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60)화 (60/110)
  • 60화

    ‘사이즈는 언제 알아낸 걸까.’

    그가 새 예복을 주문할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도 당황스러웠지만, 재어보지도 않고 의상실에 꼭 맞는 치수를 전달한 게 놀라웠다. 물론 시녀 중 하나만 불러서 물어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이런 일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알렉시스 발텐은 애초에 사치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정복만 입고 다녀서 가문의 재단사에게 편한 옷을 몇 벌 더 만들도록 했던 기억이 났다.

    공작 부인이 된 후 그가 직접 옷을 구매했다는 사실을 안 건 딱 한 번이 다였다. 그가 지방 영지에 내려보낸 물품 목록을 보았을 때 말이다. 그때 장부에 적힌 내용은…….

    ‘혹시.’

    잊고 싶어 외면했던 의문이 조금씩 조각을 맞춰 가려던 때였다.

    “다 되셨습니다. 여기만 조금 수정하면 되겠네요. 자아.”

    마담 메텔린이 흡족한 듯이 손뼉을 쳤다. 순식간에 커튼이 걷히며 밖에 서 있던 알렉시스가 보였다.

    “……아.”

    그 역시 저와 같은 예복을 입고 있었다. 진줏빛 정복은 연청색 실크로 마무리된 소맷단에 금조개 커프스가 달렸고, 허리에 매인 천과 망토 안감은 붉은색으로 빛났다.

    “두 분 다 치수가 크게 어긋나지 않으셔서 이르면 내일 오후쯤 보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담 메텔린은 짝을 맞추어 제작한 예복 두 벌을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잘 맞는군.”

    알렉시스마저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캐슬린을 보았다. 캐슬린은 복잡한 마음으로 벽면에 걸린 거울을 응시했다. 한 쌍을 이루는 아름다운 예복이 그와 자신을 하나로 묶고 있었다.

    ‘하나…….’

    결혼식 때를 제외하면 이런 식으로 그와 옷을 맞춰 입어 본 적이 없어서인지 어색하기만 했다.

    가봉을 마치고, 자리를 옮겨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캐슬린은 마담 메텔린이 몇 가지 장식의 배치를 꼼꼼하게 검토하는 것을 보고 잠깐 고민하다 물었다.

    “혹시 공작님께서 예복을 언제 주문하셨나?”

    “음, 두 달 전이었던 것 같네요.”

    생각보다 훨씬 전이었다. 그래도 보통 귀부인들이 예약하는 시기에 비하면 늦은 편이었다.

    “살롱의 예약은 그때도 차 있었을 텐데?”

    “그렇긴 하지만 공작님의 예약이시니까요. 더구나 이번에는 부인과 꼭 같은 디자인으로 예복을 맞추어 달라고 하셨으니, 이 기회를 어떻게 놓칠 수 있겠어요?”

    사교계에서 홀연히 사라진 공작 부인의 공식 행사 참석이었다. 그 자리에 참석하는 모든 이들의 이목이 쏠릴 테니, 재단사에게는 다시없을 좋은 기회기는 했다.

    동시에 공작 부부의 사이가 돈독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낼 기회기도 했다.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후, 나서자 알렉시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선물은 어땠어?”

    “……선물이었나요?”

    “당연하지.”

    그가 손을 낚아채 잡으며 대꾸했다.

    “나는 마음에 들었어. 예뻤거든.”

    갑작스러운 말에 귀를 의심한 캐슬린을 포함해, 공작 부부를 배웅하려 다가오던 직원들이 모두 움찔했다. 그러나 당사자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완성되는 대로 보내.”

    “네, 공작님.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문가답게 능숙하게 표정을 관리한 마담 메텔린이 웃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알렉시스는 제 팔에 캐슬린의 손을 얹으며 밖으로 나섰다.

    “그래서 소감이 어땠는지 궁금한데.”

    길가에 선 마차까지 걸어가는 찰나에 알렉시스가 답을 종용했다. 캐슬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생소했어요.”

    “의상실 주인 말대론 일생의 역작이라고 하던데. 혹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드는 거라면…….”

    “공작님이 제게 선물이란 걸 주신 적이 없어서요.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도 모르겠네요.”

    나직한 말에 알렉시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실수를 통감하는 듯했다.

    “미안해. 신경 못 써서.”

    불시에 던져진 두 번째 고백에 캐슬린은 다시 한번 귀를 의심했다. 망상이나 환청이 아닌지 긴가민가했다.

    “이제부턴 안 그럴게. 고치려고.”

    그러나 둘 다 아니었다. 알렉시스의 사과는 현실이었다. 캐슬린은 그의 팔에 얹은 손을 빼내고 우뚝 멈춰 섰다.

    저를 돌아보는 금빛 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그러시는 거예요?”

    “뭐가.”

    “이해가 안 돼요. 사과에, 선물에…….”

    아까는 예뻐서 마음에 든다고까지 했다. 물론 옷 이야기지만, 그래도 발텐 공작이 그런 수식어를 입에 담는 건 하녀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통틀어 기억해 봐도 처음이었다.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

    “바뀌어 보고 싶어서.”

    혼란스러운 마음을 누르며 겨우 물은 질문이었으나 들려온 답은 명료하고 쉬웠다.

    “아니, 바뀌려고.”

    “…….”

    “진심이란 걸 알려 주고 싶어졌어.”

    갑자기 목울대가 뜨거워져서 캐슬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온갖 생각이 뒤섞여 무어라 대답해도 후회하게 될 것만 같았다.

    “이 거지새끼가!”

    그때 길가 건너편에서 큰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도 그쪽으로 몰려들며 수군댔다.

    “또 그 거지들이야?”

    “더러운 놈들. 왜 여기까지 기어들어 와서는.”

    사람들은 다들 혀를 차면서도 종종 있는 일인 듯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으나 계속해서 소란이 이어졌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먼저 돌아가 있어.”

    알렉시스가 몇 발짝 앞에 있는 마차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점차 인파가 모이며 분위기가 심각하게 흘렀다. 알렉시스의 얼굴이 사뭇 심각해 보여서 캐슬린은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막 마차 쪽으로 걸음을 떼던 순간 건너편의 인파를 뚫고 누군가가 달려 나왔다. 파도가 갈라지는 것처럼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켜서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뛰쳐나온 사람이 캐슬린의 앞에서 넘어졌다.

    아이였다.

    “아으으.”

    엎어져서 몸을 잔뜩 옹송그린 채 신음을 흘리는 아이는 열 살쯤 되었을 법했는데, 낡은 옷 사이로 드러난 팔다리에는 온통 생채기가 가득했다.

    캐슬린은 조심스럽게 아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괜찮니?”

    겁에 질린 눈이 캐슬린과 마주쳤다. 그러나 답이 나오기도 전에 저편에서 아이를 쫓는 사람이 큰소리를 치며 달려왔다.

    “너 이 새끼, 이리 안 와?”

    그의 손에는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아이는 두려운지 벌떡 일어나 캐슬린의 뒤로 숨었다.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로 쏠렸다.

    알렉시스가 캐슬린의 앞을 가로막자마자 험악한 인상의 덩치 큰 남자가 들이닥쳤다.

    “무슨 일이지?”

    “비켜 주십시오. 아주 혼쭐을 내줘야 합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귀족이 가로막고 섰으니 밀쳐 내진 못하고, 답답한지 남자는 억울한 낯으로 소리쳤다.

    “아니 글쎄, 저 거지 놈이 발효하려고 창가에 내놓은 빵 반죽을 홀랑 들고 내뺐다니까요!”

    캐슬린은 뒤에 숨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품에는 작은 나무 그릇이 안겨 있었다.

    알렉시스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남자는 제 의견에 동조를 바라는 듯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게다가 도둑질한 것도 그렇고, 저 애는 빈민촌에 사는 남부 놈입니다. 감히 여길 숨어들다니, 저런 건 다리를 분질러 놔야 해요!”

    알렉시스가 고개를 돌려 아이를 훑어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물러날 기세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냉정한 얼굴로 추궁했다.

    “언제부터 수도 보호 구역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이동 불가 규정이 있었나?”

    “저놈 눈 색을 보십시오. 남부 놈입니다! 지진 때문에 뻔뻔하게 마이어로 올라와서 눌어붙어 있는 벌레 같은 놈들인데…….”

    “난 그런 걸 정한 기억이 없는데.”

    “예?”

    남자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알렉시스와 캐슬린, 그리고 옆의 마차를 차례로 훑었다. 마차 측면에 새겨진 문장에 그의 시선이 닿았다. 이윽고 눈앞의 귀족이 어떤 신분인지 알아챈 남자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언제부터 남부 출신이면 도둑질에 대한 처벌이 다리 골절로 정해졌지? 상업 특별 구역 거주자는 법조문을 따로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이라도 있었나?”

    “고, 고, 공작님. 그게 아니라 저는.”

    남자가 방망이를 떨어뜨리고 횡설수설했다. 뒤에 숨은 아이는 그릇을 안은 채로 울먹이기 시작했다. 캐슬린은 조용히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거 이리 줄래?”

    “아, 안 돼요.”

    아이는 눈물을 머금은 채로 도리질했다.

    “이거 없으면 엄마랑 동생들이 굶어야 돼요…….”

    “보호 구역에서 따로 배급이 있지 않니?”

    “남부에서 왔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빵을 더 적게 줬어요. 동생들은 맨날 배고프다고 우는데 엄마는 다리가 아파서 걷지를 못해요.”

    굽지도 않은 밀가루 반죽이 담긴 그릇을 껴안은 채로 울며 말하는 아이의 말은 거짓말처럼 보이지 않았다.

    ‘남부 출신이라면 지진 때문에 올라왔다가 소요 사태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일 텐데.’

    빈민은 황실에서 따로 구제하고 있고 몇 귀족도 자선 사업을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남부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배급이 차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어디선가 일이 잘못되고 있는 거였다.

    남부에서 일어난 문제가 가까스로 마무리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차별이 있다는 게 퍼지면, 마이어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 머무르는 이민족들이 다시 반발할 가능성이 있었다.

    알렉시스도 그 때문에 저 남자를 추궁하고 있을 터였다.

    “그거 내게 다오.”

    누군가 군중을 뚫고 나와 아이의 손에 들린 그릇을 빼앗아갔다. 얼떨결에 그릇을 내어 준 아이가 멍하게 쳐다보는 사람은 낯익은 이였다.

    “셴베르크 백작?”

    그는 캐슬린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 보이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이 빵, 내가 사려고 하는데 주인이 누군가?”

    앞으로 나아간 셴베르크 백작은 동전을 꺼내 들며 큰 소리로 이목을 끌었다. 쩔쩔매고 있던 남자가 반색하며 소리쳤다.

    “접니다!”

    “여기, 값 치르겠네. 괜찮겠지?”

    “예? 하지만 아직 굽지도 않았는데요. 발효도 덜 된 반죽인데 이 돈을 주시다니요?”

    “맛있어 보이길래. 자, 그럼 된 거겠지?”

    “아, 예에…….”

    남자가 어색하게 알렉시스의 눈치를 살폈다. 알렉시스는 셴베르크 백작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긴 했으나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승낙의 뜻이라 생각한 남자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셴베르크 백작은 무표정한 낯으로 그를 보다가 다시 웃음 짓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다시 뵙습니다, 각하.”

    “여긴 어쩐 일이지?”

    “기분 전환이나 할까 해서 나왔습니다. 그러다 각하의 신중한 판단에 감탄하여 잠깐 끼어들었군요. 너그러이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아줄 생각은 없는데 잘못 알았군. 일 다 봤으면 다시 지나가게.”

    “예.”

    그는 능청스럽게 말을 받더니 돌아서서 다시 아이에게 그릇을 내밀었다.

    “자, 가지렴.”

    아이가 눈치를 보며 그릇을 받아 들자, 셴베르크 백작은 허리를 숙여 아이의 귓가에 대고 무슨 말인가를 소곤거리더니, 손을 잡고 골목으로 향했다.

    그제야 구경거리가 다 끝났다 생각했는지 모여든 인파가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알렉시스는 굳은 얼굴로 마차로 걸어가 문을 열더니 돌아보았다.

    “캐슬린, 먼저 돌아가 있어. 아무래도 보호 구역에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잠시 살펴봐야 할 듯하군.”

    “네. 그러세요.”

    “늦지 않게 갈게.”

    그는 캐슬린이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하고 손수 문까지 닫아 준 후, 다른 마차를 잡아타고 떠났다. 서두르는 기색을 보니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다.

    “마님, 출발할까요?”

    창문 너머로 알렉시스가 황궁 쪽으로 간 것을 확인한 다음 마부가 물어왔다. 그러라고 대답하려던 찰나, 누군가 마차 문을 가볍게 두들겼다.

    떠난 줄 알았던 셴베르크 백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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