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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62)화 (162/174)
  • 162화

    “사람들을 불러올 거지? 성녀님이나 성기사들, 그리고 황성의 병사들까지.”

    데이릭이 비브르를 향해 물었다. 그러나 비브르가 순순히 그걸 불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마음대로 하라 그래. 어차피 난 손해 볼 거 없거든. 너희들이 내 병사들에 의해 죽는다면 악룡을 부활시킬 훌륭한 먹잇감이 될 테고, 이리로 오지 않는다면 민간인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야.”

    거기까지 말한 데이릭이 천천히 비브르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허공을 걷고 있음에도 그의 걸음은 무척이나 안정적이었다.

    “아마도 우리 착한 성녀님은 그걸 두고 보지는 못할 거야. 그렇지?”

    비브르는 여전히 데이릭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데이릭은 비브르의 침묵을 긍정이라 멋대로 판단했다.

    “오면 좀 재미있어질 거야. 내 병사들은 죽어도 죽지 않거든. 끊임없이 싸우고 싸우다 보면…… 성녀님도 어쩔 수 없을 거야. 그리고 모든 게 엉망이 되었을 때, 비로소 악룡의 봉인을 푸는 거지.”

    말을 마친 데이릭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가서 성녀님께 전해. 이곳에서 본 것들을. 그리고 두 시까지 오지 않으면 나도 더 기다릴 수 없다고. 너 그런 역할이잖아. 안 그래?”

    데이릭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렸다. 비브르가 자신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비브르는 하강하는 데이릭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미라벨과 비브르가 생각하지는 못한 종류였으나, 이건 데이릭이 짜 놓은 함정이었다.

    하지만 비브르는 그걸 알면서도 미라벨에게 오지 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데이릭의 병사들이 수도를 공격하기 시작한다면, 그야말로 학살이었다.

    데이릭의 뒷모습을 좇는 비브르의 시야에 플레온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플레온은 비브르가 허공에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데이릭과 무어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비브르는 오늘따라 플레온이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

    그는 왜 듀아나 여신을 배신하고, 또 인류를 배신한 건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건지.

    [미라벨, 들리느냐?]

    참담한 기분으로 데이릭과 플레온의 모습을 바라보던 비브르가 미라벨을 향해 말을 걸었다.

    곧 여기 있는 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미라벨의 맑은 음색이 들려왔다.

    ‘확인했어? 어때?’

    [문제가 생겼구나. 돌아갈 테니 가면서 말해 주마.]

    비브르는 몸을 돌려 미라벨이 있을 신전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자신이 보았던 것들을 하나하나 미라벨에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묘지 근처를 채운 것은 브로치의 암시에 잠식된 자들과 악룡의 힘에 지배되는 자들이었고, 그들의 뒤에 있는 것은 묘지를 기어오른 좀비들의 향연이었다.

    처음에는 비브르의 말에 일일이 대답하던 미라벨이 점점 말을 잃기 시작했다.

    데이릭이 무언가 준비를 해 놓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까지 준비해 놓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모든 설명이 끝나자 미라벨도 비브르도 말이 없었다.

    비브르는 단지 미라벨의 곁으로 돌아가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삼았다.

    * * *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군요. 죽음에서 돌아온 자들이라니.”

    라이넬 사제가 내 설명을 듣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침묵 속에서 라이넬 사제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크게 울리는 듯했다.

    “데이릭 모어의 말은 선전포고나 다름없군. 우리가 가지 않으면 수도를 침략하겠다니.”

    선뜻 진격을 명할 수도, 그렇다고 침략당하도록 두 손 놓고 바라보고 있을 수도 없는 상황에 브라이언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우리가 할 건 데이릭이 준비한 적을 막기 위해 진격하는 것뿐이겠죠.”

    에이드리안이 낮게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어차피 데이릭에게 침략당해서 죽으나 싸워서 죽으나 매한가지였다. 그렇다면 싸워서 죽는 쪽을 택하는 것이 더욱 명예로운 죽음이 될 터였다.

    “그러다 악룡의 부활을 재촉하게 되는 건 아닐지 염려되는군요.”

    바론 대주교가 브라이언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두 사람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 역시도 한숨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어쨌든 결론은 데이릭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황실에서 병력을 지원해 주는 것은 좋지만, 선두에는 신력을 사용할 수 있는 성기사들이 앞장을 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악룡의 힘을 파훼할 수 있는 것은 신력뿐이었다.

    우리는 최대한 인명 피해 없이 데이릭이 만들어 놓은 병사들과 싸워야 했다.

    사람의 죽음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악룡의 부활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제님들의 도움도 필요하고요.”

    “사제들의 도움…… 이라면?”

    브라이언이 의아해하며 나에게 물었다.

    “레피드가 아닌 일반 검에도 신력을 잠시나마 머무르게 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는 해도 악룡의 흔적을 볼 수 없으니 악룡의 힘에 의해 지배되는 자들에게는 크게 효용이 있지는 않겠지만, 브로치를 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효과가 있겠죠.”

    “그럼 신력이 깃든 검으로 브로치를 파괴하면…… 그들이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소리냐?”

    “네, 아마도요. 그리고 이미 병사들은 브로치를 차고 있는 사람들과 전투를 벌인 경험이 있잖아요.”

    지난번 데이릭이 신전을 습격했을 때도 병사들은 브로치를 착용한 이들과 싸움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 정도의 경험이면 충분했다.

    어차피 데이릭이 확보한 병사들은 정규군이 아닐 터였다.

    결국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악룡의 흔적을 가진 자들과 좀비들이었다.

    “성기사들은 신력을 다루는 법을 알고 있으니 앞장서서 악룡의 힘에 의해 지배되는 자들을 맡아 주세요.”

    “그럼 좀비들은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그건……”

    나는 난처함에 입을 꾹 다물었다.

    죽여도 죽지 않는 존재들과의 전투를 누가 달가워할까?

    그때였다.

    “그건 제 동료들이 맡을 테니 근방에서 지원을 좀 해 주시죠.”

    내내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제프리가 입을 열었다.

    나 역시도 제프리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기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제프리가 한번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다시 표정을 굳혔다.

    “끊임없이 죽여도 살아나는 존재라면 비슷한 걸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개싸움은 우리 용병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고요.”

    “가능한 일인가?”

    브라이언이 무거운 얼굴로 제프리를 향해 물었다. 죽지 않는 자들과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투를 벌이는 게 가능한 일인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제프리는 브라이언의 우려에도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어차피 그들을 죽여 이기는 게 목표가 아니지 않습니까.”

    제프리의 말에 몇몇 사람들이 의미를 알아차리고 눈을 크게 떴다. 더러는 헛숨을 삼키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 용병대가 할 것은 시간을 버는 일입니다. 우리가 시간을 버는 동안 데이…… 데이릭 모어를 해치우면 모든 것이 깔끔하게 끝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군.”

    “맞는 말이야. 그들을 조종하는 데이릭 모어만 처리할 수 있다면 굳이 그것들과 기약 없는 싸움을 할 이유도 없겠지.”

    몇몇 이들이 제프리의 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제프리는 그런 그들을 한 명 한 명 훑어보다가 이내 팔짱을 꼈다.

    “보수만 두둑하게 셈해 주신다면 기꺼이 우리 용병단에서 그 좀비를 맡죠. 버티는 건 충분히 할 수 있을 겁니다.”

    제프리가 당당한 목소리로 말하자 침울했던 회의실에 다시금 희망이 깃드는 듯했다.

    “그렇게 말해 준다니 고맙군.”

    에이드리안 역시 어두웠던 표정을 지우고 엷게 웃으며 제프리에게 감사를 전했다.

    “셈은 우리가 할 테니 그건 걱정하지 말게.”

    “급한 일이니 계약서는 차후에 작성하는 것으로 하죠. 믿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제프리가 에이드리안에게 말하자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제가 데이릭을 맡으면 되겠네요.”

    나는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들은 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스로 결심을 굳히고자 꺼낸 말이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중요한 전투에서 가장 막중한 역할을 맡게 되니 마음이 무거웠다.

    “성녀, 미라벨에 대한 엄호는 제가 맡겠습니다.”

    “자네가 맡아 준다면 고마운 일이지. 하지만 한 명의 엄호로는 위험하지 않을지…….”

    바론 대주교가 나를 염려하며 중얼거렸다.

    에이드리안은 당장이라도 자신이 나를 엄호하는 데 지원하겠다고 외치고 싶은 듯이 보였으나, 다행히도 충동을 잘 억누르고 있었다.

    제국의 미래이며, 또한 이곳에서 제일 높은 권한을 가지고 있는 에이드리안이 위험에 노출되어서는 안 되었다.

    “대신 제가 미라벨과 제프리를 지원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나선 것은 엘리엇이었다.

    “그래, 엘리엇. 너라면 오랫동안 미라벨과 함께 수련해 왔으니 도움이 될 게다.”

    브라이언이 엘리엇의 결심을 듣고 그를 지지했다.

    “예, 아버지. 미라벨은 제가 보조할 테니 아버지께서는 최대한 인명 피해가 없도록 조치를 취해주십시오.”

    “그러마.”

    엘리엇이 부탁하자 브라이언이 수긍했다.

    “이제 슬슬 움직이는 게 좋겠습니다. 벌써 정오가 지나고 있습니다.”

    베트람이 제안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수도 중앙에 있을 시계탑을 확인했다. 시계는 열두 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데이릭이 말한 시간이 두 시였으니 지금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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