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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51화 (151/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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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포기할 수밖에 없는

    다음. 또 다음. 그 다음에도.

    차가운 밤공기를 찢어발기며 와이번들이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세이나는 물론, 라샤드와 오웬의 입이 벌어졌다.

    차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 마치 철새 떼의 이동 같았다. 크기가 새보다 훨씬 더 크고 울음소리도 더 기괴하다는 데엔 차이점이 있지만.

    키에에에에엑!

    와이번들은 일제히 수도의 성문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 속도도 얼마나 빠른지 정수리 위로 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거센 바람이 느껴졌다.

    오싹한 괴성 역시 점점 더 다가오고 있었다. 멍한 일행들의 얼굴 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얼룩 같은 잔영을 남기며 무서운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키에에엑!

    “스키아는 너에게 입은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어.”

    소녀는 무미건조하게 말을 이어 갔다.

    “주변의 마물들을 모두 부르면, 힘을 너무 쓴 반동으로 가사 상태에 빠지게 되지. 아마 지금쯤 어딘가에서 지쳐 쓰러져 있을 거야.”

    “어디 있는지 알려 주면 우리가…….”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해. 너희는 세이나 로힐이나 지켜.”

    라샤드의 말을 소녀가 날카롭게 잘랐다.

    세이나는 마물들이 떠나간 방향에서 좀처럼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수많은 마물을 보았지만, 저토록 많은 수는 그녀도 처음이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어떻게 저런 걸 혼자…….

    “너를 따라가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마족은 성녀의 존재를 감지할 수 없거든.”

    세이나는 겨우 소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저렇게 침착한 건지, 황당할 정도였다.

    “너도 돕고 싶다느니, 그런 개소리는 집어치워. 현실적으로 생각해, 세이나 로힐. 지금 너는 도망치는 게 최선이야.”

    그리고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소녀는 그녀를 노골적으로 싫어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일까.

    “질문은 끝났어? 그럼 이제 꺼져 줄래?”

    궁금하긴 했으나 세이나에게는 더 중요한 질문들이 산재해 있었다.

    “하나 더.”

    적개심 어린 눈빛을 받으며 세이나는 어렵게 입술을 열었다.

    “하나, 더 있어.”

    “뭐지?”

    “……1년 전에도.”

    아주, 어렵게.

    “갑자기 말이 나타났지.”

    루카스와 함께 산을 나오자마자 갑자기 말 2마리와 만났다. 당시에는 그저 운이 좋았다고 여겼다. 누군가 마물을 보고 놀라 달아났겠거니.

    하지만 오늘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이나는 소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때도 네가 끌고 온 거야?”

    “맞아.”

    맙소사. 작게 탄식을 터트린 세이나는 이마를 짚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소녀는 디온의 동료로 보였다. 그렇다면 그날, 그 숲에는.

    “설마, 그때의 변화는 디온 때문에…….”

    “하!”

    소녀는 세이나가 제대로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날카롭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앳된 얼굴이 경멸로 얼룩지고 소녀의 눈빛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감히 그딴 말을!”

    말 위에 있지 않고 서서 마주 보고 있었다면 그대로 세이나의 뺨을 때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맹렬한 기세였다.

    그녀는 한동안 세이나를 바라보다 차갑게 웃었다.

    “그래, 차라리 그때 죽었으면 이렇게 번거로워지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리고 세이나에게도 드디어 한계가 찾아왔다. 뭐라 쏘아붙여 주려던 그때, 소녀가 다시 말했다.

    “너도 네가 민폐라는 것쯤은 알고 있잖아?”

    세이나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이 즐겁기라도 했는지 소녀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알고 있었다. 재판부터 신전, 그리고 지금도.

    자신이 죽었다면 모두 없었을 일.

    지금껏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세월이 모두 허무하게 다가왔다.

    제 죽음을 바라는 사람이 이토록 많다니. 우스운 사실은 그녀 역시 그것이 가장 빠른 방법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성녀가 사라지면 마족의 부활은 막을 수 있다. 반면, 그녀가 살아 있다면?

    후작의 권력과 마족의 힘 앞에서 세이나는 무력하기만 했다.

    맞서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각성은 조짐조차 보이지 않았다. 빙의자가 다 무슨 소용인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악을 쓰고 화를 내는 것뿐.

    스스로가 초라하고 한심했다. 다른 이의 도움 없이는 무엇 하나 홀로 해내지 못하는 현실이 사무치게 아팠다.

    무너지면 안 된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침착하고 냉철하게 판단할 때마다 이윽고.

    죽음이라는 종착점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무의식중에 회피하고 있던 생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살기 위해 검을 휘두르고, 이렇듯 도망까지 치고 있지만…….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세이나는 아직도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반대로 사라져야 할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다. 마족의 부활을 막기 위해서. 대신관들의 평화를 위해서. 방금도 하나 떠올랐다.

    자신이 죽으면 적어도 저 소녀는 기뻐할 게 틀림없다.

    “그래도 아직 양심은 있나 보네.”

    결국 참다못한 오웬이 끼어들었다.

    “저런 말 들을 필요 없어.”

    “이제 가지.”

    라샤드까지 그녀를 지키듯 앞으로 나서자 소녀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곧 소녀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좋아, 그것도 알려 줄게.”

    마침 오웬이 세이나가 탄 말의 고삐를 잡아당기려던 순간이었다. 일행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고,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네 동료를 죽인 이는 금발이었어.”

    “뭐……?”

    “작은 몸에, 하늘빛 눈을 가진 여자였지.”

    세이나의 눈이 삽시간에 커졌다. 또한 라샤드와 오웬까지. 소녀는 그들을 천천히 훑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그 여자는 이미 마족과 꽤 동화되어 있는 상태였어. 기억을 없애도 몸에 익은 습관까지 지울 순 없는 법.”

    “…….”

    “마물은 마기가 응축된 곳을 선호하는 것, 알고 있지? 마족도 다르지 않아. 수많은 갈림길 중, 그 여자가 선택한 방향은 모두 마물과 연관 있는 곳이었어. 그래서 이윽고 이른 신전은.”

    “…….”

    “금지 구역이라 불리는 늪과 가까운 장소였지.”

    “엘……렌이라고?”

    세이나는 충격 속에서 겨우 말을 이었다.

    “엘렌이…… 그들을……?”

    “기억을 지우면서 엘렌은 그녀의 목소리를 억누를 수 있었어. 하지만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지. 엘렌에게 힘든 일이 있던 어느 날, 그녀가 잠든 틈을 타 스키아는 몸의 주도권을 가로챘어.”

    “…….”

    “그때 깨어난 마족이, 어디로 향했을 것 같아?”

    와이번의 울음소리가 세이나의 정신을 일깨웠다. 마족은 마기가 응축된 곳을 좋아한다. 신전에서 가까운 금지 구역.

    늪.

    “오히려 집을 떠나 줘서 고맙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북쪽은 마기가 그리 짙지 않거든. 결국 그녀는 늪에서 변화를 일으킬 만큼 마기를 회복했지.”

    “…….”

    “사람도, 죽였고.”

    어느새 미소가 사라지고, 소녀는 침통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날 원망하도록 해. 엘렌을 발견하고도 내가 디온에게 돌려보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으니까.”

    “뭐?”

    세이나가 다시 경악에 휩싸였다.

    “어째서……?”

    “잘 지내는 줄 알았어.”

    소녀는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내가 봤을 때…… 신전에서 엘렌은 행복해 보였어.”

    문득 옛 기억이 떠올랐다.

    수도에 오기 전, 지냈다는 신전 이야기를 할 때 엘렌은 무척 밝은 표정이었다. 자유롭게 들판을 뛰어다니며, 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냈다고.

    “성녀의 피 없이 마족을 깨우는 방법. 알아?”

    소녀의 목소리가 세이나의 회상을 파고들었다. 이어서 라샤드가 답했다.

    “마족의 육신과 혼의 연결을 끊으면 된다고 들었다.”

    “그래, 봉인석이 잡아 둔 건 마족의 육신뿐이야. 그 연결을 끊으면 혼만 따로 빼낼 수 있지. 하지만 혼은 홀로 존재할 수 없어.”

    “적합한 육체가 필요하겠군.”

    “우선 마족의 혼을 분리해서 어린 몸에 넣어 둬. 그럼 몸의 주도권을 두고 2개의 혼이 싸우는 거지. 처음은 무조건, 원래의 혼이 이겨. 몸과 혼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법이니까.”

    “……인간 역시 마법으로 끊어 낼 수 있나?”

    “그보다 더 쉬운 방법이 있지.”

    소녀가 라샤드를 바라보았다.

    “유클레스 후작 부인은 아직도 엘렌이 후작의 사생아라고 알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지?”

    “후작과 엘렌은 부녀 관계가 아니야. 어디 하나 닮은 구석이 없잖아?”

    라샤드의 어깨가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오웬의 입술이 벌어지고, 세이나도 귀를 의심했다. 후작과 엘렌이 부녀 관계가 아니라니.

    “그래서 후작 부인도 처음엔 믿지 않았어.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오히려 엘렌에게 다정하게 대해 줬지. 그러니까 유클레스 후작이 부인에게 말하더군.”

    그럼 엘렌의 부모는 누구지?

    “너보다 엘렌의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하…….”

    “후작 부인이 양심 때문에 멈출 때마다 그녀에게 잔인한 말을 일삼았어. 제 친자식들을 멀리하면서 보란 듯이 엘렌에게 비싼 선물들을 보냈지.”

    그 순간, 극심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세이나는 이마를 짚었으나 다른 일행들은 소녀에게 집중하느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후작 부인은 남편에 대한 증오심을 점점 엘렌에게로 돌렸어. 그러도록, 후작이 유도했지. 그래서 학대가 이어진 거야.”

    “…….”

    “엘렌은 멍청하게도, 후작 부인을 이해하려고 했어. 온갖 모진 말과 핍박을 꿋꿋하게 견디면서도 한 번도 그녀를 미워하지 않았지. 모든 것은 자신이 태어난 탓. 그러다 결국, 아.”

    “…….”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세이나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집중했다. 마치 천지가 흔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대로 말에서 떨어질 것만 같다.

    “한 줌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싶다.”

    그 와중에도 소녀의 음성이 제대로 들리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원래의 혼이 살아갈 의지를 잃으면 몸은 다른 혼을 불러들이지.”

    희미한 시야 속에 다시 소녀의 모습이 잡혔다. 디온의 것처럼 푸른 눈동자가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살아야 하니까. 당연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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