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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61)화 (61/110)
  • 61화

    “기다리게.”

    마부석을 향해 말한 캐슬린은 문에 달린 창문을 살짝 열었다.

    “셴베르크 백작. 떠나신 줄 알았는데요.”

    “잠깐 아이를 큰길까지 데려다줬습니다. 부인께 꼭 드릴 말씀이 있어 다시 돌아왔지요.”

    “무슨 말인가요?”

    “저번에 도와주신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요.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시겠습니까?”

    셴베르크 백작이 능청스럽게 덧붙였다.

    “근처에 자주 가는 티 살롱이 있는데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의상실 일도 마무리되었고 알렉시스는 먼저 떠났으니 잠깐은 괜찮을 것 같았다. 캐슬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셴베르크 백작이 미소 지으며 마부에게 외쳤다.

    “저쪽 골목의 티 살롱으로 갈 테니 그 앞에서 대기하고 있게.”

    그는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그녀를 티 살롱으로 이끌었다. 앙증맞은 종이 매달린 문을 밀고 들어가자 직원들이 반기며 안쪽으로 안내했다.

    살롱의 내부는 정원을 컨셉으로 한 듯 싱그럽고 아늑한 분위기였는데, 희한하게도 다른 손님은 없었다. 소수만 출입할 수 있게 예약제로 운영되는 듯 보였다.

    “의외네요. 백작은 마이어에 자주 올라오지 않았을 텐데 이런 곳을 알고 계셨다니요.”

    “최근에 알게 된 곳입니다. 수도의 대귀족들께선 저택의 티 룸을 주로 이용하시지만, 아시다시피 전 마이어에 따로 소유하고 있는 저택이 없어서요. 우연히 여길 발견해 자주 다녔습니다.”

    그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따로 주문하지 않았음에도 직원이 티포트와 함께 에클레어와 스콘, 쿠키가 담긴 접시를 차례로 내오고 물러났다.

    셴베르크 백작은 직원이 내온 티포트를 들어 손수 찻물을 따랐다. 따뜻하게 김이 피어오르는 잔에서 은은한 향기가 났다.

    “마이어에 계속 머무르시나요?”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생각보다 바쁘시더군요. 저도 마찬가지일 듯합니다.”

    혼담이 무산되었으니 이제 엮일 일도 없을 텐데, 왜 페터와 함께 바빠진다는 걸까.

    그의 말뜻을 헤아려보던 캐슬린은 설마 하며 물었다.

    “혹시 계속 전하의 부관을 맡을 생각이에요?”

    “예. 거기다 제가 얼마 후에 열릴 전하의 성인식 연회의 총책임을 맡았습니다.”

    의외였다. 황제가 정상적으로 국정을 운영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황태자가 하위 귀족을 부관으로 두는 건 이상하지 않았지만, 페터는 귀족들 간 중립을 지키기 위해서 여태 평민 출신만 부관으로 삼았다. 그런데 왕족 출신의 귀족을 택한 건 상당히 뜻밖이었다. 게다가 셴베르크 백작은 혼담이 오간 상대의 가족이라 비밀을 들킬 가능성이 더 큰데, 그 위험을 감수하다니.

    “전하께선 봉급은 많이 줄 마음이 없으신 것 같았습니다.”

    찻잔을 가까이 밀어 주며 셴베르크 백작이 농담을 던졌다. 캐슬린은 그것을 받아 들며 답했다.

    “잘되었네요. 축하해요.”

    페터는 편지에서도 셴베르크 백작 이야기를 따로 한 적은 없었다. 나중에 만나게 되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찻물을 한 모금 마셨다. 깔끔하면서도 곡물처럼 부드러운 맛이 났다.

    “남부에서만 나는 허브의 일종입니다.”

    셴베르크 백작이 설명했다.

    “어떠신지요? 취향에 맞으십니까?”

    “네. 잎차답지 않은 특이한 느낌이네요. 허브인데 곡물의 향과 맛이 난다니 말이에요. 남부의 특산물이라 해도 되겠군요.”

    “부인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뿌듯합니다. 마이어의 티 살롱에서 남부의 차도 즐기게 되고, 발텐 가도 있으니 트리벨리언은 희망이 있군요.”

    “희망이요?”

    “남부와 북부의 통합에 두 분을 빼놓고 이야기할 순 없을 테니까요. 특히 각하께서는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어떤 대답을 듣고 싶은 건가요?”

    티 살롱과 차는 눈속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캐슬린이 찻잔을 내려놓자 그는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모르시는 겁니까?”

    셴베르크 백작이 먼저 침묵을 깼다. 그는 조금 의아한 것 같았다.

    “각하의 모친께서 남부 출신이란 것 말입니다.”

    “네?”

    “아까 각하께서 남부 출신 아이를 감싸시는 것을 보고 확신했습니다. 보통 제국민, 특히 황족이라면 관심도 없을 텐데 말입니다.”

    마치 알렉시스가 그렇게 행동할 것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말투였다.

    “각하의 금안은 남부의 순수 혈족을 닮았더군요. 남부에 출정하신 적도 있으니 숨기려 하시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사실을 언제까지나 속일 순 없는 법이지요.”

    떠보려는 듯 은근하게 건네는 말에 뼈가 있었다. 처음 듣는 말이라 혼란스러웠으나, 캐슬린은 내색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셴베르크 백작. 마이어에 온 적이 별로 없으시다고 하니 모르시는 것 같아 알려 드립니다. 공작님의 친모에 대해서는 황제 폐하께서 언급하지 않도록 명하셨어요.”

    “이런, 죄송합니다. 그저 각하께서 저와 동향이시란 사실에 반가운 나머지…….”

    “공작님은 마이어 출신이세요. 황실 족보에 그리 기록되어 있는데, 남부 출신이라는 백작의 독자 판단은 황족 모욕죄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발언이군요. 더 말씀하실 건가요?”

    “……아닙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셴베르크 백작은 깔끔하게 승복하고 물러났다. 캐슬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돌아가 봐야겠어요. 차 잘 마셨습니다, 백작.”

    “시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그러면 연회 때 뵙겠습니다.”

    셴베르크 백작이 살롱 밖까지 에스코트하겠다는 듯 손을 내밀었지만 캐슬린은 거절하고 혼자 살롱을 나와 대기하고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가까이하기에는 미심쩍어.’

    남부에서 권위를 가지는 가문의 사람이라, 곁에 두면 황실의 권위가 높아지기는 하겠지만 페터에게는 불리한 점도 많았다. 연회에서 만나면 말을 꺼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남부의 순수 혈족의 피가 흐른다니.’

    그에 더해, 추측일 뿐이지만 셴베르크 백작이 꺼낸 말은 상당히 의미심장했다. 남부의 순수 혈족 또한 북부의 겨울 요정처럼 트리벨리언이 건국되기 전에 모여 살던 토착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국에 편입된 이후 핍박을 견디다 못해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긴 했으나, 아직도 남부 백성들은 그들을 셴베르크 가와 같이 고위 귀족으로 여겼다. 그래서 황실에서는 셴베르크 가문과 더불어 그들을 반란의 씨앗이자 눈엣가시로 여겼다.

    이런 상황에서 남부의 왕족 가문인 셴베르크에서 알렉시스의 출신에 대해 섣불리 떠들고 다닌다면 문제가 커질 소지가 다분했다.

    어쩌면 제국 공작인 그의 처지가 위태로워질지도 몰랐다.

    “마님, 오셨어요?”

    생각에 잠긴 채 본관에 들어서니 에밀리가 나와 맞았다. 사용인들은 한참 물건이 담긴 상자를 이리저리 옮기는 중이었다.

    “이건 다 뭐야?”

    “아, 지방 영지에서 보관하던 물건들이라는데 소통이 잘못됐는지 마이어로 올라왔대요. 집사님이 주인님께 여쭈고 처분을 결정하실 거예요.”

    에밀리가 풀풀 날리는 먼지를 손으로 휘저으며 대답했다. 캐슬린은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알렉시스나 라일런트 자작이 보이지 않았다.

    “공작님은 오셨니?”

    “어, 함께 나가시지 않았어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는데요.”

    “급한 일이 있다고 먼저 가셨어.”

    “성인식 때문에 주인님께서도 바쁘신가 봐요. 곧 오시겠죠. 목이 마르시진 않으세요? 차를 내올까요?”

    밖에서 마시고 왔으니 괜찮다고 답하려던 캐슬린은 마음을 바꾸었다.

    “서재에 갈 테니 그리로 가져다줘.”

    “네, 마님.”

    서가에서 스치듯이 봤던 책들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캐슬린은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억누르며 서재로 향했다.

    ‘그가 정말 남부 출신이라면…….’

    셴베르크 백작이 던진 말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캐슬린은 서재에서 남부 토착민에 관한 내용이 조금이라도 적혀 있을 법한 책을 찾아내 읽기 시작했다.

    [대륙 최남단에서 기원한 일족은 북부 일족과는 달리 황금빛 땅과 노을빛 햇살의 기운을 눈과 머리칼에 머금었고, 곡식과 과실을 비옥하게 키워 내어 땅의 요정이라고 불렸다.]

    제국 신화사라는 책의 맨 뒷장에 빽빽하게 달린 각주 중 하나를 발견한 순간 캐슬린은 맥이 탁 풀렸다.

    ‘땅의 요정.’

    여태껏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는 잠자리에서 여러 가지 동화를 들려주셨다. 어느 날, 남과 다른 눈과 머리 색이 싫다고 투정을 부렸을 때, 지나가듯이 땅의 요정 이야기를 해 주신 적 있었다.

    - 우리가 겨울의 피를 이은 것처럼, 그들은 땅의 피를 이었단다. 언젠가 만나면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우리랑 아주 비슷하거든.

    책장을 마구 넘겨 보았으나 제국 신화사에는 변방 민족에 대해 더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았다.

    - 네가 엄마의 눈과 머리 색을 물려받은 것처럼, 그들은 피를 물려준단다. 그 안에 흐르는 힘, 생각, 기질. 어쩌면 우리보다 더 강인할지도 몰라.

    어렸을 땐 구름과 태양이 나그네의 옷을 벗기려 내기를 벌인 이야기가 더 재밌어 그런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느라 곧 잊어버렸는데. 셴베르크 백작의 말에 떠올랐다.

    캐슬린은 떨리는 손으로 책을 덮고 멀리 치웠다.

    ‘루치가 아팠던 이유는 독 때문이 맞았어.’

    어렴풋하게 짐작했으나 애써 아닐 거라고 외면했던 사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오랫동안 그의 혈관에 흐르던 독은 루치에게도 이어진 것이다. 결국 아이에게 알렉시스 발텐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카벨 선생이나 에디스에게 알려 아이도 진찰을 받게 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갈등이 일었다. 일단 책을 다시 꽂아 넣고 서재를 나서는데, 현관 출입문이 열렸다.

    “캐슬린.”

    그녀를 발견한 알렉시스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미안해. 함께 갔어야 하는데 살펴볼 일이…… 얼굴이 왜 그렇지?”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냥 좀 지쳐서.”

    복잡한 마음에 자리를 피하려는데 그가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어딜 다녀왔는지 궁금하진 않나?”

    “바쁘신 일이 있으셨겠죠.”

    “화가 났을 줄 알았는데. 함께 외출했는데 혼자 가게 해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어서요.”

    이전부터 홀로 돌아오는 일은 익숙했다. 그러나 알렉시스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캐슬린.”

    그는 손을 잡으려는 듯이 팔을 내밀다가 이내 거두고 말했다.

    “황궁 근처의 보호 구역에 다녀왔어. 아까 일을 보니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듯하더군. 현장을 급습해야 실상을 파악할 수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보호 구역에 직접 가셨어요?”

    그는 부관도 데려가지 않고 홀로 떠났다. 빈민들이 머무는 보호 구역이 어떤 곳인지는 당연히 알고 있었겠지만 직접 가서 확인할 만큼 관심을 두었을 줄은 몰랐다.

    오래전부터 신전을 통해 빈민 구제 사업에 꾸준히 기부했던 캐슬린은 알렉시스가 그곳에 직접 다녀왔다는 사실이 내심 놀라웠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더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래. 네가 신경 쓰는 곳이니까.”

    “…….”

    “노력해 보고 싶었어. 네가 날 조금이라도 봐줄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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