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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73)화 (173/174)
  • 173화

    신기한 마음에 손을 들어 반지를 확인했다.

    그러다 문득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고개를 들었다.

    “근데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 않아?”

    제프리가 오래 고민을 했다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대공가로 들어오지 않았던 때라면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제국에서 황실 다음가는 권력을 손에 쥐었다는 크라이튼 대공의 손녀였다.

    그렇기에 내 결혼 문제가 내 의사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건너편으로 돌아가 앉은 제프리가 내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도 생각해 본 게 있어.”

    제프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를 재촉하는 대신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안 그래도 이번에 있었던 일로 브라이언 공작님께서 황실기사단에 입단하는 걸 제안해 주셨어.”

    “숙부님이?”

    제프리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확실히 제프리 정도의 실력자라면 기사단과 겨루어도 실력으로 뒤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크라이튼 공작인 브라이언이 제프리의 보증인이 되어 준다면 평민이라고 하더라도 황실기사단으로 입단할 자격은 충분히 주어질 터였다.

    브라이언이 줄곧 제프리를 기사로 영입하고 싶어 했으니 이번 일을 기회 삼아 제프리에게 제안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우려가 되는 건 하나 있었다

    “괜찮겠어?”

    “응?”

    “너 기사가 되는 건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잖아. 무엇보다 용병으로 네가 쌓아 온 기반도 있고.”

    내 말이 끝나자 제프리가 말없이 웃었다.

    “왜 웃어?”

    “그냥. 미라벨 네가 날 걱정해 주는 게 좋아서.”

    제프리는 말을 마치고 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제프리의 푸른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는 것을 보고 있으니 나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그래도 일단 기사가 되면 작위를 받을 수 있잖아. 뭐, 내 실력이 부족하진 않겠지만 안정적으로 훈련도 받을 수 있고. 이참에 정착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제프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하고 있었지만, 그걸 듣고 있는 나는 괜찮지 않았다.

    “일단 알았어. 우선 우리 가족들한테도 얘기하고 천천히 결정하는 게 어때?”

    “……알았어.”

    제프리가 순순히 내 제안에 수긍했다.

    “바로 말씀드릴 거야?”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언제쯤 말을 할까 고민을 하느니 당장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 설렁줄을 울렸다.

    제프리에게 황실기사단 입단 제안이 들어오긴 했지만, 그 제안이 언제까지 유효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혹시라도 제프리가 정말 정착할 생각이 있는데 내가 일을 미룬 까닭에 제안이 철회되기라도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미안할 테니까.

    물론 황태자인 에이드리안이나 황실기사단의 단장인 브라이언에게 양해를 구하면 시간을 더 미뤄 주기야 하겠지만,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곧 아니타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어요, 작은 아가씨?”

    “응. 아니타, 혹시 집안에 할아버지랑 엄마, 그리고 숙부님 계시니?”

    “제가 알기론 계실 거예요.”

    “그럼 모두 모시고 와 줄래? 엘리엇 오빠까지 부탁할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래.”

    “예, 작은 아가씨.”

    아니타가 고개를 숙이고 곧 응접실을 나섰다.

    내가 직접 찾아가야 옳겠지만, 그렇게 되면 따로따로 만나 뵈어야 할 테니 이번만큼은 아니타를 통해 세 분을 응접실로 모셔오기로 했다.

    기다리는 동안 괜히 긴장되는 마음에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천천히 매만졌다.

    그런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제프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고개가 움직였다.

    제프리는 곧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러더니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긴장돼?”

    제프리가 평소처럼 다정하고 친근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나는 그를 빤히 보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었다.

    “응. 조금.”

    “괜찮을 거야.”

    나보다도 제프리가 더 떨릴 텐데, 제프리는 오히려 나를 진정시키려는 듯했다.

    그때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아니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공 각하 드십니다.”

    크라이튼 대공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였다.

    제프리와 내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문이 열리고 크라이튼 대공이 안으로 들어왔다.

    크라이튼 대공은 나와 함께 안에 있던 제프리를 확인하고 잠시 눈을 크게 떴다.

    “미라벨이 부른다기에 왔더니 또 다른 손님이 있었군?”

    크라이튼 대공은 허허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곧이어 브라이언과 엄마, 그리고 엘리엇이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 제프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자리에 착석했다.

    아니타가 차를 내오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엄마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엄마의 얼굴에 미묘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벨.”

    “응?”

    엄마가 시선을 내려 내 손을 바라보았다. 제프리가 반지를 끼워 준 손이었다.

    “그 얘기니?”

    이미 짐작한 듯 묻는 엄마의 물음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예전에는 가족도 없었고, 혼자 살아남는 것에 급급했기 때문에 이런 낯간지러운 감정을 느껴 볼 일이 거의 없었다.

    과거로 돌아와 모든 것을 바로잡은 지금이 되어서 그런 감정들과 맞닥뜨리려니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뭐야? 무슨 일인데?”

    브라이언은 엄마와 나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곧 아니타가 차를 내왔다.

    엄마는 태연히 찻잔을 들며 브라이언의 질문을 회피했다. 내게 직접 말하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실은…….”

    “제가 미라벨에게 청혼했습니다.”

    “뭐? 윽, 뜨거워!”

    막 내가 말을 꺼내려는 찰나에 제프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브라이언은 찻잔을 집어 들다 제프리의 말에 놀라 그만 손잡이를 놓치고 말았다. 그 탓에 차가 브라이언의 무릎으로 쏟아졌다.

    “괜찮아, 오빠?”

    “괜찮으세요?”

    엄마와 내가 동시에 브라이언을 향해 물었다.

    브라이언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른 젖은 부분을 닦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브라이언에게 손을 내밀어 신력을 불어넣었다. 혹시라도 화상을 입었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고맙다, 벨. 근데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브라이언은 귀를 의심하며 제프리를 확인했다.

    제프리는 평소와 달리 조금 굳은 얼굴로 브라이언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미라벨에게 청혼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브라이언은 제프리의 말이 끝나고 잠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확답을 구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맞아요, 숙부님. 방금…… 청혼받았어요.”

    반지를 매만지다가 이내 모두가 볼 수 있게 손을 조금 내밀었다.

    그제야 브라이언이 입을 떡 벌리며 나와 제프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청혼이면…… 결혼을 하겠다고? 너희 둘이?”

    “네.”

    제프리가 브라이언의 질문에 대답했다.

    브라이언은 혼란스러워하며 나를 바라보다가 작게 탄식했다.

    “워낙 둘이 만나면 붙어 있는 일이 잦더라니…….”

    이마를 짚던 브라이언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제프리 넌 아직 평민이지 않나?”

    “……예.”

    “…….”

    브라이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독 그 한숨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때 크라이튼 대공이 낮은 소리로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 덕분에 무겁던 분위기가 조금은 환기되었다.

    크라이튼 대공은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도 더욱 다정한 빛을 띠고 있었다.

    “브라이언은 신경 쓰지 말거라. 그래, 미라벨. 네 마음은 어떠니?”

    “저요?”

    “그래. 네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지.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네 마음이 아니냐.”

    크라이튼 대공의 친절한 목소리에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저는, 저도…… 제프리가 좋아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짧은 말에 내 마음이 담겨 있다는 걸 크라이튼 대공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 그렇구나. 우리 미라벨이 벌써 이렇게 컸구나.”

    크라이튼 대공은 큰 손을 뻗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주었다.

    그러더니 엄마를 돌아보았다.

    “코넬리아,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전 벨이 원한다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해요.”

    엄마 역시 나를 지지해 주었다. 어쩐지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정말 그래도 돼요?”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크라이튼 대공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코넬리아도 반대하지 않는다니 우리는 미라벨 네가 하는 선택을 따르도록 하마. 아가, 네가 행복하다면 우리는 그걸로 충분히 기쁘단다.”

    크라이튼 대공의 시선이 엄마에게 머물렀다. 엄마 역시 크라이튼 대공을 한번 확인했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그제야 크라이튼 대공이 왜 이렇게까지 나를 지지해 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엄마와 아빠의 일을 겪었으니 더는 욕심을 내지 않으려는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크라이튼 대공은 엄마가 떠난 것이 자신의 욕심 때문이라며 자책하고 괴로워했었다.

    그렇기에 이번만큼은 나를 위한 선택을 지지해 주려는 것으로 보였다.

    “결혼이라면 걱정하지 말거라. 이 할아버지가 다른 데에서 말 나올 일 없이 잘 처리해 주마. 너희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너희는 행복할 준비만 하면 된다. 알았느냐?”

    크라이튼 대공이 나와 제프리를 향해 물었다.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크라이튼 대공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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