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놓고 사내연애-32화 (특별 외전 2) (32/32)

특별 외전 2. 내겐 너무 예쁜 그녀

도훈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전 7시 40분. 이쯤이면 그녀가 도착할 때가 되었다.

곧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똑똑.

도훈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하는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들어와요.”

그렇게 답한 그는 어깨를 펴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조금 전부터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서류를 다시 열심히 보는 척을 했다.

문이 열리고,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시선은 서류에 있지만, 온 신경은 그녀에게로 향해 있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그녀의 맑은 목소리에 기다렸다는 듯이 도훈이 고개를 올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그녀는 도훈의 부하직원 한다정이었다.

그녀는 오늘도 수수한 화장과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인사 때문에 내렸던 고개를 들자, 다갈색 머리카락이 찰랑이며 어깨에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다정은 자신을 직장 상사로만 대하고 있지만, 사실 도훈은 그녀가 남다른 인연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과거의 추억 때문인지, 다정과 이 회사에서 재회한 순간부터 계속 신경이 쓰였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눈길이 갔고, 생각이 났다.

하지만 과거의 일로 자신은 그녀에게 다가갈 자격이 안 된다며, 나름의 선을 긋고 있었다.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짧은 인사를 끝내고 나가는 다정의 모습을 보며 도훈은 아쉬운 마음을 느꼈다.

3분도 채 되지 않는 이 시간을 자신이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지, 그녀는 알까.

아마 평생 모를 것이었다.

다정이 팀장실 밖으로 나가자, 도훈은 책 한 권과 출근길에 산 커피를 들었다.

그리고 기획팀 사무실로 나와 한쪽 창가에 자리를 잡고 섰다. 갑자기 제 방에서 나와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이유는 팀장실이 답답해서도, 풍경을 구경하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곧 마주할 다정의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달칵, 비품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도훈이 창밖의 풍경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의 예상대로 다정이 물뿌리개를 손에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도훈이 서 있는 맞은편 창가로 갔다. 그리고 나란히 늘어선 화분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고개를 내린 그녀의 귓불 뒤로 머리카락이 스르르 내려왔다. 다갈색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사되어 더욱 밝은 빛을 띠었다. 아담한 옆모습이 아이처럼 귀엽기도 하고, 사랑스럽게도 느껴졌다.

“너무 예쁘다.”

화분에 물을 주던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그 미소에 도훈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아, 화분에 꽃이 피었는데, 너무 예뻐서 저도 모르게 말이 나왔어요.”

자신이 너무 뚫어져라 바라본 모양이었다. 다정이 당황한 얼굴로 도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훈은 그녀가 가리킨 꽃을 한 번 본 뒤, 답했다.

“네. 정말 예쁘네요.”

물론, 제 눈에 예쁜 건 꽃이 아니었지만.

“이 화분은 이전 팀장님이 두고 가신 건데, 그분이 워낙 식물을 가꾸고 키우는 것을 좋아하셨거든요.”

평소에는 말이 거의 없던 그녀였는데, 오늘은 대화를 제법 나누었다. 문제는 대화의 주제가 이전 팀장님이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도훈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자신을 앞에 두고, 왜 자꾸 이전 팀장님 이야기를 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이전 팀장님과는 많이 친했나 봅니다.”

괜스레 심술이 나서, 어린애 같은 말이 나와 버렸다.

도훈도 말을 내뱉기 바쁘게 후회했지만, 이미 내던진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이어, 다정이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도훈은 속으로 자신의 한심함을 욕했다. 깊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왜 그녀의 앞에서는 이성적이지 못하는 걸까. 좋은 말만 해도 모자랄 판에, 늘 제멋대로 말이 나오는 걸까.

다정이 부랴부랴 제 곁을 떠나는 모습을 보며, 도훈은 홀로 마른세수를 했다.

***

점심을 먹은 도훈은 회사 로비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아침에도, 회의 때도 마신 커피를 점심에도 마실 만큼 좋아하진 않지만, 그가 카페를 자주 이용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어제 <사랑의 불착륙> 봤어? 나 마지막 장면에서 쓰러졌잖아~~.”

사원들이 북적거리는 카페 안에서 유독 목소리가 크게 들려오는 테이블이 있다. 바로 같은 기획팀 사원인 춘희의 목소리였다.

도훈은 주문을 하며, 춘희가 있는 테이블을 흘깃 보았다. 그녀가 늘 이곳에 함께 오는 멤버들 중에는 바로 다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얀색 셔츠에 하늘색 니트를 입은 그녀는 사원들의 이야기에 활짝 웃음을 짓고 있었다. 도훈은 조금 떨어진 곳에, 하지만 그녀가 적당히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커피를 마시며, 슬쩍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빨대를 입에 물고 음료를 마시다가, 사레가 들렸는지 기침을 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사원들의 이야기에 까르르 웃기도 했다.

또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얼굴이 갑자기 빨개지기도 했다.

큰일이었다. 그녀의 모든 모습이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무슨 표정을 지어도, 무슨 행동을 해도, 마냥 사랑스럽게 보였다.

다정에게 다가가면 안 된다는 머릿속의 경고가 무시된 지 오래였다. 아무리 붙잡으려고 해도, 시선이 향하는 곳은 언제나 그녀였다.

그때, 갑자기 다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떨리는 눈동자가 향하는 곳은 바로 카페 출입문 쪽이었다. 그곳엔 같은 기획팀 사원 현우가 일행과 들어오고 있었다.

그를 본 다정이 급히 옷매무시를 정돈한다. 표정도 자연스럽지 않고, 자세도 경직되었다.

그녀가 현우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굳이 알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를 보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현우가 그녀의 테이블로 다가와 스스럼없이 사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다정은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수줍게 눈인사를 건넨다.

‘바보 같은 여자.’

저런 식으로 행동하면, 어떤 남자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할까.

그렇게 속으로 탄식하던 도훈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한심하게 볼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둘째 따님을 소개 받는 건 어떨까요?’

도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되새겨보았다.

어제는 다정이 혼자 야근하는 모습을 보고, 도훈도 덩달아 야근을 했던 날이었다.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대놓고 다른 여자를 만나보라는 말을 들으니, 예상보다 충격이 컸다.

도훈은 그녀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다. 그저, 과거에 힘든 시간을 보낸 만큼, 그녀가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랄 뿐이었다. 자신과 잘해보거나, 깊은 사이가 되어야 한다는 욕심은 없었다. 아니, 없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현우가 등장하자마자 얼굴이 홍시가 된 다정을 바라보던 도훈의 눈동자에 씁쓸함이 차올랐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왔다.

***

카페에서 나온 도훈은 기획팀 사무실로 향했다.

점심시간이라 횅한 사무실을 지나쳐, 그는 팀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도훈은 잡념을 없애려, 곧바로 업무를 시작했다. 사실 급한 업무는 없었지만, 일부러 만들었다.

하지만 온갖 서류를 제 앞에 늘어놓아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까 카페에서 보았던 다정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를 향해 수줍게 미소 짓는 모습. 부끄러워서 눈도 못 마주치는 모습. 별 말 아닌 이야기에도 웃음 짓는 모습.

저에게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이 현우에게는 너무도 쉽게 허락되었다. 그 사실이 허탈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그녀에 관해선 너무도 쉽게 감정이 무너진다. 머릿속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자꾸만 욕심이 생긴다.

저에게도 그렇게 웃어줬으면 했다. 10분의 1이라도 좋으니, 현우에게 향하는 눈길을 제게도 주었으면 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도훈은 결국 서류를 한쪽에 치웠다.

“후우.”

그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 때문에 죽게 되었다. 저는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모든 걸 고백할 용기도 없는 주제에, 감히 그녀를 가지고 싶단 생각을 해선 안 되었다.

자신이 다정과 사이가 깊어지면, 상처받는 것은 결국 그녀의 몫이었다. 그녀에게 더는 다가가선 안 되었다.

머릿속을 정리한 그는 아까보다 더욱 침착해진 얼굴이었다. 강렬한 눈동자가 다시 서류를 훑었다. 마음을 완전히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업무를 이어나가던 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팀장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덤덤하게 대답하고 서류를 훑고 있는데, 문 쪽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팀장님.”

그 목소리에 도훈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들었다.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다정이었다.

도훈은 놀랍고 반가운 마음을 애써 누르며, 무덤덤하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저기……”

그의 앞으로 다가온 다정이 말했다.

“어제 주신 케이크 잘 먹었어요. 언니들한테 들었는데, 그거 무지 유명한 제과점에서 파는 케이크라고 하더라고요.”

언젠가 카페에서 춘희가 그 제과점 케이크가 맛있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분명, 그때 다정도 먹고 싶어 하는 눈치여서, 도훈이 어젯밤 힘들게 공수해온 케이크였다.

“구하기도 힘들다고 들었는데…….”

“안 힘들었습니다.”

도훈이 태연하게 답했다. 다정은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팀장님 덕분에 가족들이랑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그녀는 도훈의 책상 위에 무언가를 놓았다.

“감사의 뜻으로 드리는 거예요. 케이크에 비하면 별 건 아니지만…….”

도훈은 제 책상 위에 놓인 커피를 바라보았다. 진한 아메리카노 향이 그의 코끝을 스쳤다.

“……”

방금 커피 마시고 왔는데……. 그녀는 자신이 같은 카페에 있었는지도 몰랐나 보다.

그가 반응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다정이 살짝 긴장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커피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사 왔는데…….”

도훈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 보았다. 당황한 건지, 긴장한 건지, 그녀의 두 뺨은 살짝 상기되어있었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그렇게 말하는 도훈의 입술이 부드럽게 올라갔다. 사실,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올라간 미소였다.

그 미소를 마주한 다정이 잠시 움찔하다가, 고개를 내렸다.

“그럼, 전 이만 나가볼게요.”

서둘러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훈. 다정의 모습이 온전히 사라지고, 홀로 사무실 안에 남게 되자, 도훈의 굳어있던 얼굴이 천천히 풀렸다.

그가 손을 뻗어 다정이 준 커피 잔을 집었다. 손끝에 열기가 전해졌다. 하지만 그게 커피의 온도 때문인지, 그녀 때문인지는 정확히 몰랐다.

도훈이 김이 나는 커피 잔을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러면 곤란한데…….”

이 커피 한 잔이 뭐라고, 겨우 붙잡았던 마음이 흔들린다.

또 이리도 쉽게…… 너무도 쉽게 무너져버린다.

과연 자신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녀를 온전히 갖고 싶은 이 짙은 갈망을.

언제 폭발해버릴지 모를 시한폭탄 같은 마음을.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까.

“후우…….”

도훈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서류를 보려고 했지만, 시선이 자꾸만 그녀가 준 커피 잔으로 향했다.

오늘 하루는 도무지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대놓고 사내연애 특별 외전 完]

(공금)ⓒ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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