로 제프리는 신전에서 인정하는 자유 기사가 되었고, 또한 황제에게 정식으로 작위를 수여받기로 결정했다.

    물론 작위가 낮고, 신전의 정식 성기사인 것은 아니었기에 여전히 제프리가 기우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크라이튼 대공이 생각해낸 것이 또 하나 더 있었다.

    “미라벨.”

    제프리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그런 제프리를 향해 미소로 화답했다.

    “축하해, 제프리.”

    제프리는 멋쩍은 듯이 입술을 매만지며 웃었다.

    “다들 안 받는데 나만 받는 거 같아서 좀 민망하긴 하다.”

    “그래도 받아두면 좋지. 듀아나 신전의 자유 기사가 되면 어디서든 듀아나 신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거라고. 작위도 마찬가지고.”

    나는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며 말했다.

    “그런가?”

    “그래. 그러니까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

    제프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자 제프리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오후지?”

    “응.”

    “내가 준비해야 했는데 어쩐지 크라이튼 대공 각하께 신세를 지게 됐네.”

    제프리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오후에 있을 결혼식 얘기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할아버지한테 잘해.”

    “그야 당연히 그래야지. 내게 있어 가장 최우선은 미라벨 너야. 그리고 그다음이 너희 가족들이고.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야.”

    “…….”

    글쎄, 내가 아는 미래에서도 제프리는 스스로 용병왕의 자리에 올랐다.

    물론 이보다도 더 힘들고 고된 나날을 버텨야 했겠지.

    어린 나이에 수배자가 되어 쫓기던 것만 생각해도 그랬다.

    크라이튼 대공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아마 더 오랜 시간을 경비대에 쫓기며 살아왔을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아주 작은 도움을 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제프리는 멋지게 자라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되었다.

    “작은 아가씨! 이제 준비하실 시간이에요!”

    아니타가 초조한 얼굴로 나를 재촉했다.

    나는 제프리를 향해 빙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이따 봐.”

    “응. 이따 봐.”

    내가 제프리를 향해 손을 가볍게 흔들자 제프리 역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 곧 몸을 돌려 아니타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니타를 따라 도착한 곳은 황성의 파우더룸이었다.

    나는 그곳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아니타와 칼리나가 나를 보조했고, 다른 하녀들 역시도 내가 드레스를 입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평상시에는 번거로워서 드레스를 잘 입지는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준비된 드레스로 갈아입은 다음으로는 화장과 머리치장이었다.

    “제가 어느 때보다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드릴게요.”

    “고마워, 칼리나.”

    오랜만에 나를 치장하게 된 칼리나는 평소보다 더욱 열정 가득한 얼굴로 미용 도구들을 손에 들기 시작했다.

    * * *

    “다 됐습니다.”

    한참 모두의 손이 이끄는 대로 따르다가 문득 칼리나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어떠세요?”

    화장을 담당한 아니타가 긴장된 목소리로 나를 향해 물었다.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꼼꼼히 확인했다.

    거울 속에는 갈색 머리칼을 곱게 틀어 올린 우아한 모습의 내가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의 솜씨에 놀라며 차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솜씨가 좋은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날 예쁘게 꾸며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마음에 안 드세요?”

    아니타는 내가 말이 없자 긴장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아니, 정말 예뻐. 오늘도 맘에 쏙 들게 꾸며 줘서 고마워, 칼리나. 그리고 아니타.”

    내가 웃으며 말하자 칼리나와 아니타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는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시녀들이 나를 찾을 때만 기다리면 되었다.

    그 순간, 파우더룸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시작되는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곧 문 너머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크라이튼 소공녀님,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들려온 것은 에이드리안의 방문 소식이었다.

    “들어오시라고 해.”

    내가 대답을 마치자 곧 파우더룸의 문이 열렸다.

    “어어, 일어나지 마. 안 일어나도 돼. 그러다 옷매무새 흐트러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에이드리안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손을 내젓는 만류에 나는 일어나려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결혼, 축하해. 제프리가 데릴사위로 들어간다며?”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내가 빙긋 웃으며 대답하자 에이드리안이 잠시 자리에 굳었다. 그러더니 피식거리며 입술을 비죽거렸다.

    “예의 안 차려도 돼. 괜찮아.”

    “아…… 그래?”

    “당연하지.”

    에이드리안의 확답을 받고 나서야 나는 편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축하해 줘서 고마워.”

    “천만에.”

    에이드리안은 잠시 말을 마친 후 나를 살폈다.

    “오늘 너 정말 예쁘다.”

    작은 감탄이었다. 하지만 에이드리안의 말이 진심이라는 건 확실히 느껴졌다.

    “빈말이라도 고마워.”

    “빈말 아니거든? 그리고…… 만약에 제프리가 결혼 생활 중에 힘들게 하거나 화나게 하는 일이 생기거든 나한테 얘기해.”

    에이드리안은 듬직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그런 에이드리안을 빤히 주시했다.

    그러자 에이드리안이 멋쩍어하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왜, 왜 그래?”

    “아니, 그냥. 그거 오늘 아침에 할아버지랑 숙부님, 그리고 엘리엇이 나한테 했던 말이거든. 다들 똑같은 말을 한다 싶어서.”

    “뭐?”

    에이드리안은 당황한 듯이 되묻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누구한테든 꼭 얘기해. 그럼 제프리 녀석 뼈도 못 추릴 거야.”

    “그렇겠지.”

    생각만으로도 재밌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진짜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될 터였다.

    “그럼 난 자리에 가서 지켜볼게.”

    “응.”

    에이드리안은 짧게 나를 향해 인사하고 곧 파우더룸을 벗어났다.

    [미라벨.]

    내 어깨 위에 올라와 있던 비브르가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응. 왜?’

    비브르는 곧 머리를 내 뺨에 가볍게 대었다.

    거울로 비브르가 하는 친밀한 행동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내가 엷게 웃자 비브르가 다시금 내게 말해 왔다.

    [그동안 정말 고생했다. 그리고 앞으로 너의 앞날을 여신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도록 하마.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이란다.]

    비브르의 말이 끝나자 옅은 빛이 주변에 흩뿌려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착각이 아닌지도 몰랐다.

    그건 듀아나 여신님의 수호룡인 비브르가 내게 해주는 축복의 세례였다.

    ‘고마워.’

    비브르는 내게 축복을 내린 후 다시 내 어깨에 똬리를 틀어 자리했다.

    그리고 오래 걸리지 않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라이튼 소공녀님. 입장하실 시간입니다.”

    마침내 입장이었다.

    칼리나와 아니타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앉아 있느라 구김이 갔던 치맛자락을 정돈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아니타가 내 머리에 면사포를 씌워 주었다.

    “이제 가셔도 돼요.”

    “고마워.”

    말을 마치고 곧장 파우더룸을 나서기 시작했다. 하얀 면사포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평소보다 조금 하얗고 밝게 보였다.

    결혼식은 황성의 그레이트 홀 정원을 빌려 하게 되었다.

    도착하고 보니 정원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내게로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크립소를 앞에 뒀을 때도 이보다 더 긴장된 적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라벨 크라이튼 입장!”

    나는 웨딩 로드를 따라 안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황홀한 오케스트라단의 연주 소리에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섞여 들고 있었다.

    마침내 중간 지점에 도착하니 나를 기다리고 있던 제프리가 나에게 손을 뻗었다.

    그는 은발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까만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가자.”

    “응.”

    제프리의 손에 내 손을 얹자 제프리가 곧 나를 앞으로 에스코트해 주었다.

    마침내 우리는 바론 대주교 앞에 나란히 서게 되었다.

    절차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다.

    결혼에 대한 바론 대주교의 축언이 있고, 그다음으로는 결혼 서약이었다.

    바론 대주교의 앞에 서니 가슴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바론 대주교가 앞에서 우리의 앞날을 축복하는 축언을 하고 있었음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싫은 기분은 분명히 아니었다.

    따지자면 얼떨떨하고 설레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라벨. 미라벨.”

    “으응?”

    한참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제프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니 제프리가 입으로 ‘앞에 봐’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바론 대주교가 하는 말을 다시 귀담아들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결혼 서약이 있겠습니다.”

    어느새 마지막 절차였다.

    “제프리 콜먼은 미라벨 크라이튼을 아내로 맞아 평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바론 대주교의 질문에 제프리가 고개를 흔쾌히 끄덕였다.

    “예, 맹세합니다.”

    경쾌한 대답이었다.

    바론 대주교는 흡족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럼 미라벨 크라이튼, 그대는 제프리 콜먼을 남편으로 맞아 평생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다음 질문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난 조금 떨리는 기분으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네, 맹세합니다.”

    “좋습니다. 그런 두 사람, 서로를 마주 보고 맹세의 입맞춤을 하십시오.”

    곧 몸을 돌려 제프리를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 앞에서 입을 맞춘다고 하니 조금 어색하고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제프리는 조심스럽게 손으로 내 얼굴을 가린 면사포를 들었다.

    그러자 제프리의 얼굴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오게 되었다.

    제프리는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채로 조금씩 고개를 숙여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가까워진 순간, 나는 눈을 내리감았다.

    곧 제프리의 입술이 내 입술 위에 부드럽게 닿았다. 따뜻한 온기가 입술을 통해 전해지는 듯했다.

    짧은 입맞춤은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갔다. 나는 멀어지는 제프리를 확인하기 위해 눈을 떴다. 제프리가 다정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게 제일 먼저 보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제야 나는 제프리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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