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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6)화 (6/110)
  • 6화

    “마님!”

    어느덧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기다리고 있던 에밀리가 잽싸게 다가와 문을 열어 주었다.

    “다녀오셨어요? 세상에. 얼굴이 또 창백해지셨네. 손도 차갑고요!”

    “호들갑 떨지 않아도 돼.”

    캐슬린은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을 모아 잡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별일 없었지?”

    “저, 그게.”

    “왜?”

    평소와 달리 어쩔 줄 몰라 하는 에밀리의 모습에 캐슬린이 멈춰 서 돌아보았다.

    “무슨 일 있었어?”

    “주인님께서 벌써 돌아오셨어요.”

    “……이 시간에?”

    그는 공작령 소유의 영지에 사냥을 떠날 때면 닷새는 머물고 왔다. 공작저에서 반나절밖에 걸리지 않는 그곳에 오두막까지 마련해 두고 시간을 보내는 건 그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어제 떠났으니 오늘은 당연히 집에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무슨 문제라도 생겼을까?

    의아했지만, 캐슬린은 곧 신경을 거두었다. 어차피 제가 신경 쓸 일은 아닐 터였다.

    “알았어. 따뜻한 목욕물 먼저 올려 줄래?”

    “저, 마님.”

    “이따가. 오늘은 좀 피곤하구나.”

    너무 울어서인지 기운이 빠졌다. 캐슬린은 그녀를 지나쳐 제 침실로 곧장 올라갔다.

    그런데.

    “늦었군.”

    침실 안에는 그가 있었다.

    “황후궁 알현이 원래 이렇게 오래 걸리나?”

    두 달에 한 번, 정해진 합방일이 아니면 발걸음조차 않는 그녀의 남편이.

    “아니면 다른 이라도 만나고 온 건가?”

    예상치 못한 방문객에 얼어붙은 캐슬린을 보고 알렉시스는 신경이 거슬렸는지, 그녀가 잡은 문을 거칠게 밀어 닫았다.

    “어째서 여기 계세요?”

    “내가 못 올 데라도 왔어?”

    “그건 아니지만…… 볼일이 있으신 줄 알았어요.”

    “일이야 당연히 있지. 오늘은 그게 여기였을 뿐이고.”

    “결정해 주시려고 오신 건가요?”

    “무슨 결정?”

    “제가 이곳을 떠날 날짜요. 허락을 구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도리상 공작님께서 원하시는 때가 있는지 물으려 했…….”

    “당치도 않은 소리.”

    알렉시스가 득달같이 말을 끊었다.

    “난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이미 말했어.”

    “하지만.”

    “생각해 보니 말이야.”

    캐슬린은 항변하려 했지만 가로막혔다.

    “네가 갑자기 떠나겠다 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 대체 뭐지, 그 이유?”

    “그건…….”

    절대 말할 수 없었다. 캐슬린은 제게 남은 한 조각 자존심을 그러모아 지키고 싶었다. 드러내 밝히는 순간 이 남자는 자신을 비웃고 짓밟을 테니까. 그렇게 초라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알렉시스는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더니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러곤 캐슬린의 손목을 잡았다.

    “앉아서 얘기하지. 금방 털어놓을 것 같지는 않으니, 내가.”

    그러다 문득 말이 멈췄다.

    “하.”

    그는 짧게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캐슬린의 소맷자락에서 튀어나와 있는 손수건 자락을 잡아당겼다.

    “이게 네 대답인가?”

    금실로 수놓인 황실의 손수건을 찢어질 듯 쥔 알렉시스의 눈이 맹수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오해예요. 황태자 전하께서 잠시 빌려주신 겁니다.”

    캐슬린은 다급히 말했다.

    “황후궁 알현이 끝나고 잠시 외부 정원에 들렀다가 마주쳤어요. 그뿐입니다. 세탁해서 곧 돌려 드릴 생각으로 가져온 거예요.”

    하지만 알렉시스는 그녀의 말을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냉소를 지었다.

    “알현 시간을 미리 알려 주기라도 했나? 그 바쁜 황태자 전하께서 어찌 그 시간에 황후궁에 있었을까.”

    “그건…….”

    그가 이복동생을 몹시 싫어한다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황후를 투영해 보기 때문에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라는 것도. 적자와 서자라는 넘을 수 없는 벽이 형제의 사이를 갈라놓은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수건 한 장으로 부인까지 오해할 일일까.

    칼로 난도질당한 듯 가슴이 아팠다.

    “우연을 설명하라 하시면, 그럴 재주는 없습니다.”

    캐슬린은 잘라 말했다. 오해라 말해도 믿지 않을 남자를 설득하고 싶지 않았다.

    “공작저를 떠나는 일과 황태자 전하는 조금도 관련이 없어요.”

    “그럼 버려도 상관없겠군.”

    알렉시스의 손에서 실크 손수건이 땅으로 떨어졌다.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얇은 천 한 장은 곧 무자비한 사내의 발에 짓밟혔다.

    “……네.”

    캐슬린은 주먹을 꼭 쥐고 겨우 그렇게 대답했다.

    그가 짓밟는 손수건이 마치 저인 양 느껴졌다. 분명 아름다운 물건이지만 알렉시스에게는 쓰레기만큼의 가치를 지닐 뿐이다. 그의 심사가 뒤틀리면 언제고 찢겨도 이상하지 않을.

    “황태자 쪽으로 눈이 간다고 해도 그만둬. 호사가들 사이에서 이복형제의 치정 싸움 이야기가 도는 건 딱 질색이니.”

    헛웃음이 나왔다.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죠?”

    “떠나겠다고 우기니 책임을 내던질 수도 있을 법하지.”

    “계약을 위반하는 일은 하지 않아요.”

    “그렇다니 다행이군. 어쨌든 네가 발텐 공작 부인인 이상, 날 우습게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 자식이랑은 거리를 둬.”

    도돌이표였다. 캐슬린은 반박하기를 그만두고 테이블 앞으로 가 앉았다.

    ‘바보 같아.’

    순간적으로 기대했다.

    시동생과의 부정을 의심하는 남편에게서 질투라는 감정이 엿보일까 봐.

    거칠고 사납다고 해도 그런 감정의 조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걸 발견하면 기뻐서 날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알렉시스에게서 엿보이는 건 그런 낭만적인 감정 따위가 아니었다.

    불쾌함.

    오롯이 그것에서 비롯된 어두운 감정 여러 가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어쨌든 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하러 들렀어.”

    남편은 그녀의 심경 따위는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여상하게 맞은편에 앉았다.

    “그 병은 가져왔겠지?”

    “……병이요?”

    “피임약 병.”

    “…….”

    “황후의 손에 들어갔을 텐데. 그녀가 오늘 알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나?”

    알고 있었단 말인가?

    충격이 온몸을 강타했다. 며칠 전, 빈 피임약 병을 둔 것은 그의 제안 때문이었다. 합방일이 아닌데도 그녀의 침실로 찾아왔던 그가 건넨 말은 다소 의아하긴 하였으나 못 할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후계 압박이 심심찮게 들어오던 중에, 발텐 공작이 먼저 피임약을 권한 일은 그녀에게 방패막이가 되어 줄 것이었다. 애초에 그녀에게는 쓸모가 없는 약이기도 하고 합방일이라 하더라도 한 침대에서만 잠들기만 할 뿐, 아무 일도 없으니 약은 필요 없는 물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피임약은 불임인 내 몸 상태를 숨겨 주려는 게 아니라…….’

    황후를 도발할 미끼가 필요해서였어.

    캐슬린은 황후에게 아무리 심한 말을 들어도 알렉시스에게 전하여 그만두게 해 달라 청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이 자신이 견뎌야 할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지치고 괴로워도 참아 냈다.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황후께서도 포기하시겠지 하며.

    그런데 오히려 황후가 그 패악을 떨도록 유도한 것이 그 누구도 아닌 남편이었다니.

    캐슬린은 떨리는 손으로 핸드백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알렉시스에게 건넸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 챙기곤 일어섰다.

    “이걸 황후에게 건네준 사람이 공작저에 있다. 곧 네게 접촉할 테니 알게 되는 즉시 알리도록. 이번엔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발뺌할 수 없겠지.”

    “……네. 그럴게요.”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알렉시스는 침실을 나섰다. 처음부터 볼일은 그것뿐이었다는 듯이.

    텅 빈 침실에 홀로 앉은 캐슬린의 시야가 흐려졌다. 그녀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흐느꼈다. 뜨거운 눈물이 차가운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어리석었어.’

    배신이라 말할 수도 없다.

    처음부터 정해진 관계에 멋대로 헛된 희망을 부여한 건 자신이니까.

    * * *

    “마님, 별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밤새 잠들지 못해 아침도 거르고 일찍이 정원을 거니는데, 에밀리가 난처한 얼굴로 알려 왔다.

    “유모님이 잠시 뵙기를 청하셔요.”

    “언제?”

    “지금 당장이요…….”

    유모가 이른 아침부터 만남을 청하는 이유야 뻔했다.

    ‘황후와 같은 이유에서겠지.’

    캐슬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에 응접실로 안내해 줘. 지금 올라갈 테니까.”

    “저,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니?”

    에밀리가 우물쭈물하며 망설이다가 털어놓았다.

    “유모님이 마님더러 별관으로 친히 오시기를 청하셨어요.”

    “하.”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 말을 전한 에밀리도 당황스러운 듯 손을 꼼지락거렸다. 이미 별관에서 그럴 수는 없다 항변한 듯 손등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유모의 긴 손톱이 할퀸 자국이었다.

    “그럴 수는 없다고 전해.”

    캐슬린은 차분하게 말했다.

    “이른 시간에 알현을 청한 것도 충분히 무례인데 직접 오지도 않는다? 아무리 유모라 하더라도 공작저의 사용인치고는 무례한 언행이라고 똑똑히 전해 주렴.”

    “마, 마님.”

    당황하는 에밀리의 어깨 너머로 캐슬린은 한 시녀를 향해 손짓했다.

    “거기 너.”

    다른 세상에라도 가 있는 듯이 심드렁하던 시녀가 불에 덴 듯 깜짝 놀랐다.

    “네? 저요?”

    “별관으로 가서 말을 전하라고 했는데, 듣고 있는 거니?”

    “어, 하지만.”

    여태껏 유모에게 공작 부인의 말을 전하는 건 측근 시녀인 에밀리의 몫이었다. 그래서 매번 고초를 겪는 것도 그녀였다.

    그 말을 당장에라도 내뱉고 싶어 일그러진 시녀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그러나 캐슬린은 냉정하게 뒤돌아섰다.

    아무리 유모의 권세가 막강하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발텐 공작이 깨어 있는 시간이다. 그의 앞에서는 패악을 부리지 않는 유모는 결국, 심기가 불편함을 여지없이 드러내기는 하였어도 본관 응접실에 도착했다.

    “절 보고자 했다고요.”

    “예, 마님.”

    호칭은 더없이 깍듯했지만 말투와 태도는 불손했다. 이미 복도에서부터 큰 소리를 내며 등장한 그녀는 사용인들을 다 물리며 문도 제대로 닫지 않고 들어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캐슬린의 앞에 마주 앉았다.

    “피임약을 드셨다고요?”

    “…….”

    “허, 부정하지 않으시는 걸 보면 진짜인 모양이로군요. 대체 어찌 그리 생각이 짧을 수가 있나요? 한시바삐 후계를 이어 황후 마마의 근심을 덜어드리려 노력해도 모자랄 판에! 천한 피가 섞인 데다가 6년이나 하녀로 굴렀어도 윈스턴 백작가에서 기본 교양은 가르쳤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군요?”

    “듀록 남작 부인. 언사가 지나치네요.”

    캐슬린은 차갑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남편을 따라 늘 ‘유모’라고 부르던 호칭이 바뀌자 유모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가며 언성이 높아졌다.

    “제가 뭐가 지나칩니까?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에요. 도련님의 모친이 불의의 사고로 단명하시며 제가 도련님을 친자식처럼 키웠어요. 어미나 다름없는데 이런 말쯤은 당연히 할 수…….”

    “평민 출신이지만 명예직이라도 귀족 작위를 받아서 기본 교양은 갖추셨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군요.”

    “뭐라고요?”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받은 유모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상당히 화가 났는지 입술도 파들파들 떨렸다. 그러나 캐슬린은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남작 부인이 공작 부인을 질책할 수 있는 신분이라고 생각했다니. 이건 어디서부터 가르쳐 줘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 어리석음이라 기가 막혀요.”

    “지, 지금……!”

    “하지만 그건 차치해 두죠. 무지가 죄는 아니니.”

    캐슬린은 팔짱을 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유모를 내려다보았다.

    “침실에 피임약 병이 있는 걸 남작 부인이 어떻게 알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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