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52화 (152/179)
  • @152

    일행 중 누구도 먼저 입을 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유클레스 후작이 엘렌의 아버지가…… 아니야?’

    하지만 분명 소설에서는 그리 적혀 있었다.

    엘렌도 꼬박꼬박 후작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토록 힘들어했던 것이다. 혈육이, 자신의 고통을 방치해서.

    ‘그 소설은 엘렌의 일기 같진 않았는데.’

    당장 시점부터 달랐다. 일기란 보통, 자연스레 자신을 ‘나’라고 칭하지 않던가.

    전생에서 읽은 글은 삼인칭이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그 고통을 묘사해 주는.

    관찰자.

    세이나의 눈에 깨달음이 스쳤다. 그 순간,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일행과 소녀의 시선이 성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 번 더.

    쾅!

    피어오른 검은 연기가 희미한 별들마저 모조리 잠식해 어둠을 한층 짙게 만들었다. 그 속에서 세이나는 추락하는 선명한 빛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와이번. 조금 전, 그녀의 머리 위를 스친 마물들이 유성우처럼 불을 안고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마법이야.’

    저만한 수의 불길을 한 번에 일으킬만한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러고도 와이번이 모두 사라지지 않은 것이었다.

    발치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진동도 신경 쓰였다. 뭔가가 성문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내 친절은 여기까지야, 세이나 로힐.”

    그런 그녀의 걱정을 자르듯, 소녀가 차갑게 말했다.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그런 뜻을 품은 눈빛이었다.

    소녀는 말머리를 성문으로 돌렸다.

    “엘렌을 깨우는 건 이제 네게 달렸어.”

    “잠깐, 아직 안 끝났어!”

    쉰 목소리로 토해 낸 외침은 늦지 않게 소녀에게 닿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세이나가 말했다.

    “넌 대체 누구야?”

    소녀는 다시 무심한 낯으로 돌아와 있었다.

    15살 남짓. 그 또래에게서 찾기 힘든 분위기였다. 어린 몸에 다른 나이의 영혼이 갇혀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무미건조하고 생기 없는, 마치 잘 그려 낸 그림 같은 이질감도 느껴졌다. 소녀의 입술이 느리게 열렸고.

    “나는…….”

    갑자기 그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소녀의 눈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보고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입술에서 떨어진 핏방울들이 그녀의 옷에 물들기 시작한 순간.

    “어?”

    그녀가 말에서 떨어졌다.

    세이나는 황급히 말에서 내려 그녀에게 달려갔다.

    소녀는 몸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지 계속해서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그녀를 일으켜 주려던 세이나는 소녀의 배에서 번지기 시작한 피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창에 꿰뚫린 것처럼.

    “안 돼…….”

    이어서 또 다른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전에는 들어 본 바 없는, 그러나 단언컨대 가장 오싹한 비명이었다.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대기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세이나는 그제야 와이번들이 더는 떨어지지 않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섭게 튀어 오르던 불꽃도 이미 사라진 후였다.

    “디온…….”

    그 말을 기점으로, 소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 * *

    벌써 세 번째.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디온은 제 앞에 꽂힌 도끼날을 주시했다.

    알아차리는 것이 늦었다면 몸이 반으로 쪼개졌으리라. 생사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어서고도 그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은 없었다.

    그저, 빠르게 다시 손을 놀렸을 뿐.

    그의 부름에 따라 굉음과 함께 날카로운 바람이 허공을 쇄도했다.

    황소의 머리를 한 마물, 미노타우로스는 말 그대로 종잇장처럼 무참히 반으로 쪼개졌다. 그러나 정적도 잠시.

    그 사체 옆에서 튀어나오는 검은 해골들과 눈이 마주치자 디온은 혀를 차며 몸을 뒤로 빼내었다.

    그 왜소한 몸과 달리 해골들은 제법 재빠른 편이었다. 쉬익! 날카로운 날이 그의 눈앞을 스쳤고.

    파지직!

    곧이어 땅에서 솟구친 검은 연기가 해골을 삼켰다.

    키에에엑!

    바람이 일으킨 흙먼지에서 몸을 빼내고, 디온은 숨을 골랐다. 그렇게나 많이 처치했는데도 아직 마물은 꽤 많은 수가 남아 있었다.

    ‘어쩔 수 없나.’

    마력을 아낄 상황은 아니었다. 디온은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쾅!

    기묘한 폭발이 숲을 삼켰다.

    땅으로 내려온 와이번들은 꼼짝도 못 하고 맹렬한 불길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이어서 걸음이 빨랐던 일부 스켈레톤들까지 불에 휩싸이자 숲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지옥에서나 볼 법한 참혹한 광경이었다.

    불 속에서 미친 듯이 발버둥 치는 해골들, 고통에 잠긴 비명, 거칠게 휘날리는 불티. 아찔할 정도의 열기.

    그 속에, 디온이 있었다.

    “하…….”

    벌써 세 번째.

    이제는 말버릇이 된 그 숫자는 바로 디온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횟수였다.

    어린아이가 되어서, 뱀에 물려서, 마지막은 진실 게임에서 패배해서.

    특히, 첫 번째가 가장 치명적이었다.

    폭주 직전까지 끓어올랐던 마력은 원래 몸으로 돌아온 후에도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테지만, 안정기에 접어들기도 전에 두 번이나 더 의식을 잃었다.

    벌써 세 번이나.

    오늘 디온은 마력이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첫 번째는 스켈레톤들을 일부 땅으로 다시 돌려보냈을 때. 두 번째는 와이번들을 공중에서 터트렸을 때였다.

    미노타우로스들을 반쯤 날려 버린 순간, 갑자기 마력이 통제를 잃고 날뛰었다. 그는 한쪽 손으로 제 손목을 꽉 붙들었다.

    “젠장.”

    그러나 후회하기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돌연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디온은 이를 악물고 허리를 세웠다. 흐려진 시야 속에서 그는 자신이 지탱하던 나무가 박살이 나 버린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선, 검은 괴물도.

    “하아…….”

    벌써 세 번째.

    죽이고, 죽이고, 또 죽여도 괴물은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더 많은 팔, 근육이 팽창한 다리. 폭발이 남긴 불씨를 곳곳에 단 몸은 시시각각 더 부풀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잘라 낸 머리만은 재생되지 않는지, 목이 있는 자리에 검은 촉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볼수록 기괴한 모습이었다.

    ‘마정석만 깨트리면 된다고 했는데…… 아직 남은 건가?’

    주의 깊게 살폈지만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

    “마지막으로 묻지.”

    머리가 없는 목이 좌우로 움직였다. 마치 순수한 어린아이가 갸웃하는 것 같다.

    “네 주인은 어디 있지?”

    대답은 이번에도 공격이었다.

    괴물에게서 뻗어 나온 촉수들을 다섯 번 쳐낼 때 즈음, 검이 쪼개어졌다. 그 손잡이를 집어 던진 디온은 크게 뒤로 물러나 괴물과 거리를 벌렸다.

    그는 혀를 차며 마력을 불러들였다. 의식을 한 지점으로 집중하고, 손끝을 스치는 힘을 끌어당겼다.

    그의 스승이 가르쳐 주었듯이.

    - 스키아는 나와 같은 사례를 없애기 위해 그놈의 이성까지 모두 지웠을 게다. 그저 명령대로 움직이는 인형이 된 거지.

    오래된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듯했다. 디온은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 그 아이의 죄는 힘을 원한 것밖에 없다. 평생을 길거리를 방황하며, 처절하게 살아왔지. 처음 만났을 땐 누가 한 것인지 너무 심하게 얻어맞아서 제대로 눈도 뜨지 못했어.

    몇 걸음 앞, 괴물이 달려오고 있었다. 스승이 말했다.

    - 불쌍한 아이다.

    “알 바냐.”

    화르륵! 불길이 일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색채의 불꽃, 그 가장 깊은 곳에서 백색과 푸른빛이 뒤엉켜 있다. 불길은 광포한 열기를 일으키며 순식간에 검은 소용돌이로 바뀌었다.

    “하, 하아…….”

    불길이 거칠어질 때마다 생명이 깎이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생명이 꺼져 가고 있는 건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디온에게 퍽 위로로 다가왔다. 스승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를 맴돌았다. 푸른 불꽃은 혼마저 집어삼키는 것.

    - 부디 내 제자에게는 쓰지 말아다오.

    “하…….”

    어질어질한 열기 속에서 디온의 무릎이 마침내 바닥에 닿았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괴물의 잔상 위로 스승의 실망스러운 눈빛이 겹쳐 보였다. 디온은 실소를 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그리 허무하게 죽지 말았어야지.’

    공기는 이제 곧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포효를 닮은 거친 바람이 주위를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미친 듯이 움직이던 괴물의 그림자가 차츰 가라앉았다. 디온의 손등에서 검은 핏줄이 꿈틀대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벌써 세 번째.’

    난폭한 불길이 남긴 마지막 환영은 세이나 로힐이었다.

    황성의 복도에서처럼, 금색 눈동자는 냉정한 빛을 품고 있었다. 그 안의 원망을 읽어 낸 디온은 입을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

    변명은 없었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은 자신. 내가 이렇게나 속이 좁았던가, 홀로 남아 한탄하기도 수십 번.

    도망치듯 찾아간 꿈에서도 세이나 로힐이 있었다. 그곳의 그녀는 현실에서보다 훨씬 싸늘하게 그를 노려보며 으르렁대듯 말했다.

    마족.

    “아.”

    디온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젠장.”

    그는 어느새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무래도 잠시 기절한 것 같았다. 와이번들의 요란스러운 울음소리가 고맙게 느껴질 줄이야.

    키에에에엑!

    ‘아직도 남았나.’

    정말 징글징글하게도 모아 왔다 싶었다.

    그것은 뒤집어 말하자면, 그의 계획이 잘 먹히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저 마물들을 모두 불러낸 여파로 스키아는 어디에선가 의식을 잃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아직 어깨의 상처도 다 치료하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괴물을 통해 본 시야 속에서, 디온 프라벨은 공작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그 광경을 보였으니 찾아가면 제 편으로 인식할 것이다. 이제, 그녀를 찾아내기만 하면…….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디온은 몸을 다 일으키지 못하고 다시 드러눕고 말았다. 매캐한 연기가 섞인 밤하늘은 기분 나쁠 정도로 새까맣기만 했다.

    ‘아직 할 일이 남았는데…….’

    그리고 와이번들도 다 처리하지 못했다.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디온은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익숙한 기운. 사람은 아니었다. 또 공격인 걸까.

    하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자신을 향해 뻗어 오는 거친 살기를 느끼며, 디온은 거친 숨을 뱉었다.

    죽음이 성큼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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