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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97)화 (97/110)
  • 97화

    캐슬린은 북부에서 산사태와 지진으로 실종된 후, 시신을 찾지 못하여 사망 상태로 처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다시 돌아왔으니 행정적 절차를 밟아 정리해야 할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캐슬린 윈스턴이 다시 발텐 대공비로 돌아오게 된다면 윈스턴 백작의 딸이라는 신분이 다시 조명될 수밖에 없었다. 에버튼 윈스턴은 이미 변경백의 권한을 잃은 데다가, 이사벨라 윈스턴이 선황후 및 호프웰과 손을 잡고 반역을 꾀했으니, 윈스턴 가는 반역자 가문이나 다름없었다. 페터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캐슬린에게 새로운 신분을 주려는 것이었다.

    “이리 다시 줘 보게.”

    알렉시스가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칙서를 받아 살폈다.

    칙서의 아래쪽에는 이 정략혼이 시사하는 바와 함께 갖가지 부칙이 주르륵 적혀 있었다. 그는 흡족한 마음으로 그것을 꼼꼼히 읽었다.

    ‘불가역적이고 영원한 결혼.’

    캐슬린과 저를 얽어 넣는 문구가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아, 전하. 이 칙서는 두 번째였습니다. 이게 먼저였군요.”

    뒤늦게 두루마리 바깥쪽에 새겨진 숫자를 확인한 라일런트 자작이 조마조마한 얼굴로 눈치를 보면서 다른 칙서를 꺼내 내밀었다. 다행히 그의 상관은 화를 내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침착하게 다른 칙서를 받아서 읽어 내렸다.

    “어떤 내용이에요?”

    캐슬린이 묻자, 알렉시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스문트 가에 변경백 작위를 내린다는군.”

    “네? 변경백 작위요?”

    그녀가 놀란 듯하자 알렉시스는 칙서를 직접 보라며 건네주었다. 황급히 캐슬린은 그것을 받아서 살펴보았다.

    윈스턴 백작이 다스렸던 접경의 영지를 우스문트 가의 가주인 카시엘에게 내리며, 제국민과 함께 겨울 요정족이라 일컬어지는 북부 원주민들의 자치를 도우라는 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수신자는 카시엘 우스문트로, 황제의 인장이 찍혀 마무리된 서류가 함께 딸려 있었다.

    ‘맞아. 페터는 외숙부님께 대화해 보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었지.’

    가슴이 따뜻해졌다. 페터는 황제로서 평화로운 제국을 만들기 위해, 새롭게 제국민으로 포용해야 할 범위에 그녀의 가족들도 잊지 않고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페터가 먼저 내민 손은 제국으로서도 한참 손해를 감수하는 일이었다. 변경의 이민족에게 제국의 안위를 맡기겠다는 의지의 표식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 마님께선 우스문트 백작 영애가 되시고, 전하께서는 새로운 대공비로 우스문트 백작 영애를 마이어로 데려오는 절차를 밟으시면 되는 겁니다.”

    라일런트 자작이 기쁜 표정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캐슬린은 알렉시스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말했다.

    “외숙부님께서도 페터의 뜻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가서 잘 말씀드려 볼게요.”

    “그래.”

    알렉시스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잠시 황궁에 다녀와야겠어. 떠날 채비 하고 있어, 캐슬린.”

    그러고는 다소 급하게 다이닝 룸을 벗어났다.

    ‘페터는 괜찮을까?’

    황제의 성별이 여자라는 사실은 알렉시스가 부정했으니 일단락되었다지만, 아직 귀족들은 믿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 상황에서 이민족에게 작위를 수여한다면 반발이 클 터였다. 캐슬린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창문을 통해 황궁으로 향하는 알렉시스를 내려다보았다.

    * * *

    “말도 안 됩니다, 폐하!”

    절대 불가를 외치는 귀족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모여 회의실을 가득 울렸다.

    “남부의 세율을 조정하기로 한 것도 영주에게 온전히 부담을 지우는 일인데, 북부도 포함하라니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맞습니다. 더구나 북부 이민족에게 변경백 작위를 내린다면, 기존에 북부를 다스리던 영주의 권위가 크게 떨어질 것입니다. 이민족들의 무엇을 믿고 그리 제국이 희생해야 한단 말입니까?”

    “선대 황제께서 통탄하실 일입니다!”

    득달같이 달려들어 반대를 말하는 이들은 물러날 기미가 없었다. 페터는 그들을 차례로 쏘아보며 하나하나 짚어 나갔다.

    “지금 경들이 이민족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오래전부터 북부를 고향으로 삼고 살아왔던 원주민이오. 그런데 황궁에 보고 없이 독단으로 그들을 터전에서 몰아낸 것이 과거의 윈스턴 백작이거늘, 그를 처단하고 원래로 되돌리는 것이 어찌 다른 영주의 권위가 훼손되는 일이란 말이오?”

    “독단이라 하여도 제국의 영토를 넓힌 것이니 공이라 봐 주어야 합니다. 게다가 한번 복속한 식민지의 백성들에게 스스로 다스릴 힘을 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교묘하게 황제의 지적을 피해 그들의 입장만 고수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끝나지 않는 소모적인 다툼을 이어 가야 한다는 사실에 점점 지쳤으나 페터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 내 대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민족 문제는 돌이킬 수 없어.’

    캐슬린의 친족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제국 통합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었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으로 캐슬린 덕에 카시엘 우스문트가 대화의 기미를 보였는데, 그 기회를 이리 놓칠 순 없었다.

    “우스문트 가는 전설 속에 이름이 남았을 정도로 명문가이고, 북부의 지형을 잘 아는 만큼 외세를 막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오. 게다가 카르미네의 임야에서 자라는 약용식물에도 조예가 깊으니, 제국과 상생할 수 있는 점이 많소. 그러니…….”

    “폐하께서 잘못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들려온 말에 페터는 제 귀를 의심했다.

    황태자 시절부터 단 한 번도 귀족들은 저를 무례하게 대한 적 없었다. 어릴 적 황태자가 되어 선황이 쓰러지고 난 후에 정사를 이어받을 때까지, 페터는 누구보다 뛰어난 정통성을 지닌 황족이었다.

    그런데 불손한 말과 태도로 저리 당당히 황제의 뜻을 꺾으려 들다니.

    오스타버 후작은 가소롭다는 듯한 웃음을 머금으며 마저 말했다.

    “아직 폐하께서는 연소하시니 그리 생각하실 법도 합니다. 하지만 제국은 그리 유약하지 않습니다. 북부건 남부건 원주민을 내쫓고, 제국민이 그곳에 살도록 계획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릇 사내라면 그리 생각하는 것이 옳지요.”

    누군가 뒷머리를 둔기로 후려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야 저들이 왜 이리 이를 악물고 반대를 하는지 이해가 갔다.

    ‘내가 여자라 유약하게 구는 것이 아니냐고 떠보고 있어.’

    실소가 새어 나왔다.

    저는 이전과 달라진 점이 없는데, 호프웰 백작이 제기한 의혹만으로 황제의 능력을 의심받고 있었다.

    페터는 침착하려 노력하며 차근히 설득을 시도했다.

    “남부의 일처럼,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반란을 그때그때 진압하는 건 시간과 물자를 낭비하는 일이오. 차라리 그들을 회유해서 백성들이 전화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는 편이 낫잖소.”

    “그럴 거라면 차라리 군대를 주둔시켜 이민족들을 모두 소탕해 버리시지요.”

    기가 막혔다. 그럼 선량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모두 잡아 죽이란 이야기인가?

    “왜 그리 망설이십니까, 폐하? 설마 겁을 내시는 겁니까?”

    “그만하지.”

    빈정거리던 오스타버 후작의 말을 가로채며 누군가 회의실로 걸어 들어왔다. 좌중의 시선이 모두 문 쪽으로 쏠렸다.

    “대, 대공 전하?”

    “전하! 괜찮으신 겁니까?”

    순식간에 귀족들이 모두 그에게 몰려갔다. 페터도 뜻밖의 등장에 눈을 크게 뜨고 일어났다. 알렉시스가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을 전해 듣긴 했으나, 급히 회의에 참석하게 되어 정확한 상태를 알지는 못했고 칙서만 보냈기 때문이다.

    “형님.”

    페터는 반가움에 다가서다가 공적인 자리에서 사적인 호칭을 불러 버린 걸 깨닫고 곧바로 후회했다. 그렇지 않아도 권위에 대한 도전을 받는 상황에서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폐하.”

    자괴감에 빠져 있을 즈음, 알렉시스는 다른 귀족들을 모두 뿌리치고 페터에게 가까이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제야 귀환 보고를 올립니다. 늦음을 용서하십시오.”

    더없이 깍듯한 태도에 귀족들은 멍한 표정이 되어 수군거렸다.

    “어떻게 된 거요? 왜 전하께서…….”

    “소문을 못 들으신 건 아닐 텐데?”

    귀족들은 발텐 대공이 황제와 반목하리라 생각하고, 그의 편에 서려 했으나 계획이 어긋나자 당황한 기색이었다.

    알렉시스는 태연히 페터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행동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대공으로서 황제에게 충성을 보여 온전한 지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형제의 뜻을 알아차린 페터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기다렸습니다.”

    페터는 알렉시스를 손수 일으켜 세웠다. 황제라면 어깨만 가벼이 두드려야 하는데, 지금의 저는 그의 동생이었기에.

    알렉시스는 기꺼이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리고 찬찬히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폐하. 황궁에 쥐새끼 무리가 아직 살아 있군요. 아무리 전쟁으로 흘린 피가 많다고 하지만 그런 자들을 청소하는 데까지 자비를 보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싸늘한 시선은 오스타버 후작에게 길게 머물렀다. 노골적인 경고에 오스타버 후작이 찔끔하며 고개를 내렸다. 등골이 오싹하며 떨리는 것 같았다.

    “황궁에 관심을 두지 않아 몰랐는데, 꽤 심각한 듯합니다. 명만 내리신다면 기사단을 황궁으로 보내 청소를 도와 드리지요.”

    이번에는 오스타버 후작이 아닌 다른 귀족들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그들 역시 오스타버 후작과 다르지 않게 움찔하며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럼 회의를 마저 진행하시지요.”

    알렉시스는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 뒤로는 속전속결이었다. 한사코 트집을 잡아 안건을 반대하던 귀족들이 모두 찬성표를 던진 후 회의가 끝났다.

    “덕분에 성공적으로 끝났군요.”

    모두 물러가고 둘만 남은 회의실에서 페터가 말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이었다. 페터는 알렉시스에게 열등감이나 질투 따윈 느끼지 않았다. 그가 저를 진심으로 도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도운 게 아니다. 그저 당연한 정리를 했을 뿐이지.”

    알렉시스는 태연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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