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4)화 (14/174)
  • 14화

    나는 문 앞에서 대기하던 하녀를 따라 방으로 향하며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크라이튼 대공과 마찬가지로 브라이언은 다니엘을 경계하지 못했던 걸까?

    설마하니 브라이언이 다니엘의 편이 되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브라이언은 크라이튼 대공의 적자였다.

    크라이튼 대공이 아무런 변고 없이 죽음을 맞이한다면 크라이튼 대공의 유산과 지위, 그 모든 것들이 브라이언에게 상속될 예정이었다.

    그러니 굳이 다니엘과 손을 잡을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다니엘과 손을 잡고 자신의 몫을 분할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게다가 브라이언이 쥐고 있는 것들이 적은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브라이언은 크라이튼 대공의 자식이었으며, 젊었을 적 마물과의 커다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승전의 주역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그런 브라이언에게 공작이라는 작위를 내려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가 다스릴 영지까지도 보상으로 내어 주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가 수도와 국경 지대를 오가는 탓에 영지는 따로 사람을 두어 관리하는 듯했으나, 어쨌든 중요한 건 그에게 크라이튼 대공을 죽일 만한 동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크라이튼 대공과 브라이언의 사이가 나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비록 10년 만에 돌아온 엄마에게 향하는 것만큼 커다란 애정을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크라이튼 대공과 브라이언 사이에는 깊은 신뢰와 애정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였다.

    오늘 아침 식사 자리에서 보았던 그들의 대화를 생각해 보면, 내가 이런 추측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들의 대화는 스스럼없었으며, 자연스러웠고, 즐거워 보였다.

    그런 크라이튼 대공과 브라이언의 사이를 의심하는 것부터가 맞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브라이언은 다니엘이 크라이튼 대공가를 장악하는 그 순간까지 모든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까?

    아주 틀린 추측은 아닐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그는 일 년 중 절반이 넘는 날 동안 항상 국경 지대에 머물렀으니까.

    브라이언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다니엘이 이 저택을 장악하고 모든 것을 계획했던 거겠지.

    물론 내 추측이 백 퍼센트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보았던 상황을 모두 조합하면, 다니엘 크라이튼만이 대공가의 적이라는 결말만 도출되었다.

    창으로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복도를 지나, 왼쪽 모퉁이를 끼고 돌아 정면으로 걸으면 우리가 처음 저택에 들어온 현관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인과 하녀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그렇게 서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익숙한 대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저택으로 들어올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멀찍이 떨어져서 그곳을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얼굴을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그의 뱀처럼 교활하게 치켜 올라간 눈매를 머릿속에 각인해 두었다.

    나를 죽이고, 크라이튼 대공을 죽였으며, 엄마의 희망을 철저히 짓밟고 부수었던 남자.

    다니엘 크라이튼.

    “오셨습니까, 다니엘 님.”

    가장 앞에 서 있던 집사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다니엘을 반겼다.

    다니엘은 익숙하게 모자를 벗어 집사에게 넘겼다. 곧 하인 한 명이 그의 뒤로 다가가 코트를 벗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렇게 가벼운 차림이 된 다니엘이 문득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못 보던 아이인데…….”

    “큰 아가씨의 따님입니다.”

    의아해하는 다니엘을 향해 모자를 받아 들었던 집사가 설명을 덧붙였다.

    “오오, 그래. 코넬리아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는데, 이렇게 귀여운 딸이 있다는 소식은 미처 듣지 못했구나.”

    감탄하는 어투로 말한 다니엘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엄마의 편지에 내가 언급이 안 되어 있을 리가 없다.

    엄마의 편지는 용서를 구하는 내용도 있었지만 엄마가 만약 피치 못하게 눈을 감을 경우, 무엇보다 나를 보살펴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을 테니까.

    그 편지를 모조리 빼돌린 다니엘이 내 존재를 몰랐다고?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태연히 나와 눈을 맞추며 거짓말하는 다니엘을 보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니엘은 내가 그를 경계하는지 상관하지 않고 부드럽게 눈을 휘어 웃으며 무릎을 굽혀 앉았다. 마치 나와 눈높이를 맞추려는 것처럼 보였다.

    “코넬리아의 딸이면 내가 네 작은할아버지가 되겠구나. 아이야, 이리로 오련?”

    “…….”

    두 팔을 벌려 나를 안아 주기라도 할 기세인 다니엘을 보며 나는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 있기만 했다.

    그가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건지 뻔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어린아이처럼 그에게 안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말없이 다니엘을 경계하고만 있자 다니엘이 난처한 듯이 웃음을 흘렸다.

    “낯을 많이 가리는 아이인가 보군. 오늘 안에 친해지긴 글렀나 봐. 안 그런가, 바든?”

    다니엘이 옆에 있는 집사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작은 아가씨께서 저택에 오신 지 겨우 하루밖에 되지 않으신걸요. 아직 낯설어서 그러실 겁니다.”

    집사는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을 마쳤다. 다니엘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제 도착했다고 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곧 다니엘이 포기한 듯이 펼쳤던 손을 회수했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았다.

    여전히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럼 아이야,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려 주지 않으련? 나는 네 어머니 코넬리아의 작은아버지란다. 아니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못 알아들으려나? 그래, 네 할아버지의 동생이란다. 이름은 다니엘 크라이튼이지.”

    다니엘의 찢어진 눈매는 웃을 때만큼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인자해 보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사람 좋은 듯이 웃는 그의 얼굴은 마치 길거리에서나 볼 법한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마도 내가 미래를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분명히 다니엘의 미소에 넘어갔겠지.

    간사하게도 저런 웃음으로 크라이튼 대공을 안심시켰던 걸까?

    저런 인자하고 다정한 얼굴로 굽신거리니 크라이튼 대공이 의심조차 하지 못했던 거겠지.

    생각만 같아서는 그런 다니엘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나는 일단 그의 장단에 맞추는 쪽을 선택했다.

    “……할아버지의 동생이요?”

    나는 아직도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이 저택에서 다니엘의 수족을 찾기 위해서는 다니엘과 그 수족들이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라고 생각해 주는 게 편할 테니까.

    “그래. 그러니 너무 겁먹을 필요 없단다.”

    나는 다니엘의 말에 내 뒤의 하녀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하녀는 내 눈빛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웃었다.

    “맞습니다. 크라이튼 대공 각하의 동생분이셔요.”

    나는 그제야 안심한 듯이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니엘을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내가 어린 몸인 게 참 답답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처럼 다니엘의 앞에서 순진한 척하고 있기에는 이 몸이 제격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미라벨이에요.”

    기어가는 목소리로 나를 소개했다.

    “미라벨이구나. 이름이 정말 잘 어울린다. 코넬리아가 지어 줬느냐?”

    “엄마랑 아빠가 같이 고민해서 지었다고 했어요.”

    “아빠라면…… 그 기사 말이군. 뭐, 어쨌든 이리로 오련?”

    다니엘의 부름에 내가 쭈뼛거리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가 그의 앞에 서자 다니엘이 흐뭇하게 웃으며 큰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무의식중에 그의 손길을 피하고는 아차 싶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적당히 그의 장단에 맞추려고 했는데 반사적으로 불쾌한 기분이 들어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낯을 가리는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다니엘도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을 터였다.

    그 말을 증명하듯 다니엘이 손을 회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다, 미라벨. 앞으로 자주 보게 되겠구나.”

    “……네에.”

    “참, 네 할아버지를 만나러 왔는데, 할아버지가 어디 계신지 아느냐?”

    다니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안내해 주겠니? 네 안내를 받아서 가면 더 좋을 것 같구나.”

    굳이 나한테?

    나는 의아함을 지우지 못하며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하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방금 크라이튼 대공을 만나고 나온 후였으니 곧장 그 길을 거슬러 가는 거야 금방이었다.

    하지만 길 안내를 굳이 나를 시킨다는 점에서 좀 의아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다시금 고개를 들어 하녀를 돌아보았다. 내 대신 하녀를 시켜도 되지 않느냐는 의미였지만, 하녀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다니엘 님께서 작은 아가씨와 친해지고 싶으신가 봐요.”

    “나랑?”

    “네.”

    “그렇단다, 미라벨. 그래서 네게 부탁하는 거야. 형님께 안내해 주겠느냐?”

    다니엘마저 하녀의 추측이 맞는다고 거들자 나도 딱히 거절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앞에 서서 걷기 시작했다.

    “어릴 적 코넬리아의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구나. 그래도 낯을 많이 가리는 건 코넬리아와는 딴판이야. 아직 이곳이 어색해서 그런가?”

    “작은 아가씨께서도 금방 익숙해지실 겁니다.”

    “그래, 뭐. 이제 하루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동안 평민으로 지내다 이런 화려한 곳에 왔으니 얼마나 놀랍겠나. 촌티를 벗으려면 적어도 몇 달은 걸려야겠지. 그래도 얼굴이 예쁘장하니 관리만 잘하면 남자들 꽤 울릴 법하게 자라겠군.”

    다니엘의 무례한 평가에 집사는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그의 말이 무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히 다니엘의 언행을 지적할 용기가 없는 탓이었다.

    나 역시 그의 말을 들으면서 불쾌하고 수치스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우선은 속으로 꾹꾹 참아 냈다.

    수치심에 대한 앙갚음이나 화풀이는 나중으로 미뤄도 충분했다.

    먼저 다니엘의 명령을 받아 편지를 빼돌린 배신자를 찾아야 했다.

    크라이튼 대공, 그리고 브라이언이 나를 더 신뢰하게 되었을 때 다니엘의 계략을 낱낱이 밝혀내며 지금의 무례에 대해 따져 물어도 늦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