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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5)화 (15/174)
  • 15화

    “그러고 보니 바예프 후작가의 영식이 이제 열여섯 살쯤 되었다는데, 그쪽과 결혼으로 인연을 맺으면 크라이튼 대공가의 권세가 더욱 공고해지겠지.”

    다니엘을 크라이튼 대공에게 안내하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 문을 두드리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바예프 후작가가 아니라면 칼리드 백작가도 괜찮지. 이거 하나하나 꼽다 보면 열 손가락을 넘기겠군, 그래.”

    그러나 물건 판매처를 정하듯 계속해서 어디의 어떤 귀족 자제와 어떻게 연결하면 좋을지를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다니엘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은 꽤나 역겨웠다.

    따지고 본다면 나는 고작 아홉 살짜리 어린 여자애였다.

    벌써부터 결혼을 생각하기에는 10년은 더 이른 나이였다.

    게다가 다니엘은 내 부모님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나를 품평하며 어느 집안의 어떤 자제들과 엮어 줄지 생각하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쩌면 다니엘은 이미 먼 미래에 크라이튼 대공가를 점령하고, 나를 정치적으로 팔아먹을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고서야 저런 말들을 자연스럽게 내뱉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이만 괜찮다면 조르주 공작도 나쁘지는 않아.”

    도저히 못 들어 주겠다고 생각해서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러고는 다니엘을 돌아보며 쏘아 주려는 찰나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작은할아버님?”

    다니엘이 망상 속에서 나를 어떤 사람과 엮어 줄지 고민에 빠진 사이, 누군가가 다가와 다니엘의 망상을 깨트렸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반대편 복도에서 흐트러진 차림새를 한 엘리엇이 걸어오고 있었다.

    어제, 그리고 오늘 보았던 엘리엇의 부드러운 이미지와는 달리 불쾌한 듯 정색한 얼굴이 무척 사납게 보였다. 그 모습이 흡사 브라이언의 모습과 닮아 있어 나는 잠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미라벨은 이제 아홉 살인데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조르주 공작님의 슬하에는 자제가 없는 것으로 아는데, 설마하니 미라벨의 혼처로 조르주 공작님을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엘리엇은 똑바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더니 나를 제 등 뒤에 숨기듯이 다니엘의 앞에 섰다.

    그제야 엘리엇의 옷이 땀에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 머리도 단정했던 아침과 달리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는 모양새였다.

    아침에 없던 훈련을 받게 생겼다 싶더니 훈련을 끝마치고 저택으로 막 들어온 것 같았다.

    “조르주 공작님의 연세를 잊으셨나 보군요. 작은할아버님께 기억력에 좋은 약재를 선물로 드려야 할 듯싶습니다.”

    “…….”

    다니엘은 경계하는 엘리엇을 보며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퍽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엘리엇, 네가 잘못 들었나 보구나. 혼처를 대신하여 알아볼 사람으로 조르주 공작을 언급했던 거란다. 조르주 공작이 원체 발이 넓으니 미라벨에게 어울리는 사람을 소개해 줄 수도 있겠지. 내가 좋은 의도로 말한 걸 네가 왜곡하니 너무 슬프구나.”

    다니엘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엘리엇은 조금도 믿지 않는 눈치로 다니엘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좋은 의도셨다고 하니 방금 하신 말씀들을 아버님과 대공 각하께 전달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다니엘은 그런 엘리엇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려무나.”

    “예. 그리고…….”

    말꼬리를 흐린 엘리엇이 나를 돌아보았다.

    엘리엇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미라벨이 왜 작은할아버님을 안내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요. 이것도 제가 잘못 본 겁니까?”

    “아니야. 작은할아버님께서 할아버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해 달라고 하셨어.”

    혹시라도 다니엘이 끼어들 새라 얼른 엘리엇에게 말했다.

    엘리엇은 내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인을 시키지 않고?”

    “미라벨이 형님이 계신 곳을 알고 있어 그랬단다. 내가 이것까지 네게 설명을 해야겠느냐?”

    “……하지만 이제 이 저택에 발을 들인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미라벨에게 안내를 받으시는 건 무리가 있지 않습니까? 미라벨이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을 안내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엘리엇이 걱정하는 듯 말했지만, 딱히 다니엘을 걱정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다니엘 역시 이 사실을 알고는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나야 이 저택에 한두 번 오는 게 아니니 길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 굳이 미라벨이 안내해 드리지 않아도 되겠군요. 미라벨, 네 방 준비가 다 끝났다는 연락을 받았어. 이 저택에 익숙하지 않을 테니 내가 네 방까지 안내해 줄게.”

    엘리엇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직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엘리엇의 손에는 굳은살이 투박하게 박여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내게 보인 친절만큼은 거칠고 딱딱하지 않았다.

    크라이튼 대공 저로 들어오고 난 이후로 불편하고 어색함만 느껴졌던 것이, 엘리엇으로 인해 조금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미라벨?”

    내가 손을 잡지 않고 보고만 있으니 엘리엇이 나를 불러 재촉했다.

    나는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엘리엇은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며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안내는 바든에게 받으셔도 될 것이라 사료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고개를 숙여 다니엘에게 정중히 인사한 엘리엇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엘리엇의 손에 이끌려 가며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서 다니엘이 눈을 가늘게 좁혀 뜬 채로 나와 엘리엇을 주시하고 있었다.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로 그리 쳐다보고 있으니 흡사 먹잇감을 놓친 뱀과도 같아 보였다.

    엘리엇은 한참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오른 이후에야 내 손을 놓아 주었다.

    아직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계단을 빠르게 오른 것만으로도 숨이 차올랐다.

    벽을 짚고 고개를 숙인 채로 숨을 고르고 있으니 엘리엇이 쭈뼛거리며 내 옆으로 다가와 등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미안. 많이 힘들었어?”

    몇 번이나 숨을 들이쉬고 내쉰 후에야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상체를 일으켰다.

    “아니, 괜찮아. 오히려 아까 더 숨이 막혔는걸.”

    한결 상쾌한 기분으로 엘리엇을 보았다. 힘들어서 몇 번이나 숨을 헐떡인 나와는 달리 엘리엇은 멀쩡해 보였다.

    “아까는 정말 고마웠어.”

    “작은할아버님과의 일 말이지?”

    엘리엇이 짐작한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긍정의 뜻을 내비쳤다.

    “응.”

    “이건 내 의견이지만, 작은할아버님과는 가급적이면 접촉하지 않는 게 좋아.”

    엘리엇은 내가 더 이상 숨을 헐떡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앞장서서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따라가며 슬쩍 엘리엇의 얼굴을 확인했다.

    크라이튼 대공의 반응이나 엄마의 반응만 보았을 때는 다들 다니엘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듯이 보였는데, 엘리엇만은 다른 반응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어른들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작은할아버님은 가끔씩 좀…… 의뭉스럽거든.”

    중간에 말을 멈추고 몇 번이나 단어를 골라내듯 입술을 달싹이던 엘리엇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엘리엇의 걸음은 엄마의 방에서 오른쪽 두 번째 방 앞에서 멈추었다. 우리를 따라온 하인이 먼저 앞으로 나와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어 주었다.

    소리도 없이 열린 문 너머로 푸른색의 벽지가 가장 먼저 우리를 반겼다.

    안으로 들어서니 파란색과 하늘색, 그리고 하얀색의 소품들이 화려하게 장식된 내부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의 방과는 달리 시원하고 상쾌한 느낌을 주는 방이었다.

    “네 방이야.”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방을 둘러보다가 족히 사람 다섯 명은 누워도 남을 법한 커다란 침대에 엉덩이를 걸쳤다.

    사실 침대 높이가 높은 편이라 올라가기 위해서 한 번 폴짝 뛰어야 했다.

    어쨌든 침대는 어제 하루 사용했던 엄마의 방 침대와 마찬가지로 솜털에 앉은 듯이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어때? 마음에 들어?”

    “응. 정말 마음에 들어.”

    내가 아직 크라이튼 대공가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게 어렵다고 하더라도 나를 위한 방, 그것도 최고급으로 꾸며진 방이 생겼다는 게 싫지는 않았다.

    나는 몇 번이나 침대 위의 푹신함을 만끽하다가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엘리엇을 바로 주시했다.

    “근데 엘리엇 넌 왜 다니엘이 의뭉스럽다고 생각한 거야?”

    “왜겠어? 아까 너한테 했던 것과 비슷한 이유 때문이지.”

    엘리엇은 어깨를 한 번 으쓱 추어올리고는 근처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 나를 마주 보듯 앉았다.

    “주변에 어른들이 없으면 작은할아버님과는 단둘이 있지 마. 사용인들도 작은할아버님께는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거니까, 사용인들만 있으면 자리를 피해. 괜히 같이 있다가 안 좋은 소리 듣지 말고.”

    엘리엇은 아무래도 다니엘에게 뭔가 된통 당한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거기서 또 의문이 하나 생겼다.

    엘리엇이 다니엘을 이토록 경계하는 일이 있었다면, 어른들이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엘리엇은 크라이튼 대공의 적손이었고, 브라이언에게는 하나뿐인 자식이었다.

    두 사람이 엘리엇에게 소홀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 엘리엇이 뺨을 긁적였다.

    “나도 너랑 비슷한 문제야.”

    “결혼?”

    “응.”

    고개를 끄덕인 엘리엇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원래 우리들의 결혼이라는 게 집안 대 집안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기는 하지만, 작은할아버님은 이상할 정도야. 마치…….”

    “팔아 치우려는 것처럼?”

    내 직설적인 표현에 엘리엇이 조금 얼떨떨해하다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근데 미라벨 너 진짜 아홉 살 맞아?”

    엘리엇이 황당해하며 물었다. 대답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 추어올린 후 엘리엇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야 성인이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더욱 불쾌하게 받아들인 거였다.

    만일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진짜 아홉 살짜리 어린아이였다면, 다니엘이 하는 말의 반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었다.

    어쩌면 내가 불쾌하게 여기더라도 그게 왜 불쾌한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데 엘리엇은 나처럼 다니엘의 말을 불쾌하게 여겼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그 정도는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려서 그런 걸까?

    내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엘리엇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조금 알 것도 같아졌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혹시나 하고 찔러 보자 엘리엇이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목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응. 있어.”

    “누군데?”

    “있어. 제니엘 슈페른이라고.”

    엘리엇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사춘기 소년의 풋사랑을 알아차리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내가 놀라는 모양새를 확인하고는 엘리엇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비밀이야.”

    엘리엇은 그 말만 남기고 방을 떠나 버렸다. 나는 방에 홀로 남아 내가 아는 미래에 엘리엇과 제니엘 슈페른이라는 사람이 잘 되었는지를 떠올렸다.

    다행히 기억 저편에서 크라이튼 소공작이 슈페른 백작가의 영애와 결혼을 올렸다는 내용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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