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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46)화 (146/174)
  • 146화

    크라이튼 대공과의 대화가 있은 후로 다시금 침묵이 찾아왔다.

    제프리와의 전투로 피로감을 느꼈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제프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밤을 지새우기 시작했다.

    밤이 찾아와 어둠이 드리워야 했지만, 수정 방은 수정이 내뿜는 오묘한 빛으로 인해 썩 어둡지 않았다. 사위를 분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으윽…….”

    그때 제프리가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나는 무릎을 끌어안았던 손을 풀어 제프리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는 괴로움에 얼굴을 찡그리더니 이내 가늘게 눈을 떴다.

    “정신이 들어?”

    내가 제프리를 향해 묻자 제프리가 나를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푸른 눈동자에 수정 빛이 반사되어 다시금 반짝거리는 듯했다.

    “어디야?”

    제프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는 신전의 수정 방에 대해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이 어디인지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듀아나 신전이야.”

    “여기가? ……으윽!”

    “일어나지 마. 너 아직 치료된 거 아니야.”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제프리가 괴로움에 신음을 흘렸다. 나는 그런 제프리를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맛보았다.

    다급히 제프리를 다시 자리에 눕혔다. 제프리는 고통 속에서도 누워 있는 것이 꽤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멋쩍게 웃었다.

    “웃을 때야?”

    “……아닌가?”

    내가 핀잔을 주자 제프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를 향해 눈을 흘기다가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도 깨어난 모습 보니까 좋네. 난 정말 네가 죽는 줄 알았어.”

    내가 작게 속삭이자 제프리가 실없이 웃었다. 그러다가 고통스러운지 또다시 신음을 흘렸다.

    “내가 널 두고 어떻게 죽겠어? 아직 약속 못 지켰는데.”

    “약속?”

    제프리가 언급한 약속이라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프리는 그걸 잊었냐는 듯 황당해하면서도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약속. 네가 어렸을 때 나한테 감자를 나눠 줬잖아. 내가 그걸 두 배로 갚는다고 했고.”

    나는 뒤늦게 어린 시절에 그런 대화를 나눴다는 것을 깨닫고 헛숨을 들이쉬었다.

    “그걸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어?”

    어차피 지나가며 했던 말일 뿐이었다.

    제프리가 그걸 계속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럼 잊어버리고 있었어?”

    “……응.”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아서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프리는 그런 날 빤히 올려다보다가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괜찮아. 내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미안.”

    “미안할 건 없지.”

    제프리는 짧게 대꾸하고는 다시 고통에 신음했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한동안 괴로워하던 제프리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그의 숨이 불규칙하게 떨리고 있었다. 고통 때문인 듯했다.

    “괜찮아?”

    “응.”

    제프리는 내가 걱정스럽게 묻자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괜히 그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매번 내가 그에게 부상 입으면 치료해 주겠노라 얘기했건만, 정작 그가 크게 다쳤을 때 도움이 되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미라벨.”

    문득 제프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를 주시하자 제프리가 허공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고작 감자 몇 알인데 왜 안 갚았는지 알아? 용병 생활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그 정도는 금방 갚을 수 있었는데 말이야.”

    제프리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게. 왜 그랬어? 제프리 너, 음식 빛은 절대 안 만든다고 했잖아.”

    원래대로라면 제프리는 내게 감자를 갚아도 한참 전에 갚았어야 옳았다.

    그런데 14년이 지난 후에야 굳이 이 얘기를 언급하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걸 갚으면, 널 만나러 갈 명분이 사라질 것 같아서.”

    “뭐? 그러지 않아도 넌 내 친구니까 찾아와도 됐는데…….”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중얼거리자 제프리가 픽 웃었다.

    “그냥 너랑 만날 구실 하나쯤은 만들고 싶었어.”

    “…….”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말하는 제프리를 보며 나는 옅게 미소를 흘렸다.

    그 순간이었다.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물론이고 제프리 역시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잠시 잠들었던 플레온 사제와 크라이튼 대공도 거칠게 울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성녀님, 플레온 사제님, 안에 계십니까?”

    밖에서 들려온 건 몇 번인가 신전에서 들어 본 사제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플레온 사제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플레온 사제도 딱히 짚이는 것은 없는 듯했다.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저도 갈게요. 저도 불렀잖아요.”

    플레온 사제가 문으로 향하며 말했다. 나 역시 플레온 사제를 뒤따랐다.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언제든 레피드를 소환할 준비를 마쳤다.

    문을 열자 평사제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달려왔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플레온 사제가 묻자 사제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라이넬 사제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뭐라고요?”

    플레온 사제는 사제가 꺼낸 말에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나도 사제가 꺼낸 말에 너무 놀라 헛숨을 들이쉬었다.

    “어디에 있어요?”

    나는 황급히 사제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일단 라이넬 사제를 만나고 볼 일인 듯했다.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사제가 왔던 길을 거슬러 가기 시작했다. 나와 플레온 사제 역시 사제를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부서진 잔해들이 채 치워지지 않은 곳에 어두운 안색의 라이넬 사제가 있었다.

    나는 재빠르게 라이넬 사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서 그의 곳곳을 살폈다.

    “라이넬 사제님?”

    내가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자 라이넬 사제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다크서클이 져 퀭한 두 눈은 생기를 잃은 듯 흐리멍덩하기만 했다.

    혹시나 그에게 악룡의 흔적이 새겨져 있을까 확인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보는 시야에는 악룡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악룡의 흔적이 새겨져 있지 않다면, 라이넬 사제가 직접 데이릭을 도왔다는 말일까?

    나는 그가 데이릭의 힘으로 인해 조종당했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그건 플레온 사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성녀님, 혹시 그에게서 악룡의 흔적은…….”

    플레온 사제가 다급히 나를 향해 물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볼 때는 없는 것 같아요.”

    “없다니…… 그 무슨.”

    플레온 사제 역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라이넬 사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라이넬 사제가 나와 플레온 사제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눈물을 글썽거렸다.

    “죄송합니다.”

    라이넬 사제는 그 말을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나는 황급히 쓰러지는 라이넬 사제를 받치며 그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혀 놓았다.

    “다시 한번 살펴 주십시오. 성녀님. 악룡의 흔적이 없을 리가 없습니다. 혹여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니 꼼꼼히 살펴봐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플레온 사제가 내게 간절히 부탁했다.

    “알겠어요.”

    나 역시 플레온 사제처럼 라이넬 사제에게 악룡의 흔적을 찾아내고 싶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의 말대로 라이넬 사제에게서 악룡의 흔적을 꼼꼼히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서 악룡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런데 차마 플레온 사제에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

    “성녀님?”

    플레온 사제는 내가 침묵을 유지하자 이상함을 느꼈는지 나를 불렀다.

    나는 윗입술을 깨물며 플레온 사제를 바라보았다.

    “발견했어요. 예상했던 대로 라이넬 사제님에게 악룡의 흔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런데……라니요?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까?”

    내 말을 따라 되묻는 플레온 사제를 보며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가슴에 새겨져 있어요. 플레온 사제님,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죠?”

    라이넬 사제의 옷 안쪽으로 악룡의 흔적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러나 레피드로 찔러 넣기 애매한 위치였다.

    악룡의 흔적을 발견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애매한 흔적의 위치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다리나 다른 곳이라면 악룡의 흔적을 지우며 신력으로 치료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 위치가 심장이라면?

    내가 레피드로 악룡의 상징을 지우면, 치료가 가능하긴 한 걸까?

    내가 난처해하며 플레온 사제를 바라보자 플레온 사제도 작게 침음을 흘렸다.

    “위험한 위치군요.”

    “네…….”

    플레온 사제는 내 말을 이해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일단은 안으로 들이도록 하죠. 그리고 그가 다른 짓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포박해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플레온 사제는 말을 마치고 주변에 있는 평사제들에게 부탁해 라이넬 사제를 그나마 남아 있는 실내로 이동시켰다.

    수정 방 근처에 그를 이동시킨 후, 두 팔을 뒤로 묶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나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플레온 사제의 옆에서 같이 침묵을 유지했다.

    우리에게 지금 꼭 필요한 사람이 돌아온 상황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고, 또 데이릭이 은신하고 있는 곳은 어디인지 알고 있는 주요 인물. 그리고 제프리를 치료할 중요한 인물이 돌아왔다.

    그러나 썩 긍정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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