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4/22)
  • 3.

    한량처럼 소파에 길게 누워 뒹굴거리던 박성범은 6시가 다 된 것을 보고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직 학교야?]

    [ㅇㅇ]

    [6시 반까지 데리러 갈게♥]

    [ㅇㅇ]

    [사랑해♥♥♥]

    잠깐 기다렸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문자를 보고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재경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슬슬 외출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몸을 일으키는데 띠링, 하고 한발 늦게 핸드폰 알림음이 울렸다.

    [나도]

    [이제 문자 그만보내]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잠시 후에 집을 나선 박성범은 학교 도서관 앞 주차 구역에 차를 댔다. 계단 위 출입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으니 정확히 6시 30분에 재경이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짧게 클랙슨을 울리자 재경이 차를 발견하고는 다가와서 조수석에 올랐다. 박성범은 곧바로 출발하는 대신 핸들에 손을 걸친 채 옆을 바라보며 물었다.

    “안 피곤해?”

    “조금.”

    역시나 이재경은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오늘 아침, 지난밤에 미처 즐기지 못했던 월풀 욕조에서 몸을 풀고 체크아웃한 뒤에 박성범은 집으로 차를 몰았다. 그런데 거의 다 왔을 무렵, 재경이 학교 앞에서 내려달라는 말을 꺼냈다.

    ‘진짜 학교에 갈 거야?’

    믿을 수가 없어서 계속 되물은 질문에 재경은 쿨하게 그렇다고 대답했고, 도서관 앞에 차를 세우자 망설임 없이 안전 벨트를 풀었다.

    재경이 차에서 내리기 직전, 갑자기 떠오른 사실에 박성범은 오늘 저녁을 같이 먹자고 다급하게 말했다. 이번에도 쿨하게 오케이한 재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서관 계단을 올라갔다.

    덕분에 박성범은 한순간 짝을 잃은 외기러기 신세가 되어 혼자 집에 갔다가 저녁 약속 시각에 맞춰서 재경을 데리러 온 참이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 근처에 다다랐다. 차는 지하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경사로로 진입했고, 잠시 후 박성범은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문이 열리자 꽤나 어두운 복도가 나타났다.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남자에게 본인의 이름을 댄 뒤에 박성범은 재경의 손목을 가볍게 이끌며 안쪽으로 걸어갔다.

    복도를 따라서 몇 개의 문이 나 있고, 쿵쿵대는 음악 소리도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흡사 노래방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에 재경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박성범에게 물었다.

    “제대로 온 거 맞아?”

    “맞아.”

    잠시 후 어느 한 곳의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들이 두 사람을 반겼다.

    “왔어?”

    “어서 오세요!”

    함께 나타난 두 사람을 보면서 저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문가에 앉아 있던 김성욱이 기다렸다는 듯 불만 아닌 불만을 토로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원래 주인공은 제일 늦게 등장하는 거야.”

    “생일이니까 봐준다. 야, 얼른 초에 불부터 붙여.”

    말은 그렇게 하면서 정작 몸을 일으킨 사람은 김성욱이었다. 종이봉투 안에 든 성냥을 꺼낸 김성욱은 단번에 불을 붙여서 케이크 위에 꽂아둔 양초에 갖다 댔다. 이어서 생일 축하 노래를 선창하기 시작했다.

    “뭐 해. 빨리 불어.”

    모두의 시선이 재경을 향했다. 갑자기 쏟아지는 시선에 당황해하다가 일단 재경은 김성욱이 시키는 대로 촛불을 불어 껐다. 이어서 김성욱은 다 같이 준비했다며 제법 커다란 쇼핑백을 재경에게 건넸다.

    “그럼 얼른 밥부터 먹자. 배고파서 눈 돌아가는 줄 알았어.”

    테이블 위에는 피자와 치킨, 파스타 등이 푸짐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다들 경쟁이라도 하듯 식사를 시작했고, 재경도 뒤늦게 젓가락을 움직이다가 때를 봐서 박성범에게 물었다.

    “애들, 네가 부른 거야?”

    “맞아.”

    “그럼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그랬어.”

    박성범이 그 말을 듣고 귀엽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서프라이즈 파티를 당사자한테 미리 말해주는 경우도 있어?”

    그건 그렇긴 한데…….

    “얼른 먹어. 김성욱 미쳤다 지금.”

    고개를 돌려 보니 김성욱이 ‘존나 맛있어’를 연발하며 그릇까지 먹어치울 기세로 파스타 면발을 흡입하고 있었다. 이거 먹어 봐. 박성범이 내미는 피자 조각을 받아들면서 재경은 다시 물었다.

    “음식은 시킨 거야?”

    “어. 미리 주문하면 시간 맞춰서 세팅해 주더라고. 밥 먹고 장소 또 옮기는 것보다는 한 번에 하는 게 편할 것 같아서 여기로 골랐어.”

    음료수를 마시려던 김성욱이 마침 속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고 말을 걸었다.

    “뭔 대화를 둘이서만 그리 심각하게 하냐?”

    “좀 이따 게임 하면서 너 물 먹일 계획 짜고 있었어.”

    그 말에 김성욱은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이것들이 내 무서움을 모르네. 오늘 한번 달려봐?”

    “콜. 판돈 걸 거야?”

    “당연한 거 아님?”

    “덕분에 대여 비용 벌겠네.”

    “닥쳐.”

    탁구공처럼 오가는 대화를 재경은 잠시 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끝나자 박성범은 파티 룸 구석에 있는 수납장에서 보드 게임 하나를 골라 가져왔다.

    재미로 가볍게 시작했을 땐 언제고, 시간이 흐를수록 팽팽한 긴장감이 차올랐다. 각자 세 장의 카드를 손에 쥔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말을 제일 먼저 탑 꼭대기 층에 올리기 위해서 두뇌를 풀가동했다.

    또다시 한 바퀴를 빙 돌아서 재경의 차례가 다가왔다. 입가가 슬며시 상승 곡선을 그렸다. 모형 탑 상단부에 놓인 자신의 말 위치를 확인한 재경은 쥐고 있던 카드 중 초록색 카드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짧게 한마디 했다.

    “끝.”

    “뭐? 끝이라고?”

    다음 차례를 기다리던 김성욱의 입에서 새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재경이 내려놓은 카드와 탑 위의 말을 서둘러 확인하고는 세상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와 씨, 나도 이거만 털면 끝이었는데!”

    “아까부터 왜 이렇게 소릴 질러?”

    시끄럽단 구박을 받으면서도 툴툴대던 김성욱이 이내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듯 재경을 쳐다봤다.

    “처음 해 본다는 거 구라지?”

    “맞는데.”

    “근데 왤케 잘해?”

    “네가 못하는 거지. 운도 더럽게 없고.”

    “닥쳐, 박성범.”

    끼어들며 놀리는 말에 발광하는 김성욱을 바라보며 재경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두 번 연속으로 눈앞에서 승리를 놓쳤으니 억울할 만도 하지만, 보드 게임은 정말로 처음 해 보는 거였다. 어디 게임만 그러할까. 이런 파티 룸이 있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알았다.

    “흥 다 식었어. 그만하고 노래나 부르자.”

    한 시간이 넘어가니 슬슬 질리던 참이었기에 다들 김성욱의 말에 동의했다. 이윽고 시끄러운 반주 음악과 탬버린 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면서 광란의 시간이 펼쳐졌다.

    느긋하게 맥주를 마시며 흡사 애들 재롱잔치를 보는 것처럼 구경하고 있는데, 테이블에 올려둔 핸드폰 액정이 갑자기 밝게 켜졌다. 발신자를 확인한 박성범은 핸드폰과 담뱃갑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보세요?”

    발신자는 어머니였다. 건물 밖으로 나간 박성범은 벽에 등을 기대며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뭐 하고 있어 아들?

    “친구 생일이라서 밖에 나와 있어요. 무슨 일이세요?”

    - 오늘 도우미 아줌마가 물김치 새로 담갔거든. 와서 좀 가져갈래?

    “내일 수업 끝나고 갈게요.”

    - 그래. 전에 말한 그 친구랑은 계속 같이 살고 있는 거야?

    “네.”

    - 별다른 일은 없고?

    어머니가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 것 같았지만, 박성범은 내색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 굶지 말고 밥 잘 챙겨 먹어. 배달 음식 너무 자주 시켜 먹지도 말고.

    “네. 걱정하지 마세요.”

    - 그래. 그럼 내일 보자, 아들.

    “네.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박성범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다른 손으로는 그새 여기저기서 온 문자를 확인하는데 지척에서 누군가가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박성범?”

    고개를 들자 예상치 못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윤정현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형?”

    “가게 쉬는 날이라서 밥 먹고 나가는 길이야. 너는?”

    “친구 생일이라서 나왔어요. 파티 룸 빌렸거든요.”

    “그래?”

    옆에 나란히 선 윤정현이 왼손을 내밀며 까딱했다. 박성범은 재깍 의미를 파악하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넨 다음 불까지 붙여 주었다.

    “형 혼자 왔어요?”

    “아니.”

    “그럼 얼른 가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일행들 기다릴 텐데.”

    “상관없어. 어차피 밥만 먹고 헤어질 생각이었거든.”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내뱉으며 윤정현이 말을 이었다.

    “룸메이트랑은 어떻게 됐어? 물어보면 실례려나.”

    “아뇨. 잘 돼서 지금 사귀고 있어요.”

    그 말에 윤정현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옆을 쳐다봤다.

    “사귀고 있다고?”

    “네.”

    짤막한 대답이었지만 박성범의 표정만 봐도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느껴졌다. 윤정현은 픽 웃으며 다시금 필터를 가볍게 빨았다.

    “거봐, 내가 뭐랬어. 잘 될 거라고 했지?”

    “그러게요.”

    “망충하게 웃지만 말고 썰 좀 풀어봐. 내핵 뚫어버릴 기세로 삽질해대더니, 어떻게 해피엔딩 루트로 올라탔어?”

    그러자 박성범은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대답했다. 처음으로 애인 자랑을 늘어놓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는데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재경이가 먼저 고백해 줬어요. 다른 사람한테 나 빼앗기기 싫다고.”

    “허어?”

    윤정현의 얼굴에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박성범이 은연중에 계속 대시했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상대가 먼저 고백했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걔 게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

    “맞아요. 사실 전 진짜 내려놨는데, 누가 재경이한테 저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해서 위기감을 느꼈나 봐요. 다른 사람한테 뺏기기 싫다고, 자기한테만 잘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진짜 꿈꾸는 줄 알았어요.”

    그때를 회상하듯 박성범의 표정이 헤벌쭉하게 풀어졌다. 윤정현은 픽 웃으며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누군지 몰라도 남 좋은 일만 시켰네.”

    “네. 저한테는 완전 은인이죠.”

    윤정현은 거듭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운발이 기가 막힌 사람들은 넘어져도 돈을 줍는다더니, 아무래도 박성범 같은 녀석을 두고 하는 말인 듯했다.

    “들뜬 건 알겠는데, 너무 앞서가지는 마. 상대는 적응할 시간이 더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야죠.”

    “특히 밤에 적당히 밀어붙이고.”

    박성범은 머쓱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몇 년간 가까이 알고 지내는 사이답게 자신의 패턴이나 행동쯤은 손바닥 보듯 훤히 보이는 모양이었다.

    “다음에 한 번 가게로 데리고 와. 칵테일 맛있게 만들어 줄게.”

    “네. 그럼 저 들어가 볼게요.”

    “오냐. 나도 간다.”

    설렁설렁 손을 흔들어 보인 윤정현이 먼저 자리를 떠났고, 박성범도 담뱃불을 비벼끈 뒤에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룸 문을 열자 양재현이 록 가수라도 되는 양 마이크를 쥐고 열창하는 모습이 보였다. 잠깐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옆에 앉은 재경의 허벅지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금세 고갤 돌리는 재경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가서는 말을 걸었다.

    “안 피곤해?”

    “괜찮아.”

    “조금만 더 있다가 집에 가자.”

    끄덕, 고갯짓을 하는 재경에게서 몸을 떼며 박성범은 마시다 만 캔맥주를 집어 들었다. 거의 동시에 지금도 테이블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캔에 가려진 입가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박성범은 다시금 재경의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며 귓속말을 했다.

    “저거, 계속 남으면 집에 가져갈까?”

    “뭘?”

    “케이크.”

    “그러던…….”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것도 잠시, 재경은 뒤늦게 말뜻을 깨닫고는 박성범의 허벅지를 힘껏 꼬집었다.

    “악!”

    갑자기 터져 나온 비명에 일순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했다. 음료수를 홀짝이던 김성욱의 여친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성범 오빠?”

    “아무것도 아냐.”

    김성욱도 빠지지 않고 냉큼 끼어들었다.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닌데?”

    “……혼날 짓을 했어 내가.”

    “혼날 짓을 했다고?”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재경은 시치미를 뚝 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한 조각 정도 남은 생크림 케이크가 눈에 들어왔다.

    가기 전에 다 먹어버리든가 해야지, 원.

    속으로 중얼거리며 룸을 나선 재경은 화장실로 직행해서 볼일부터 먼저 봤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 김에 두 손으로 물을 받아서 세수까지 했다. 샴페인에 이어 맥주도 계속 홀짝였더니 얼굴에 열이 오른 까닭이었다.

    그러다 문득 거울 속 제 모습을 발견하고 시선을 고정했다. 엄밀히 말하면 왼쪽 손목에서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는 손목시계에 눈길이 닿았다. 어젯밤에 박성범이 생일 선물이라며 직접 채워줬던 바로 그 손목시계였다.

    “…….”

    오른쪽 엄지로 가만히 시계 위를 문질렀다. 머릿속으로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자정이 지나자마자 생일 축하를 받은 것도, 생일이라서 친구들끼리 모여서 먹고 마시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부 박성범이 아니었으면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었다.

    하지만 재경의 얼굴은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박성범은 친구로서는 물론이고 연인으로서도 더할 나위 없이 완벽에 가까운 녀석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불안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것들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박성범은 계속해서 안겨주고 있었다. 녀석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점점 깊어질수록, 녀석의 존재감이 커지면 커질수록, 혹시라도 그걸 잃게 됐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 * *

    요란한 생일 파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니 밤 10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때를 봐서 적당히 끝낼 생각이었지만, 다른 녀석들이 제대로 흥이 오른 탓에 계속 붙잡혀 있다 보니 예상보다 귀가가 늦어지게 됐다.

    재경이 욕실에서 씻고 나오니 마침 박성범도 샤워를 끝냈는지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늘 그렇듯 입가를 올리며 기분 좋게도 웃는다. 단걸음에 가까이 다가와서는 허리를 슬쩍 끌어안으며 묻는다.

    “내 방에서 할 거지?”

    “뭐?”

    “내 방에서 할 거냐고 물었어. 네 방에서 하면 딱 붙어 잘 수 있어서 좋긴 한데, 아무래도 불편할 거 같아서.”

    재경은 저도 모르게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주말마다 둘이 딱 붙어서 자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박성범이 뒤에서 자신을 꼭 껴안고 자는 것은 지금도 여전했다. 하지만 박성범은 내 방에서 ‘자는’ 게 아니라 ‘할 거냐’고 물었다.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려던 찰나, 갑자기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재경은 곧 설마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그거 하려고?”

    “어.”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재경은 살짝 어이가 없었다.

    “준비되면 한다고 하지 않았어?”

    “응. 그래서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잖아.”

    녀석의 말마따나 집으로 오는 길에 대리 기사가 차를 잠깐 세우긴 했다. 하지만 재경은 내리지 않고 박성범 혼자 내려서 빠른 걸음으로 편의점에 들어갔고, 검은 봉지를 손에 든 채로 털래털래 돌아왔었다.

    ‘그럼 설마…….’

    필요한 걸 샀겠거니 해서 뭘 샀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아무래도 그렇고 그런 것들을 구매한 모양이었다. 생글생글 웃고 있던 것도 잠시, 박성범은 재경의 표정이 심상찮음을 뒤늦게 감지하고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다음에 할까?”

    “……아니, 괜찮아.”

    “안 괜찮은 거 같은데…….”

    “진짜 괜찮아. 가자.”

    쿨하게 말한 재경이 먼저 뒤돌아서 박성범의 방으로 걸어갔다. 솔직히 말하면 당황했지만, 이내 뭐 어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설핏 웃음이 나왔다. 어젯밤에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천년만년 기다려줄 것처럼 말하더니, 설마 오늘 바로 하자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하지만 이 또한 어찌 보면 박성범답다는 생각이 들어서 귀엽게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녀석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표정을 보자마자 답이 나왔다. 또다시 저를 배려한답시고 답답하게 물러서기 전에 재경이 먼저 선수를 쳤다.

    “오늘도 튕기면 앞으로 1년은 꿈도 꾸지 마.”

    “……!”

    “그니까 빨리 와. 마음 변하기 전에.”

    이래서야 주객전도가 따로 없다고 생각하면서 재경은 거실로 되돌아갔다.

    “고개 좀 숙여봐.”

    뜬금없는 말에도 박성범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냉큼 상체를 굽혀 주었다. 그런 녀석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재경은 입을 맞췄다.

    놀란 듯 몸을 굳힌 것도 잠시, 이내 커다란 손이 재경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몸을 밀착했다. 입맞춤도 더욱 깊어졌다. 열어달라는 듯 부드럽게 입술을 핥는 움직임에 재경은 살며시 입을 벌렸고, 그 틈으로 박성범의 혀가 깊숙이 들어왔다.

    “으응… 하아….”

    막상 키스가 시작되니 박성범은 언제 망설였었냐는 듯 거침없이 몰아붙였다. 계속해서 깊숙이 혀를 얽으면서 한 손으로는 재경의 허리며 엉덩이를 쉼 없이 쓰다듬었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재경은 언제인지도 모르게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춥, 다시 한 번 짧은 입맞춤을 한 뒤에 박성범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단숨에 훌렁 벗었다. 순간 저도 모르게 재경의 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체격 자체가 큰 데다 근육이 잘 붙은 몸이라 그런지 이렇게 올려다볼 때마다 위압감이 상당했다.

    그새 바지까지 벗어 던진 박성범은 이어서 재경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쿵, 쿵, 심장이 박동을 빨리 했다. 재경은 태연한 척하며 누워 있었지만, 몹시도 더디게 느껴지는 손길에 결국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

    “빨리해.”

    “싫어.”

    “……!”

    “좋아하는 사람 옷 벗겨주는 거, 되게 로맨틱하면서도 기분 좋은 일 같아. 나한테 전부 허락해준다는 거잖아.”

    천천히 움직인 손가락이 마침내 마지막 단추까지 풀어냈다. 박성범은 재경의 몸을 덮듯이 하며 상체를 숙였다. 반듯한 이마를 시작으로 곳곳에 베이비 키스를 남기며 조금씩 아래로 내려왔다.

    뜨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목덜미에는 머무르는 시간이 길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좋은 향기가 나는 살결을 깨물고 핥으며 흔적을 새겨 넣다가, 조금 더 아래로 내려와서 작은 유두를 입에 물었다.

    “……깨물지 마.”

    “미안.”

    그러면서도 박성범이 고개를 드는 일은 없었다. 그만하라는 말을 못 들은 척하며 계속해서 재경의 가슴을 애무하다가 한참 뒤에 고개를 들었다.

    아래를 내려다본 재경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아플 정도로 잘근잘근 씹어댄다 싶더니, 빨갛게 일어선 데다 타액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문제는 이런 것도 싫지가 않다는 점이었다. 그러기는커녕 어느새 발기한 것을 깨닫고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박성범이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바지 위로 윤곽이 드러난 재경의 앞섶을 은근하게 문지르면서 미소가 만연한 얼굴로 물었다.

    “기분 좋아?”

    “……그럭저럭.”

    “여긴 그럭저럭이 아닌 거 같은데.”

    힘주어 지그시 움켜쥐는 손길에 재경의 몸이 움찔했다. 어느덧 얼굴은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붉게 물든 모습을 기분 좋게 바라보다가, 박성범은 재경의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붙잡고 끌어내렸다. 갑자기 드러난 하체에 당황할 틈도 없이 그대로 다리를 벌리며 재경의 중심을 입에 물었다.

    밀어내지도, 그렇다고 붙잡지도 못한 채 재경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춥, 추웁, 아래에서 들리는 야릇한 소리에 귓가가 더욱 붉어졌다. 거칠 것 없는 애무에 사정감이 금세 치밀어 올랐다.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눌러 삼키며 간신히 숨만 몰아쉬다가, 점점 한계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헐떡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그만해. 할 거 같아.”

    “해.”

    하지만 박성범은 물러서지 않았다. 외려 더욱 깊숙이 물며 주변의 민감한 부위를 손끝으로 간질이듯 쓰다듬는 애무가 이어졌다. 재경은 어쩔 줄을 몰랐다. 결국 팔꿈치로 상체를 반쯤 일으켜서 박성범의 어깨를 밀어냈다.

    “나오라니까. 진짜, 할 거 같아.”

    “하라니까.”

    괜찮다고, 불명확한 발음으로 대꾸하면서 박성범은 끝까지 얼굴을 들지 않았다. 결국 먼저 한계에 달한 사람은 재경이었다. 참고 참았지만 더는 버티지 못하고 재경은 그대로 박성범의 입안에서 사정했다.

    “하아, 하아….”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갤 드는데 마침 박성범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툭 불거진 울대가 꿀꺽, 하고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재경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사색이 되어 녀석에게 물었다.

    “설마……. 삼켰어?”

    “응.”

    아무렇지 않게 하는 대답에 재경은 당황스럽다 못해 기가 막혔다.

    “그걸 대체 왜 삼켜?”

    “네가 너무 좋아하는 거 같아서…… 라는 건 내 희망 사항이고, 그냥 내가 좋아서. 나 때문에 너 흥분하고 느끼는 거 보면 되게 기분 좋아.”

    “하…….”

    솔직하다 못해 해맑게까지 들리는 대답에 전의가 절로 상실되는 기분이었다. 재경은 잠깐 애먼 곳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박성범과 시선을 맞췄다. 소용없단 걸 알면서도 손등으로 녀석의 입가를 벅벅 닦아주었다.

    “다음부터 이런 건 하지 마. ……그냥 만지기만 해도 충분히 기분 좋으니까.”

    “응. 알았어.”

    날렵하게 몸을 일으킨 박성범은 침대 옆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집에 오자마자 세팅해 둔 물품 중에 젤을 골라서는 손바닥에 흥건히 고일 정도로 듬뿍 짰다.

    손을 오므려 몇 번 치댄 뒤에 재경의 중심부로 손을 가져갔다. 사정으로 살짝 풀이 죽은 성기를 부드럽게 만져주면서 다시금 고갤 숙여 재경의 입술을 찾았다.

    “추웁… 하아….”

    욕망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딥 키스를 하면서 박성범은 조금씩 아래로 손을 움직였다. 회음부 주변을 문지르다가 중지 끝을 주름 위에 슬쩍 갖다 댔다. 동시에 재경의 몸이 흠칫했다. 하지만 밀어내거나 거부하는 움직임은 없었기에, 다시금 주름 위를 더듬다가 안으로 손가락 하나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내벽을 더듬자 재경이 눈에 띄게 굳는 게 느껴졌다.

    “괜찮아?”

    “괜찮아. ……계속해.”

    약간 거북하긴 해도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잠시 후, 재경은 곧바로 생각을 철회했다. 두 개에 이어 세 개째로 짐작되는 손가락이 들어온 순간, 아래가 빠듯하게 벌어지는 느낌과 함께 상당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뒤늦은 후회가 찾아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그냥 모른 척하고 가만히 있을걸.’

    그도 그럴 것이 재경은 박성범의 거시기 사이즈를 잘 알고 있었다. 손가락만으로도 벌써부터 버거운 느낌인데, 그보다 훨씬 두껍고 딱딱한 게 과연 무사히 들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절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와중에도 박성범은 착실하게 안을 넓혀갔다. 위로하듯 재경의 얼굴 곳곳에 입술을 내리면서 혹시라도 상처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움직이며 내벽을 길들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두르지 않고 끈질기다 싶을 정도로 공들여 풀어줬더니 처음에 비해서 한결 부드러워진 게 느껴졌다.

    마침내 재경의 안에서 손가락을 빼낸 박성범은 한 번 더 협탁 위로 손을 뻗었다. 남아 있던 젤을 손바닥에 마저 뿌린 뒤에 검지와 중지를 구멍 안에 같이 넣고 원을 그리듯 크게 움직였다.

    “아프진 않지?”

    “……참을 만해.”

    잠시 후 다시금 빠져나가는 손가락에 재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시선 끝에 박성범의 성기가 보였다.

    한껏 팽팽하게 발기한 것은 물론이고 끝은 프리컴으로 젖어 있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아직 한 번도 뺀 적이 없었다. 재경은 잠깐 고민하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너야말로 괜찮아?”

    “응?”

    “아플 거 같은데.”

    눈짓으로 아래를 가리키자 박성범도 따라서 시선을 움직인다. 지금 다시 보니 혈관까지 툭툭 불거져 있었다.

    덕분에 재경은 상대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어느 정도 풀렸다 싶으면 그냥 넣을 법도 한데……. 자신도 남자다 보니 저런 상태에서 참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애널 섹스는커녕 이성과의 성교도 해본 적이 없긴 하지만, 참고용으로 봤던 영상만 떠올려도 박성범이 얼마나 자신을 배려해주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손으로 먼저 해줄까?”

    “아니. 네 안에서 가고 싶어.”

    박성범은 잠깐 고민하다가 거절했다. 한 발 먼저 빼서 줄어들면 삽입이 조금이나마 수월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그럴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슬슬 한계에 달한 것도 사실이었기에, 젤 옆에 있던 콘돔 상자를 잡아서 밀봉된 스티커를 뗐다. 그걸 본 재경이 금세 놀란 눈을 하고 물었다.

    “몇 개짜리야, 그거?”

    “잠깐만.”

    박성범은 곧바로 박스 표면을 살폈다.

    “100개입이라고 쓰여 있네.”

    “뭐하러 그렇게 큰 걸 샀어?”

    “원래 뭐든 대용량이 저렴하잖아. 그리고 아마 생각보다 금방 쓸걸?”

    그러길 바라는 희망이 담긴 말이었다.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재경이 귀여워서 입술에 쪽 입을 맞춘 뒤에 박성범은 낱개로 포장된 콘돔을 꺼내서 이로 물고 비닐을 찢었다. 단숨에 페니스에 씌운 다음 재경의 다리를 벌리고 자세를 잡았다.

    “긴장 풀어. 천천히 할게.”

    이윽고 박성범은 천천히 재경의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삽입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귀두부를 넣자마자 자를 것처럼 조여대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 상태로 숨을 한 번 고른 뒤에 박성범은 재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아?”

    “…….”

    너 같으면 괜찮겠냐, 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재경은 꾹 참아내고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충격이 상당했다. 아래가 한계까지 벌어져서 당장에라도 찢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니, 어쩌면 벌써 찢어졌는지도 모른다.

    어느덧 재경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손으로 스스럼없이 닦아준 뒤에 박성범은 곧장 재경의 성기를 쥐고 빠르게 흔들기 시작했다. 앞으로 쾌감을 느끼면 조금이라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옴짝달싹도 못 하던 재경은 결국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됐으, 니까 어떻게 좀 해봐.”

    “많이 힘들면 뺄까?”

    “빼긴 뭘 빼. 차라리, 빨리 넣어.”

    공들인 시간이 얼만데, 여기까지 와서 중도 스탑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빨리해. 참아 볼 테니까. 시트를 틀어쥔 채 한 번 더 재촉하자 박성범은 다시금 천천히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즈윽, 살이 밀리는 느낌이 선연했다. 가슴팍에 돌덩이가 놓인 것처럼 힘겹게 얕은 숨을 몰아쉬다가 재경은 잠시 후에 다시 물었다.

    “다 넣었어?”

    “아니. 이제 반 정도 들어갔어.”

    “씨발…….”

    순간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왜 안 넣느냐는 말 따위 꺼내지도 말걸.

    한껏 미간이 일그러진 재경을 내려다보는 박성범의 눈빛에 미안함이 가득했다. 오늘은 그냥 손으로 풀어주기만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은 후회였다.

    이제 와서 한 번 더 “뺄까?”하고 물어보면 정말로 욕바가지가 날아들 것 같아서 박성범은 풀 죽은 재경의 성기를 거듭 만져주며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토록 기다리던 말이 재경의 귀에 들려왔다.

    “다 들어갔어. 괜찮아?”

    “……안 괜찮아.”

    이젠 빈말로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래는 말도 못 할 정도로 뻐근하고, 몸속에서는 맥박이 요동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박성범은 곧바로 움직이는 대신 재경의 가슴과 성기를 만져주며 적응할 시간을 주었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잘라 먹을 것처럼 조여대서 아플 지경이었지만 재경이 느끼는 고통에는 비할 바가 못 될 터였다.

    “숨 계속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어 봐. 천천히.”

    시키는 대로 심호흡을 하자 기분 탓인지 아주 조금이나마 나아진 것 같기도 했다. 여전히 미간을 잔뜩 구긴 채로 재경은 박성범을 불렀다.

    “야.”

    “응?”

    “한 대만 때려도 돼?”

    “갑자기?”

    “……이 정도면 네가 끝까지 안 한다고 했어야지, 너무 양심 없는 거 아냐?”

    영상 속 남자들은 하나같이 잘만 받길래 은연중에 자신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게 오산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멀쩡할 수 있지? 올라타서 흔드는 것도 잘만 하던데.

    “많이 아파?”

    “……죽을 거 같아.”

    “미안. 끝나고 나서 실컷 맞아줄게.”

    말을 하면서도 박성범은 계속해서 재경이 잘 느끼는 포인트를 자극하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재경은 큰맘 먹고 먼저 말을 꺼냈다.

    “천천히 움직여 봐.”

    “괜찮겠어?”

    “……괜찮겠지.”

    그러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다급하게 물었다.

    “찢어지진 않았어?”

    “잠깐만.”

    살짝 몸을 뗀 박성범이 아래를 확인하고는 대답했다.

    “응. 괜찮아.”

    “피도 안 났고?”

    “안 났어.”

    박성범은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꾹 참아냈다. 다른 데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똑 부러지는 이재경이 그곳의 안위를 다급하게 묻는 게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몹시도 귀엽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쪽, 재경의 손등에 입을 맞춘 뒤에 박성범은 저도 모르게 진심을 흘려보냈다.

    “좋아해. 진짜로.”

    “…….”

    “사랑해.”

    “……알았으니까 빨리해. 이러다 날 새겠다.”

    “응. 천천히 할게.”

    한 번 더 재경을 안심시킨 뒤에 박성범은 아주 조금 뒤로 허리를 물렸다.

    이후로는 다시 한 번 인내의 시간이 요구되었다. 끝까지 넣었다가 재경이 놀라지 않도록 조금씩 빼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는 동안 박성범의 등에도 땀이 흥건하게 맺혔다.

    그나마 젤을 한 통 다 쏟아부은 덕분에 생각보다 움직임이 수월한 게 다행이었다. 덕분에 재경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듯하자 마침내 박성범은 조금씩 피치를 올리기 시작했다.

    왕복 운동을 하는 동안에도 박성범은 재경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직 버거움이 느껴지는 표정을 보니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이 차올랐다. 섹스라는 행위 자체에서 비롯되는 쾌감도 있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체온을 나누며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데서 오는 정신적인 만족감이 상당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젠 좀 더 과감하게 뺐다가 깊숙이 밀어 넣는데 재경이 갑자기 짧은 신음을 흘리면서 아래를 꽉 조였다. 박성범은 덩달아 흠칫했다가, 이내 떠오른 생각에 한 번 더 같은 곳을 자극했다. 그러자 어김없이 움찔한 재경이 당황해서 버둥거렸다.

    “자, 잠깐만.”

    “여기네.”

    “흐읏…!”

    박성범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그와 달리 재경은 몹시 당황했다. 일전에 박성범이 안쪽을 건드렸을 때, 그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갑자기 찌르르하며 요의가 느껴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 근처를 자극한 듯했다.

    이제 박성범은 대놓고 그쪽만을 노리며 허릿짓을 하기 시작했다. 재경은 서둘러 박성범의 팔뚝을 붙잡으며 만류했다.

    “하지 마, 거기.”

    “괜찮아. 이제 계속 기분 좋을 거야.”

    “싫어. 그냥 아까처럼 막 해.”

    박성범은 대답 대신 한 번 더 재경의 입술에 키스했다. 잠시 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시선을 마주했다.

    “전생에 진짜 혁혁한 공을 세웠나 봐.”

    “갑자기 무슨 말이야?”

    “아니면 어떻게 네가 나한테 왔겠어?”

    “…….”

    그러고 보면 박성범은 한 번씩 손발이 오그라드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차마 그 비슷한 말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재경은 태연함을 가장한 얼굴로 대꾸했다.

    “하던 거나 마저 해.”

    “응. 그럼 계속한다?”

    또 한 번 안을 가득 채우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박성범의 움직임은 느리고도 신중했다. 통증과 이물감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흐읏…!”

    그 때였다. 또 한 번 안쪽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재경은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 말라고 했잖아.”

    “응.”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재경의 손에 깍지를 낀 박성범이 고개 숙여 입술을 찾았다. 진득하고도 깊은 키스를 하면서 잠깐 멈췄던 허리를 잘게 흔들기 시작했다.

    “으응… 하지, 마… 우웁….”

    의도적으로 계속 같은 곳을 자극하자 재경이 진저리를 치는 게 맞닿은 몸으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재경이 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쾌감이 느껴지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할 거다.

    알지만, 박성범은 그 나름대로 몹시 절박했다. 처음으로 몸을 겹치는데 고통스럽고 괴롭다는 생각만을 하게 되는 건 싫었다. 욕심이라는 걸 알지만 재경이 조금이라도 더 기분이 좋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반면 재경은 이래저래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아래에선 계속 낯선 쾌감과 열기가 몰려오고, 위에는 빨판처럼 붙어서 혀를 빨아대는 박성범 때문에 호흡이 곤란할 지경이었다. 간신히 풀려나서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재경은 눈물 고인 눈으로 박성범을 노려봤다.

    “끝나면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응. 원하는 만큼 샌드백 해줄게.”

    쪽, 쪽, 얼굴 곳곳에 연거푸 입맞춤을 내린 뒤에 박성범은 상체를 일으키며 좀 더 빠르게 속도를 올렸다. 재경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열기가 가득했다.

    찌푸린 미간도, 젖은 채 벌어진 입술도, 아플 만큼 세게 팔뚝을 쥐고 있는 손도, 가쁘게 들썩이는 가슴도. 평소의 쿨한 모습과 전혀 다른 간극이 더 큰 흥분을 자아냈다.

    혀로 입술을 핥은 뒤에 박성범은 거듭 재경의 성기를 쥐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흘러내린 프리컴이 손바닥과 마찰하면서 찌걱거리는 야한 소리가 났다.

    “소리 들려? 흠뻑 젖었어.”

    “닥, 쳐.”

    재경은 박성범의 팔을 떼내려고 했지만 힘으로 녀석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완급을 조절하며 능숙하게 쾌감을 끌어내는 손놀림에 재경은 얼마 못 가서 사정했다.

    이제는 박성범의 차례였다. 다시금 얽듯이 깍지를 낀 뒤에 깊이 박은 채로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진짜 좋아.”

    마구 뒤흔들고 싶은 걸 인내하며 참다 보니 더더욱 안달이 나면서 미칠 것 같았다. 뺐다가 다시 박을 때마다 내벽이 찰지게도 들러붙었다. 어느덧 이마엔 땀이 가득했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허릿짓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크게 찔러 넣고는 열락의 덩어리를 쏟아냈다.

    “후우…….”

    사정을 마친 박성범은 긴 숨을 내쉬며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얼굴엔 만족스러움이 가득했다. 사정 후에 이렇게 기분 좋은 여운이 남는 것은 처음이었다.

    재경이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다. 순간 작은 심술이 삐죽이 올라왔다. 거기는 말할 것도 없고 한껏 벌어진 채 눌린 허벅지도 아픈데, 박성범은 너무도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내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마음이 금세 스르륵 풀리는 걸 보니 자신도 좋아하는 사람에 한해서는 꽤나 무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녀석의 말에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한 번 더 할까?”

    “……뭐?”

    “한 번 더 하자고. 힘들게 넣었는데 아깝잖아.”

    “하나도 안 아까워. 무거우니까 비켜.”

    “진짜 안 돼?”

    “안 돼. 지금 내 꼴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네 거 계속…….”

    발기해 있었다고 말하려다가, 재경의 눈빛을 보고 빠르게 입안으로 삼켰다. 박성범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천천히 페니스를 빼냈다. 혹시나 해서 아래를 확인해보니 살짝 벌어져 있긴 해도 다행히 유혈 사태가 나지는 않았다. 콘돔을 벗겨서 처리한 다음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으며 다정한 눈빛으로 재경을 내려다봤다.

    “물 마실래?”

    “어. 시원한 걸로 갖다 줘.”

    박성범은 군말 없이 일어나서 침실을 나섰다. 재경도 뒤늦게 팔꿈치를 이용해서 상체를 일으켰다. 자연스레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얼굴이 붉어진 것은 금방이었다. 하얀 정액이 군데군데 묻어 있는 복부가 보인 탓이었다.

    그 아래, 얼얼한 통증은 지금도 여전했다. 하지만 차마 만져볼 엄두가 나질 않아서 애써 외면하고 있으니 잠시 후에 박성범이 생수병을 들고 돌아왔다.

    순간 재경은 흠칫했다. 박성범이 알몸으로 나갔다 온 탓에 앞판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여기.”

    아무것도 못 본 척하며 생수병을 건네받은 재경은 꿀꺽꿀꺽 시원하게 물을 마셨다. 단숨에 절반 정도를 비우고 입을 떼자 박성범이 병을 다시 가져갔다. 뚜껑을 채운 병을 협탁 위에 올려놓고는 뒤돌아 앉으면서 커다란 등을 내보였다.

    “자.”

    “뭐야?”

    “샌드백 대기 중이야.”

    재경은 한발 늦게 말뜻을 깨닫곤 웃음을 흘렸다. 근육이 도드라진 등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등짝으로 되겠어?”

    “……응?”

    “이쪽 보고 똑바로 앉아. 눈 감고, 이 악물고.”

    순간 박성범은 움찔했지만, 했던 말과 했던 짓이 있다 보니 순순히 재경이 시키는 대로 돌아앉아 눈을 감았다.

    살짝 긴장한 채 곧 다가올 충격을 기다렸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입술에 부드러운 것이 와 닿았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뜨니 재경이 입가를 올린 채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눈 완전 질끈 감더라?”

    “안 그랬어.”

    박성범도 뒤늦게 웃으며 재경의 몸을 와락 껴안았다. 다시 생각해도 어떻게 이런 녀석이 제 애인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진짜 행복해서 죽을 거 같아.”

    “또 오버한다.”

    “진짜야. 그런 의미에서, 한 번만 더 하면 안 돼?”

    “…….”

    재경은 가만히 손날을 세워서 박성범의 머리를 가격했다. 제법 세게 쳤는데도 인상을 찌푸리기는커녕 거듭 품에 끌어안으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진짜 잘할게.”

    “……거기나 죽이고 말해.”

    이번에야말로 박성범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말았다.

    세상 모든 행복이 한곳에 모여 있다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싶었다.

    < 3권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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