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사내 부부의 신혼
“일어나요.”
기분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마치 구름 위를 거니는 듯한 느낌이었다.
몽롱한 기분에 취한 다정이 눈을 뜨려다가, 다시 감았다.
그러자 달콤한 음성이 또 한 번 들려왔다.
“아침 먹고 가려면 지금 일어나야죠.”
다정이 이불을 어깨 위까지 끌어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으음……. 오늘은 안 먹고 갈래요.”
“안 돼요. 만날 아침을 안 먹으니까 속을 버리는 거 아닙니까.”
으……. 은근히 잔소리꾼이란 말이야.
어쩔 때는 엄마보다 더했다. 다정이 눈을 여전히 감은 채로 말했다.
“더 자고 싶어요.”
“이렇게 못 일어나면서, 그동안 항상 2등으로 어떻게 온 겁니까?”
“그때야…… 밤마다 덮치는 사람이 없으니 체력 소비가 없었잖아요.”
“말은 바로 합시다. 어제 먼저 덮친 건 당신이잖아요.”
“…….”
다정이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말대로 어젯밤 가만히 있는 도훈에게 달려든 건 저 자신이었다.
도훈은 잠들기 전에 항상 책을 읽는 습관이 있었다. 마음에 드는 책에 빠져들 때면, 다정이 옆에서 무엇을 하든 눈길을 주지 않았다.
다정은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집중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늘 가슴이 뛰어왔다. 특히, 막 샤워를 하고 나와서 책을 읽고 있는 그는 그렇게 섹시할 수가 없었다.
‘나 변태인지도 몰라. 나한테 관심 없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오히려 덮치고 싶다니.’
어젯밤 역시, 젖은 머리카락에 단단한 몸이 여지없이 보이는 티 한 장만 입은 도훈이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다정은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어루만졌다가 천천히 올라가 가슴을 쓸었다. 뜨거운 눈빛을 보내던 다정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짙은 키스를 퍼부었다. 결국 도훈은 어젯밤도 책을 몇 페이지밖에 읽지 못하고 덮어야만 했다.
어젯밤 회상에 빠진 채, 일어나지 않는 다정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도훈. 그녀의 귓바퀴 근처로 입술을 가져가 말했다.
“안 일어나면 덮칠 겁니다.”
“!!”
귀 끝이 빨개진 다정이 눈을 번뜩 떴다.
“지……지금 일어나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 시작은 저가 먼저 했지만, 끝은 맘대로 끝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정이 먼저 유혹한 날은 더더욱 끝을 모르는 그였다.
어젯밤 그렇게 사랑을 나누어놓고, 아침에 또 사랑을 나눈다면 다정은 종일 삭신이 쑤실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침만 되면 리셋이라도 한 것처럼 에너지가 넘쳐나는 그였기에 더욱더 조심해야 했다.
“일어났어요. 일어났다고요.”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웠는지, 도훈이 입매를 씩 올렸다.
부스스한 다갈색 머리카락도, 살짝 부은 눈가도 어쩌면 이렇게 사랑스러운지 모를 노릇이었다.
맘 같아선 침대에 도로 눕히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아침 먹고 회사에 가려면 시간이 여유롭지 않았기에 꾹 참고 말했다.
“얼른 씻고 나와요.”
***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다정이 수건으로 머리에 남은 물기를 닦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지런히 올려놓던 도훈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하얀색 티셔츠는 어깨 끝이 한참 밑으로 내려갔고,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펑퍼짐했다. 누가 봐도 자신의 옷이었다.
도훈이 물었다.
“그거 내 티셔츠 아니에요?”
그녀가 의자를 빼고 앉으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맞아요.”
“이번 주말에 당신 옷 좀 사러 갑시다.”
“아니에요. 나 옷 많아요.”
그런데 왜 자꾸 내 옷을 입느냐는 의아한 눈빛으로 도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정이 말했다.
“우리 집엔 여자만 있어서, 남자 옷이 이렇게 편한지 몰랐어요. 한 번 입으니까 계속 입게 돼요.”
그녀는 신세계를 경험한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우리 남편 향이 은은히 나서 기분도 좋고요.”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는 그녀의 모습에 도훈이 움찔했다. 이윽고 그의 뺨에 붉은 기가 번졌다. 아침이고 뭐고 다 재껴두고 당장이라도 침실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감정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훈은 강한 인내를 보이며 말했다.
“얼른 먹어요. 다 식겠어요.”
그의 말에 다정이 숟가락을 들고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찌개와 계란 후라이, 감자볶음 그리고 갖가지 밑반찬들이 놓여있었다. 모두 자신이 좋아하는 반찬들이었다. 다정은 저절로 콧소리가 나왔다.
“맛있겠다~”
가장 좋아하는 된장찌개부터 한 술 뜨려던 그녀가 손짓을 멈추었다. 그리고 도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당번은 나인데요.”
“오늘 아침 당번이 너무 곤히 자길래.”
“그럼 좀 더 빨리 깨우지 그랬어요.”
“일부러 조금이라도 더 자라고 안 깨운 거예요. 또 회사에서 꾸벅꾸벅 졸지 말라고.”
“내가 언제 회사에서 꾸벅꾸벅 졸았다고 그래요?”
“어제 내가 본 것만 해도 다섯 번이 넘는데.”
그걸 또 언제 보았대.
다정이 살짝 민망해하며 말했다.
“그건…… 신혼 부작용이에요. 남편이 밤마다 쉴 틈을 안 주고 괴롭히는데 어떡하라고요.”
“당신은 아무래도 체력을 길러야겠어요. 이번 주말부터 나랑 같이 헬스장 다닙시다.”
“…….”
다정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아내가 이렇게 피곤하다고 하면, 사랑을 나누는 횟수를 줄인다거나 시간을 줄인다는 말을 할 법도 한데 되레 체력을 기르자고 하는 그가 얄미웠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도훈이 씩 웃으며 말했다.
“늦겠어요. 얼른 먹죠.”
다정은 맛보려던 된장찌개를 먼저 한 숟갈 떠먹었다. 바지락과 갖가지 야채에서 우러나온 시원한 국물 맛이 다정의 입맛에 딱 맞았다.
“와, 맛있다.”
그녀가 감탄하며 국물을 다시 떠먹었다. 그리고 다른 반찬들도 골고루 맛있게 먹었다. 그 모습을 보는 도훈의 입가에는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맛있어요?”
다정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녀는 맞은편에 앉은 도훈이 밥은 안 먹고 저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먹고 있던 음식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당신은 왜 안 먹어요?”
“이제 먹을 거예요.”
도훈도 숟가락을 들어 식사를 시작했다. 사실 결혼전만해도 아침을 이토록 거하게 챙겨 먹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주스나 간단한 토스트로 끼니를 때웠던 그였다. 하지만 다정과 결혼한 이후로는 어떻게든 제대로 된 아침상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다정의 밥그릇이 바닥을 보일 즈음, 도훈이 그녀의 잔에 물을 채워주며 말했다.
“다 먹었어요?”
“네. 맛있어서 정신없이 먹었네요.”
“맛있었다니 다행이네요.”
그녀가 벅찬 포만감에 깊은 숨을 내쉬었다.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요. 내 배 좀 봐요.”
해맑게 웃으며 빵빵해진 제 아랫배를 통통 쳐 보이는 다정. 그런 그녀를 보며 도훈은 또 한 번 위기를 맞이했다. 뺨이 상기된 도훈이 제 입술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하……. 귀여워 죽겠네.”
낮은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다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라고요?”
도훈은 난감한 듯 미간을 좁혔다. 오늘은 회사에서 일찍 준비해야 할 업무들이 많았다.
강한 인내심으로 욕망을 겨우 억누른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얼른 준비해서 가죠.”
***
드레스룸에서 타이를 매고 있는 도훈에게 다정이 다가왔다.
그녀의 양손에는 베이지색 원피스가 한 벌씩 들려 있었다. 도훈이 보기에는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는 원피스를 몸에 차례로 가져다 대보며 그녀가 물었다.
“여보. 이게 나아요, 이게 나아요?”
도훈이 타이를 마저 매며 대답했다.
“둘 다 예뻐요.”
“아이 참. 그렇게 말하지 말래도요.”
“진짜 둘 다 예쁜데 어떡하라고.”
그의 말이 싫지 않은 듯 다정이 피식 웃었다.
도훈이 짙은 회색 재킷을 걸치고 코트를 꺼내는 찰나, 다시 한번 다정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고민하던 원피스를 제쳐두고 결국 다른 원피스를 입고 온 그녀는 도훈에게 등을 보인 채로 말했다.
“나 뒤에 지퍼 좀 잠가줘요.”
도훈은 허리 부분까지 내려가 있는 원피스 지퍼를 향해 손을 뻗었다. 까만 원피스 사이로 보이는 깊게 파인 등골이 도훈의 시선을 빼앗았다. 머리카락을 앞으로 넘긴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 또한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다정의 은은한 샴푸향과 달콤한 향수향이 코끝을 스쳤다. 문득 도훈은 지퍼를 잠그기는커녕, 모두 벗겨버리고 그녀를 끌어안고 싶어졌다. 그의 타오르는 욕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정이 재촉했다.
“얼른 잠가줘요. 나 화장도 덜 했단 말이에요.”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한참 갈등하던 도훈은 한숨을 나직하게 토해내며, 결국 원피스 지퍼를 올렸다.
***
출근 준비를 모두 마치고 현관으로 향하는 다정과 도훈.
신발장에서 꺼낸 낮은 구두를 신던 다정은 고개를 올려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짙은 회색 슈트에 검은색 코트를 입은 도훈은 완벽하리만큼 깔끔하고 근사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말끔하게 넘긴 머리카락과 잡티 하나 없이 도자기처럼 매끈한 피부결은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로웠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다정이 물었다.
“너무 멋있게 하고 가는 거 아니에요?”
딱히 꾸민 게 없었던 도훈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뾰로통한 얼굴로 이어 말했다.
“이러다 또 신입 여직원들이 꼬이면 어쩌려고요.”
그녀의 말에 도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유부남을 누가 본다고. 얼른 가요.”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다정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유부남이 되었다고 그 멋진 미모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되레 결혼하고 난 후로는 도훈이 인상도 좋아진 것 같다며 사원들이 한마디씩 하기도 했다. 그 덕에 다정은 누가 또 추파를 던지지 않을까 항상 긴장하며 그의 곁을 지키곤 했다.
도훈이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던 찰나, 갑자기 다정이 그의 손을 잡았다.
“잠깐만요. 나가기 전에 줄 게 있어요.”
“?”
도훈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마주 보았다. 바로 앞으로 다가온 다정이 그의 두 뺨을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고개를 올려 그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쪽,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달콤한 입술.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 나 대신 맛있는 아침 해준 답례예요.”
그렇게 그녀의 사랑스러운 미소를 맞이하는 순간, 도훈의 귓가에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 내내 아슬아슬하게 지켜왔던 이성의 끈이 완벽하게 날아가 버리는 소리였다.
꾹꾹 눌러왔던 욕망이 순식간에 터지며, 도훈의 몸을 달구었다.
그는 뜨거운 눈빛으로 다정을 응시하며 말했다.
“답례를 할 거면 제대로 해야죠.”
그리고선 그녀를 불쑥 끌어안아 올렸다. 그의 두 팔에 공중으로 몸이 올라간 다정이 당황하며 말했다.
“어맛, 뭐 하는 거예요?!”
“도저히 안 되겠어.”
“뭐, 뭐가 말이에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욕망이 차오른 도훈으로선 침실로 향하는 거리조차 멀게 느껴졌다.
그녀는 절대 모를 것이었다. 오늘 아침 동안만 몇 번을 참았는지.
다정을 침대에 눕힌 그가 빠르게 제 외투를 벗었다. 그리고 다정의 몸 위로 올라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어느새 부피를 키운 그의 남성이 다정의 아래 부분에 닿았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다정이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안 돼요. 이러다 늦어요.”
“한 번만.”
그럼 두 번 하려고 했니?
다정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도훈이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그윽하게 응시하며 말했다.
“당신이 너무 예뻐서 그래.”
저 눈빛, 저 목소리…….
다정이 윽, 하고 짧은 신음을 내었다.
저보다 더 달콤한 목소리를 내고, 저보다 더 그윽한 눈빛을 가진 이는 세상에 없으리라.
매번 마음을 무너지게 하는 그의 필살기이다. 그 공격을 피하기 위해 다정이 잽싸게 시선을 내렸다.
“그렇게 봐도…… 안 되는 건 안 돼요. 이러다 지각하면 어쩌려고요. 옷도 다시 입어야 되고, 머리도 헝클어질 텐데.”
“빨리 끝낼게요.”
“거, 거짓말! 내가 그 말에 몇 번이나 속았는데……!”
그녀의 외침은 파도처럼 쏟아지는 격렬한 키스에 잠기고 말았다.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밀려들어 왔다.
도훈은 입술과 혀를 부드럽게 얽으며, 그녀의 원피스를 허리까지 끌어내렸다. 도훈은 브래지어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쥐다가, 단단해진 유두를 손가락에 끼고 돌렸다. 악기를 다루듯이 손을 움직이며, 그녀의 몸을 연주했다.
달콤하게 머금던 입술이 떨어지며, 목덜미와 쇄골, 가슴으로 이어졌다. 그의 입술이 브래지어 끝부분을 물고 위를 향해 올렸다. 그러자 봉긋한 가슴이 그의 눈앞에 마주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분홍빛 유두를 머금었다. 입술 사이로 머금고 핑그르르 현란하게 원을 그리던 혀끝이 한 곳을 집요하게 빨아들였다. 손으로 가슴을 주무르며, 입으론 부푼 정점을 계속 빨아들이자, 다정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흣…….”
온몸에 퍼지는 아찔한 쾌감에 다정이 결국 신음을 내뱉었다. 도훈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다리를 쓸며 원피스 안으로 들어섰다. 이윽고 그녀의 검은색 스타킹이 주르륵 말리며, 매끈한 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스타킹에 이어 검은색 레이스 속옷도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도훈은 다시 격렬한 키스를 퍼부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어루만졌다. 살결을 지분대는 손길이 점차 거칠어지며, 깊은 골짜기로 향했다. 젖은 입구를 매만진 손가락이 애액으로 번들거렸다. 그 손가락으로 클리토리스를 지그시 누르자, 다정의 신음을 토해냈다.
“읏!”
도훈은 그녀의 가장 취약하고 예민한 부분을 고르고 골라 자극했다. 점점 격렬해지는 애무에 다정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아!”
정신이 몽롱해지고, 숨결은 거칠어졌다. 불꽃처럼 뜨겁고 강렬한 쾌감이 몸을 점령했다. 지각할까 봐 걱정했던 마음은 이미 머릿속에서 날아간 지 오래였다.
참을 수 없는 정염에 다정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의 가슴을 밀어내던 손길은 어느새 목덜미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저와 같아졌다는 것을 눈치 챈 도훈이 재빨리 바지 버클을 풀었다. 그녀의 위로 몸을 싣고 단박에 제 것을 밀어 넣었다. 굵고 단단한 이물감이 그녀의 안을 꽉 채웠다. 빨리 끝낸다는 약속을 지킬 생각인지, 아니면 여유를 부리기가 힘들 만큼 몸이 달아오른 것인지, 그는 처음부터 가장 깊은 곳을 찍으며, 빠르게 돌진했다.
“하악……읏!”
“흐읍.”
두 사람의 입술에서 거친 숨소리가 흩어졌다. 끝없는 들판을 질주하는 야생마처럼 도훈의 움직임은 격렬하고 야성적이었다.
그의 페니스가 앞뒤로 빠르게 왕복하며 부피를 키웠다. 다정이 벅찬 듯한 숨을 토해낼 때마다, 도훈은 볼과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움직임이 잠시 부드러워졌다 싶더니, 다시금 빨라졌다. 이미 충분히 깊은 곳에 머물렀음에도, 더욱 깊은 곳을 찾아 헤맨다. 젖은 살결이 서로 맞닥뜨리며, 야릇한 마찰음이 침실 가득 울려 퍼졌다.
그날 아침. 결국 빨리 끝내겠단 도훈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둘은 겨우 지각을 면했다.
***
아침 조회를 마친 기획팀 사원들이 일과를 시작하기 전 잠시 휴식시간을 가졌다.
기획팀 사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휴게실에는 몇몇 여자 사원들이 옹기종기 앉아,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다정은 아침부터 열렬하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원들의 대화에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다. 몸이 나른하고, 잠이 밀려왔다. 이 모든 게 어젯밤으로도 모자라 아침까지 이어진 섹스 때문이었다.
도훈은 아침에 사랑을 나누고 나면 늘 개운한 기색이었지만, 다정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 역시 맘 같아선 종일 사랑을 나누고 싶다만, 체력이 따라주지 않는 게 문제였다.
아침에 그에게 붙들린 날이면 다정은 업무 집중력이 다른 날보다 떨어졌다. 오늘처럼 격렬한 섹스를 나눈 날이면 더더욱 그랬다.
오늘도 몸이 천근만근인 다정은 입을 가리며, 소리 없이 하품을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춘희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선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머, 우리 다정 씨 잠을 별로 못 잤나 봐~”
“네?”
“왜 잠을 못 잤을까~~~ 나는 알 것 같기도 한데 말이지. 후후후.”
그녀의 눈꼬리가 음흉한 빛을 띠며, 입술이 히죽 올라갔다. 다정의 얼굴이 빨개지자, 춘희는 말 안 해도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신혼 때는 아침에 걷는 것도 힘들었어. 우리 신랑이 나를 가만두는 날이 없었거든.”
지금은 너무 가만둬서 문제지만. 씁쓸한 뒷말을 작게 내뱉은 춘희는 진심 어린 얼굴로 조언을 했다.
“아무튼 신혼일 때 마음껏 즐겨. 나중에 아이 생기면, 확 달라질 테니까 말이야.”
아이를 낳고 나면 부부관계가 소원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던 다정은 진지하게 물었다.
“정말 그렇게 돼요?”
“모든 부부가 그렇게 되는 건 아니지만…… 아이 키우는 게 워낙 힘들다 보니 몸이 지쳐서 하기 싫을 때도 많아지고, 아이 때문에 분위기 잡기도 어려워지거든.”
“……그렇구나.”
다정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데 맞은편에 앉은 사원이 물었다.
“다정 씨 아이 계획은 아직 없지? 다정 씨는 젊으니까 느긋하게 가지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음……. 특별히 계획하고 있지는 않은데, 팀장님은 원하는 눈치예요. 아이를 워낙 예뻐하거든요.”
“어머? 그렇게 안 봤는데, 아이를 예뻐하시는구나.”
사원들이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곤 부러운 눈빛으로 다정을 보며 말했다.
“팀장님은 아이 생기면 아이한테도 다정 씨한테도 잘할 것 같아.”
“정말 만점짜리 남편이다~”
다정이 옅게 미소 지었다. 그녀들의 말대로 도훈은 아이가 생긴다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아빠가 될 것이었다. 그를 똑 닮은 아이가 찾아오는 미래를 꿈꾸며 다정이 흐뭇한 미소를 짓는 순간, 춘희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다정 씨랑 팀장님은 사내부부다 보니, 매일 붙어있을 거 아니야. 집에서도 보던 사람을 회사에서까지 보면 조금은 지겨울 때도 있지 않아?”
“글쎄요. 전 아직까진 좋던데요.”
“그래? 난 남편이랑 24시간 붙어있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진저리가 나는데 말이야. 뭐, 그이도 질색팔색하겠지만.”
사원들은 기획팀 1호 부부인 다정과 도훈을 보며 궁금한 점이 많았다. 종일 어떻게 붙어있냐고 많이들 물어보지만, 다정은 사내부부가 되고 나서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이 더 많았다.
출퇴근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점, 골치 아픈 업무를 공유하고 의논할 수 있다는 점, 서로의 고된 직장생활을 이해하고 격려할 수 있다는 점…….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좋은 점이 많이 있었지만, 더 늘어놓았다간 사원들이 질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볼까 봐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긴. 팀장님 얼굴이 어디 매일 본다고 질릴 얼굴이니?”
“게다가 신혼이잖아. 매일 붙어있어도 모자랄 때지. 후후후.”
직원들이 농담 섞인 말을 내뱉으며 하하호호 웃었다. 그 순간, 다정의 핸드폰이 지잉, 하고 울렸다. 다정은 핸드폰 화면으로 손을 가져가, 방금 온 문자를 확인했다. 도훈에게서 온 문자였다.
[또 음담패설 나눕니까?]
그 문자에 다정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휴게실 창문 너머, 직원들과 대화하며 복도를 거니는 도훈의 모습이 보였다. 다정이 새침한 얼굴로 문자를 써내려갔다.
[어머. 날 뭘로 보고. 아니거든요.]
[아침부터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아요? 회의 시간에도 좀 그렇게 열성적일 수는 없나.]
[당신은 이해 못 해요. 여자들은 수다로 스트레스를 푼다고요.]
[스트레스라면 상사 욕도 하겠네요. 누가 내 뒷담화 안 합니까?]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하겠어요. 와이프가 떡하니 앞에 있는데. 말 못 하는 사원들 대신 내가 욕해주고 있으니, 걱정 말아요.]
[뭐라고 욕하는데요?]
실제로 사원들 앞에서 욕을 한 적은 없지만, 오늘 아침 그 때문에 지각할 뻔했던 것을 떠올린 다정은 일부러 심술궂게 문자를 보냈다.
[한 번 사랑을 나누기 시작하면 끝을 모르고, 중간이 없는 남편이라고요. 회사에선 선비처럼 점잖아 보이지만, 집에선 짐승도 그런 짐승이 없다고요.]
[흠.]
짧은 한마디 뒤에 도훈의 문자가 다시 왔다.
[그건 욕이 아니라, 자랑 아닙니까?]
윽. 다정의 정갈한 눈썹이 물결처럼 휘었다. 저가 쓴 문자를 다시 보니,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지잉, 짧은 진동음과 함께 도훈의 문자가 도착했다.
[이제 그만 들어와요. 곧 회의 시작해요.]
***
오전 회의는 기획팀 사무실 바로 옆에 있는 소회의실에서 열렸다.
긴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은 기획팀 사원들. 테이블 끝에는 말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도훈이 서있었다.
그는 최근 900억 원 규모의 물류시설 신축공사 수주 계약을 체결한 건을 두고,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었다.
“도크 도어 356대, 유효층고 9.5m로 내년 12월 31일 준공을 목표로 시공할 예정입니다.”
다정은 유창하게 회의를 진행하는 도훈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반듯한 자태와 날렵한 눈매가 집에서 보는 모습과는 또 다른 매력을 선사했다. 회의를 시작한 지 삼십 분이 지났는데도 제게는 눈짓 한 번 주지 않았다. 다정은 냉철하고 무덤덤한 상사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변신한 그에게 이질감을 느끼기는커녕, 섹시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왜 저렇게 멋진 거야.’
이지적인 매력을 풍기는 남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찰나, 도훈의 시선이 다정에게로 향했다. 그와 눈빛이 마주친 다정은 사원들 모르게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윙크에 도훈이 말을 하다 말고 잠깐 멈칫했다.
“…….”
도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발표 내내 자연스러웠던 손동작이 뻣뻣해졌다. 사원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도훈은 다시 담담한 어투로 발표를 이어나갔다.
그 후 삼십 분이 지나고 나서야, 회의는 끝이 났다. 팀원들은 발표 자료와 서류를 챙겨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정도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날카로운 눈빛으로 찌릿, 하고 노려보는 도훈의 시선을 포착했다. 다정이 난감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
‘뭐야. 화났나. 회의에 집중 안 하고 딴청 피웠다고?’
그는 집 안에서는 다정다감한 남자였지만, 공적인 자리나 사원들 앞에서는 칼 같은 사람이었다. 특히나 오늘처럼 중요한 사안을 다루는 자리에서는 제아무리 아내라도 맘에 차지 않는 행동을 하면 거침없이 지적을 늘어놓곤 했다.
그런 그에게 회의 도중 흐름을 깨는 행동을 했으니, 화가 날 법도 했다.
과감하게 윙크할 때는 언제고, 후환이 두려워진 다정. 그녀가 마른침을 삼키는 순간, 핸드폰이 지잉, 하고 흔들렸다. 다정은 문자를 확인했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도훈이었다.
[5분 뒤 비품실로.]
***
비품실 문 앞에 선 다정은 주위를 살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비품실 안은 불빛 하나 없이 깜깜했다.
‘아직 안 왔나?’
문을 닫은 다정이 비품실 안쪽을 향해 발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손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비품실 가장 구석 쪽으로 끌고 갔다.
“?!”
딱딱한 벽에 등이 마주 닿은 다정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날렵한 얼굴선이 빛나고 있는 남자는 바로 자신의 남편 도훈이었다. 다정이 말했다.
“갑자기 잡아당기면 어떡해요. 깜짝 놀랐잖아요.”
도훈의 강렬한 눈빛이 느껴졌다.
“내 얘기는 대체 어디로 듣는 겁니까?”
“뭐, 뭐가 말이에요?”
“회사에선 되도록 나 자극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자극하다니요? 설마…… 회의실에서 눈 한 번 찡긋한 거 말이에요?”
다정은 그의 귀 끝이 빨개진 것을 보았다.
‘그럼 회의실에서 얼굴이 굳었던 건 화난 게 아니라, 어쩔 줄 몰라서 그랬던 거야?’
다정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제야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도훈은 애교에 굉장히 약한 남자라는 사실 말이었다. 아까 회의실에서처럼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을 땐 더더욱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했다. 단둘이 있을 때야 바로 침실로 가면 그만이지만, 회의실에선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서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나 참. 윙크 한 번에 무너지면 어쩌자는 거야.’
문득 저에게도 이 정도인데, 나중에 딸아이가 애교를 부리는 날이 온다면 어떻게 되려나 싶었다. 아마 그 자리에서 쓰러질지도 모를 위인이다.
어찌하겠는가. 이런 남편의 모습도 아직까진 귀엽게만 보이는걸. 다정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요. 이제 사원들 앞에서 그런 돌발 행동은 삼갈게요. 됐죠?”
도훈이 시선을 내려 그녀의 검은색 원피스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이 원피스도 회사에선 입지 말아요.”
“왜요?”
“너무 파였잖아요.”
“이런 거 좋아할 때는 언제고요?”
“그건 단둘이 있을 때고.”
이거 소정 언니가 선물해준 건데. 너무 화려하지 않고 깔끔한 디자인이라 좋아했던 옷인데…… 대체 뭐가 불만이람?
도훈은 미간을 좁힌 채로 말했다.
“아까 회의실에서 보니까, 고개 숙일 때마다 속옷이 보일 듯 말 듯 하던데, 내가 회의 내내 얼마나 미칠 지경이었는지 압니까?”
그는 아직도 답답한 속이 풀리지 않는지, 깊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 누가 볼까 봐 자꾸 신경 쓰이고, 바로 눈앞에 마주하고도 끌어안지도 못하고…… 아주 고문이 따로 없더군.”
그 말에 다정이 살짝 퉁명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아니, 회의 시간에 회의에 집중해야지, 왜 남의 가슴을 보고 있어요?”
“자꾸 보이는 걸 어떡합니까.”
“안 보면 되잖아요. 그리고 만날 보는 몸인데 흥분할 게 뭐 있다고.”
도훈은 손을 들어 시계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렇게 투덕거릴 시간 없어요. 일단 급한 불부터 끕시다.”
그렇게 말하며 도훈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급한 불이요?”
다정이 눈썹이 크게 위로 솟구쳤다. 문득 그녀는 제 배꼽 부분에 둔탁한 무언가가 닿는 것을 느꼈다. 다정은 시선을 내려 그것의 정체를 살폈다. 어젯밤에 그토록 자신을 괴롭혀놓고도, 오늘 아침에도 건재함을 자랑했던 도훈의 본능이었다.
오늘 아침보다 더 대단해 보이는 자태에 다정이 마른침을 삼켰다. 바지 앞 선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모양새가 그가 말한 대로 급하긴 급해 보였다.
다정이 살짝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이곳은…… 대체 언제 쉬는 거예요? 이 녀석도 휴식을 취할 시간은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이렇게 예쁜 마누라를 옆에 두고, 쉬긴 왜 쉽니까? 더 분발해도 모자랄 판에.”
“…….”
내가 졌다. 체력적으로나, 말발로나 그를 이길 재간이 없었다.
낮에는 져준다더니, 요즘 하는 행동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결혼한 이후로 밤낮없이 달려드는 그도 문제였지만, 그의 눈빛과 손길에 너무도 쉽게 정복당하는 자신도 문제였다.
오늘도 다정은 제 몸 곳곳을 리드미컬하게 연주하는 그의 손길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도훈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가슴으로 손을 가져갔다. 부드럽다가도 강하게 주무르는 그의 악력에 다정이 얕은 신음을 흘렀다.
“하아.”
가슴에 머물렀던 손이 어느새 원피스 치마 안을 파고들었다. 빠르게 옮겨지는 손길에 조급함이 느껴졌다. 부드럽게 살결을 쓸던 손끝이 조금씩 은밀한 곳을 향해갔다. 지분대는 손길이 점점 더 깊어지고 강렬해졌다. 얇은 스타킹과 속옷 위로 야릇한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순식간에 온몸이 뜨거워졌다.
“그만.”
다정이 밭은 숨을 흘리며, 그의 어깨를 꽈악 쥐었다. 그만하라는 말과는 달리, 달아오른 몸은 그에게 바짝 붙어있었다. 누군가가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야릇한 긴장감에 흥분이 최고조에 달했다. 도훈은 빠른 손놀림으로 그녀의 스타킹과 속옷을 벗겨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바지 버클도 풀어헤쳤다.
다정의 원피스 끝자락을 허리까지 올린 그가 몸을 가까이 밀착시켰다. 서로의 뜨거운 체온이 하나로 겹쳐지려는 그 순간이었다.
“달칵.”
비품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옅은 빛이 스며들어왔다. 이어 또각또각 구두소리가 울리며, 누군가가 비품실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다정과 도훈은 일순간 그대로 굳었다. 제2의 노래방 사태가 온 것이었다.
당황스러워 왕방울만큼 커진 다정의 눈망울이 도훈에게 물었다.
‘어떡하면 좋아요?’
그가 담담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침착해요.’
이 상황에서 어떻게 침착하라는 거야! 다정이 눈을 질끈 감았다.
둘이 딱 달라붙어 숨을 죽이고 있는 동안, 구두소리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다정은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얼굴은 창백해지고, 손끝은 얼음장이 되었다.
비품실 구석에 있는 그들을 향해 가까워지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추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챙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다시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
“달칵.”
문이 다시 닫히고, 짙은 어둠이 찾아왔다. 다행히 정체 모를 누군가는 그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비품실을 나간 모양이었다. 그제야 다정은 참아왔던 숨을 내뱉었다.
“하아……. 다행이다.”
기획팀 직원에게 이 장면을 들켰다고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다정이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정돈하며 그에게 말했다.
“우리 이제 회사에서는 좀 자제해요. 이러다가 언젠가는 들키겠어요.”
“슬슬 장소를 옮겨야겠군요.”
자제하자고 말했더니, 장소를 옮기자는 말이나 하고 있는 그를 다정은 눈을 가늘게 떠 노려보았다.
“옮길 데가 어디 있어요? 화장실이나 옥상에서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농담 삼아 내뱉은 그녀의 말에 도훈이 그것도 괜찮은 아이디어라는 듯이 바라보았다.
미쳤어, 정말.
그라면 정말 화장실이나 옥상으로 데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정이 재빨리 몸을 돌렸다. 다정이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자, 도훈이 그녀의 손목을 턱 붙잡았다.
“어디 가요?”
“어디 가긴요. 일하러 가야죠. 우리 둘이서 사무실을 너무 오래 비우면 다들 눈치챈다고요.”
또다시 돌아서는 그녀의 몸을 이번엔 뒤에서 끌어안는 도훈.
“?”
“이렇게 끝내는 법이 어딨어요?”
매혹적인 음성이 다정의 귓가를 간질였다. 이윽고 엉덩이 윗부분에 둔탁하게 닿는 익숙한 감각에 다정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하던 건 마저 하고 가야죠.”
그의 손길에 원피스 끝자락이 다시금 올라갔다.
***
씻고 나온 다정이 화장대에 앉아 로션을 바르고 있었다. 문득 거울 속에 비치는 제 얼굴 뒤편으로 도훈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침대에 기대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저렇게 좋아해서 똑똑한 거였나?’
자신도 책을 많이 읽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었지만, 그는 노력이 아니라 취미였다. 신혼생활 내내 다정은 언제나 책을 가까이 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한 번 빠져들면, 집에 도둑이 들어와도 모를 만큼 놀라운 집중력을 선보였다.
다정은 다시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살짝 내리감은 속눈썹과 우수에 젖은 눈동자, 날렵한 콧대와 붉은 기가 도는 입술. 여기까지 느껴지는 은은한 샤워코롱 냄새. 살짝 젖은 채로 눈썹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
다정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제 남편이지만 너무나 멋있었다. 다정의 머릿속에 이대로 그의 품에 안기자는 충동과 얌전히 자야 된다는 이성이 부닥쳤다.
‘확 덮치고 싶지만…….’
다정은 도톰한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참자. 내일을 위해서.’
괜히 시동을 걸었다가, 어젯밤처럼 끝을 알 수 없는 사랑을 나눌지도 모른다. 그러면 내일도 회사에서 흐리멍덩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었다.
화장품을 다 바른 다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오늘도 그녀가 입은 티셔츠는 어깨선이 아래로 축 늘어진 도훈의 옷이었다.
도훈의 옆에 있는 무드등만 켠 채로, 방 안의 불이 꺼졌다. 다정이 그의 옆에 누워 잠을 청해보았다. 잠들려고 노력했지만, 온몸의 신경이 자꾸 도훈에게로 향했다. 다정이 슬쩍 눈을 떠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책에 완전히 빠져든 그의 얼굴은 옆에 마누라가 홀딱 벗고 있어도 관심이 없을 모양새였다.
불빛을 머금은 옆선이 지나치게 매혹적이었다. 그의 이지적이고 수려한 자태에 자꾸만 심박동이 거세지는 그 순간,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안 덮쳐요?”
“네. 안 덮칠…….”
당연하게 대답하던 다정이 눈을 번뜩 뜨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당황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설마…… 눈치챈 거예요?”
“뭐가 말이에요?”
그가 드디어 책에서 시선을 떼고, 다정을 바라보았다.
“내가 책 읽는 모습만 보면 당신이 흥분하는 거요?”
“윽.”
이 눈치 빠른 인간…….
다정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도훈이 물었다.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이참에 물어보죠. 대체 왜 내가 책 읽을 때마다 꼭 그러는 겁니까? 평소에는 도망가기 바쁘면서.”
“…….”
“결혼하고 나서 이 책을 아직도 다 못 읽은 거 알아요?”
“그건…….”
얼굴이 홍당무빛이 된 다정이 솔직하게 제 맘을 털어놓았다.
“당신이 나 말고 다른 거에 집중하는 모습이…… 너무 섹시해 보여서예요.”
“…….”
“그 짙은 눈빛을 나에게로 다시 돌리게 하고 싶기도 하고, 막 괴롭히고 싶기도 하고 그래요.”
도훈의 잘생긴 눈썹이 슬며시 올라갔다. 다정이 물었다.
“방금 변태 같다고 생각했죠?”
“좀 변태 같으면 어때요. 내 눈엔 예쁘기만 한데.”
그가 그윽한 눈빛으로 다정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가슴 떨리려던 다정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에게 말했다.
“잠깐. 그럼 눈치채놓고서도 말 안 하고, 일부러 밤마다 책을 읽었던 거예요?”
그가 대답을 아꼈다. 다정이 당했다는 듯이 말했다.
“와……. 완전 계략남이네.”
“그걸 이제 알았어요?”
도훈이 피식 웃으며 책을 침대 옆 협탁으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다정을 어루만졌다. 허리를 감싸는 그의 손길이 뜨거웠다. 헐렁한 티셔츠 안으로 순식간에 들어온 손은 그녀의 예민한 곳들을 탐닉했다. 이윽고 도훈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살짝 상기된 얼굴의 다정이 그의 팔뚝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 말이에요.”
“?”
“아무리 신혼이라지만 너무 자주 하는 거 아닐까요? 오늘만 해도 벌써 아침, 점심, 저녁마다 하고 있잖아요. 무슨 끼니 챙기는 것도 아니고.”
그는 끼니는 안 챙겨도 이건 챙겨야 된다는 눈빛이었다. 도훈이 담담하게 말했다.
“신혼 때는 원래 눈만 마주치면 하는 거라던데.”
“누가 그래요?”
“며칠 전 춘희 씨가 휴게실에서 말하는 거 들었어요.”
“…….”
하여간 춘희 씨는 목소리가 큰 게 딱 하나 흠이라니까. 다정이 살짝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이렇게 너무 자주 하다가…… 나중에 당신이 질려버리면 어떡해요?”
“내가요?”
도훈은 기가 차는 듯 옅은 실소까지 터트렸다.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
“아니요. 지금으로선 더하면 더했지, 쉽게 식을 사람으로는 안 보여요.”
“잘 아네요.”
그가 피식 웃으며 다정에게 입술을 묻었다. 부드럽게 머금은 입술이 움직이며 더 깊게 파고들었다. 둘의 잠옷이 너무도 손쉽게 하나씩 바닥으로 떨어졌다. 뜨거운 입맞춤과 손길이 서로의 몸을 갈구했다. 신혼방의 온도는 금세 뜨거워졌다.
그리고 그날 밤. 다정은 꿈을 꾸었다. 커다란 잉어 두 마리가 자신의 품에 뛰어드는 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