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66화 (66/179)
  • #66

    “리처드가 실종됐네.”

    어느 날 갑자기 방문한 노인은 예의와는 먼 사람이었다.

    머리는 잔뜩 헝클어지고, 옷은 입다가 만 것 같았다. 오면서도 몇 번 넘어졌는지 무릎에는 상처가 있었다.

    온몸으로 급박함을 알려 온 노인과 달리, 할머니는 차분했다. 그들은 노인을 집 안으로 들이고, 그의 설명을 들었다.

    노인이 돌아간 후에는 세이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이렇게 말했다.

    “괜찮을 거야.”

    할아버지는 저녁에야 소식을 들었다. 저녁 식사를 하며 세이나는 두어 번 더 그 소리를 들었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그리고 소리는 그날 밤에도 이어졌다. 늦은 밤중, 잠에서 깬 세이나는 반쯤 열려 있는 문틈 사이로 울먹이는 할머니를 발견할 수 있었다.

    “괜찮겠지?”

    다음 날 할머니는 퉁퉁 부은 눈으로 아침을 준비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랬다. “괜찮을 거야.”는 점점 드물어지더니 마침내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갈수록 더 쇠약해졌다. 그녀는 끝내 세이나가 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기운을 잃지 않았다.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처럼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났다. 전직 헌터라는 경력은 꽤 많은 곳에서 통했고 이런저런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그가 받은 도움 중 실종된 아들의 소식이 없다는 사실에 모든 이들이 애석해할 만큼이나 할아버지는 인망이 두터웠다.

    건방지기로 유명한 젊은 협회장도 그를 존중했다.

    어느 날 방문한 그가 고개를 숙이며 아들 내외를 찾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 하자 할아버지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괜찮을 거야.”

    다시 그 말이 생겨났고, 세이나는 학교에 들어갔다.

    안 가도 되는데, 교육이 중요하다 할아버지가 고집을 부려 비싼 사립 학교에 들어갔다.

    입학시험을 망칠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는 이미 슬픈 소식을 너무 많이 접했다. 합격 소식은 어린 그녀가 그나마 전할 수 있는 기쁜 일이었다.

    억지로 들어간 학교는 꽤 혼란스러웠다. 재산이 많은 평민과, 위세가 낮은 귀족들이 섞여 매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중 마르셀은 몰락한 귀족 가문의 아이였다.

    “네 아버지가 내 스승님을 죽였어!”

    2살이나 많은 선배에게 전치 2주의 상처를 입히고도 세이나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어른들의 표현대로라면, 마르셀은 ‘맞아도 싼’ 놈이었다. 그녀는 한 번도 부모님을 부끄러이 여긴 적이 없었다.

    오히려 할아버지도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리라고 믿었다.

    ……그 생각은 다음 날 학교로 불려온 할아버지가 마르셀의 부모님에게 고개를 숙이며 박살이 나 버렸지만.

    그래도 부모님을 원망한 적은 없었다.

    마르셀의 괴롭힘은 점점 더 집요해져 갔다. 길을 가다 공에 맞는 것은 이제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의자 위의 압정, 찢어진 책, 갑자기 쏟아지는 물벼락은 숙련되니 피할 만했다. 그보다 아이들이 그녀를 볼 때마다 반사적으로 외치는 말이 더 뼈아팠다.

    비겁자.

    동료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배신자.

    도망자. 사기꾼.

    여론은 끓는 물과 같다.

    한때 세간의 관심사였던 로힐 부부 실종 사건은 세월이 지나 예전 일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제 일처럼 안타까워하던 이들은 ‘아, 그랬었지.’라는 말을 시작으로 ‘그런데, 아직도 못 찾았대?’라고 마무리했다.

    비아냥 섞인 조롱도 붙었다.

    “몰래 도망친 거 아냐?”

    그리고 급격하게 식어 버린 여론 속에 누군가 독을 풀어 넣자 물은 다르게 변질하였다.

    “쉐인, 이제 더는 리처드를 찾지 않는 게 어떨까.”

    깨진 무릎을 안고 찾아온 노인은 마지막까지 도움을 준 이 중 1명이었다.

    그마저도 포기하자는 말을 꺼내자, 늘 꼿꼿하던 할아버지의 허리는 그만 꺾이고 말았다.

    “이젠 모아 둔 돈도 다 쓰지 않았나.”

    세이나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할아버지의 병세는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어려운 병과, 어려운 병, 또 어려운 병의 설명을 들었다.

    세이나는 열심히 돈을 벌었다. 다행히 일자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할아버지는 아들 내외를 둘러싼 의혹들을 두고도 아직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사람들은 기꺼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어느 날, 노을이 지던 저녁.

    할아버지는 침대에 누운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

    “살아 있어.”

    처음엔 너무 작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미약하게 움직이는 마른 입술을 봤을 땐, 기적이 일어났다 생각하기도 했다.

    알아들었을 땐 몹시 슬퍼졌다. 세이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끌어 잡았다.

    “살아 있어.”

    “응. 살아 있을 거야.”

    “살아 있어.”

    “아빠는 강하니까.”

    “세이나.”

    “응.”

    깊이 팬 주름을 따라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푹 꺼진 뺨. 메마른 입술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집을 소중히 해 다오.”

    세이나는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고, 또 끄덕였다.

    “응. 그럴게.”

    그가 볼 수 있도록. 노인의 흐려진 시야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내가, 기다리고 있을게.”

    그리고 그 맹세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

    혼자가 되어서도.

    계속.

    * * *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시계를 확인할 정신이 있었다면, 세이나는 체감과 다른 현실에 다소 놀랐을 것이다.

    방 안에 들어오고 불과 몇 분.

    자리에 주저앉은 이후로는 겨우 몇 초의 흐름이 지났을 뿐이다. 아주 오래전에서 시작된 기억이 빠르게 현실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이제 세이나는 처음 헌터로서 임무를 받은 열여덟에 머물고 있었다.

    첫 임무는 말 그대로 개 같았다.

    두 번째도 다를 바 없었고, 세 번째부터는 상스러운 욕으로 제 감정을 표출하는 방법을 배웠다. 네 번째는 진심으로 XXX이었고 다섯 번째는…….

    21살. 세르벤스 숲에 도착했다.

    작은 오솔길 하나 없는 울창한 숲. 끝없이 펼쳐진 녹음. 그곳은 숲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초록색 구덩이 같았다.

    손을 뻗으면 그대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깊고, 또 거대했다.

    ‘왜 유클레스 후작과 관련된 흔적을 못 찾은 거지?’

    세이나는 정말 처절하게 노력했다.

    당시 부모님을 만났다던 사람들을 모두 찾아갔고, 떼를 써서 레이번의 영주도 만났다. 그는 제 부하인 의뢰인을 직접 끌고 와 세이나에게 사죄했다.

    - 정말 미안하네.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

    세르벤스 숲도 살폈다. 그 빌어먹을 숲은 빌어먹게도 평범했다. 마물은커녕 동물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한없이 걷고 또 걷다 그 안에서 길을 잃었던 순간이, 그녀가 목숨을 포기할 뻔한 첫 번째 날이었다.

    성과는 없었다.

    ‘왜…….’

    기억은 감정을 남긴다.

    불과 몇 초.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 속에서 세이나는 일생 겪었던 감정들이 제 속으로 쏟아지는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아팠고, 슬펐고, 억울했고, 아프고, 또 슬프고, 아프고, 아프고, 아프고, 아프고…….

    아프다.

    그걸 깨달은 순간, 시야가 환해졌다.

    세이나는 멍한 눈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피가 손금을 타고 흐르다가 뚝, 오웬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오웬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가 손수건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

    “이해합니다.”

    꽉 쥐고 있는 손가락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열어 상처가 난 손바닥 위에 손수건을 겹쳤다.

    어쩐지 그걸 받아들이기가 싫어 손을 빼내 보려 하자, 오웬이 그녀를 힘주어 붙들었다.

    당겨진 손수건이 손을 강하게 압박했다.

    아팠다.

    갑자기 쏟아진 과거가 갑자기 물러났다.

    돌아온 현실에서 세이나는 오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해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내가 뭐라고 했더라.

    ‘내게 잘 보여, 칼만 공작의 약점을 캐내려는 거냐고 물었지.’

    그냥 뱉은 말은 놀랍도록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부모님의 실종 사건을 ‘알아봐 주겠다.’라고 했다.

    아무 인연도 없고, 심지어는 제 이마를 강타한 여자에게 보이기엔 지나친 친절이었다.

    새삼스레 경계심이 생겨났다.

    이해합니다, 라니.

    대체 뭘, 어떻게 이해한다는 건지.

    불현듯 그와 함께 있는 상황이 불편해졌다. 손수건을 마무리한 후에도 계속 잡은 손목도, 가까이 앉아 닿을 듯한 무릎도 불편했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세이나는 방금까지 한 생각을 잠시 잊게 되었다.

    그의 회색 눈에는 동정심이 담겨 있었다.

    “세이나, 저를 믿을지 굳이 오늘 판단할 필요 없습니다.”

    “……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붙잡고 있는 손의 힘이 조금 강해졌다. 그의 손안은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세요.”

    예상외의 제안에 세이나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그리고 공작님이든, 그 남자에게든 일단 따뜻한 요리를 달라고 하십시오.”

    “…….”

    “배가 부르면 마음에 조금 여유가 생길 겁니다. 그들의 위로를 받아도 괜찮겠죠. 의논해도 됩니다. 제 욕도 마음껏 하세요. 오늘 밤은 귀가 불편하겠지만, 참아 보겠습니다.”

    “…….”

    “밤새 울어도 되고. 내일 당장 기분이 안 풀려도 괜찮습니다. 마음이 한결 편해지면 저와 다시 이야기합시다.”

    그가 조금 더 몸을 앞으로 빼내었다.

    세이나가 고개를 약간 숙인 탓이다. 오웬은 집요하게 그녀에게 시선을 맞춰 왔다.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정성 들여 설득하는.

    위로하는 어조다.

    “제가 당신을 속일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말대로, 저는 세이나에게 일단 지금 잘 보이고 싶으니까.”

    “…….”

    “알겠죠?”

    조금 뒤 그녀의 고개가 느릿하게 아래위로 움직였다. 오웬이 그녀를 놓아주며 물었다.

    “바래다 드릴까요?”

    “아니요.”

    세이나는 쉰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혼자 갈게요.”

    돌아가는 길은 지치고 피곤했다.

    많은 것을 보았고, 들었고, 또 떠올렸으나 세이나는 그중 어느 것도 제대로 되새길 수 없었다.

    머리가 너무 아프고 몸에 힘이 없었다. 걸음은 아슬아슬했다.

    정말 드문 일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쓰러질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좀처럼 멈춰지지는 않았다.

    - 일단, 집으로 돌아가세요.

    그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마치 최면에 걸린 듯 발자국 한 발자국을 무의식중에 내딛게 된다.

    세이나는 정말 간신히 집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익숙한 강가. 익숙한 지붕들. 익숙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목소리는 그다음이었다.

    “각하께서 부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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