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3/22)

2.

“……그래서 답이 2야. 이해가 돼?”

“응.”

“그러면 이 문제 한번 풀어봐봐.”

비슷한 유형의 문제를 찾아서 가리키자 경수는 곧장 연습장에 대고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한가한 토요일 오후, 재경은 학교 근처에 있는 스터디 카페에서 경수의 공부를 봐주고 있었다. 대출 문제로 크게 다툰 이후로 삼촌과는 일절 연락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라는 연결고리가 있다 보니 완전히 연을 끊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삼촌과 사이가 나쁘다 해서 경수마저 외면할 수는 없었기에 예전처럼 주말마다 만나서 공부를 봐주었다. 대신 삼촌 집으로 찾아가지 않고 빈 강의실이나 저렴한 스터디 카페에서 만나곤 했다.

“다 했어, 형.”

경수가 내민 연습장을 받아 든 재경은 빠른 눈으로 풀이 과정을 확인했다. 이내 웃음 띤 얼굴이 경수를 향했다.

“맞게 풀었네.”

“진짜?”

“어. 잘했어.”

“오, 예!”

계속해서 틀리던 유형의 문제를 드디어 맞히자 경수는 주먹을 불끈 쥐며 몹시도 기뻐했다. 재경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 시간을 확인했다. 경수가 문제를 푸는 동안 틈틈이 책을 읽어서 그런지 어느덧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숙제는 없어?”

“없을 리가 있겠어? 여기부터 여기까지 풀어 와.”

팔락팔락 빠르게 문제집을 넘기며 페이지를 가리키자 경수가 곧장 볼멘소리를 냈다.

“조금만 줄여주면 안 돼? 다음 주에 수련회도 가는데.”

“요즘도 수련회 같은 걸 가?”

“응. 2박 3일이야. 그러니까 조금만 줄여주라. 응?”

거듭 애교스럽게 하는 부탁에 결국 재경은 못 이기는 척 숙제를 줄여주었다. 그러자 경수는 금세 희희낙락하며 가방을 챙겼다. 재경이 계속해서 경수의 공부를 봐주는 데는 녀석의 태도가 미치는 영향도 컸다. 말을 안 듣거나 뺀질거리면 진작 손을 뗐을 텐데, 숙제로 내주는 건 꼭꼭 해오고 사정이 있으면 오늘처럼 알아서 먼저 이야기를 해주니 미워할 구석을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형, 이거 받아.”

가방을 챙기던 경수가 갑자기 무언가를 내밀었다. 제법 부피가 큰 쇼핑백이었다.

“뭐야, 이게?”

“내일 형 생일이잖아. 근데 못 만나니까, 오늘 미리 주려고 가져왔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재경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쇼핑백을 쳐다봤다가 경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경수의 얼굴에는 한껏 뿌듯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꺼내 봐봐, 형. 얼른.”

선물을 받은 사람보다 선물을 준 사람이 더 들뜬 기색이었다. 바라는 대로 쇼핑백을 열자 파란색 상자가 눈에 띄었고, 살짝 꺼내서 뚜껑을 열어보니 운동화가 들어 있었다.

“맘에 들어?”

어째 오늘따라 계속 들떠 보이더니, 이것 때문이었나?

반짝반짝 눈을 빛내고 있는 경수는 영락없이 주인의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그와 달리 재경은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생일을 잊지 않고 기억해준 녀석이 고마우면서도 괜한 부담을 줬다고 생각하니 마냥 솔직하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이런 걸 사.”

“비싼 거 아니야. 친구가 도와줘서 인터넷으로 싸게 샀어.”

그럼에도 좀처럼 펴지질 않는 형의 얼굴을 본 경수가 재빨리 선수를 쳤다.

“얼른 신어봐, 형.”

상자에서 운동화를 꺼낸 경수가 아예 재경의 발 앞에 놓아주었다. 계속 신어보라고 조르는 통에 재경은 마지못해 신고 있던 신발을 벗고 운동화에 발을 넣었다. 이내 얼굴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사이즈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는데, 직접 신어보고 산 것처럼 거의 딱 맞았다.

“어때 형? 맞아?”

“……내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어?”

“예전에 형이 집으로 왔을 때, 형 몰래 신발 사이즈 재봤어.”

경수의 선물은 또 있었다. 상자 위에 작은 카드가 붙어 있었는데, 편지는 집에 가서 읽어보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통에 살짝 떼서 가방 안에 따로 챙겨 넣었다.

“환불하라고 하면 안 할 거지?”

“당연하지! 거기 환불 못하는 데야.”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에 재경은 웃음을 흘렸다. 말만 한번 꺼내봤을 뿐 정말로 환불을 해서 상처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재경은 경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늦은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잘 신을게.”

“지금 바로 신고 다니면 안 돼?”

고맙게 받기로 했는데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나머지 신발도 마저 갈아 신은 뒤에 재경은 원래 신고 있던 운동화를 상자 안에 넣으며 경수에게 말했다.

“다음 주에는 공부 끝내고 형이랑 같이 밥 먹자. 형이 맛있는 거 사줄게.”

“오늘은 안 돼? 나 시간 많은데.”

“미안한데 형이 오늘 선약이 있어서.”

“생일 파티해?”

유감스럽지만 그런 귀여운 약속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데이트를 한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어서 재경은 대충 얼버무리며 대답한 뒤에 가방을 챙겨 들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걸어간 재경은 경수가 타는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녀석을 보내고 나서 시간을 확인해보니 약속 시간까지 1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는데 주차장에 도착해보니 눈에 익은 차가 벌써 와 있는 것이 보였다. 다가가서 조수석 문을 열자 박성범이 생긋이 웃으며 재경을 반겼다.

“수업은 잘했어?”

“어. 언제 왔어?”

“좀 전에. 근데 그건 뭐야?”

눈썰미 좋은 녀석은 재경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가방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재경은 차 문을 닫으며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선물.”

“무슨 선물?”

“그냥…… 공부 가르쳐줘서 고맙다고.”

생일 선물이라고 말해줘도 별 상관은 없지만 사실대로 말하려니 왠지 쑥스러웠다. 그래도 처음에 삼촌 집에서 살게 됐을 때는 미역국을 먹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재경 본인에게도 큰 의미가 없는 날이 되었다. 경수만이 매해 잊지 않고 생일을 축하해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도 걔는 생각이 있나 보네. 부모가 안하무인이면 자식들도 거의 그렇던데.”

말 속에 가시가 느껴졌다. 박성범은 실제로 삼촌을 만나본 적이 없지만, 저번에 손찌검을 했던 그 일 때문에 삼촌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가 단단히 박혀 있는 듯했다.

“경수는 안 그래.”

그러고 보니 상자 뚜껑에 카드도 붙어 있던 것이 생각났다. 가방을 뒤적여서 카드를 꺼낸 재경은 곧장 봉투에 붙어 있는 스티커를 떼고 안에 든 카드를 읽어봤다.

“그것도 사촌 동생이 준 거야?”

“어. 자꾸 이쪽 보지 말고 앞에 쳐다봐.”

“뭐라고 썼어? 설마 욕 같은 거 적혀 있는 건 아니지?”

“그런 애 아니라니까. 경수는 진짜 착해. 자기 엄마나 아빠보다 내가 더 좋다고 하는 녀석이야.”

아무래도 다음에 한번 같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재경은 갈무리한 카드를 가방에 도로 넣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토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얼마 못 가서 차가 신호에 걸렸다. 눈에 비치는 풍경을 의미 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슬그머니 손을 잡는 기척이 느껴졌다. 문득 드는 생각에 재경은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추울 땐 좋은 거 같아.”

“뭐가?”

“네 손 말이야. 남들보다 뜨겁잖아.”

여름엔 잡기는커녕 스치기만 해도 기겁하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계속해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그런가.”

다시금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싱긋이 웃고 있는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새벽에 눈 떠보니까 나한테 꼭 붙어서 자고 있더라고.”

“……!”

“목이 말라서 깼는데, 네가 안 놔줘서 결국 그냥 다시 잤잖아.”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설령 사실이라 해도, 사람을 무슨 죽부인처럼 옴짝달싹 못하게 먼저 껴안은 사람은 제가 아니라 박성범이었다. 어디 그뿐일까. 느닷없이 그쪽을 건드려서 사람 기함하게 만들더니 남의 허벅지에 대고 그걸…….

“무슨 생각을 하길래 얼굴이 빨개지실까?”

“……!”

갑자기 끼어드는 목소리에 재경은 흠칫 놀랐지만, 잡힌 손을 빼내며 태연한 척 대답했다.

“아무 생각도 안 했어. 앞이나 봐.”

마침 타이밍 좋게 신호가 바뀐 덕분에 재경은 위기 아닌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잠시 후에 차는 야외에 있는 공영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박성범이 오늘 저녁으로 고른 메뉴는 장어구이였고, 재경은 필연적으로 들 수밖에 없는, 메뉴 선택에 대한 의구심을 애써 잠재우며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다음 코스는 영화관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탄 재경은 팔짱을 낀 채 무심한 표정으로 정면을 봤다. 하지만 속으로는 내심 두근거림을 느꼈다. 영화관을 찾은 것은 고3 때 수능을 치고 나서 단체 관람을 왔던 이후로 처음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순간, 저도 모르게 멈칫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과장 좀 보태서 여름철 해수욕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팝콘 냄새나 맡으려고 영화관을 찾지는 않았을 테니, 저 많은 사람들이 전부 영화를 보러 왔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웠다.

“저기 빈자리 있다.”

재경이 잠깐 넋을 놓고 있는 동안 박성범은 재주도 좋게 빈자리 하나를 찾아냈다. 재경은 처음엔 괜찮다고 했지만 아직 20분 정도 시간이 남았다는 말을 듣고는 슬그머니 엉덩이를 붙였다.

옆에 앉은 커플이 팸플릿 같은 걸 들여다보며 주고받는 말이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박성범이 오늘 볼 영화를 예매해서 재경은 무슨 장르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물어볼 생각에 입술을 달싹이려는데, 갑자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재경?”

고개를 돌리자 거의 매일같이 얼굴을 보는 김성욱이 서 있었다. 여자친구와 팔짱을 끼고 있는 걸 보니 주말이라고 함께 영화를 보러 온 모양이었다. 박성범도 뒤를 돌아보고는 김성욱의 여자친구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오빠들끼리 영화 보러 오셨어요?”

“어. 우리도 데이트 중이거든.”

태연자약한 대답에 재경은 저도 모르게 토끼 눈을 하고 박성범을 쳐다봤다.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다행히 김성욱은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같이 사는 걸로 부족해서 이젠 주말에도 붙어 다니냐?”

그러더니 이내 표정을 바꾸며 박성범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나도 끼워주라.”

“어. 월세 50.”

“야, 이 날강도놈아.”

김성욱은 곧 오빠가 이렇게 산다며 여자친구 어깨에 대고 볼을 비볐고, 성숙한 그의 여자친구는 다 이해한다는 듯 남친의 머리를 쓰담쓰담해주었다. 훌쩍이며 우는 시늉을 하던 김성욱이 문득 뭔가가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참, 내일 저녁에 재…… 우웁!”

재경은 물론이고 김성욱의 여자친구도 어맛, 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박성범이 갑자기 팔을 뻗으며 김성욱의 입을 틀어막다시피 한 까닭이었다.

“우, 우웁…!”

버둥대는 녀석의 귀에 대고 박성범이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김성욱이 고개를 마구 끄덕이자 그제야 녀석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천천히 뗐다.

“와, 씨.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입만 막았는데 오버는.”

“그러니까 숨이 막히지!”

“코는 장식이야?”

“…….”

할 말이 없어진 김성욱은 또다시 여자친구의 어깨를 붙잡으며 우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재경은 속으로 끌끌 혀를 찼다. 새삼 김성욱의 여친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좀 엉겨 붙으라며 정색할 법도 한데 잘도 받아준다 싶었다.

“너넨 뭐 보러 왔어?”

“호라이즌.”

“우리랑 다른 거네. 몇 시에 시작하는데?”

“10분 뒤에.”

“그럼 얼추 비슷하게 끝날 거 같은데, 같이 노래방이나 갈까?”

기대가 담긴 표정이었지만 박성범은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다른 약속 있어.”

“구라치지 말고.”

“진짜야.”

“진짜는 개뿔. 영화 끝나면 9시가 넘는데 다른 약속이 있다고?”

“어.”

칼 같은 대답에 김성욱이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어디까지나 장난인 것을 아는 김성욱의 여친이 생긋 웃는 얼굴로 중재 아닌 중재에 들어갔다.

“저희 이제 영화 시간 다 돼서요. 먼저 가볼게요.”

“그래.”

“영화 재밌게 보세요.”

김성욱은 툴툴대면서도 냉큼 여친을 따라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재경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기껏해야 3분 정도 같이 있었지 싶은데 태풍이 몰아친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우리도 슬슬 들어가야 될 거 같은데, 가서 팝콘 좀 사 올게.”

“방금 밥 먹었는데 사려고?”

“원래 간식 배는 따로 있잖아. 다른 거 먹고 싶은 건 없어?”

“어. 작은 걸로 사 와.”

저녁을 워낙 많이 먹은 덕분에 지금 상태로는 팝콘 하나 입에 넣기도 버거울 것 같았다. 박성범은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떠났고, 잠시 후에 돌아온 녀석을 본 재경은 그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분명 작은 걸로 사 오라고 했는데, 품에 안고 온 팝콘 박스가 녀석의 얼굴보다 더 커 보였다.

“다 먹을 수 있겠어?”

손에 들고 있던 음료 컵을 대신 들어주며 그렇게 묻자 박성범은 자신만만하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윽고 핸드폰으로 좌석을 한 번 더 확인한 뒤에 나란히 상영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박성범의 말은 사실이었다. 영화에 집중하며 별생각 없이 계속 팝콘을 집어 먹었더니 영화가 끝났을 땐 그 커다란 통이 거의 텅텅 비어 있었다.

재경은 안전벨트를 잡아당기며 포만감이 가득한 숨을 내쉬었다. 음료도 다 마셨더니 배가 너무 불러서 숨쉬기도 버거울 정도였다.

주차장을 빠져나온 박성범은 대로로 접어든 뒤에 재경에게 물었다.

“영화는 괜찮았어?”

“어. 생각보다 재밌더라.”

다들 연기력도 좋고, 빵빵한 사운드에 화려하고도 시원시원한 액션 신이 나올 때마다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비싼 돈 주고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피곤하진 않아?”

“괜찮아.”

빠듯한 평일에 비해서 주말은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편이었다. 게다가 오늘 저녁은 박성범과의 약속 때문에 시간을 완전히 빼둔 상태라서 마음도 편했다.

대교를 가로지르는 동안 바라보는 야경은 생각보다 근사했다. 이 또한 박성범과 사귄 이후로 생긴 변화 중 하나였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재경은 학교와 호프집, 고시텔만을 다람쥐 쳇바퀴처럼 오갔고, 외출이라고 해봤자 주말마다 삼촌 집에 가거나 할아버지가 계신 요양 병원을 찾아가는 게 전부라서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아예 없었다.

박성범은 꽤 오랫동안 차를 몰았다. 그러다 오른쪽 차선으로 붙으며 잠시 후에 우회전을 했다. 계속 창밖을 보고 있던 재경의 얼굴에 뒤늦게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갑자기 울창한 나무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 까닭이었다.

“어디 가는 거야?”

“마지막 데이트 코스.”

에둘러 대답하는 목소리에 옅은 웃음기가 묻어났다.

‘야경이라도 보러 가나?’

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재경은 잠시 후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앞 유리창 너머로 누가 봐도 호텔 같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호텔에 가는 거냐는 질문이 떠올랐지만, 괜한 설레발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단은 말을 아꼈다.

그런데 아무래도 추측이 맞는 듯했다.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호텔 출입문 앞에서 박성범은 차를 세웠다.

“다 왔어.”

태연하게 건네는 말에 재경은 살짝 표정을 굳힌 채로 물었다.

“여긴 왜 왔어?”

“왜 왔긴, 당연히 자러 왔지. 저기 사람 온다.”

고개를 돌리니 정말로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검은색 정장 차림의 남자는 바로 앞에 멈춰 서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고, 곧 바깥에서 차 문이 열렸다.

“내리자. 발레파킹해줄 거야.”

붙잡을 틈도 없이 박성범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재경은 텅 빈 운전석과 활짝 열린 차 문을 황당한 표정으로 번갈아 쳐다보다가, 일단은 안전벨트를 풀고 박성범을 따라서 내렸다. 곧장 가까이 다가가서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여기서 잘 거야?”

“어. 얼른 들어가자.”

“잠깐만!”

재경은 서둘러 박성범을 붙잡았다. 녀석의 등 뒤로 우뚝 서 있는 건물을 한번 쳐다본 뒤에 다시금 시선을 마주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솔직하게 말하면 재경은 모텔에 돈을 쓰는 것도 아까웠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박성범에게까지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제껏 연애는 해본 적이 없지만, 일반적인 인간관계로만 생각해도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자기주장만 내세우거나 일방적인 희생을 하면 그 관계는 오래갈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사귀는 사이가 된 이후로 박성범은 지금까지도 몹시 들뜬 기색이었다. 크게 내색은 하지 않아도 재경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어느 정도의 데이트 비용은 감수할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호텔 건물은 딱 봐도 허용 범위를 훨씬 초과한 사치였다. 그래서 에둘러 난색을 보였지만, 박성범은 옅게 웃으며 재경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까 보니까 특가로 나왔길래 예약한 거야. 생각만큼 그렇게 안 비싸.”

“…….”

“다음에 언제 또 올지 모르니까 제대로 즐기고 가자.”

눈웃음을 치듯 웃는 녀석을 보면서 재경은 짤막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여전히 마음은 편치 않지만, 당일이라서 환불이나 취소가 불가능할 텐데 계속 불만을 표출해봤자 서로 감정만 상할 뿐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녀석의 말대로 본전이나 실컷 뽑고 가야 할 것 같았다. 굳이 좋게 생각하면 앞으로 언제 또 이런 곳에서 묵을 수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오늘 거는 반띵 안 할 거야.”

딴에는 진지하게 한 말이었지만 박성범은 소리 내어 웃으며 사랑스럽다는 시선으로 재경을 바라봤다.

“당연하지.”

뒤늦게 걸음을 옮기자 문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남자가 출입문을 직접 열어주었다. 박성범은 자연스럽게 재경을 리드하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프런트 직원에게 이름을 대자 간단한 확인 절차를 거친 다음 곧바로 카드 키를 건네주었다.

엘리베이터는 11층에서 멈췄다. 박성범은 룸 넘버를 확인한 뒤에 왼쪽 복도로 걸어갔다. 잠시 후 객실 문 앞에 멈춰 서며 카드 키를 댔다.

“들어가자.”

재경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불이 켜진 순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실내는 무척 넓고 깔끔했다. 그리고 전면 창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마치 거울처럼 실내 전경을 반사했다. 덕분에 박성범의 입에서도 만족스러운 평가가 나왔다.

“좋네.”

“진짜 좋다.”

재경은 이끌리듯 창가로 다가가서 딱 붙어 섰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도시의 야경은 지상에서 볼 때와는 또 다른 근사함을 자아냈다. 잠시 후에 시선을 떼며 뒤돌아서자 박성범은 그새 재킷 단추를 풀고 있었다.

재경도 뒤늦게 외투를 벗었다. 잠깐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박성범이 재경에게 샤워 가운을 건넸다. 그리고 허리를 살짝 굽히며 실내용 슬리퍼도 놓아주었다.

“먼저 씻고 와. 겉옷은 나한테 주면 걸어놓을게.”

아무래도 오늘 박성범은 자처해서 집사 노릇을 할 생각인 듯했다. 저에게 잘 보이려고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좋아서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재경은 시키는 대로 순순히 겉옷을 건넨 뒤에 안에 받쳐 입은 라운드 티를 벗으면서 물었다.

“진짜 나부터 씻어?”

“어. 스파 욕조니까 땀 쫙 빼고 천천히 나와도 돼.”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재경은 가운을 챙겨 들고 욕실로 들어갔고,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었던 속옷까지 마저 벗은 다음 샤워기를 틀었다.

금세 뜨거운 물이 쏟아지며 희뿌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재경은 스펀지에 바디 워시를 눌러 짜서 가벼운 샤워부터 먼저 했다. 샤워 부스 뒤편으로는 방금 들은 대로 커다란 월풀 욕조가 갖춰져 있었다.

욕조에 물부터 먼저 받을 걸 그랬나. 흘끗 뒤를 돌아본 재경은 서둘러 거품을 헹궈냈다. 갑작스러운 호텔행이 아직도 조금 당황스럽긴 하지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으니 이런저런 편의시설을 최대한 이용해볼 생각이었다.

샤워를 마친 재경은 샴푸를 펌핑해서 머리를 감았다. 그런데 잠시 후, 문 쪽에서 달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린 재경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박성범이 옷을 전부 벗은 채 욕실로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웃어 보이더니 긴 다리를 자랑하며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무성한 음모와 살짝 힘이 들어간 듯한 중심부에 시선이 닿은 순간 얼굴에 열이 확 올랐지만,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화장실 급해서 온 거야?”

“아니.”

그런 이유였으면 굳이 옷을 다 벗고 들어왔을 리도 없고, 무엇보다 화장실은 다른 공간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재경은 당황한 상태였다.

“그러면 왜…….”

“생각해보니까, 시간도 절약할 겸 같이 씻으면 좋을 거 같더라고. 서로 등도 닦아주고.”

박성범은 웃고 있었지만 왠지 모를 위기감이 느껴졌다. 재경은 저도 모르게 샤워기를 꽉 움켜쥔 채 서둘러 다시 말을 이었다.

“나 거의 다 씻었어. 머리만 헹구면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천천히 해. 어차피 욕조에도 들어갈 거잖아.”

“너부터 먼저 해도 돼.”

“그럴 수는 없지.”

일부러 사진까지 확인하고 예약한 건데.

박성범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욕조로 다가가서 물을 약하게 틀었다. 그러고는 재경이 서 있는 샤워 부스로 다가가서 스펀지를 집어 들었다.

“내가 해줄게.”

그 말에 재경은 움직임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박성범이 서 있어서 깜짝 놀랐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해주긴 뭘 해줘. 샤워는 벌써 했어.”

“알아. 그래도 이왕 들어왔으니까 내가 해주고 싶어. 남이 씻겨주면 느낌이 다를걸?”

청산유수처럼 대답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작정하고 들어온 게 분명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문을 잠그는 건데. 호텔 욕실 문도 잠글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미 늦은 후회였다. 다 벗고 들어온 것만 봐도 절대 그냥은 나가지 않을 듯해서 재경은 자신이 한발 물러서주기로 했다.

“마음대로 해.”

그러자 박성범은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으며 마른 어깨에 입을 맞췄다.

“기분 좋게 해줄게.”

“……안 좋기만 해봐.”

일견 퉁명스럽게 들리는 음성이지만, 화가 난 게 아니라 쑥스러워서 그런다는 사실을 박성범은 잘 알고 있었다. 쪽, 쪽, 두어 번 더 재경의 어깨에 입을 맞춘 뒤에 스펀지에 대고 바디 워시를 듬뿍 눌러 짰다. 풍성하게 거품을 낸 다음 재경의 목덜미부터 천천히 닦아주기 시작했다.

약속대로 박성범의 손길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부드럽다 못해 간지럽게 느껴지는 감각에 재경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데도 숨이 점점 가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

점점 아래로 미끄러진 스펀지가 허벅지까지 내려갔을 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 결국 재경은 참지 못하고 박성범의 손목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됐어. 이제 내가 할게.”

“왜, 별로야?”

“그건 아닌데……. 느낌이 이상해.”

정말로 이상했다. 내심 생각한 대로 야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몸을 닦아주는 것뿐인데도 아랫배가 근질거리며 발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박성범은 그런 재경의 상태를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어떻게 이상한데?”

“몰라. 이제 내가 할 테니까…… 으응.”

박성범이 재경의 턱을 가볍게 붙잡아 돌리며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재경은 움찔했지만, 이내 두 눈을 감으며 박성범의 어깨를 붙잡았다.

툭, 손에서 미끄러진 스펀지가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욕실 벽에 재경을 밀어붙이다시피 하며 딥 키스를 퍼붓던 박성범은 아쉬움에 한 번 더 재경의 입술을 물었다 놓은 다음, 거치대에 걸려 있던 샤워기를 성급하게 뽑아서 재경의 몸에 거품을 씻어 내렸다.

“섰네.”

박성범의 말마따나 재경의 중심은 아까부터 발기한 상태였다. 아래를 흘끗 내려다본 재경은 민망함을 숨기려 퉁명스러움을 가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는 안 그런 것처럼 말한다?”

“그럴 리가. 난 밖에서 옷 벗을 때부터, 아니, 너 먼저 씻으러 들어갔을 때부터 이 상태였어.”

그러곤 또다시 재경의 입술을 찾으며 뜨거운 손바닥으로 중심부를 문질렀다.

“야, 잠깐만…….”

“못 기다려.”

미끈한 혀가 얽혀드는 느낌에 재경은 등줄기를 따라서 찌르르한 쾌감이 번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바짝 일어선 작은 유두를 손끝으로 둥글리다가 박성범은 입술을 떼며 재경과 시선을 마주했다.

말보다 명확한 뜻이 담겨 있는 눈빛에 재경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등 뒤가 벽으로 막혀 있어서 피할 곳이 없었다.

“침대로 갈까?”

기분 탓인지 목소리도 흥분으로 살짝 갈라진 것처럼 들렸다. 재경은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고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먼저 가. 난 욕조에서 뜨끈하게 몸 풀고 싶어.”

“나중에 같이하자. 이거, 불쌍하지도 않아?”

발기한 성기를 은근히 밀어붙이는 움직임에 재경은 기겁했다. 거의 매주 주말마다 진한 스킨십을 하고 있지만, 볼 때마다 놀랍다 못해 살짝 질릴 정도였다. 풀 발기 상태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어떻게 저 정도까지 커질 수 있을까.

“응?”

와중에도 박성범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계속해서 조르듯 은근히 허리를 움직였다. 이쯤 되면 해결책은 하나뿐이었다. 이번에도 재경이 져줄 수밖에 없었다.

“가자, 가.”

“잘 생각했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에 박성범은 커다란 타월을 가져와서 재경의 몸을 꼼꼼하게 닦아주었다. 그러다 여전히 반쯤 발기한 상태인 재경의 중심을 보고는 무릎을 굽혀 앉으며 스스럼없이 입을 맞췄다.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재경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새된 소리가 터져 나갔다.

“뭐 하는 거야?”

“그냥. 예뻐 보여서.”

씩 웃으며 대답하는 말에 재경은 대꾸할 말을 잃었다. 연인으로서의 박성범은 생각보다 스킨십도 좋아하고 낯간지러운 말도 곧잘 하는 편이지만, 거기에 대뜸 입을 맞추는 건 생각도 못 해본 일이었다.

‘……하긴. 조물딱거리는 것도 좋아하는 놈이니까.’

재경은 이내 피식 웃으며 농담조로 물었다.

“그렇게 좋냐?”

“어. 미치게 좋아.”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대답한 뒤에 박성범은 재경의 손을 이끌고 욕실을 나섰다.

침대에 눕히자마자 그 위에 올라탔다.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가득했다. 뭘 해도 버튼을 누르는 상대가 있다더니 정말로 그랬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던 외모는 물론이고 듣기 좋은 목소리도,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도, 가끔 집요하게 들러붙으면 처음엔 잘 받아주다가 결국엔 숨기지 못하고 살짝 구겨지는 표정까지. 그야말로 재경의 모든 것이 미치도록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이미 몇 번이고 생각한 바지만, 그때 재경에게 같이 살자고 말한 게 태어나서 제일 잘한 일 중 하나가 틀림없었다.

“왜 그렇게 실실 웃어?”

“좋아서 그렇다니까.”

쪽, 또 한 번의 짧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이어서 박성범은 재경과 자신의 성기를 한 손에 같이 쥐고 천천히 훑기 시작했다.

“흐읏……!”

예민한 귀두를 엄지로 살살 문지를 때마다 재경의 몸이 움찔했다. 귓가는 어느덧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내리누르듯 허벅지 위에 앉아 있는 탓에 상대의 체온은 물론이고 단단한 무게감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그 때문에 재경은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강렬한 쾌감이 밀려올 때마다 발을 버둥거리며 신음을 참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찌걱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계속 빠르게 손을 움직이던 박성범이 어느 순간 손을 떼며 헝클어진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 틈에 재경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기를 잠시, 또다시 느껴지는 자극에 별생각 없이 아래를 내려다봤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박성범이 입으로 자신의 성기를 물고 있었다. 너른 어깨 위에 걸쳐진 두 다리, 그리고 그보다 더욱 적나라한 광경을 인지한 순간 또 한 번 얼굴 전체에 열기가 번졌다.

‘……안 좋아. 심장에 안 좋다고.’

하지 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입술만 달싹이다가 속으로 삼키고 말았다. 이럴 땐 절대 물러서지 않는 녀석이니 말해봤자 소용없을 게 뻔했다.

처음에 오럴을 받았을 때 재경은 기겁해서 박성범을 밀어냈다. 하지만 녀석을 이길 수는 없었다. 기분 좋게 해주고 싶다고, 한 번만 믿어보라며 씩 웃는 미소에 결국 넘어갔고, 이후로 박성범은 재경의 몸 곳곳에 스스럼없이 입술을 갖다 대곤 했다.

춥, 추웁, 야릇하게 울리는 소리에 재경은 입술을 깨문 채로 애먼 곳을 노려보듯 쳐다봤다. 처음에 기절할 것처럼 놀랐던 때에 비하면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민망한 건 민망한 거였다.

“나와봐. 할 거 같아.”

그럼에도 박성범은 집요하게 재경을 괴롭히다가 거듭 비키라고 하는 말에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곧 커다란 손이 그 자리를 대신했고, 빠르게 훑어주는 손놀림에 재경은 울컥 정액을 쏟아냈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고르는 와중에도 박성범은 재경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깨 위에 걸쳐진 종아리를 붙잡고는 안쪽의 여린 살에 쪽쪽 입을 맞췄다.

그 사이로 우뚝 솟아 있는 중심이 재경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틈만 나면 만져대는 녀석과 달리 재경은 엉거주춤하게 서너 번 정도 손으로 훑어준 게 고작이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뒤에 재경은 평온함을 가장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나도 해줄까?”

“뭘?”

“네 거 말이야.”

무슨 말인지 깨달은 듯 박성범이 입가를 올리며 옅게 웃었다. 그러더니 다시 한 번 다리에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됐어. 괜히 무리할 필요 없어.”

재경은 게이가 아니다. 다른 남자의 성기를 만지는 건 쉽지 않은 일일 테고, 자신이 이렇게 달라붙어도 피하지 않고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무리는 무슨. 이쪽으로 와서 누워 봐.”

몸을 일으킨 재경이 박성범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박성범은 평소처럼 못 이기는 척 넘어가주는 대신 제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어설프게 웃을 뿐이었다.

“됐어. 굳이 안 그래도…….”

“아, 진짜. 누워보라니까.”

힘껏 체중을 실어서 어깨를 밀자 방심하고 있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재경은 틈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움직여서, 좀 전에 박성범이 그랬던 것처럼 허벅지 위에 걸터앉았다.

녀석이 답지 않게 망설이는 이유는 쉽게 짐작이 갔다. 늘 자신감이 넘치고 또 스스럼없이 달라붙으면서도, 정작 제가 거길 만지려고 하면 긴장해서 몸을 굳히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상대가 ‘동성’이라는 사실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행위이니 혹시라도 거부감을 느낄까 봐 불안한 거겠지.

하지만 재경은 결코 어쭙잖은 마음으로 고백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당시에는 녀석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우선이긴 했지만, 이런 성적인 행위도 충분히 염두에 두고 나름대로 공부까지 했는데 저를 믿지 못하고 자꾸만 피하려는 녀석을 보니 오기 아닌 오기가 생겼다.

재경은 곧장 손을 뻗어서 박성범의 중심을 손에 쥐었다. 역시, 자신의 생각은 변함없었다. 한 손으로 간신히 쥘 수 있는 사이즈가 부담스럽긴 해도 거부감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단단해 보이는 복근과 두드러진 장골, 거기에 무성한 음모와 우뚝 솟은 중심까지 어우러진 모습이 시각적인 흥분을 한껏 끌어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오직 자신만 독점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충족감마저 차올랐다.

“괜찮겠어?”

남의 속도 모르고 박성범은 계속해서 불안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못한다고 흉이나 보지 마.”

짤막하게 대꾸한 뒤에 재경은 몸을 뒤로 물리며 고개를 숙였다. 막상 가까이에서 보니 살짝 겁이 나긴 했지만, 이내 입을 크게 벌리며 끝부분을 입에 물었다.

서툴게나마 혀를 움직이자 박성범은 확실한 반응을 보였다. 팔이 닿아 있는 허벅지 근육이 꿈틀대서 깜짝 놀랐지만, 별다른 제지는 없었기에 다시금 천천히 혀를 움직였다.

“괜찮아?”

머리 위에서 들리는 물음에 재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순간 뒷덜미를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단순히 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애무하듯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재경의 중심도 또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같은 남자 걸 빨면서 흥분하다니. 박성범이 아니었으면 평생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일이겠지만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서툴기 짝이 없을 오럴에도 착실하게 반응해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이제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코가 꿰였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재경은 좀 더 대담하게 움직임을 이어갔다. 도저히 입으로 머금을 수 없는 부분은 손으로 만지며 자극했고,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박성범은 계속해서 재경의 귀와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가끔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그때마다 재경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저로 인해 느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녀석이 침대에서 왜 그렇게 자신을 물고 빨고 하는지 조금이나마 알 듯했다.

“……할 것 같아.”

흥분했을 때만 들을 수 있는 톤의 목소리에 재경은 또 한 번 움찔했다. 한껏 머금고 있던 걸 뱉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자 끈적한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그런 재경의 입술에 대고 아무렇지 않게 키스한 뒤에 박성범은 순식간에 자세를 바꾸며 재경을 침대 위에 눕혔다. 벌린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는 또다시 중심을 함께 쥐고 빠르게 흔들었다.

임계점까지 끌어 올려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너른 어깨를 힘주어 꽉 붙잡은 채로, 재경은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쾌감 속에서 절정에 달했다.

“하아…….”

긴 숨을 내쉬며 저도 모르게 감았던 눈을 떴다. 어째 가슴이 답답하다 했더니, 커다랗고 단단한 몸이 이불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을 덮고 있었다.

“비켜. 무거워.”

그러자 박성범이 씩 웃으면서 시선을 맞췄다.

“할 거 다 했다고 바로 찬밥 취급이야?”

재경은 헛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찬밥은 무슨. 완전 갓 지은 밥이겠지.”

“갓 지은 밥?”

“뜨끈뜨끈하잖아.”

높은 체온을 일컫는다는 걸 깨달은 박성범이 소리 내어 웃었다. 재경의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반 바퀴 돌리자 순식간에 두 사람의 자세가 반대로 바뀌었다.

“그래도 요즘 같은 계절엔 따뜻해서 좋지 않아?”

“……인정.”

반박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여름이었으면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밀어냈겠지만, 요즘처럼 쌀쌀한 날씨에는 은근히 반갑기까지 했다.

지금도 못 이기는 척 얌전하게 안겨 있다가, 재경은 이대로 잠들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고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옷 입으려고.”

“옷이 왜 필요해. 나랑 꼭 껴안고 자면 되지.”

“미안한데 난 누구처럼 홀딱 벗고 자는 취미는 없거든.”

재경은 침대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뒤에서 휙 뻗어 나온 팔이 재경의 허리를 낚아채듯 끌어안았다. 오후까지만 해도 없었던 흔적이 군데군데 새겨져 있는 목덜미에 한 번 더 입을 맞춘 뒤에 박성범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욕조에서 한 번 더 할까?”

뜨거운 입김에 움찔한 재경은 재빨리 박성범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그 손마저 붙잡으며 차단한 박성범이 그대로 재경에게 체중을 실었다. 졸지에 앉은 채로 녀석을 업게 된 듯한 자세에 재경이 뒤를 돌아보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무거우니까 비켜.”

박성범은 못 들은 척하며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은은한 바디워시 향과 뒤섞인 체향을 깊게 들이마시면서 재경의 손을 조물거리다가, 탁자 위에 둔 핸드폰을 잠깐 켜서 시간을 확인했다.

“어, 시간 됐다.”

그제야 재경을 놔주고 일어선 그는 옷장에 들어 있던 가운을 꺼내서 몸에 걸쳤다. 나머지 하나를 가져와서 재경에게도 입혀준 뒤에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잠깐 눈 좀 감고 있어 봐.”

“왜?”

은연중에 불신이 담긴 표정으로 묻자 커다란 손이 장난스럽게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속는 셈 치고 잠깐만 감고 있어줘. 설마 내가 너한테 뭐 안 좋은 걸 하겠어?”

그렇지는 않을 거다. 다만 틈만 나면 야한 짓을 하려는 게 문제지.

어쨌거나 전혀 어려운 일도 아니고 거듭 부탁을 받기도 해서 재경은 순순히 눈을 감아주었다.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감고 있어. 실눈 뜨는 것도 금지야.”

“알았어.”

시야가 차단되면서 자연스럽게 청각이 예민해졌다. 멀어지는 슬리퍼 소리, 뭔가가 달칵거리는 소리 등이 차례로 들리더니 이윽고 박성범이 다시 돌아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제 눈 떠도 돼.”

시키는 대로 눈을 뜬 순간 재경은 저도 모르게 벙찐 표정이 되었다. 옅은 어둠 속, 케이크 위에 꽂힌 숫자 양초가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어서 부드럽게 말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생일 축하해.”

재경은 멍하니 촛불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어떻게 사귀게 됐는데, 애인 생일도 모르면 안 되지.”

“…….”

“촛농 떨어진다. 얼른 불어.”

머뭇거리다가 어색하게 촛불을 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박성범은 빙그레 웃음 지었다.

“소원 빌었어?”

“……아니, 깜빡했어.”

“그럼 지금이라도 얼른 해.”

그러자 순순히 생각에 잠기는 듯한 재경을 잠시 기다려주다가 박성범이 다시 물었다.

“빌었어?”

“응.”

“어떤 거?”

“……비밀이야.”

살짝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저기 다니기를 좋아하는 녀석이라서 오늘도 으레 그런 줄로만 알았지, 설마 생일인 걸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박성범이 준비한 것은 또 있었다. 잠깐만, 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무언가를 들고 와서 재경에게 냉큼 내밀었다.

“이건 생일 선물이야.”

“……안 줘도 되는데.”

“무드 없기는. 얼른 풀어봐.”

어째 받는 사람보다 더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재경은 피식 웃으며 천천히 포장지를 뜯었다. 네모난 상자 뚜껑을 열자 고급스러운 자태를 뽐내는 손목시계가 보였다.

“맘에 들어?”

“어. 예쁘네.”

“줘봐. 내가 채워줄게.”

시계를 꺼낸 박성범이 재경의 왼쪽 손목에 시계를 채워주었다. 이내 얼굴에 흐뭇함이 가득 번졌다. 역시 자신의 안목은 틀리지 않다는 생각에 뿌듯해하는데 산통을 깨는 질문이 들렸다.

“비싼 거 아냐?”

“……진짜…….”

무드 없다, 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박성범은 가까스로 말을 멈췄다.

“뭐?”

“아냐, 아무것도.”

이내 픽 웃으며 재경의 머리를 벅벅 헝클었다. 만일 자신이었으면 진한 딥 키스로 화답한 다음 그대로 침대에 밀어 눕혔을 텐데, 설마 이 분위기에서 비싸냐는 질문을 할 줄이야. 하지만 이 또한 재경답다고 생각하면서 박성범은 말을 이었다.

“너 이제 큰일 났어.”

“큰일 났다고? 왜?”

“왜긴. 그 시계 찼으니까, 앞으로 네 시간은 전부 나랑 공유해야 돼.”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지만, 재경은 그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시계가 아니라 족쇄 아냐?”

“맞아. 근데 이미 늦었어. 못 도망가.”

또다시 뒤에서 재경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박성범은 가운 위로 슬쩍 드러난 목덜미에 쪽쪽 입을 맞췄다. 덕분에 재경은 원치 않아도 알게 되고 말았다. 주인을 닮아서 지칠 줄 모르는 아랫도리가 허리께를 꾹꾹 찌르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일찍 자기는 글렀네.’

어느덧 슬금슬금 샤워 가운 안으로 파고드는 손가락이 그 증거였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재경은 망설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근데 말이야.”

“응?”

“왜 그건 안 해?”

“뭘?”

“그거 말이야. ……넣는 거.”

일전에 박성범이 그쪽을 건드린 이후로 재경은 ‘드디어 올 게 왔구나.’ 하고 나름대로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다. 물론 쉽게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동영상 속 남자들에게 자신과 박성범을 대입할 때마다 얼굴이 타버릴 것처럼 열이 올랐고, 또 녀석의 크기를 알고 있기 때문에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박성범이니까, 그리고 사귀는 사이니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후로 그쪽은 전혀 건드리질 않으니 되레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박성범은 침묵을 지켰다. 살짝 놀라는 듯하더니, 그저 곤란함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제 목덜미를 쓸어댈 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재경은 초조함을 느끼며 박성범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다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다시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면……. 혹시 그 반대야?”

“뭐?”

“네가 받는 쪽이냐고.”

“…….”

또 한 번 침묵이 찾아왔다. 재경은 이제 초조함을 넘어서 혼란스러움을 느낄 지경이 됐다.

이것도 아닌가? 아님 그냥 만지거나 비비는 걸로 만족하는…….

그 때였다.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박성범이 커다란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었다.

침묵으로 사람 쫄게 했을 때는 언제고, 갑자기 터진 웃음소리에 재경은 눈썹을 꿈틀했다. 잠시 후 박성범이 거듭 재경을 끌어안으며 마른 어깨에 턱을 올렸다.

“받는 쪽이면 넣어줄 거야?”

“……네가 원하면.”

“그럼 그 반대라면 넣게 해줄 거고?”

귓가에 대고 묻는 목소리에 재경은 움찔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밀어냈지만, 박성범은 손쉽게 붙잡아 내리면서 대답을 재촉했다.

“응?”

뒤늦게 밀려드는 민망함에 재경은 태연함을 가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서 방금 너한테 물어봤잖아. 왜 그건 안 하냐고.”

그러자 전혀 엉뚱한 대꾸가 들려왔다.

“너도 나 좋아하는 거 맞네.”

“갑자기 무슨 말이야?”

“……넌 나랑 다르잖아. 그래서 네가 먼저 이런 말 꺼낼 줄은 생각도 못 했거든. 근데, 괜히 무리할 필요 없어. 난 지금처럼 이렇게 너 껴안고, 뒹굴뒹굴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연인 사이로 발전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지금도 재경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고 함께해준다는 사실이 꿈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물론 삽입 섹스까지 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긴 하겠지만, 말했다시피 게이가 아닌 녀석에게 거기까지 바라는 것은 양심 없는 짓이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 때문에 재경이 부담을 느끼게 하기 싫었고, 저 때문에 억지로 참고 받아들이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지금의 행복을 계속 누릴 수만 있다면 찰나의 욕정 따윈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었다. 그만큼 이재경은 자신에게 소중한…….

“만족은 무슨.”

“……어?”

“그럼 얼마 전에 내 그…… 들쑤신 건 뭐야?”

딱 붙어 있는 덕분에 재경이 입안으로 얼버무리듯 한 말도 박성범은 놓치지 않고 들었다.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말이 먼저 튀어나갔다.

“거길 들쑤셨다고?”

재경은 팩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농담이나 장난이면 화를 냈을 텐데,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로 금시초문인 것처럼 보였다.

“진짜 그랬어? 내가?”

“어. 하지 말라고 해도 조금만, 조금만 그러면서 들은 척도 안 하더라. 거기다 내 다리 사이에 끼우고 비비기는 또 얼마나 비비던지……. 허벅지에 불나는 줄 알았어.”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박성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곤혹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뒤늦게 이실직고했다.

“……미안. 기억이 안 나.”

재경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날따라 술 냄새가 많이 나긴 했지만, 설마 완전히 잊어버렸을 줄이야.

이걸 어떻게 할까, 하는 표정으로 박성범을 쳐다보다가 재경은 짤막한 한숨을 흘린 뒤 허심탄회하게 말을 이었다.

“나 때문에 참을 필요 없어.”

“……어?”

“하고 싶으면 해도 된다고.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것도 생각 안 하고 너랑 사귄다고 했겠어?”

어쩐지 말을 하면 할수록 알 것 같았다. 스킨십도 유사 섹스도 그렇게나 좋아하는 녀석이 왜 이제껏 뒤는 건드리지 않았는지를. 혹시라도 자신이 싫어할까 봐 지레 겁먹은 모양인데 그야말로 괜한 걱정이었다.

물론 처음엔 녀석을 놓치기 싫다는 생각만으로 붙잡은 게 맞지만, 한창 피 끓는 청춘들이 플라토닉 러브로 만족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재경은 바쁜 시간을 쪼개서 낯 뜨거운 단어도 검색해보고 영상까지 찾아보면서 나름대로 준비를 했던 참이었다.

하지만 박성범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불도저처럼 밀어붙일 때는 언제고, 계속 곤란해하며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할 수 있을 거 같은 거랑 할 수 있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야. 난 진짜 이대로도 괜찮으니까…….”

자꾸만 물러서려는 태도에 결국 재경은 폭발했다.

“내가 괜찮다고, 내가! 저번에는 갑자기 그래서 좀 놀라긴 했어도 싫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 네가 뭘 걱정하는 줄도 알고 날 위해서 그렇다는 것도 알겠는데, 왜 정작 당사자인 내 말은 안 들어주는데?”

“…….”

“그렇게 무서우면, 다른 놈이랑 먼저 하고 올까?”

“절대 안 돼!”

버럭 터져 나온 큰 소리에 재경은 깜짝 놀랐다. 고함친 당사자도 놀란 듯 움찔하더니, 이내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푹 내쉰다.

잠시 후에 다시 마주한 눈동자에는 가시지 않은 불안함이 남아 있었다. 살짝 갈라진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다음이었다.

“네 생일인데 내가 선물을 받은 기분이야. 그것도 엄청나게 큰 선물.”

“그러게 왜 계속 괜찮다고 고집을 부려?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너 그때 진짜 장난 아니게 밀어붙였어. 알아?”

“……기억은 안 나는데 어땠는지는 알 거 같아.”

“말이나 못 하면.”

볼멘소리로 중얼거리는 재경을 꼭 껴안으며 박성범은 어렵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안 해.”

“……! 야, 너 진짜…….”

“끝까지 들어줘. 사실 미치게 하고 싶은데, 당장이라도 네 안에 들어가고 싶은데, 지금은 콘돔도 없고 젤도 없어. 그리고 너도 준비가 필요할 테니까 다음에 제대로 하자.”

살며시 재경의 뺨을 감싸며 입을 맞췄다. 만일 윤정현이 지금 상황을 봤다면 다 차려진 밥상 엎는 똥멍청이라며 혀를 차거나 두고두고 놀려먹겠지만, 재경이 처음인 만큼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성급하게 몸을 겹치고 싶지는 않았다.

……않은데,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잘 만큼 성인군자인 것도 아니었다. 혀를 섞고 호흡을 앗아가는 딥 키스를 계속하면서 박성범은 자연스레 재경을 침대 위에 눕혔다. 한 손을 내려 재경의 성기를 거침없이 주무르다가 두 다리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걸치고 몸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 상태로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발기한 성기가 재경의 고간 이곳저곳을 찔러댔다. 귀두를 음낭에 대고 문지르거나 허벅지 안쪽의 여린 살에 비비기도 했다. 급기야 회음부까지 자극하는 움직임에 재경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오늘은 안 할 거라며?”

“응. 그냥 비비기만 할 거야.”

박성범은 한술 더 떠 재경의 몸을 왼쪽으로 돌린 다음 허벅지 사이에 성기를 밀어 넣은 채로 잘게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다리 사이를 드나드는 적나라한 움직임에 재경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래서야 넣지만 않았을 뿐이지 삽입 섹스와 다른 점이 뭐가 있나 싶다. 남의 속도 모르고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이던 박성범이 돌연 움직임을 멈추며 재경의 목덜미를 꽉 깨물었다. 절대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이 뒤늦게 생각난 탓이었다.

“……! 아프잖아.”

“아프라고 한 거야. 한 번만 더 다른 놈이랑 한다고 하기만 해봐.”

날벼락 같은 통증에 반사적으로 목덜미를 감싼 재경은 한발 늦게 박성범의 말뜻을 이해하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 그래서 한 말이지, 내가 미쳤다고 진짜 그러겠어?”

“알아. 아는데, 빈말이라도 싫어.”

여전히 뒷목을 감싸고 있는 재경의 손을 살짝 끌어 내리며 박성범은 선명하게 남은 잇자국 위에 달래듯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한편으로는 묘한 희열감이 차올랐다. 마음만 먹으면 재경의 몸 어디에든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기쁘면서도 만족스러웠다.

고개를 드는데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박성범은 곧 은근한 목소리로 재경에게 물었다.

“배는 안 고파? 케이크 있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먹자고?”

“응. 먹여줄까?”

“됐어. 내일 먹을게.”

“그럼 나 혼자 먹어야겠네.”

협탁으로 팔을 쭉 뻗은 박성범이 손가락 끝으로 케이크의 생크림을 듬뿍 떠냈다. 별생각 없이 쳐다보고 있던 것도 잠시, 이내 재경의 얼굴에 설마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야, 너……!”

다급하게 입을 열었지만 이미 늦었다. 생크림을 재경의 몸에 바른 뒤에 박성범은 그대로 입술을 내렸다.

“너 미쳤어?!”

“미쳤지. 너한테.”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재경은 말문이 턱 막혔다. 얼이 빠져 멍하니 쳐다보는 동안 박성범은 재경의 몸에 묻힌 크림을 깨끗하게 먹어치운 다음 작게 솟아 있는 유두까지 잘근잘근 씹어댔다.

“아파…!”

“미안. 살살 할게.”

그렇게 본인의 욕심을 실컷 채운 뒤에야 박성범은 고개를 들었다. 만족스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재경을 내려다보던 시선이 어딘가에서 멈췄다. 시선의 종착지를 확인한 순간, 재경은 저도 모르게 다리를 오므리면서 외치듯 말했다.

“더 하면 가만 안 둬.”

“……안 돼?”

“절대 안 돼! 하기만 해봐.”

처음은 방어할 틈도 없이 불식간에 당했지만 두 번은 절대 안 될 말이었다. 한편으로는 기가 막혔다. 박성범과 사귀면서 새롭게 경험하는 일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지만, 설마 이런 경험까지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더 했다간 진심으로 화를 낼 것 같은 분위기에 박성범은 아쉽지만 욕심을 접고 침대에 누워 재경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허벅지 사이에 다시금 성기를 끼운 채로 허리를 흔들면서 왼손으로는 재경의 중심을 쥐고 빠르게 훑었다. 금세 고조된 열기와 흥분 속에서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절정의 흔적을 토해냈다.

재경은 녹초가 되어 널브러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사실 자신은 딱히 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나 체력 소모가 클 줄이야.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하지만 아래가 흠뻑 젖기도 했고, 방금 박성범이 제 몸에 생크림을 발랐던 걸 생각하면 도저히 이대로 그냥 잘 수는 없었다.

10초만…… 10초만 있다가 일어나자. 그렇게 마음먹고 속으로 카운팅을 하는데 귓가에 대고 은근하게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씻겨줄까?”

퍽-!

“악!”

팔꿈치로 가슴팍을 가격당한 박성범이 비명을 질렀다.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일으킨 재경이 단호한 표정으로 엄포를 놨다.

“따라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마. 장난하는 거 아냐.”

“……가고 싶어도 못 가겠어. 갈비뼈 나간 거 같아.”

“엄살은.”

재경은 미련 없이 욕실로 향했다.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어가서 살짝 미안하긴 하지만, 지금 돌아가면 일련의 과정들이 또다시 반복될 게 뻔했다.

샤워기를 틀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무언가가 재경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잠깐 잊고 있었던 존재감을 자랑하는 손목시계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풀어서 샤워 부스 너머에 있는 세면대 위에 올려두었다.

‘너 이제 큰일 났어.’

‘시계 찼으니까, 앞으로 네 시간은 전부 나랑 공유해야 돼.’

저도 모르게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변치 않는 사랑은 믿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오늘 박성범과 함께 보낸 시간은 아주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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