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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47)화 (147/174)
  • 147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플레온 사제에게 물었다. 라이넬 사제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직면한 과제를 위해서라도 라이넬 사제에게 새겨진 악룡의 흔적을 제거해야만 했다.

    하지만 흔적이 새겨진 위치가 좋지 않아서 선뜻 실행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혹시 비브르 님께서는 말씀이 없으십니까?”

    플레온 사제가 내게 물었다. 나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돌려 내 어깨 위에 올라와 있는 비브르를 바라보았다.

    [어려운 질문이구나. 악룡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는 레피드를 사용해야 한단다. 하지만 지금으로 봐서는 라이넬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란다.]

    “신력을 사용해서 빠르게 치료하면?”

    [그렇게 한다면 가능하기야 하겠지만, 힘들 거란다. 매우 섬세한 치료를 요할 텐데, 그 치료는 누가 담당한다는 말이냐? 만일 플레온이 그랬다면 라이넬에게 맡기면 될 일이겠지만, 당사자가 라이넬이 아니냐.]

    비브르는 우려스러운 말투로 문제점을 짚었다.

    “내가 하면 되지 않을까? 어렵기는 하겠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아. 라이넬 사제님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라이넬 사제님한테 14년을 배워 왔는걸. 제프리의 상처럼 신력이 통하지 않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그건 아니잖아.”

    비브르는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로 나를 빤히 주시했다.

    [그럼 레피드는 누가 드느냐?]

    “조건이 레피드로 악룡의 흔적을 찌르는 거라면, 굳이 레피드를 내가 들지 않아도 되잖아. 낮에만 해도 제프리가 레피드를 잡았잖아. 안 그래? 흔적을 나만 볼 수 있다면, 내가 위치를 알려주면 돼.”

    내 말에 비브르가 불만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비브르로서도 그 외의 해결책을 찾지 못했기에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럼 한번 해 보는 게 낫겠구나. 적어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응.”

    나는 비브르의 답을 들은 후 플레온 사제를 돌아보았다. 플레온 사제는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마주치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비브르 님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일단은 시도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 말을 들으셨겠지만, 우리에게는 라이넬 사제님이 필요하잖아요. 제프리에 관한 것도 그렇고, 지금 데이릭이 어디 은신하고 있는지에 대한 단서도 라이넬 사제님께서 알고 계실 거고요.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요.”

    “……그렇죠.”

    플레온 사제가 긴 한숨을 내쉬며 긍정했다.

    지금으로서는 시도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부탁이 있어요.”

    내가 그를 올려다보자 플레온 사제가 짐작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피드라면 제가 맡겠습니다.”

    내가 무슨 부탁을 할지 미리 알고 있었던 건지 플레온 사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탁드릴게요.”

    “네. 그럼 외람되지만 바로 해도 되겠습니까? 라이넬 사제의 상태도 걱정되고, 제프리 콜먼의 상태도 썩 좋지 않으니 말입니다.”

    플레온 사제가 먼저 내게 제안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넬 사제를 구금한 방으로 들어갔다. 라이넬 사제는 아무것도 모르고 기절해 있었다.

    라이넬 사제를 똑바로 눕혀 놓은 채로 레피드를 소환했다. 그리고 검을 플레온 사제에게 넘겼다.

    플레온 사제는 레피드를 받아들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검을 내려다보았다.

    성자였던 플레온의 기억 속에서 레피드는 그의 검이었을 테니 다시 검을 잡게 된 지금, 기분이 남다를 듯싶었다.

    나는 그 모습을 한번 바라본 후 라이넬 사제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옷을 조금 풀어헤쳐 악룡의 흔적을 확인했다.

    “여기예요. 잘 기억해 두셔야 해요.”

    내가 흔적을 가리키며 말하자 플레온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확인했습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볍게 심호흡한 후 라이넬 사제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았다. 그리고 신력을 당장이라도 끌어 쓸 수 있도록 집중했다.

    “지금이에요.”

    내 신호에 플레온 사제가 라이넬 사제의 가슴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나는 그사이에 신력을 끌어내 라이넬 사제에게 집중시켰다.

    일반적인 상처를 치료하는 것과 달리 심장을 치료하는 것에는 씨실과 날실을 자아내는 것처럼 섬세한 작업이 필요했다.

    검이 뽑히는 순간에 빈틈을 만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집중하고 노력해야만 했다.

    신력을 이만큼이나 끌어 쓰며 섬세한 작업을 해 본 것이 처음이기에 작업을 하면서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다 못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작은 실수도 허용하지 않아야 했기에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시간의 흐름이 마치 이곳만 멈춘 듯했다. 한없이 늘어지는 시간 속에 오직 나와 라이넬 사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한 끝에 무사히 라이넬 사제님의 치료를 마칠 수가 있었다.

    나는 치료를 마치자마자 황급히 라이넬 사제의 안색을 살폈다.

    퀭하고 어둡던 라이넬 사제의 얼굴이 천천히 혈색을 되찾아갔다.

    나는 퍽 안심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괜찮으십니까?”

    플레온 사제가 나를 향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괜찮아요. 그리고 라이넬 사제님도 괜찮은 것 같아요. 제가 확인하긴 했지만, 플레온 사제님께서도 확인해 주시겠어요?”

    만약을 대비하여 플레온 사제에게 부탁했다. 그사이에 소환했던 레피드는 소환을 해제한 후였다.

    플레온 사제가 천천히 라이넬 사제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느 때보다도 꼼꼼히 살핀 끝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무사합니다.”

    “……다행이네요.”

    나는 안심하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라이넬 사제의 무사를 확인하자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나는 최대한 신력을 활용해 내 몸의 피로를 지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이었다.

    “으윽…….”

    라이넬 사제에게서 옅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라이넬 사제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이내 힘겹게 감았던 눈을 떴다.

    “……여긴.”

    “신전입니다. 플레온 사제님.”

    라이넬 사제가 간신히 내뱉은 말에 플레온 사제가 대답했다.

    라이넬 사제는 그러고도 한참 동안 주변을 둘러본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신이시여…….”

    안도하며 몸을 일으키려던 라이넬 사제가 묶여 있는 자신의 손을 확인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어떻게 된 겁니까?”

    손을 들어 올리는 그를 보며 나와 플레온 사제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풀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라이넬 사제의 손을 속박한 밧줄을 풀어 주었다. 그의 레피드를 뽑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의 몸에 있는 상처를 같이 치료했음에도 밧줄에 쓸린 건지 붉은 자국은 남아 있었다.

    나는 얼른 그의 손목에 손을 얹어 밧줄 자국까지 지워 주었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라이넬 사제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가 오늘따라 유난히 반가웠다.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예. 괜찮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 전 분명 데이릭의 감시를 맡아 그를 지키고 있었는데요.”

    라이넬 사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플레온 사제와 눈을 마주쳤다.

    라이넬 사제의 기억이 온전치 않음으로 인해 중요한 정보를 놓친 셈이었다.

    그래도 라이넬 사제가 무사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많은 일이 있었어요. 길어질 테니 설명은 천천히 해 드릴게요. 그나저나 혹시 괜찮으시면 제프리를 좀 봐주시겠어요?”

    “예? 예에.”

    라이넬 사제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라이넬 사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라이넬 사제가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를 대동한 채 방에서 나왔다.

    “맙소사!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는 온전한 방을 벗어나 반쯤 붕괴한 신전의 모습을 확인하고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데이릭 모어의 짓입니다.”

    “그런……! 그럼 정말 데이릭이 실종 사건의 범인이었던 겁니까?”

    플레온 사제는 라이넬 사제의 질문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라이넬 사제가 헛숨을 들이쉬며 괴로워했다.

    “근데 전 어떻게 된 건지.”

    “데이릭이 라이넬 사제님을 악룡의 힘으로 조종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사제님께서 직접 신전으로 돌아오셨고요. 무사히 돌아왔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플레온 사제가 짧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라이넬 사제는 자신이 악룡의 힘에 지배되었다는 사실에 놀라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하여 문제를 만들었군요.”

    “아니에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요.”

    내가 그를 위로하자 라이넬 사제가 쓰게 웃었다.

    “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쪽 길은 수정 방으로 가는 길 아닙니까? 제프리 콜먼의 상태를 봐달라 하시더니 왜 이쪽으로 가시는 건지요?”

    라이넬 사제가 질문했다.

    “가 보시면 압니다.”

    플레온 사제는 마침내 도착한 수정 방의 문을 열었다. 라이넬 사제는 영문을 몰라 우리를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수정 방 한가운데에 있는 제프리를 확인하고 낮게 침음을 흘렸다.

    “상태가 심각하군요.”

    “네. 라이넬 사제님, 방금 깨어나셔서 경황이 없고 당황스러우실 테지만, 제프리를 좀 치료해 주시겠어요? 부탁드릴게요.”

    나는 라이넬 사제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라이넬 사제는 당황스러운 듯이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옅게 미소를 지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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