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적막은 꽤 긴 시간 방 안을 지배했다.
“괜찮아요?”
오웬은 기다림 끝에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닿은 부분은 손끝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겨우 그 감촉에, 세이나는 누군가 제 발을 밟은 것처럼 크게 움찔했다.
그녀가 오웬을 돌아보았다. 오웬은 세이나가 아직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음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리처드 로힐.
“읽어 보죠.”
오웬은 그러고 정확히 서류를 가리켰다. 세이나의 황망한 눈이 다시 그 이름을 읽었다.
“읽어 봅시다.”
첫 장은 아주 오래된 의뢰서였다. 빛바랜 종이 위에 반듯한 글씨체로 적힌 첫 문장은 이것이었다.
세르벤스 숲 마물 생태계 조사 의뢰.
의뢰인의 이름은 탈란 로컨. 의뢰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이었다.
임무를 수락한 이는 리처드 로힐.
그 아래로 나머지 11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마르셀의 스승, 알리야 아셀은 세 번째로 의뢰를 수락한 이였다. 마지막 이름은 올리비아 로힐.
세이나의 어머니였다.
“괜찮아요?”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지난 몇 년간 수없이 곱씹었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마주할 때마다 세이나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목이 꽉 막히고, 가슴이 갑갑하다.
의뢰서 다음 페이지는 완전히 다른 이가 작성한 문서였다.
세르벤스 숲 실종 사건 진상 조사.
그녀가 긴장된 목소리로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세르벤스 숲 실종 사건이란 제국력 1135년 12월 15일을 기점으로 발생한 헌터 12명의 실종 사건을 말한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생각하면서.
“……모험가 협회에서 총 25명의 헌터를 진상 조사를 위해 파견, 12월 20일부터 세르벤스 숲을 포함 근처 지역의 조사를 진행한 결과.”
“…….”
“12월 28일. 세르벤스 숲 외곽. 알리야 아셀의 시신 발견. 시신에 남아 있는 찰과상, 흔적, 사인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
“마물로부터 도주 중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사단은 알리야 아셀을 시작으로 세르벤스 숲 여기저기에 있는 시신들을 찾아낸다. 흔적들은 모두 비슷했다.
날카로운 발톱, 혹은 이빨에 의해 난 상처들. 조사단은 세르벤스 숲에 알려진 것과 달리 흉포한 변종 마물이 나타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조사단이 세르벤스 숲을 샅샅이 뒤지는 동안 변종 마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그들의 시신들을 찾는 것은 예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 2명.
세이나의 부모님을 제외하고.
“도망간 거라고, 다들 그러더군요.”
세이나의 손에는 어느새 문서의 가장 마지막 장이 들려 있었다.
조사단은 마지막까지 로힐 부부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들의 의복이나 무기, 혹은 아주 작은 장신구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증발한 것이다.
“변종 마물이 두려워서 동료들을 버리고 살고자 도망쳤다 했어요. 그리고 창피해서 차마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조사단은 이후 전 제국을 대상으로 조사 범위를 넓혔다. 세르벤스 숲이 있는 동쪽을 중심으로 로힐 부부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어.”
그녀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오래된 종이가 구겨지며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오웬은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만난 이래로 줄곧 당당하던 여자의 등이 한없이 작아 보이는 순간이었다.
짧은 침묵 후, 그가 말했다.
“가져갑시다.”
“네?”
“어차피 오래된 일이라 살펴보는 이도 잘 없을 겁니다. 하나쯤 가져간들 아무도 모를 거예요.”
“가져가서 무슨…….”
“이곳.”
오웬이 손가락에 서류에 닿았다. 그가 가리킨 곳은 세르벤스 숲이었다.
“네. 저도 가 봤어요. 레이번의 영주와 의뢰인. 이 사건과 연관된, 찾을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만났고요. 큰 소득은…… 없었어요.”
세이나는 오웬이 세르벤스 숲의 조사를 도와주겠다 말하리라 생각했다.
등급이 높은 헌터는 어딜 가든 신용 받는다. 그녀가 기를 쓰고 등급을 높이려고 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웬이 꺼낸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제 이야기, 어디까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네? 음…… 봉인된 마족이 총 33명이라고 했던가…….”
“성국은 제게 다섯 가문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는 건?”
“기억해요. 그중 하나로…….”
“유클레스 후작가가 있었죠.”
세이나는 제 귀를 의심했다.
“……네?”
* * *
“유클레스 후작가도 있었어요?”
“네. 문장을 보여 드리지 않았습니까.”
“문장만 보고 어떻게 알아요. 귀족들이나 알아보겠지. 거기다 그때…….”
나는 너무 졸렸는걸.
괴기한 조각상으로 가득 찬 저택에 들어선 날을 회상하던 세이나는 바로 입을 닫았다.
남이 열심히 설명하는데 꾸벅꾸벅 졸고 있던 건 어디에나 내세울 만한 자랑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웬은 그녀를 비아냥대지 않았다. 그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어조로 차분하게 말했다.
“성국은 제게 봉인석을 찾는 데 필요할 만한 모든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너무 세세해서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죠.”
“그 책도 성국에서 준 건가요?”
“네. 그걸 보여 주며 마족에 대항한 다섯 가문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해 주더군요. 다섯 가문 중 누군가 봉인석을 훔쳤다고 의심이 되고 있으니 당연히 철저하게 살펴야 했죠.”
“네…….”
“그리고 전 기억력이 아주 좋은 편이고요.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여기 지도가 있네요.”
작은 테이블 위에 대륙의 지도가 펼쳐졌다.
세이나는 한눈에 동쪽에 있는 세르벤스 숲을 찾을 수 있었다. 너무 많이 봐서 이젠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눈이 움직였다.
“현 유클레스 후작의 어머니는 백작 영애였습니다.”
오웬이 고개를 들어 세이나를 보았다.
“원래는 남작 영애였죠.”
“원래요?”
“이름은 일리아나 에르멜. 에르멜 백작은 그녀의 먼 친척으로, 결혼하지 않아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데려와 제 딸이라고 해도 아무도 반발하지 않았죠.”
“그럼 원래는……?”
“카르멘 데스틴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인 케이든 데스틴 남작이 다스리던 영지가 바로.”
비틀린 글자 위. 오웬의 긴 손가락이 닿았다. 그 이름을 읽어 낸 세이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난 세월, 수백 번도 더 되새겼던 곳.
“레이번.”
제국 동쪽에 있는 영지 레이번에는 작은 마을 2개가 붙어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동쪽으로 가면 나타나는 곳이 바로.
세르벤스 숲.
“전혀…… 전혀 몰랐어요.”
세이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이전 영주님이라고 지나가듯 말하는 이들이 있긴 했지만……. 지금 레이번 영주의 아버지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사람들이…….”
“물어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을 겁니다. 유클레스 후작의 외조부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니까요.”
“네?”
“죄명은 반역이었습니다.”
탁자 끝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어졌다. 세이나는 멍한 얼굴로 오웬의 이야기를 들었다.
“카르멘 데스틴이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어린 카르멘은 일리아나로 이름을 바꾸고, 에르멜 백작의 사생아가 되었습니다.”
“…….”
“운 좋게도, 아주 먼 친척임에도 생김새가 비슷했다 하더군요.”
“…….”
“그리고 데스틴 가문이 레이번을 다스린 시기는 짧습니다. 영지민들도 그저 스쳐 지나간 불상사로 여겼을지도 모르겠군요.”
머리가 어지러운 와중에도 오웬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그의 이야기를 속으로 곱씹던 세이나는 문득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후작의 어머니가 그에게 그곳에 대해 말했을 겁니다.”
설마.
“칼만 공작의 말에 따르면, 유클레스 후작은 마족을 부활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족은 마물을 부르지요.”
겨우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심장이 꽉 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세이나가 숨이 가쁜 사람처럼 헐떡이며 말했다.
“유클레스…… 후작이, 후작이 부른 마물이, 헌터들을 죽였단 말인가요?”
“그저 추측입니다.”
“왜…… 왜 세르벤스 숲이죠?”
“보고서의 내용 중 ‘알려진 것과 달리’라는 부분이 있었죠. 추측하자면 그 숲은 마기가 거의 없는 곳일 겁니다.”
“그건 맞아요. 의뢰인이 헌터들을 부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죠. 마물이 없었던 곳에, 갑자기 마물이 나타나서.”
세르벤스 숲은 마물이 발견된 이력이 없었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곳이라는 것 외에는 딱히 특징도 없는 깨끗하고 평범한 숲.
“그러니 변화를 살펴보기도 좋겠죠.”
“하, 하지만 그곳은 후작령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어요. 여기까지 와서, 후작이 뭘 할 수 있을 리가…….”
“네. 그러니 추측입니다. 세이나. 진정해요.”
“말도…… 말도 안 돼요. 그럴 리 없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번 시작된 의심은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변종 마물을 조사하러 세르벤스 숲으로 갔다. 세르벤스 숲은 후작의 외조부가 한때 다스리던 곳이었다. 후작은 마족을 데리고 있고…….
‘만약.’
만약 오웬의 추측이 맞다면.
세르벤스 숲은 하나의 거대한 실험장이었을 것이다.
딸의 피를 마신 마족. 그리고 그 마족이 가진 힘을, 유클레스 후작은 거리낌 없이 사용했을 테다.
들킬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더 마음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곳은 그의 영토가 아니니까. 문제가 생겨도 그곳 영주의 책임이지 않은가.
마족의 마력이 변형시킨 마물들은 세르벤스 숲 밖으로 빠져나가게 되고.
헌터들은 거기에 휘말려…….
“이건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왜요?”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날 선 물음이 튀어나온 뒤였다. 오웬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당황을 읽었음에도, 세이나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바꿀 수 없다 하는 쪽이 더 정확했다.
말이 멋대로 튀어나왔다.
“제게 잘 보여서, 칼만 공작의 약점을 잡을 생각인가요?”
“세이나, 그건…….”
“제가 오웬이 주는 정보를 어떻게……!”
세이나는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손에서도 통증이 느껴졌다.
손바닥을 파고든 손톱이 깊은 고통을 낳다, 그만 피를 보게 한 것이다. 주먹에서 시작한 떨림이 곧 전신으로 퍼졌고, 그녀는 곧 옆에 있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안해요. 예민해져서…….”
다시 옛 기억이 떠올랐다.
세르벤스 숲. 끝없는 녹색 바다.
그곳에 대해 처음으로 들었던 날, 세이나는 겨우 7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