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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78)화 (78/110)
  • 78화

    만감이 교차했다. 이곳에서 살아 나갔을 때는 알렉시스와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기도 했었는데.

    ‘그만 생각하자.’

    무의식중에 또 과거를 추억해 버렸다.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지우며 다시 짐마차 안으로 들어가려고 천을 열자마자 에밀리의 품에 안긴 루치가 쏙 고개를 내밀었다.

    “엄마! 저거 뭐야?”

    하늘에서 눈송이가 흩날리는 모습을 보고 눈을 반짝이며 루치가 물었다.

    “눈이야.”

    “눈?”

    루치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두 손으로 제 눈을 가렸다 뗐다. 에밀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눈이 아니라 다른 눈이에요. 하얗고 차가운 이것도 눈이라고 부른답니다.”

    에밀리가 손바닥을 하늘로 치켜올려 잡아 낸 진눈깨비를 뺨에 대어 주자, 루치가 신기한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익숙해질 거야, 곧.”

    캐슬린은 아이의 뺨을 가볍게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자신의 뿌리가 이어진 이곳에서 어머니 쪽 가문의 사람들을 찾을 수 있다면, 루치는 저와는 달리 외로워하거나 무시받지 않고 자랄 수 있을 터였다.

    짐마차는 그로부터 한참을 더 이동한 후 멈추었다. 눈발은 이제 진눈깨비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굵어졌고, 뺨을 스치는 바람도 꽤 서늘했다.

    상단주는 정말 자신들을 따라서 다른 영지로 가지 않겠느냐고 몇 번이나 묻더니, 캐슬린이 이곳을 고집하자 하는 수 없이 내려 주었다.

    “여기, 지도를 줄 테니까 초소를 찾아가시오. 야경꾼들이 머무는 숙소라고 들었소. 어린애도 있는데 너무 무리하지 말고. 혹 다시 돌아가고 싶다면 한 달 뒤 여기서 기다리시오. 그때쯤 우리가 지나갈 테니까.”

    “감사해요. 새로운 납품 계약이 잘 성사되길 바랄게요.”

    캐슬린과 에밀리는 미리 마련해 두었던 방한복을 단단히 껴입고 짐마차에서 내렸다.

    “에밀리, 루치를 잡아 줘.”

    루치가 소복이 쌓인 눈에 가까이 가고 싶어 안달이었기에, 캐슬린은 아이의 신발에 노끈으로 묶어 만든 덧신을 매 주었다. 원형 모양으로 넓게 생긴 덧신을 신기면 표면적이 커져 체중이 분산되니 눈구덩이에 발이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 건 어떻게 아셨어요, 마님?”

    에밀리에게도 신발에도 노끈 덧신을 묶어 주자 신기해하며 이리저리 걸어 보았다.

    “이러면 쌓인 눈을 밟아도 갑자기 푹 꺼지지는 않겠어요.”

    “어렸을 때 여기저기서 주워들었어. 북부에서는 자주 사용해. 그리고…….”

    자꾸만 털 달린 로브 모자를 벗으려는 루치와 씨름하는 에밀리를 보며 캐슬린이 말했다.

    “이제 루치에게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 내게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발텐의 이름이 아니라 예전의 내 이름으로 살고 싶어, 에밀리.”

    간절한 부탁에 그녀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할게요, 켈리.”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훨씬 친근한 느낌이 드는 어투였다.

    “얼른 초소를 찾아가자. 해가 지면 더 추워질 거야.”

    캐슬린은 상단주가 건네주었던 지도를 펼쳐보며 방향을 가늠했다. 다행히 초소가 멀지는 않아서 밤이 되기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도를 보며 한참 카르미네 산맥의 중턱에 진입한 즈음이었다.

    “엄마! 저거 봐요!”

    솜옷을 껴입은 루치가 에밀리의 손을 잡고 가다가 눈이 가득 쌓인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눈송이가 꽃처럼 엉겨 붙어서 얼어 있는데, 그게 신기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눈꽃이라고 하는 거예요.”

    에밀리가 아이를 안아 들고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해 주며 알려 주었다. 정원에서 봤던 꽃과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건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그러던 중, 캐슬린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잠깐만.”

    그녀는 제 눈을 의심하며 멈춰 섰다.

    “에밀리, 잠시 멈춰 봐.”

    “왜 그러세요?”

    에밀리의 물음에도 캐슬린은 나뭇가지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얹힌 눈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온몸이 얼어붙었다.

    “산사태가 날지도 몰라.”

    “네? 사, 산사태라뇨?”

    “주변에서 지진이 났나 봐. 그 여파가 전해지는 거면 큰일이야.”

    캐슬린은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초소는 이제 많이 가까워져 있었다. 보통 초소는 지대가 안전한 곳에 세우는 편이니 그쪽으로 대피한다면 안전할 수 있었다.

    캐슬린은 에밀리에게서 루치를 넘겨받았다.

    “가자, 에밀리. 전속력으로 뛰는 거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에밀리가 손을 붙잡고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기 시작했다. 두껍게 쌓인 눈밭을 한 번 박차고 뛰어올랐다가, 다시 디딜 때면 저 아래서 우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진동이 전해져 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전에 겪었던 산사태가 떠오르며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저기예요!”

    정신없이 뛰다 보니 초소 문 앞까지 도착했다. 지금까지 걸어 왔던 길과는 달리 사람이 오간 흔적이 보였다. 쌓인 눈도 깊지 않았고 사람 발자국과 함께 말발굽 자국도 보였다.

    에밀리가 재빠르게 먼저 뛰어가 초소의 문이 잠기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 안을 살피고 왔다.

    “며칠 전까지 누가 머물렀나 봐요. 아직 벽난로에 희미하게 불씨가 남아 있어요.”

    “다행이다. 얼른 가 보자.”

    아무리 잘 껴입었다고 해도 눈을 오래 맞았다. 실내에서 눈이 녹기 시작하면 옷이 젖어 체온이 떨어지는 것이 제일 큰 문제인데 불을 피울 수 있다면 생각보다 오래 머물 수 있을 터였다.

    초소 안은 꽤 아늑했다. 창문은 깨지거나 금 간 곳도 없이 수리되어 있어 칼바람을 막을 수 있었으며, 낡긴 했지만 깨끗한 침낭도 있었다.

    “북부에서는 산중의 초소도 이렇게 신경을 많이 쓰나 봐요. 변경 방어가 중요하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세심할 줄은 몰랐네요.”

    “아마 폐하가 즉위하시면서 행정관을 보내 조치하신 게 아닐까 싶어.”

    윈스턴 백작은 제 공로를 치하받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남는 일만 하고 싶어 했다. 카르미네 산맥은 몇 남지 않은 북부 이민족의 침입을 저지하는 능선으로 방어의 요충지였지만, 윈스턴 영지에 속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산맥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의 관할이 아니었고, 윈스턴 백작은 카르미네를 지나서 제 영지로 넘어오는 자들만 해치우곤 했다. 그러니 아마 여기에 초소가 있는지도 모를 거였다.

    ‘그럼 나를 아는 사람을 마주칠 가능성은 적어.’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자아, 도련님…… 아니, 루치. 여기 얌전히 있어야 해.”

    에밀리가 루치를 내려놓고 서둘러 벽난로에 가까이 다가가 불씨를 살리기 위해 애썼다. 캐슬린도 초소 안의 물건이 대략 무엇이 있는지 살피고, 가지고 온 비상식량을 정리하며 이곳에서 지낼 준비를 했다.

    얼마 안 있어서 불이 몸집을 키우며 타올랐다. 젖은 옷을 앞에 걸어 말리고, 앞에 모여 앉아 온기를 쬐었다.

    “엄마, 목말라요.”

    몸이 녹자 루치가 칭얼거렸다. 캐슬린은 찬장에 나무 컵이 있던 것을 기억해 내고 가지고 왔다. 에밀리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물은 가지고 온 게 없는데, 어떡하죠? 밖은 온통 눈보라가 치는데 연못이 있을 리도 없고. 이럴 줄 알았으면 상단 사람들과 헤어질 때 한 병 얻어올 걸 그랬어요.”

    “괜찮아. 잠깐 기다려 봐.”

    캐슬린이 컵 위로 손을 올리자 순식간에 얼음이 그 안에 채워졌다. 확실히 마이어에 있을 때보다 얼음을 더 수월하게 다룰 수 있는 느낌이 들었다. 에밀리가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했다.

    “세상에, 이게 뭐예요? 정말 켈리가 만든 건가요?”

    “응. 대공저에선 쓸 수 없는 능력이었지만, 이젠 아니야.”

    캐슬린은 컵을 불 앞에 놓고 얼음이 녹기를 기다리며 에밀리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제야 다시 알렉시스를 떠나게 된 이유를 알게 된 그녀가 경악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어요. 진심이신 줄 알았는데…….”

    에밀리가 얼음이 녹은 물을 루치가 마시도록 도와주며 중얼거렸다.

    “게다가 요제프 신관님까지…… 어차피 루치도 친부와 함께하는 편이 나을 테니 잘됐어요.”

    “……으응. 아, 불길이 약해지는 것 같네. 땔감을 찾아올게.”

    캐슬린은 잦아든 불꽃을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마침 초소 안에는 장작이 얼마 없으니 미리 구해 놓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같이 가요.”

    “아냐. 안에서 루치 보고 있어. 금방 나뭇가지 주워서 돌아올게.”

    외투를 다시 걸치고 눈보라 치는 밖으로 나왔을 땐 지진의 전조는 느껴지지 않았다. 미약하게 지나간 건지, 아니면 초소가 지반이 튼튼한 곳에 있어서 느껴지지 않는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다행인 일이었다.

    길을 따라 주변 숲의 입구에 자작나무가 빽빽하게 자라 있었다. 캐슬린은 세찬 바람에 벗겨지려는 후드를 눌러 쓰며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웠다.

    귀가 시릴 때쯤이 되자 꽤 많은 양을 주울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 다시 날씨가 더 나빠질지 모르고, 루치를 생각하면 불을 세게 때는 게 나을 테니 땔감을 더 많이 마련해 놓는 것이 나을 듯했다.

    ‘초소 뒤에도 숲이 있었지.’

    일단 모은 땔감을 가져다주고 다시 나올 생각으로 길을 돌아와 초소 앞마당에 도착했을 때였다.

    땅바닥에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설마 지진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있지는 않았다. 다시 들어보니 땅속에서 들려온다기보다는 표면에서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

    단단하게 언 땅을 강한 힘으로 박차고 올랐다가 다시 내려앉으며 일정한 간격으로 부딪치는 쇠붙이 소리.

    ‘……말발굽 소리야.’

    한둘이 아니었다.

    공포감이 온몸을 덮쳐 왔다. 산맥을 오르는 말들은 대개 짐을 나르니, 저렇게 급하게 달리지 않았다.

    “히히힝!”

    등 뒤에서 말이 콧김을 내뿜으며 멈추어 서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누군가 말에서 내렸다.

    “캐슬린.”

    품에 안고 있던 나뭇가지가 후드득 떨어져 흰 눈밭에 흩뿌려졌으나 캐슬린은 몸을 숙여 주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부정하고 싶었으나,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느리게 뒤를 돌았다. 망토조차 걸치지 않고 평복 차림을 한 알렉시스 발텐이 설원에 서 있었다.

    핏발 선 금안이 저를 향하더니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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