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여긴 어떻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무레닌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발텐 대공이 주변에 머문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어 마이어로 돌아갔으리라 여겼는데, 그가 눈앞에 서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처음에는 오솔레로 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한데 거기는 이미 내가 아는 곳이니 굳이 선택했을 것 같지 않더군. 게다가…….”
캐슬린은 제게 다가오는 그를 보며 뒷걸음질 쳤다. 한 걸음을 내디딜수록 멀어지는 그녀를 본 알렉시스가 침통한 표정으로 다가가기를 멈추었다.
“네가 나를 버리고 간다면 이유는 하나지. 그놈 때문이잖아.”
“…….”
“미리 약속하진 못했을 테니, 이곳으로 올 거라는 사실을 생각해 내는 건 어렵지도 않았어. 더구나 근방에 초소는 여기뿐이고.”
불현듯 벽난로의 불씨가 살아 있던 것이 떠올랐다. 거친 야경꾼들이 머물렀다기에는 말끔히 정리돼 있었던 초소의 물건들도.
마치 사냥감을 몰아넣듯, 그는 저를 꿰뚫어 보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거짓말을 한 건 당신이야.”
온몸이 떨렸다. 추위 때문인지, 그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이 억울해서인지, 그도 아니면 멍청하게 그를 또 믿어 버린 제가 한심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약속했잖아요. 요제프를 해하지 않겠다고. 날 온전히 믿어 주겠다고. 그런데 당신은 그러지 않았어.”
세찬 바람에 머리가 풀어져 흩날렸다. 캐슬린은 뜨거워진 눈시울을 세게 닦으며 그에게 한 발짝 더 멀어졌다.
“날 속여서 마정석으로 손발을 묶어 놓고, 요제프를 쫓아냈어. 내 말이 틀렸어요?”
“그래. 네 말이 맞아.”
알렉시스가 성급하게 말했다.
“내가 널 믿지 못했다.”
흡사 간절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어투였다.
“잘못했어, 캐슬린. 수백 번을 돌아봐도 내 잘못이다. 난 두려웠어. 네가 언제든 나를 버리고 떠날까만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랬다.”
“너무 늦었어요. 이만 돌아가요.”
이미 그는 주어진 기회를 버렸다. 한번 깨어진 신뢰는 다시 붙여진다 해도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
“캐슬린……!”
그를 뒤로한 채 돌아서자 눈앞에 기사단이 포진해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또다시 손발을 묶어 새장에 가둬 둘 참인가요?”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는 척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저를 의심하고, 믿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요제프의 존재일 뿐이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다른 사람으로 변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캐슬린은 불신 속에 갇혀 그가 허용하는 모습으로만 살아야 하는 꼭두각시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게 아니야, 캐슬린. 내가 다 설명할게. 그러니까 제발 이쪽으로 와. 나와 돌아가면, 아니, 돌아가지 않아도 돼. 잠깐 시간만 내주면 내가 다 설명할게.”
“정말이지 당신이란 사람은.”
진작에 이 말을 해야 했다. 모르는 척 숨겨 줄 것이 아니라.
“독을 핑계 대지 마요, 알렉시스 발텐. 당신은 그저 당신만 생각하는 사람일 뿐이에요.”
“그게…… 무슨.”
“변할 거라 믿었던 내가 어리석었어.”
이대로 그와 함께 돌아가느니 초소에서 굶어 죽는 길을 택하리라.
떨어진 땔감을 다시 주워 든 순간 초소 문이 열리고 에밀리와 루치가 걸어 나왔다.
“아빠!”
루치가 용케 그를 알아보고 반갑게 소리쳤다. 당황한 에밀리가 그쪽으로 뛰어가지 못하게 아이를 안아 들고 캐슬린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들어가자, 에밀리.”
캐슬린이 막 초소 쪽으로 한 발짝을 내디뎠을 즈음이었다. 땅속에서 갑자기 강한 진동이 울렸다.
“전하! 지진입니다!”
기사단장이 황급히 외침과 동시에 나무들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쌓여 있던 눈들이 후두두 떨어지고 산 너머에서는 묵직하게 무언가 울리는 소리가 났다. 산사태의 징조였다.
“피하셔야 합니다!”
기사단장이 다시 외침과 동시에 캐슬린이 딛고 선 땅이 갈라져 한쪽 발이 빠졌다.
“아!”
품에 안은 땔감이 흘러 떨어지며 순식간에 몸이 아래로 빠졌다.
“캐슬린!”
알렉시스가 소리치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캐슬린은 반사적으로 루치를 바라봤다. 다행히 에밀리가 아이를 초소 안으로 다시 들여보낸 상태였다.
‘다행이다.’
미끄러지는 순간에도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캐슬린!”
알렉시스가 희게 질린 얼굴로 팔을 뻗었다. 아슬아슬하게 그의 손끝이 제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갈라진 땅의 틈이 점점 커져 캐슬린의 허리 아래까지 집어삼켰을 때였다. 발밑에 튀어나온 나무뿌리 같은 것이 걸렸다. 캐슬린은 거기에 지탱해 위쪽의 돌부리를 잡고 매달렸다.
“내 손 잡아.”
그가 기사들을 뿌리치고 다시 한번 제게 손을 내밀었다. 발돋움하고 힘껏 팔을 내밀면 잡힐 만한 거리였다.
“전하, 산사태입니다!”
쿠르릉, 거대한 눈 더미가 몰려오는 듯 묵직한 소리가 났다. 기사들이 모두 대피해야 한다며 알렉시스를 붙잡고 있었다.
“제발, 캐슬린…….”
기사 서넛을 한 번에 밀쳐 낸 그가 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캐슬린의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알렉시스 발텐이 울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발밑에서 나무뿌리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캐슬린은 한쪽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알렉시스의 낯에 안도감이 스쳤다.
“다른 손도 날 잡아. 얼른.”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이젠 벗어나고 싶어요, 당신한테서.”
“뭐?”
그가 반문함과 동시에 나무뿌리가 완전히 부러졌다. 캐슬린은 발밑이 허공에 뜸과 동시에 그의 손을 놓았다.
“안 돼!”
울부짖는 알렉시스의 목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푸르게 맑았던 하늘이 점점 작아지며 시야가 가려졌다. 곧이어 둔탁한 무언가에 몸이 거세게 부딪치며 아픔이 몰려왔다.
캐슬린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 *
알렉시스는 무릎을 꿇고 갈라진 땅의 틈 사이로 팔을 뻗은 채로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눈앞에서 그녀가 사라졌다. 제 손을 놓고서.
아내를 집어삼킨 깊은 땅속을 내려다보며 그는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했으나, 귓가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점차 말소리로 변했을 때 현실임을 자각했다.
“안 돼.”
그는 갈라진 음성으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안 돼, 캐슬린…….”
날 보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초소로 에밀리와 함께 돌아간다고 했잖아. 그럼 그렇게 했어야지. 왜 내 손을 놓고…….
-이젠 벗어나고 싶어요, 당신한테서.
그녀가 했던 말이 갑자기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제야 알렉시스는 깨달았다.
저에게 돌아가느니 죽음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하던 아들을 두고서도 스스로 죽음을 택할 만큼 제가 끔찍하다는 뜻이리라.
제가 내민 손을 잡으면서 올려다보던 연한 푸른색 눈에는 안도감 따위의 감정이 조금도 묻어나 있지 않던 것이 떠올랐다. 숨통이 막히며 절망이 차올랐다.
그녀가 사라진 암흑 속으로 따라가고 싶었다. 정녕 널 온전히 가지려는 것이 잘못되었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알렉시스가 반쯤 땅이 벌어진 틈으로 몸을 내밀었을 때였다.
“전하를 붙잡아라!”
기사들이 그의 몸을 붙잡고 매달렸다.
“놔!”
“전하, 산사태가 여기까지 덮치기 전에 얼른 피하셔야 합니다!”
“놓으라고 했다!”
알렉시스가 거칠게 그들을 뿌리치며 몇 번이나 뛰어들려 하자, 기사단장이 황급히 뛰어왔다.
“죄송합니다, 전하!”
그는 기사들 너덧 명이 붙잡은 상태의 알렉시스의 뒷목을 검집째로 강하게 내려쳤다. 알렉시스의 무릎이 꺾이더니 이내 풀썩 쓰러졌다.
“빨리 대공 전하를 초소 안으로 옮겨라!”
“예! 그런데 비전하는 어쩌지요?”
기사단장이 안타까운 얼굴로 땅 사이를 굽어보았다. 이미 어둠 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미 늦었다. 이제 우리 목표는 전하와 공자님을 지켜 마이어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시금 땅이 진동하며 멀리서 다시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기사들은 황급히 발텐 공작을 들어 올려 업고 대피했다.
* * *
알렉시스가 다시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익숙한 천장이었다. 발텐 대공저의 침실이었다.
‘꿈……이었나?’
무언가 고통스러운 꿈을 꾸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끊겨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흐릿한 정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창문으로 햇빛이 비치는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아빠?”
이불을 잡아당기는 약한 힘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이가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캐슬린을 닮은 동그란 연청색 눈이 물기에 젖어 있었다. 그는 아이를 안아 올려 옆에 눕히며 생각했다.
‘캐슬린은 어디 있지?’
어린 아들을 홀로 돌아다니도록 둘 리 없는데.
하다못해 에밀리나 유모도 없었다. 의아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루치가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 어디 있어요?”
“……뭐?”
“엄마가 안 보여요.”
아이가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반사적으로 등을 두들겨 주려고 팔을 올리는 순간 짧게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꿈이…… 아니다.’
호흡이 느려지며 순간 심장이 쥐어 짜이듯 아팠다.
캐슬린 발텐이 저를 떠났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저와 함께 돌아가 사는 것이 끔찍해 스스로 죽어버렸다.
모든 일이 다시 선명한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 알렉시스의 목구멍에서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아아…….”
알렉시스는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당장에라도 검을 찾아 그녀를 붙잡지 못한 손을 잘라 버려야 했다. 멍청하게 그녀를 속박하고 시간을 벌면 이해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머리를 베어 버려야 했다.
벽에 걸린 장검을 내려 검집에서 검날을 빼 들었을 때였다. 문이 거세게 열리며 누군가 뛰어 들어와 제 팔을 붙잡았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놔.”
“아이가 보고 있습니다. 당장 내려놔요!”
아이라는 말에 손에서 힘이 풀렸다. 페터가 그때를 놓치지 않고 검을 빼앗아 바닥에 던졌다. 알렉시스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다시 가야겠다. 그녀를 찾아야 해.”
“안 됩니다.”
페터가 침통하게 대답했다.
“발텐의 기사단이 형님과 루치를 데리고 돌아온 것만 해도 천운이었어요. 지진이 끝나기 전에는 북부로 가실 수 없습니다.”
“가야 해. 캐슬린이…… 캐슬린이 다쳤을 거다.”
“……너무 늦었습니다, 형님.”
페터가 팔을 잡으며 만류했다.
“후에 시신을 찾아 수습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시신…….
그녀가 죽었을 거라고 확신하는 말이었다. 황제의 말로 확인된 그녀의 죽음에 알렉시스의 무릎이 허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