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63)화 (163/174)
  • 163화

    짧은 회의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이미 황성에서 보낸 지원 병력이 길을 따라 쭉 이어지고 있었다.

    여기에 듀아나 신전의 성기사들과 사제들까지 함께할 테니 인원은 더욱 늘어날 터였다.

    제프리는 대기하고 있던 용병단으로 돌아가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들은 좀비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말에도 끝나고 나면 맥주를 원 없이 마시겠다며 껄껄거렸다.

    처음 제프리가 좀비들을 맡겠다고 했을 땐 용병단에서 거부하는 이들이 있지 않을까 염려하였으나, 내 기우였던 모양이었다.

    “가자.”

    엘리엇이 내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응.”

    억지로 입매를 끌어 웃으며 대답한 후 신전 앞에 대기하고 있던 말 위에 올랐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에이드리안와 브라이언이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무기를 들어 올리자 병사들 역시 무기를 들어 올리며 외쳤다.

    다수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지자 땅이 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병사들이 늘어선 것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창문을 닫고 사라졌다.

    에이드리안과 브라이언이 앞장서고, 나와 제프리, 그리고 엘리엇이 그 뒤를 따랐다.

    목적지로 향하는 내내 그 누구도 말이 없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큰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눌 만큼 속이 여유롭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그 상대가 데이릭과 플레온 사제라고 하니 더더욱 그랬다.

    “벨,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네가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엘리엇이 나와 속도를 맞추며 걱정 어린 눈으로 말했다.

    나는 잠시 정면을 응시했다가 엘리엇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안 해도 돼. 괜한 마음으로 일을 그르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래. 다행이다.”

    안심이라는 듯 미소를 짓는 엘리엇을 보다가 이내 앞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미라벨, 만약에 데이릭이 크립소의 부활을 성공한다면…… 너 역시도 나를 깨워야 할 거란다.]

    문득 비브르가 입을 열었다. 비브르는 이미 최악의 상황을 어느 정도 가정하는 듯했다.

    ‘이전에 널 실체화시켰던 그때처럼 말이지?’

    [그래. 하지만 조심하려무나. 알고 있겠지만 실체화가 진행되는 동안 넌 아주 취약한 상태에 들어가게 될 게야.]

    ‘그렇겠지.’

    나는 14년 전, 비브르를 실체화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의 기억은 내게 있어 몇 안 되는 최악의 경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체내의 신력과 함께 생명력이 모조리 뽑혀 나가는 듯한 끔찍한 기억.

    그런 경험은 다시 하고 싶지 않아 최대한 비브르를 실체화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데이릭을 막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나는 비브르를 실체화해야 할 터였다.

    [널 엄호하기로 한 두 사람에게는 말을 해 주렴. 상황이 그렇게 된다면 널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만일 도중에 실패하게 된다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른단다.]

    비브르가 내게 제안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브르의 제안에 수긍했다.

    “오빠, 제프리.”

    내가 양옆을 확인하며 두 사람을 불렀다. 그러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어?”

    즉각적으로 돌아오는 엘리엇과 제프리의 반응에 나는 설핏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만일 데이릭이 악룡을 부활시키게 된다면, 나 역시도 비브르를 실체화시킬 수밖에 없어. 그런데 그동안 난 무방비한 상태가 될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널 지키면 되는 거지?”

    제프리가 내 말의 요지를 깨닫고 바로 물어왔다. 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목숨을 걸고서라도 널 지킬 테니까.”

    “그래. 우리를 믿어.”

    제프리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답했다. 엘리엇 역시도 웃으며 내게 믿음을 주었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그렇게 되는 일이 없으면 좋겠군. 수호룡까지 실체화할 정도라면 최후의 방법인 거잖아?”

    “그렇겠지.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그렇게 되지 않게 막아야지.”

    엘리엇과 제프리의 말을 들으니 왠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한참 길을 따라 말을 몰고 있으니 서쪽 성벽이 보였다. 성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은 미리 보고받았는지 군대를 확인하자마자 곧장 성문을 열었다.

    성문 너머에는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평원에 멈추어 선 채로 군대를 정비했다.

    듀아나 신전의 사제들은 데이릭을 마주하기에 앞서 병사들의 검에 신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타인이 불어넣은 신력이 과연 얼마나 오래 유지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브로치에 의해 잠식된 이들의 암시를 깨는 것에는 효과가 있을 터였다.

    성기사들은 직접 검을 뽑아 신력을 검에 덧씌웠다.

    나도 그 모습을 보다가 엘리엇과 제프리를 바라보았다.

    “검 좀 줘 볼래?”

    엘리엇이 먼저 내게 검을 건넸다. 검에 내 신력을 불어넣자 하얀빛이 검날을 감싸기 시작했다.

    “제프리는 몇 번 데이릭과 싸워 봐서 알겠지만, 검에 신력을 두르는 것도 임시방편일 뿐이야. 데이릭의 마력을 상쇄시킬 수는 있겠지만, 신력과 마력이 부딪힐 때의 충격을 검이 버티지 못하거든.”

    엘리엇에게 검을 돌려주자 엘리엇이 검을 살피기 시작했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었다.

    다음으로는 제프리였다. 내가 일전에 검을 깨트린 이후 검을 새로 구했는지 이전보다 좀 더 묵직한 투 핸디드 소드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의 검에도 엘리엇의 검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력을 불어넣었다.

    “최대한 조심해야 해. 데이릭의 마력에 검을 대는 일은 가급적이면 없도록 하고.”

    “알았어.”

    “주의할게.”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제프리의 검에도 하얀빛이 어리는 것을 확인하며 손을 회수했다.

    시간이 제법 소요되었지만, 꼼꼼히 준비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데이릭에게도 뒤지지 않을 터였다.

    “준비는 되었나?”

    브라이언이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준비되었습니다!”

    병사들이 말을 맞춘 듯 동시에 대답했다. 웅장한 소리에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무사하길 빌겠네.”

    “와아!”

    함성이 평원을 가득채웠다.

    브라이언은 그들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걸 신호로 병사들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리 오래 걷지 않아 우리는 데이릭이 자리를 잡고 있는 묘지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묘지 근처에는 데이릭이 준비한 군대가 있었다. 나름대로 오와 열을 지켜 서 있었지만, 브로치로 세뇌된 이들을 급하게 모아 만든 까닭에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을 데이릭이 노렸을 것이라 판단했다.

    데이릭의 목표는 여기서 이기는 것이 아니었다.

    최대한 많은 죽음을 초래하여 악룡의 봉인을 위한 초석으로 삼는 것.

    그러니 굳이 데이릭으로서는 훈련된 병사가 필요하지 않았다.

    빠르게 죽어 줄 제물만 필요할 뿐.

    그가 노리는 바가 너무도 명확하게 보여 오히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앞두고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부정적인 생각하지 말렴.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이니 잘될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내가 초조하게 입술을 씹고 있으니 비브르가 내게 충고했다.

    “그래야겠지.”

    의지를 다지기 위해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우와! 준비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많이 준비하셨는걸요?”

    오두막 지붕에 앉아 있던 데이릭이 휘파람을 불며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듯했다.

    그쪽을 확인하는데 신전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에서 침음성이 들려왔다. 데이릭의 옆에는 플레온 사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플레온 사제는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대신, 그의 옆에 있는 데이릭이 과장스러운 손동작을 하며 입을 열었다.

    “잘 지내셨어요, 성녀님? 제프리도 잘 지냈지? 그리고…… 오늘은 황태자 전하도 납시었네?”

    전투를 앞둔 상황이었음에도 데이릭의 목소리는 장난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 이길 거라는 확신이 있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아니, 천성이 그런 건지도.

    “데이릭 모어, 이대로 항복한다면 그대의 형벌이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을 거다.”

    황실 기사 중 한 명이 데이릭을 향해 호기롭게 외쳤다.

    데이릭의 시선이 곧 그 기사를 향했다.

    “글쎄요. 그 말은 곧 제가 항복을 하든 말든 처벌될 거라는 말이잖아요? 그럼 굳이 항복할 필요가 없죠. 여기서 이기면 될 텐데.”

    데이릭은 스스로 말하고도 우스웠는지 큰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쇠를 긁는 소리처럼 불쾌하게 들렸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데이릭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제일 앞에 있던 데이릭의 병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일제히 움직이는 모습이 흡사 군무를 보는 듯했다.

    “다들 열심히 죽어 주렴.”

    데이릭이 벙글거리며 말하자 데이릭의 병사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최대한 희생을 피하도록 하라! 그들의 옷에 붙은 브로치를 떼거나 파괴하면 어차피 힘을 잃을 것이다!”

    브라이언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돌격!”

    “와아아!”

    브라이언의 신호를 끝으로 황실 병사들 역시 빠르게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많은 수의 병사들이 서로 부딪히는 광경은 가히 장관이었다.

    죽이려는 자와 제압하려는 자의 싸움이었다

    아무리 훈련받은 병사들이라고 해도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