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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77)화 (77/174)
  • 77화

    “설마 모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겠죠? 당신도 날 성녀라고 부르고 있으면서.”

    내가 대답하자 린제이 사제가 입이 찢어질 듯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대로 린제이 사제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당장 레피드를 소환했다.

    순식간에 손에 생긴 미려한 검의 모습에 린제이 사제가 돌연 겁을 집어먹은 듯이 낯빛이 창백해지더니 털썩, 두 무릎을 꿇었다.

    “성녀님, 왜 그러시는 거예요? 설마 그 검을 저한테 휘두르시려고요……? 잘못, 잘못했어요. 그러니 부디 자비를…….”

    아까는 나를 향해 비웃음을 보이더니 돌연 겁을 집어먹고 몸을 덜덜 떠는 린제이 사제의 모습이 의아했다.

    설마하니 비브르의 뼈로 만든 검이 무서워서 그러는 건가?

    알 수 없는 린제이 사제의 행동에 나는 신중을 기하며 그녀에게 천천히 걸음을 뻗었다.

    그때였다.

    “무슨 일입니까, 성녀님!”

    갑작스레 문이 열리더니 플레온이 다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검을 든 채 서 있는 나와 벌벌 떨며 눈물까지 흘리고 있는 린제이 사제를 번갈아 확인했다.

    아직 내가 아홉 살의 몸을 갖고 있기는 해도 플레온은 내가 과거에 이름깨나 날린 용병이었으며, 또한 제국의 검이라 불리는 브라이언에게서 검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반면, 내 앞에서 덜덜 떨고 있는 린제이 사제는 듀아나 여신의 신전 보육원에서 일하고 있는 사제였다.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린제이 사제가 왜 내가 검을 꺼낸 이후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한 건지 알 것도 같았다.

    “오해예요, 플레온 사제님”

    “플레온 사제님! 도와, 도와주세요. 갑자기 성녀님께서 제게 검을……!”

    침착한 내 목소리와 달리 린제이 사제의 목소리는 불안으로 인해 불규칙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연기가 맞나 싶을 정도로 애절하고 또 간절한 목소리였다.

    “성녀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플레온이 내게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에서 나를 향한 의심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내 쪽에 서서 린제이 사제를 경계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습격입니까?”

    “……비슷해요.”

    정확히는 습격이라고 하기 뭐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린제이 사제가 내게 뭔가를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단순히 비브르가 그녀를 보고 악룡 크립소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비브르의 말을 믿고 대체 언제 악룡 크립소의 힘을 받게 되었는지를 묻고 있었을 뿐이었다.

    “믿겠습니다.”

    “플레온 사제님! 어째서 제가 아니라 저분을 도와주시는 거예요?”

    애절한 목소리로 린제이 사제가 물었다. 플레온 사제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차분한 음색으로 대답했다.

    “성녀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뭐라고요?”

    린제이 사제는 플레온이 왜 나를 선택했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사실 나조차도 플레온 사제가 어떻게 단번에 내 편을 들 수 있는지 의아했다.

    어쨌든 나는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었고, 린제이 사제는 아마도 오랜 기간 듀아나 신전에 몸을 담아 온 사람일 터였다.

    그런데도 플레온 사제는 내가 단지 성녀라는 이유로 내 편을 들었다.

    무조건적인 그의 발언에 안도하기는 했지만, 조금 걱정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직도 이해를 못 하는군. 성녀님께서 레피드를 들고 있는 이상, 이건 성녀님만의 의지가 아니라는 뜻이야. 모르겠나?”

    ‘무슨 뜻이야?’

    나조차도 플레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브르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아마도 비브르라면 플레온의 말뜻을 이해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추측이 맞는다는 것을 증명하듯 비브르가 천천히 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미 말했지만, 레피드는 내 뼈로 만들어진, 세상에 하나뿐인 아주 특수한 검이란다. 악룡의 힘에 대항할 수 있으며, 또한 나의 의지와 함께하지. 고로 나의 의지가 없다면 미라벨, 너 역시 성녀라 하더라도 레피드를 사용하지 못할 거란다.]

    ‘그런 의미였구나.’

    나는 그저 성녀가 되면 악룡의 지배를 받는 자들과 싸우라고 준 검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검을 쓰기 위해서는 비브르의 용인이 필요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검을 사용한 것은 저택에서 남몰래 훈련할 때와 빈민가뿐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성자였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플레온은 이미 레피드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었다.

    이 자리에 플레온과 온 것이 다행이었다.

    다른 사제들과 왔다면 분명히 이 상황을 해명하기 위해 진땀을 뺐을 테니까.

    “성녀님, 그래서 이 상황이 어떻게 된 상황입니까?”

    내 편을 들어 주는 것과 별개로 플레온 사제는 상황을 받아들이지는 못한 것 같았다.

    “린제이 사제님이 악룡 크립소의 힘에 지배당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플레온 사제가 뒤늦게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그 이상으로 뭔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더 설명하는 대신 나는 플레온 사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내가 성녀가 된 이후로 악룡 크립소의 힘에 지배당하는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나보다 더 경험이 풍부한 플레온 사제라면 바로 내게 조언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원해서 악룡 크립소의 힘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면 어딘가에는 분명히 흔적이 남았을 겁니다. 그걸 공격하면 됩니다.”

    플레온은 마치 아침에는 아침을 먹는다는 듯한 어투로 내게 말했다.

    그러나 악룡 크립소의 흔적을 알지도 못하는 내가 그걸 빠른 순간 안에 캐치해 낼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소란을 듣고 달려온 몇몇 기사들이 내부를 확인하고는 혼란에 휩싸였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돌림노래와도 같이 도착하는 사람들마다 당황해서 상황설명을 요구했다.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일단은 다들 물러나 계세요.”

    다행히 플레온 사제가 성기사들에게 지시했다. 영문을 모르는 기사들은 플레온의 명령에 주춤거리며 한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문이 사람들로 인해 막혀 더 물러설 수가 없게 되었다.

    “성녀님, 린제이 사제에게서 이상한 점이 보이지는 않습니까?”

    플레온 사제가 내게 물었다. 그의 말을 따라 린제이 사제의 모습을 확인했다. 린제이 사제의 모습은 다른 사제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오른쪽에 불꽃같이 생긴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있어요. 불꽃같이 생긴 거 말씀하시는 거죠? 다른 사제들의 옷에서는 보이지 않던 건데.”

    “네, 맞습니다. 그걸 레피드로 잘라 내시면 됩니다.”

    “……해 볼게요.”

    우리가 자신을 공격할 듯 의견을 나누고 있으니 무릎을 꿇은 채 덜덜 떨고 있던 린제이 사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순히 잡힐 것 같아?”

    그 말을 끝으로 린제이 사제가 창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나는 황급히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녀의 속도도 매우 빠른 편이었지만, 그래도 못 따라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금세 따라잡은 나는 들고 있던 레피드를 린제이 사제의 어깨에 찔러 넣었다.

    “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퍼진 운동장을 울렸다.

    레피드의 칼날은 정확히 문양이 새겨진 곳에 박혀 있었다.

    이대로 된 건가 싶은 순간, 문양에서 검은색의 연기가 허공으로 피어올랐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스러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린제이 사제의 어깨에는 아무런 문양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상을 당한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지 어깨에 꽂힌 칼에 나직이 신음하며 몸을 떨고 있었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니었나?

    플레온 사제의 말처럼 린제이 사제의 어깨에 있던 문양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공격해야만 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공격은 그녀의 문양만 없애는 것이 아니라, 린제이 사제 본인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당연했다. 칼로 그녀의 어깨를 찌르는 일이었으니까.

    나는 아차 싶은 마음에 레피드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린제이 사제의 어깨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바로 치료해 드릴게요.”

    나는 황급히 린제이 사제의 어깨에 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고는 신력을 불어넣어 린제이 사제의 어깨를 치료했다.

    환하게 반짝거린 신령이 빠르게 상처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모든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는 편안해 보이는 얼굴로 잠든 린제이 사제만 남아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는 부상의 흔적으로 혈흔이 남아 있었지만, 벌어진 옷 틈으로는 매끈하게 치료된 그녀의 어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성녀님!”

    뒤늦게 플레온 사제와 성기사들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플레온 사제를 올려다보았다.

    “말씀하신 대로 했어요. 그리고 린제이 사제의 부상도 치료했고요.”

    천천히 바깥에서 있었던 일을 플레온 사제에게 설명했다.

    플레온 사제는 다행이라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락되어서 다행입니다. 길버트 경, 레일 경.”

    플레온 사제가 성기사 두 명을 불렀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성기사 두 명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와 본인임을 알려 주었다.

    “린제이 사제를 병동으로 데려가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두 성기사가 린제이 사제를 데려가는 모습을 확인했다.

    일단 내가 치료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린제이 사제에게 대체 언제부터 악룡의 힘에 사로잡혔던 건지 확인 부탁드릴게요.”

    “예, 그리하겠습니다. 놀라셨을 테니 일단 자리를 옮는 게 낫겠군요.”

    “네.”

    플레온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 걸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에 플레온 사제를 바라보았다.

    뭔가가 허전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데이릭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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