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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98)화 (98/110)
  • 98화

    “그래도 알맞은 시간에 왔다는 생각이 드는군.”

    “네. 잘 오셨습니다.”

    형제의 말투는 한결 친근하게 들렸다. 페터는 새삼 놀라면서도 웃음 지었다.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캐슬린이 능력을 써서 그를 살렸다더니, 사람이 좀 더 유해진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은 쉬셔야 할 텐데 무리하셨습니다. 마차를 내어 드릴 테니 타고 가시지요.”

    “다 나았으니 환자 취급할 것 없다. 그보다 부탁할 것이 있어.”

    “무엇입니까? 말씀하십시오.”

    “캐슬린과 함께 카르미네로 가 볼 생각이다. 루치와 함께.”

    “예?”

    뜻밖의 말에 당황스러워진 페터는 한사코 만류했다.

    “캐슬린이 우스문트 백작 영애가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직접 카르미네에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쪽도 작위 임명 건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진 않을 테니까요. 캐슬린도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우선은 라일런트 자작을 대신 보내시지요.”

    “아니, 내가 직접 갈 거다. 가서 허락받을 것도 있고.”

    알렉시스는 잘라 말했다.

    “무엇보다 캐슬린이 가고 싶어 해.”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한 겁니까?”

    그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페터는 다급하게 물었다.

    “그럼 형님께서는요? 설마 형님께서도 카르미네에서 쭉 은둔하겠다는 뜻은 아니시지요?”

    “그럴 수도 있고.”

    “형님!”

    “하지만 네가 바라는 것처럼 아예 사라져 버리진 않을 거다.”

    “제가 그런 걸 바랄 리 없잖습니까? 이제 제가 의지할 사람은 형님뿐인데요.”

    알렉시스는 초조해 보이는 페터를 가만히 바라보고는 말했다.

    “넌 이제 다른 이를 의지해서는 안 된다. 황제는 그런 사람이니까.”

    “…….”

    “네가 그 자리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제대로 서야 할 거다. 그래야 지킬 수 있어.”

    제 마음을 꿰뚫어 보는 말이어서 페터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네가 원하는 길을 걷도록 지켜봐 주마.”

    제가 황제 되기를 바랐던 사람은 많았지만, 온전히 페터 트리벨리언을 위해 그리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는 그의 어머니조차도.

    그래서 페터는 발텐 대공가의 북부행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먼저 우스문트 가에 사람을 보내 말을 전해 두도록 하지요.”

    제가 올바른 황제가 될 수 있도록 지켜봐 주겠다는 형제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간절한 금빛 눈은 맑았으나 제국의 주인답게 다부졌다. 알렉시스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한 손을 내밀었다.

    “그래, 돌아오지.”

    승낙을 듣고 나서야 페터의 입가에 안도의 웃음이 어렸다. 그는 알렉시스의 손을 마주 잡았다.

    형제가 맞잡은 두 손은 역사상 그 어느 동맹보다도 굳건했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발텐 대공은 황제의 명을 받아 우스문트 가의 가주에게 변경백 작위를 내린다는 서한과 칙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받고 북부로 출발했다.

    물론 홀로는 아니었다. 새로운 대공비가 될 우스문트 백작 영애에게 청혼하려는 목적도 있었으니, 딸린 인원과 챙긴 물자가 많았다.

    “당신도 좋아할 거예요.”

    변경백 작위를 받게 된 것에 대해 카시엘은 긍정적인 답을 보냈다고 들었다. 생각보다 외숙부님의 마음이 많이 풀리셨구나, 싶어진 캐슬린은 들뜬 기색으로 알렉시스에게 우스문트에서 보냈던 날들을 하나하나 들려주기 시작했다.

    “일단 마을로 들어가면 카르미네보다는 훨씬 포근해요. 마을 사람들도 모두 친절하고요.”

    “응.”

    “외숙부님은 성에서 지내시는데, 어머니가 어렸을 때 쓰시던 방도 보존해 두고 계세요. 제 방은 그 옆쪽이고요. 다른 방도 많은데 다 둘러보진 못했어요.”

    “그래.”

    “루치도 거기서 지내는 걸 좋아해야 할 텐데.”

    “좋아할 거야.”

    알렉시스는 이미 신경이 온통 그녀에게만 쏠려 있어서, 무슨 말을 듣든지 간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캐슬린은 그런 알렉시스를 알아채지 못한 채 루치를 안고 창문 밖으로 카르미네의 풍광을 보여 주며 설레어했다.

    알렉시스는 아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그녀의 한쪽 손을 꼭 잡았다. 그녀가 카르미네에 갔다 오겠다고 했을 때, 따라갈 명분이 없어 초조했는데 페터가 적절한 핑계를 찾아주어 다행이었다.

    ‘이왕이면 카르미네에서 오래 머물러도 괜찮겠지.’

    다시 업무 일선에 복귀하면 캐슬린과 루치와 단란한 시간을 보낼 가능성은 적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황궁의는 당장 내쫓아 버렸어야 하는데 괜히 건강 상태를 황궁에 보고하는 걸 놔두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몸 상태가 건강해졌다는 것이 알려지자, 궁정 회의를 포함해 황실의 각 기관에서도 끊임없이 참석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지방 영지에서도 밀렸던 업무 보고서가 도착하고 있었다.

    이전이라면 별 무리 없이 소화했을 일정이었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그런 일들보다 캐슬린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게 더 중요했다. 제국은 대공의 자리가 비어도 괜찮았지만 그녀의 옆자리는 아니었으니까. 캐슬린이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으며,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모조리 알고 싶었다.

    “전하, 우스문트에서 사람이 나왔습니다.”

    카르미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마차가 멈추더니 마부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직 우스문트 사람들이 지내는 마을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리는데 의외였다.

    “살펴보고 올게.”

    “같이 가요.”

    “바람이 차가우니 안에 있어.”

    알렉시스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루치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 마차에서 내렸다.

    “발텐 대공 전하시오?”

    경계심을 보이며 묻는 남자의 눈 색은 밝은 고동색이었고, 머리는 캐슬린과 같은 은빛이었다. 유달리 흰 피부 또한 그녀 비슷했다.

    “그렇다.”

    “가주님께서 모셔 오라고 보내셨소. 길이 험준하니 따라오시오.”

    그는 신분증으로 우스문트의 수비대 표식을 내밀었다. 알렉시스는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말했다.

    “길을 잡는 쪽으로 마차를 몰도록 하지.”

    그리고 다시 마차로 들어가려는 순간, 수비대원이 덧붙여 말했다.

    “가주님께서 모셔 오라고 하신 건 켈리 아가씨와 아드님뿐이오만.”

    “그게 무슨 소리지?”

    알렉시스가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수비대원은 기가 죽은 듯하면서도 꿋꿋하게 카시엘의 말을 전했다.

    “아가씨와 아드님이 탄 마차만 마을의 입구를 통과할 수 있다고 하셨소. 대공 전하께서 거기 타시면 통과시켜 드릴 수 없다는 이야기요.”

    “…….”

    “해가 지기 전에 오라고 하셨소.”

    그가 전하는 바는 명백했다. 카시엘 우스문트는 조카인 캐슬린과 그녀의 아들인 루치만 출입을 허용한 것이다. 알렉시스 발텐은 그의 기준에서 허락할 수 없는 존재라는 명백한 거절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캐슬린이 문을 열고 물었다.

    “알렉, 외숙부님께서 전하신 말씀이 있나요?”

    “별일 아냐. 추우니 들어가 있어.”

    알렉시스는 캐슬린을 안심시킨 후 수비대원을 향해 말했다.

    “그럼 내 아내와 아들만 먼저 데려가. 난 뒤따를 테니.”

    전시 상황도 아닌데, 대귀족이 마차를 타지 않고 직접 말에 올라 이동하는 것은 대단한 수치였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 대공의 모습에 수비대원의 눈썹이 움찔했다.

    가주의 뜻은 아마도 제 자존심을 꺾어서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리라. 하지만 알렉시스에겐 이쯤은 별일 아니었다. 그는 뒤를 따르던 대열에서 아끼는 흑마를 이끌고 와 안장을 얹었다.

    “뭐 하나? 길을 잡으라고 했는데.”

    “아. 알겠소.”

    수비대원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 애쓰며 앞장섰다. 알렉시스는 태연하게 흑마에 올라, 마차에 가까이 다가가 창문을 두들겼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캐슬린이 고개를 내밀었다.

    “캐슬린, 루치와 함께 먼저 가.”

    “알렉은요?”

    “아무래도 당신 외숙부님께선 나를 마뜩잖아하시는 듯하니, 맞춰 드려야 할 것 같군.”

    “괜찮겠어요? 바람이 차가운데 말을 타고 가다니요.”

    “상관없어. 내쫓는 것도 아니니까.”

    알렉시스는 미안해하는 캐슬린을 달래 먼저 마차를 출발시키고 말에 올라 뒤를 따랐다.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마음이 풀리시겠지.’

    동생의 딸이 힘들게 살아왔다는 것을 들으면 그녀의 남편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알렉시스는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승복하고 아내가 애틋하게 생각하는 가족에게 인정받은 후,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렇게 카르미네에 들어서고 한참의 시간이 걸려 우스문트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였다.

    통행 절차를 위해 높은 목책 위에서 수비대장이 내려왔다. 캐슬린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마차를 먼저 통과시키더니 알렉시스의 쪽으로 다가왔다.

    “방문 목적을 밝혀 주십시오.”

    알렉시스는 품 안에 든 황제의 서한과 칙서를 꺼내려다가, 수비대장의 눈빛에서 제국에 대한 경계심이 어린 것을 눈치채고 생각을 바꿨다.

    “아내의 가족을 만나러 왔다.”

    “그럼, 방문자의 성함을 알려 주십시오.”

    “알렉시스 발텐.”

    작위를 드러내 밝히지 않았다. 철저히 캐슬린의 남편으로서 이곳을 방문했을 뿐이라는 뜻이었다. 수비대장 역시, 부하와 마찬가지로 알렉시스가 이리 나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멈칫했다.

    “그, 그럼 통과하십시오.”

    알렉시스는 여유롭게 마을 입구를 통과했다. 이미 마차는 먼저 성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뒤에서 따라오는 행렬을 이끌고 마찬가지로 그쪽으로 향했다.

    성 앞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경비병이 나와 맞았다.

    “대공 전하, 머무르실 곳을 마련해 두었다는 가주님의 전언입니다.”

    “알았다.”

    건성으로 대답하며 안쪽으로 발을 들이려는데 그가 앞을 가로막았다. 감히 제국의 대공 앞을 가로막았다는 사실에 겁이 나는지 굉장히 떨고 있었지만, 그는 꿋꿋이 말했다.

    “전하께서 머무르실 곳은 성 밖입니다.”

    “뭐?”

    “공식적인 접견일이 잡힐 때까지는 성 밖의 숙소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아가씨와 아드님도 그때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완전히 가족을 떼어 놓으려는 심산이었다.

    알렉시스는 졸지에 아내와 아들을 모두 빼앗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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