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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76)화 (76/174)
  • 76화

    플레온 사제가 흔쾌히 수락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역시 플레온 사제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성녀님과 함께 데이릭이라는 아이를 만나러 가 보겠습니다.”

    “그래, 잘 안내해 드리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바론 대주교를 향해 인사한 후 곧장 플레온을 따라나섰다.

    플레온은 그동안 가지 않았던 큰 복도를 지나 야외와 이어진 간이 복도로 나를 안내했다.

    어디로 가는 건가 싶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를 따라갔다.

    걸어가면 갈수록 어디선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플레온 사제에게 물었다. 플레온 사제는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신전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으로 가는 길입니다.”

    “아, 이 길이요?”

    이쪽으로 오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편안히 주변을 둘러보며 길을 감상했다.

    간이 복도에서는 잘 꾸며진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뿐만이 아니라 멀리 보이는 운동장에는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운동장에서 들려왔던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아무런 근심도 없이 뛰어노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어렸을 때 방황하지 않고 신전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 들어갔다면 그때와는 다른 삶을 살았을까?

    그랬다면 확실히 어려서부터 힘들게 용병으로 살아가는 일은 없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살았던 그 미래를 겪은 후에야 나는 과거로 돌아와 모든 것을 되돌릴 기회를 얻었으니까.

    새로 얻은 기회로 엄마를 살릴 수 있었으니 나는 그걸로도 만족했다.

    ‘그런데 비브르.’

    [무슨 일이냐?]

    내 말에 내내 조용하던 비브르가 대답했다.

    ‘왜 그렇게 조용해?’

    [그냥 조금 찜찜한 기분이 드는구나.]

    ‘찜찜한 기분?’

    그럴 일이 있나?

    모든 것이 순조로운 상황이었는데 비브르가 찜찜하다고 하니 오히려 나는 의아했다.

    물론 다니엘이 이미 어느 정도 악룡 크립소의 봉인을 풀어 낸 것은 사실이었으니 이대로 안주할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악화될 일은 없으니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지 않을까?

    [모든 것이 너무 순조롭구나. 순풍에도 파도는 친다고, 이렇게 잘 풀리기만 하는 일은 내 긴 기억 속에서도 많지 않았단다.]

    ‘혹시 일이 잘못될까 봐 그러는 거야?’

    [그래.]

    비브르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브르가 무엇을 불안해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일이 너무 잘되면 오히려 불안한 법이었다. 언제 넘어질지 모르니까.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볼게.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바로 대처할 수 있게. 그리고 나도 훈련이나 수련하는 건 멈추지 않을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나는 최대한 비브르를 안심시키기 위해 차분하게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도 다니엘을 처리하기 전까지 내가 하는 일들을 멈출 생각이 없으니까.

    [그래, 그렇게 말해 주니 안심이 되는구나.]

    비브르가 내 뺨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비브르가 닿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곁눈질로 비브르가 하는 행동은 확인할 수 있었다.

    “혹시 비브르 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어떻게 알았는지 플레온 사제가 내게 물었다.

    “네. 일이 너무 잘 풀려서 찜찜하대요.”

    “그렇군요.”

    내가 전해 준 말에 플레온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 제게 남아 있는 다른 시간대의 기억 속에서 비브르 님과 저는 계속 실패만 겪었으니까요.”

    한탄을 하듯 플레온 사제의 목소리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꼭 방금 전 비브르의 목소리처럼.

    “그러다가 성녀님께서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이 모든 것을 바로잡지 않으셨습니까?”

    플레온 사제나 비브르나 지난 일에 대한 죄책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의 플레온 성자는 자신의 힘을 다해 비브르를 나에게 전달해 주었고 비브르는 그때의 기억으로 나를 이끌어 주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나는 플레온 사제의 생각을 부정하거나 위로하는 대신 플레온 사제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의 손에는 연륜이 가득 묻어 있는 듯했다.

    플레온 사제는 내가 손을 잡자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대화를 마치고도 플레온 사제를 따라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갔다. 그러자 작은 건물 하나가 나타났다.

    “이곳이 보육원을 관리하는 건물입니다. 저기 있는 별채가 아이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죠.”

    플레온 사제의 소개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보육원의 관리 건물로 향하는 것을 본 몇몇 아이들이 먼발치에서 졸졸 따라오는 게 보였다.

    나는 몸을 돌려 아이들을 향해 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몇몇 아이들이 나를 따라 가볍게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곧 실내로 들어가는 바람에 아이들의 모습을 더 볼 수는 없었다.

    “이 안으로 들어가시면 금방 데이릭을 데려오겠습니다.”

    보육원 상담실 앞에 멈추어 선 플레온 사제가 내게 말했다.

    “네. 부탁할게요.”

    내 대답을 들은 플레온 사제가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상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내부와 몇 개의 테이블, 의자가 놓여 있는 게 딱 용도 그대로의 방인 듯했다.

    나는 의자 하나를 빼 앉았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벌써 플레온 사제가 돌아온 건가 싶어서 문을 바라보았다.

    “성녀님, 보육원을 관리하는 린제이라고 합니다.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네, 괜찮아요. 들어오세요.”

    내가 허락을 내리자 문이 열리고 백금발에 사제복을 입은 여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성녀님. 여신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사제 린제이입니다. 성녀님을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린제이 사제가 나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여신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미라벨 크라이튼입니다.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나 역시 린제이 사제를 향해 인사했다.

    “저 때문에 서 계시지 않아도 돼요. 참, 기다리시는 동안 마실 거라도 가져다드릴까 싶어서 찾아온 건데요. 어떤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상냥하게 웃으며 말하는 린제이 사제의 모습에 나는 의자에 앉으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물 한 잔만 부탁드릴게요. 목이 좀 말라서요.”

    “네, 알겠습니다.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린제이 사제가 물을 가지러 잠시 상담실을 나섰다.

    [미라벨.]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사이에 비브르가 나를 불렀다.

    “왜 그래?”

    아까 시무룩했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비브르는 무언가를 경계하듯 낮게 깔린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방금 나간 사제, 악룡 크립소에게 지배받는 인간이구나.]

    “뭐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입을 가렸다. 만약 비브르가 말한 것처럼 린제이 사제가 악룡 크립소에게 지배받는 자라면 그녀가 도망가기 전에 잡아야 할 것 같았다.

    ‘사실이야? 확신할 수 있어?’

    [그래.]

    ‘하지만 린제이 사제는 듀아나 여신을 모시는 신전의 사제인데? 그게 가능한 거야?’

    비브르의 말을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선뜻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기에 비브르에게 다시금 질문했다.

    [나도 확신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단다. 분명히 그녀에게는 듀아나 여신님의 신력이 존재하고 있으니까. 근데 그녀가 이 방에 들어오는 순간, 악룡 크립소의 냄새가 났다. 그건 악룡 크립소에게 지배된 자들에게서 나는 냄새야.]

    나는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했지만, 비브르는 그 짧은 사이에 린제이 사제에게서 신력과 악룡의 기운을 동시에 감지한 듯했다.

    [하지만 이상하구나. 여신님의 신력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그녀에게 악룡 크립소의 힘이 깃든 걸까?]

    ‘글쎄, 그건 직접 알아봐야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은 어제 듀아나 신전의 보육원으로 들어오게 된 데이릭이었다.

    만일 비브르의 말처럼 린제이 사제가 악룡 크립소에게 지배받는 자가 되었다면, 그 사이에 접촉했을 데이릭이 유일한 용의자가 될 것이었다.

    똑똑,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언제든 검을 불러낼 준비를 마치고 문을 응시했다.

    “성녀님?”

    “들어와요.”

    “네.”

    대답이 들리고 곧 문이 열렸다. 작은 쟁반 위에 물잔을 들고 온 린제이 사제가 조용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 앞에 물잔을 내려 주었다. 언뜻 마주쳤을 때 보인 눈웃음이 참 매력적이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다가 그녀와 같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어때? 아직도 그렇게 느껴져?’

    [……그래. 틀림없어.]

    비브르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대답하기까지 공백은 있었지만, 대답만큼은 확신을 담고 있었다.

    비브르가 내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테니 린제이 사제는 틀림없이 악룡 크립소에게 지배되는 자일 터였다.

    “그런데 린제이 사제님.”

    “네?”

    “대체 언제…… 악룡의 힘에 어떻게 감염되신 거예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린제이 사제를 향해 물었다.

    린제이 사제는 내 말에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방금 전 온화하게 웃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냉정하고 싸늘한 시선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시선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였다. 비브르의 판단이 정확했다. 린제이 사제는 악룡 크립소에게 지배받는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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