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7)화 (7/110)
  • 7화

    “모르는 사용인이 이 저택에 있다고 생각하나요? 정해진 합방일도 아닌데 도련님이 처음으로 들르셨으니, 침실에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그럼 이 저택의 모든 사용인들이 침실에서 그 병을 훔쳐다 황후궁에 전달할 용의자란 이야기군요.”

    “그, 그렇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사용인들이 그런 불손한 생각을 하는 줄 알고도 묵인한 건 남작 부인의 책임이 아닌가요?”

    “지금 저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겁니까!”

    평소와 달리 구는 캐슬린의 태도에 당황한 유모가 벌떡 일어나 노려보았지만 캐슬린은 위축되지 않았다.

    “합리적 추론입니다. 남작 부인의 죄를 따지면 잘 봐주어도 사용인들의 작태를 묵인하였거나, 아니면 황후궁과 내통하였다는 것으로밖에는 이해가 안 돼요.”

    “말도 안 되는!”

    “물론 후자인 것 같군요.”

    유모는 황후궁에서 알렉시스의 모친을 데리고 다니던 시녀였는데 유독 사이가 각별했다고 했다. 그래서 황제의 사생아의 유모가 되기를 자처했고.

    그래서인지 알렉시스는 그녀가 방자하게 구는 것을 늘 묵인해 주었다. 어쩔 땐 캐슬린보다 그녀를 더 믿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캐슬린은 죽음에서 돌아온 이후 유모에 대해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이 황후의 근심을 말해?’

    캐슬린은 감정이 격해진 와중에 튀어나온 말은 진심일 가능성이 크다고 믿었다. 그녀의 말에 정곡을 찔린 것인지 유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모습을 보며 캐슬린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운명을 바꾼 그 날 밤.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캐슬린이 다시 돌아와 목격했던 유모의 은밀한 비밀.

    ‘그 호위 기사, 어느 출신이지?’

    남편과 사별한 지 오래되었는데 호위 기사와 각별한 사이인 것을 숨기는 데엔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하여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의심스러웠다. 혹시 그 기사가 황후 쪽에서 서임받은 사람이라면…….

    무언가 막 떠오르려는 찰나였다. 유모의 붉게 칠한 입술이 비틀렸다.

    “하.”

    그녀가 테이블을 돌아 천천히 다가왔다.

    “몸을 놀려 공작 부인 자리를 꿰찬 주제에 아무 말이나 지껄여?”

    “악!”

    순식간에 유모가 캐슬린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그 자리는 네게 갈 자리가 아니었어!”

    “남작 부인! 이거 놔요!”

    “내가 네가 석녀라는 사실을 몰랐을 줄 알아? 모르는 척 엎드려 있으면 될 것을 굳이 이렇게 날뛰다니. 천박하게 굴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데다가 끼니도 두 번이나 거른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분노가 극에 달한 데다 악에 받친 유모의 손아귀를 벗어나는 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이민족 주제에 애도 못 가지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계집이!”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운 말이 날아들자마자 캐슬린의 숨통이 막혔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태어났군.

    계속해서 휘둘리고 있던 상태에서 갑자기 시야가 까맣게 흐려지며 귓가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그 소리는 웅얼거리다 갑자기 천둥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 왔다.

    ‘아.’

    손이 싸늘하게 얼어붙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머리채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유모의 손아귀 때문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지만 이젠 그녀도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었다. 캐슬린은 그대로 풀썩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이 계집이 어디서 연기를. 당장 눈 뜨지 못해? 물이라도 끼얹어야 정신을 차릴…… 악!”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유모는 벽으로 밀쳐졌다.

    “흐윽…….”

    벽에 어깨를 부딪친 그녀가 고통의 신음을 흘리며 나동그라졌다. 누가 감히 응접실로 들어왔느냐 소리치려던 유모는 눈에 들어온 흑발의 사내를 보고 숨을 멈췄다.

    “도, 도련님?”

    “오드리 듀록.”

    캐슬린을 품에 안고 일어선 그는 더없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듯해 유모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오해하셨습니다. 공작 부인께서 먼저 저를 모함하려 하시기에 항변하다가 그만.”

    “황족 모독죄로 즉결 처분한다.”

    “예, 예?!”

    어안이 벙벙해진 그녀가 알렉시스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무장한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알렉시스는 무표정한 낯으로 명령했다.

    “별관으로 데려가 숨통을 끊어라. 내통자는 덜미를 잡는 순간 처리하는 것이 발텐의 규칙이니.”

    “예!”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유모가 울며불며 외쳤다.

    “도련님! 제 말 한 번만 들어 주세요. 오해세요! 황후 마마와는 그저 사정이 있어서 잠깐…… 제발! 도련님!”

    하지만 소용없었다. 알렉시스의 눈짓 한 번에 유모는 짐짝처럼 들려 나갔다. 발악하는 소리가 점차 작아지더니 종내에는 들리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캐슬린을 응접실 소파에 눕힌 다음 설렁줄을 당겨 시녀를 불렀다.

    “마님, 부르셨…… 마님!”

    에밀리가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알렉시스는 창백한 얼굴로 미동 없이 누운 그녀를 내려보며 짤막하게 말했다.

    “황궁의를 불러라.”

    * * *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15살 때였다.

    보통의 여자아이들과 달리 월경의 전조가 보이지 않아 초조해진 윈스턴 백작이 신전에 줄을 대어 몰래 의뢰한 것이다.

    “안타깝지만 백작님의 생각이 맞으십니다.”

    신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일어섰다. 캐슬린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허.”

    분노를 겨우 삭인 윈스턴 백작이 나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백작가의 집사가 신관에게 금화 주머니를 쥐여 주고는 그를 데리고 나갔다.

    둘만 남은 응접실에서 길지 않은 침묵이 흐르고, 전혀 가라앉지 않은 분노가 윈스턴 백작에게서 터져 나왔다.

    “월경이 늦어서 설마설마했더니 애를 못 낳는 게 사실일 줄이야!”

    “죄, 죄송해요, 아버지…….”

    “얼굴이 반반해서 써먹을 데가 있을까 했더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태어났군.”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었다. 캐슬린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꼭 깨물었다가 화들짝 놀라며 아버지의 눈치를 보았다. 윈스턴 백작은 씨근덕거리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널 내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인데! 그렇지 않아도 네가 어미의 낯을 빼다 박는 바람에 천한 핏줄인 것이 다 들통났다. 다른 이들의 사생아는 아비를 닮기도 했던데 너는 어째서! 네 어미가 유난히 더러운 핏줄이라 그런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어머니와 저를 한데 묶어 죄인처럼 비난하는 것은 윈스턴 백작의 취미나 다름없었다. 그래야만 겨울 골짜기의 요정을 전리품으로 취한 자신의 짓이 정당하게 느껴지기라도 하는 듯이.

    “주인님. 그레이엄 자작과 개럿 자작, 모리스 남작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 할까요?”

    “그래, 내 말은 전했느냐? 뭐라더냐?”

    신관을 보내고 돌아온 집사가 쭈뼛거리며 들어와 가신들이 모두 모였음을 보고했다. 윈스턴 백작은 한 줄기 희망이라도 잡아보려는 것처럼 성마르게 물었다.

    “저, 그분들도 모두 사정이 같으시다 합니다. 시집간 영애들이 하나같이 후계를 낳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소박맞아 쫓겨난 분들도 있다고 전하셨습니다.”

    “제길!”

    윈스턴 백작이 욕설을 내뱉었다. 눈이 거의 살의에 차 있다 볼 수 있을 정도로 거친 태도였다.

    “재수 없는 것을 들이니 이런 망조가 드는 게지!”

    그는 씨근덕거리며 말했다.

    “싹 다 돌아가라고 해! 그놈들이 꼬드겨 이 난리가 났으니까 말을 섞기도 싫다.”

    “예, 주인님.”

    윈스턴 백작의 심기가 몹시 불편함을 눈치챈 집사는 잽싸게 도망쳤다. 캐슬린은 어머니와 어머니의 가문 사람들을 마구 헐뜯고 비난하는 아비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나를 팔아치울 소나 말처럼 생각하시는구나.’

    자신이 윈스턴 가의 피를 이었는데도 같은 인간으로 봐 주지 않는 것을 오늘에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윈스턴 영지는 북부의 접경 지역에 있었고, 1년 내내 눈보라가 휘몰아쳤으며 척박했다.

    10년에 걸친 긴 전투가 끝나고 그 공을 인정받아 새로이 변경백이 된 윈스턴 백작은 다소 거친 성정이었고 권력욕 또한 대단했다. 하여 수도의 귀족 영애와 약혼을 하고서 얼마 후 다시 북부로 내려와 종군했는데, 깎아지른 듯 험난한 골짜기에 전설 속 요정들이 산다는 소문을 들었다.

    수도에 잠깐 들렀던 사이에 그 겨울 요정을 잡아 와 취한 가신들은 의기양양하게 아내를 자랑하고 다녔다. 하나같이 시린 눈처럼 하얀 피부에 반짝이는 은발. 청초하니 아름다운 외모는 수도에서 보지 못한 색다른 미인들이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그들에게는 저주의 힘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겨울 요정의 외모를 보고 내심 욕심이 생긴 윈스턴 백작도 골짜기를 뒤져 대기 시작했다. 어차피 약혼녀와 결혼하려면 아직 멀었는데, 그 긴 시간 동안 북부에서 독수공방하는 것은 불만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데다 이미 가족들을 빼앗긴 요정들이 호락호락하게 발견될 리 없었다.

    물론 윈스턴 백작은 엄청난 집착의 소유자였기에 이 잡듯이 골짜기를 뒤져 댔고 결국 몇 년 후 원하던 겨울 요정을 잡아 올 수 있었다.

    가신들의 아내보다 월등하게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자는 눈동자 색마저도 황홀했다. 얼음 결정에 사파이어를 박아넣은 듯 기묘하게 빛나는 눈은 윈스턴 백작을 매혹하기에 충분했다.

    돌려보내 달라는 애원을 간단하게 무시한 윈스턴 백작은 그 여자를 취했고, 그녀는 아이를 가졌다.

    그제야 약혼이 깨질 것을 겁낸 윈스턴 백작은 약간 후회하였으나, 정부를 두지 않는 귀족이 더 드물었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요정이 배 속에 품은 아이를 3년 후에 낳기 전까지는.

    아름다운 외모에 매혹되었던 이들 모두가 소름 끼친다며 요정을 무서워했다. 윈스턴 백작 역시 그랬다. 처음에는 태어난 아이가 다른 핏줄이라 의심하여 내쫓으려 했으나, 신관의 검증으로 자신의 딸임을 알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당시 만삭이었던 윈스턴 백작 부인은 남편이 숨겼던 요정의 존재를 알고 펄펄 뛰었지만 남편의 설명을 듣고서야 진정했다.

    변경백인 이상, 수도의 사교계에서 연줄을 이어 가기 위해서는 정략혼의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대상에는 얼굴도 반반하고 친모의 가문이 한미한 그녀가 제격이었다.

    ‘그런데 나는 소나 말만큼의 가치도 없는 딸이었어…….’

    저를 두고 떠난 어머니가 남긴 거라곤 고작 이런 것뿐.

    감정이 북받친 캐슬린의 손끝에서 새하얗게 얼음 결정이 생겨나 얼어붙기 시작했다.

    “당장 가리지 않고 무엇하느냐! 소름 끼쳐서 눈에 담기도 싫다 하지 않았느냐!”

    윈스턴 백작은 호통을 치며 캐슬린에게 천 장갑을 던졌다. 천천히 허리를 숙여 장갑을 줍는 그녀의 눈가가 축축해졌다.

    “아이도 낳지 못하다니, 저주받은 핏줄이 분명해.”

    신경질적으로 뇌까리는 아비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날로 캐슬린은 결심했었다.

    쓸모없는 자식은 이만 사라져 드리겠노라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