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놓고 사내연애-21화 (21/32)

Chapter. 21

팀장실에서 나온 도훈. 그의 귓가에 팀원들이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한다정 씨 아직도 안 왔네. 휴가 쓴다는 말은 없었잖아. 병가 낸 건가?”

“그러게요. 이렇게 말없이 빠진 적은 없었는데, 몸이 많이 아픈가 봐요.”

그들의 수다를 들은 도훈의 낯빛은 어두운 기색이 가득했다.

그는 오늘 아침, 다정에게서 병가를 내겠다는 문자를 받았다. 자신이 팀장으로 있는 동안, 그녀가 병가를 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

도훈의 눈동자에 짙은 어둠이 서렸다.

어젯밤 다정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21년 전 우리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고, 왜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이 힘들었는지를.

아마 제 말을 듣기 전까지는, 꿈에도 생각 못 했을 것이다. 자신이 그녀의 아버지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다정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지도, 울분을 토해내지도 않았다.

그저 시선을 내린 채로 하염없이 허공을 응시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도훈은 조회를 하기 위해 사무실 정중앙으로 걸어갔다. 도훈의 등장에 팀원들이 자세를 바로 하며 그를 주목했다.

문득 그의 시선이 다정의 자리로 향했다.

주인 없는 빈자리를 보자, 가슴이 더욱 메어왔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 얼굴을 살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겪는 고통은 그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도훈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도훈은 강인한 눈빛으로 팀원들과 시선을 마주치며, 조회를 시작해나갔다.

“아침 조회를 시작하겠습니다.”

***

잠옷차림으로 침대에 누워있던 다정이 눈을 떴다.

그 전까지 계속 눈을 감고만 있을 뿐, 잠에 들지는 못했던 그녀였다. 다정은 퉁퉁 부은 눈을 손으로 감쌌다.

어젯밤부터 한숨도 잠들 수가 없었다. 밤새 도훈이 자신에게 했던 이야기들이 떠올라, 그녀를 괴롭혔다.

아빠가 교통사고 현장에 뛰어들었다가 사망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빠가 구하려고 했던 사람이 도훈의 어머니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 못 했던 이야기였다.

‘팀장님의 엄마를 구하려다가…… 아빠가 돌아가신 거라고?’

다정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이런 고약한 운명이 있을까.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도훈과의 인연이 지독히도 얄궂게 느껴졌다.

자신이 기억하는 아빠는 한없이 다정하면서도 강직한 사람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세 자매와 하루 일과를 이야기하며 웃음꽃을 피웠고, 주말에는 가족들과 함께 산과 바다를 놀러 다녔다. 하지만 세 자매가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하거나, 도가 지나친 행동을 하면 굉장히 엄하게 훈계했던 아빠였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남편의 죽음에 슬퍼할 시간도 없이 딸 셋을 키우느라 바쁜 삶을 보냈다. 가정주부로만 살아왔던 엄마는 궂은일을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뛰어들었다. 전단지 알바부터 시작해 주유소, 마트, 식당 등 일해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할머니 또한 일하느라 집에 없는 엄마를 대신해, 언니와 자신을 돌보느라 많은 고생을 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한동안, 두 언니는 몹시 힘들어했다. 첫째 언니는 학교에 가기 싫다며 등교거부를 하기도 했고, 둘째 언니는 밤마다 아빠가 보고 싶다며 울어댔다.

그나마 나이가 어렸던 다정은 아빠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거라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꿈꾸며 나날을 보냈다.

만약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우리 가족은 어땠을까.

만약 팀장님이 아빠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면…….

만약 아빠가 팀장님의 엄마를 구하려 하지 않았다면…….

이제 와선 이룰 수도 없는 애꿎은 가정들이 다정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가슴 한구석에 지긋한 통증이 스며들었다.

아빠의 기억이 옅게 흐려졌을 뿐, 지워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가슴 한편에 자리 잡아, 다정을 애틋하게 울리던 존재였다.

그동안 다정에게 크고 작은 일이 있었던 순간마다, 아빠가 살아있었다면 어땠을까…… 수없이 생각하고, 그리워했다.

아빠는 다정에게 그런 존재였기에, 도훈의 이야기에 다정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눈앞은 암흑 속에 잠긴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한편으로는 도훈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 보여서, 충격을 뒤로한 채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선 도통 움직이질 않았다. 목구멍은 쓰디 쓴 감각이 차오르며, 꽉 막혀왔다.

결국 그에게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가버리곤, 회사까지 빠져서 팀장님이 난감해하겠지……?’

다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 상황에서도 그를 걱정하는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 순간이었다. 똑똑,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다정이 문 쪽을 바라보았다. 방문이 열리고, 작은 쟁반을 든 엄마 봉해의 모습이 보였다.

방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침대 옆 협탁에 찻잔 하나를 내려놓았다. 꿀을 넣은 홍삼차였다. 봉해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누워있는 다정에게 물었다.

“좀 잤니?”

“네.”

“몸은 어때?”

“푹 쉬었더니, 많이 괜찮아졌어요.”

“괜찮기는. 네가 회사도 빠질 정도면 정말 많이 아픈 거지. 정말 병원 안 가봐도 되겠어?”

“네. 그냥 감기 몸살일 뿐이에요. 오늘 하루 쉬면 나아질 거예요.”

“그래. 그럼 한숨 더 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봉해는 그녀의 가슴 위까지 이불을 덮어준 후, 작게 다독였다. 그녀가 쟁반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봉해가 나가려고 방문을 열려는 그 순간, 다정의 목소리가 울렸다.

“엄마.”

자신을 부르는 딸의 목소리에, 곧바로 몸을 돌리는 봉해.

“응?”

다정은 벽 쪽으로 돌아누운 채 물었다.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그녀의 질문에 봉해는 잠시 가만히 서있다가, 옅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좋은 사람이었지.”

“…….”

“아빠는 잔정도 많고, 의리도 있고, 정의감도 넘치는…… 그런 사람이었어. 주위에서 불쌍하거나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늘 지나치지 못했거든.”

남편을 떠올리는 봉해의 눈동자는 짙은 빛으로 물들었다.

“한 번은 젊은 여자를 괴롭히는 불량배들에게 대들었다가, 온몸에 새파랗게 멍 자국이 들어서 온 적도 있었어.”

“…….”

“속상해하는 나에게 네 아빠는 그래도 어디 안 부러진 게 어디냐며 실없는 소리나 했었지.”

봉해는 추억의 한 페이지를 떠올리며 작게 미소 지었다. 다정은 잠잠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나선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아빠는 늘 한결같았어. 나이도 있으니 몸 좀 사리라고 말해도 소용없었어. 아빠 고집은 어렸을 때부터 아무도 못 말렸다고 할머니가 그러시더라.”

그렇게 말하며 봉해의 입가엔 씁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미동 없이 누워있던 다정이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그럴 때마다, 엄마가 많이 힘들었겠어요.”

“당연히 속상하기도 하고, 못마땅하기도 했지. 남들에게 신경 쓸 시간이 있으면, 언니들이나 너와 함께해주길 바랐거든.”

엄마의 말에 다정도 괜스레 속상한 마음이 밀려오던 차, 봉해가 나긋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바보 같을 정도로 우직하고, 쓸데없이 정의감이 투철한 아빠를…… 사랑하기도 했지. 그게 가장 네 아빠다운 모습이었으니까.”

“……?”

“세상 사람들 모두가 몰라도, 엄마만큼은 네 아빠를 인정해줘야 된다고 생각했어. 네 아빠가 얼마나 따뜻한 성품을 가졌는지, 얼마나 타인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했는지…… 적어도 나만큼은 꼭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녀의 진심 어린 말들이 다정의 가슴을 가득 채워 울렸다.

“그런 사람이 내 남편이고, 너희 아빠라는 사실이 엄마는 자랑스럽고 행복했어.”

그렇게 말하는 봉해의 눈동자에는 따스한 빛이 돌았다. 그녀는 여전히 벽을 보고 옆으로 누워있는 다정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이야기는 왜 물어?”

“그냥…… 궁금해서요.”

“싱겁기는. 얼른 한숨 더 자. 이따가 저녁 먹을 때 깨울게.”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가자, 미동도 없던 다정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베개는 어느덧 뜨거운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

다정이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땐, 어느새 방 안은 어둠이 잠식했다.

그녀는 가늘게 눈을 떠 벽시계를 보며 시각을 확인했다.

저녁 10시. 여섯 시간 가까이 푹 잠들었던 모양이다. 엄마와 이야기를 나눈 후로 그녀는 가슴이 아려오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정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밤새 이루지 못했던 잠을 잘 수 있었다.

다정은 머리맡에 두었던 핸드폰 전원을 켰다. 핸드폰 액정이 환히 밝아지자마자, 그동안 쌓였던 메시지가 줄줄이 뜨며, 다정의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몸은 어때요?]

[많이 아픈 겁니까?]

[병원에는 가봤어요?]

답답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문자들.

바로 도훈의 문자였다.

“…….”

문자를 하나씩 읽어나가는 다정의 눈망울이 애틋하게 떨려왔다.

어쩌면 도훈은 자신보다 더 힘들어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이야기를 전해주기까지 그가 얼마나 고심하고, 저 자신을 책망했을지 눈에 뻔히 그려졌다.

우습게도 자신이 아프면 아팠지,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문자를 바라보던 다정은 무언가를 다짐한 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티셔츠와 청바지로 옷을 갈아입고 방 밖으로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며,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다정.

거실에 있던 언니들이 그녀를 보며 물었다.

“어디 가?”

“팀장님한테.”

“뭐? 야, 아프다면서 어딜 나가려고…….”

말리려는 언니들을 뒤로한 채 다정은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왔다. 핸드폰을 귓가에 댄 그녀는 연결된 상대방에게 말했다.

“콜택시죠? 여기 성수동 656에 322번지인데요.”

한시라도 더 빨리 가기 위해, 대로변으로 걸음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다정이 쥐고 있던 핸드폰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의 시선이 정면에 보이는 한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눈망울이 세차게 떨려왔다.

언제부터 와있었던 걸까.

얼마나 긴 시간을 홀로 이곳에서 보냈던 걸까.

집 앞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도훈이 서있었다. 늘 그랬듯이 근사한 슈트 차림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다정은 가슴이 북받쳐 오르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팀장님.”

그는 곧장 다정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의 슈트 재킷을 벗어, 다정의 어깨에 감싸주었다.

“아직 밤에는 쌀쌀한데, 왜 이렇게 입고 나왔어요?”

“…….”

재킷을 걸쳐주는 그의 손길에서 차디찬 기운이 스쳤다. 찬 기운이 맴도는 손끝은 그가 이곳에 한참 동안 머물러 있었음을 알려주었다. 다정이 그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와계셨던 거예요?”

“방금요.”

이럴 때 보면 참 거짓말도 잘 하는 남자였다.

다정이 핏기 없는 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의 창백한 낯빛에 도훈의 눈가가 낮게 가라앉았다.

“몸은 괜찮은 겁니까?”

“네. 그냥 감기 몸살이었어요.”

“많이…… 아팠어요?”

“……조금요.”

전혀 아프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그를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면 그 역시 거짓말이었다.

도훈의 짙은 눈빛이 처연하게 흔들리자, 다정이 말했다.

“아픈 건 전데, 왜 팀장님이 더 아픈 얼굴이에요?”

“…….”

“조금만 더 기다리시지 그랬어요. 제가 안 그래도 팀장님에게 가려고 했던 참인데.”

그 순간 다정의 작은 어깨가 홱 그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도훈은 그녀를 끌어안은 채로, 가녀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곧 이어 그의 굵은 음성이 쏟아졌다.

“기다리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기다리겠어.”

“…….”

“잠도 못 자겠고, 먹지도 못하겠고, 일은 물론 아무것도 못 하겠어.”

그 어떤 순간에도 차분했던 목소리가 산산이 부서졌다.

“당신이 걱정돼서.”

“…….”

“안 보면 미칠 것 같아서.”

놓칠세라 힘 있게 끌어안은 그의 손에서는 애절함과 열기가 치밀었다.

“어제 당신을 그렇게 보내고 나서, 미친 듯이 후회했어.”

“…….”

“괜히 말했나, 당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조금 더 빨리 말할걸, 아니면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말할걸. 그것도 아니면, 죽을 때까지 꽁꽁 숨길걸. 날 다시는 안 본다고 하면 어떡해야 하나…… 별 생각이 다 들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

숨 한 번 제대로 고를 틈도 없이 빠르게 쏟아지는 말들은 그가 얼마나 애가 타고 미칠 지경인지 보여줬다.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그의 흐트러진 모습에, 다정의 눈망울이 더욱 크게 흔들렸다.

도훈은 제 가슴에 품은 그녀를 살짝 떨어뜨려, 얼굴을 마주 보았다. 마주친 그의 눈빛은 애틋하면서도, 지독한 갈망으로 물들어있었다.

“날 원망해도 좋고, 날 비난해도 좋고, 분이 풀릴 때까지 때려도 좋으니까…… 날 떠나지만 마.”

“…….”

“이기적인 남자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어.”

마치 절대 놓아주지 못하겠다는 듯 강인한 음성이 그녀의 가슴을 세차게 울렸다.

“이미 당신은 내 전부야. 당신이 없으면 나도 없어.”

도훈의 눈빛은 강인했지만, 그 강인한 눈빛 속에 담긴 초조함과 두려움이 다정의 눈에는 고스란히 보였다.

그는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를 떠날까 봐. 이대로 영영 끝나버릴까 봐.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다정은 묵묵히 닫혀있던 입술을 떼었다.

“처음엔 그저 아빠가 가여웠고, 팀장님도 원망스러웠어요.”

“…….”

“하지만 종일 방 안에서 생각해본 결과, 잘못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도훈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그저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모두가 당연한 행동을 했을 뿐이었어요. 부모를 살리기 위해 찻길로 뛰어든 팀장님의 선택도, 도움을 청한 사람을 구하러 간 아빠의 선택도…… 그 상황에선 마땅히 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이었죠.”

다정은 곧은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아빠가 돌아가신 건 예상치 못한 차 폭발 때문이었지, 팀장님 때문이 아니에요.”

“…….”

“아빠가 팀장님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더 이상 자신을 원망하지도, 자책하지도 말아요. 그 일로 팀장님이 이토록 오랫동안 괴로워하는 건 저희 아빠도 바라지 않았을 거예요.”

다정은 그가 마음의 짐을 덜었으면 했지만, 어두운 도훈의 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담담하게 말을 내뱉는 그녀의 모습이 되레 도훈의 가슴을 찌르르 울렸다. 그의 구슬픈 눈동자가 다정에게로 향했다.

“내가…… 원망스럽지 않아요?”

그의 말에 다정은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저 팀장님 밉지 않아요. 오히려 팀장님이 용기내서 말해준 덕분에, 우리 아빠가 얼마나 대단하고 멋진 사람인지 알게 되었는걸요.”

“…….”

“팀장님 이야기대로라면, 아빠는 곤경에 처한 사람을 지나치지 않았던 거잖아요. 자기 목숨을 걸면서까지, 팀장님 어머니를 구하려고 했던 거잖아요.”

그녀의 다갈색 눈동자에 수없이 많은 감정이 차올랐다. 그 어떤 어둠 속에서도 모습을 보이는 달빛처럼 반짝였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아빠의 용기가 존경스러워요. 우리 아빠가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는 게…… 자랑스러워요.”

“…….”

“물론 팀장님 어머님을 구했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아주 조금만 더 내 옆에 있다가 갔더라면 더 좋았을 테지만……. 그래도, 아빠의 선택을 원망하진 않아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향해 웃어 보이는 그녀를 차마 바라보지 못하는 도훈.

충분히 괴로웠을 마음을 뒤로한 채, 한 마디 한 마디 차분하게 자신의 마음을 전한 그녀가 고마우면서도, 한없이 미안했다.

“……미안합니다.”

고개를 숙인 그의 눈가에는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정말…… 미안해요.”

뺨 위로 굵게 떨어진 그의 눈물을 다정이 손을 뻗어 닦아주었다. 그녀는 도훈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울지 말아요.”

손끝으로 전해오는 따스한 감각에 도훈이 고개를 들었다.

오래전, 자신을 위로하고자 초콜릿을 내밀던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울지 마. 오빠.’

이른 새벽의 이슬처럼 맑았던 눈망울.

가슴 깊이 울렸던 다정한 목소리.

모든 근심을 잊게 할 만큼 아름다웠던 미소.

자신을 다독이는 다정에게 그 소녀의 모습이 겹치자, 도훈의 눈가가 더욱더 뜨거워졌다.

“아빠가 너무 일찍 떠나버린 게 미안해서…… 이렇게 멋진 사람을 제게 보내주셨나 봐요.”

다정은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 곁에 와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입가에 띤 미소를 바라보는 도훈의 눈동자에 애틋함이 번졌다. 그는 손을 뻗어 다정을 꼭 끌어안았다.

“약속해요.”

짙은 눈빛을 한 그의 입술에서 묵직한 음성이 떨어졌다.

“내가 아버지 몫까지…… 한다정 씨 사랑할게요. 당신이 힘든 순간에도, 기쁜 순간에도, 그 어떠한 순간에도 내가 함께할게요.”

마주 닿은 가슴엔 심장 소리가 뜨겁게 요동쳤다. 어느새 다정의 눈에도 눈물이 그윽하게 넘쳐흘렀다.

“평생 곁에 머물면서 당신 지켜줄게요.”

도훈은 그녀의 작은 어깨를 가슴 깊이 끌어안으며 말했다.

“내 모든 걸 걸고 맹세할게요.”

진심 어린 그의 맹세가 깊고 아름다운 밤하늘을 가득히 울렸다. 그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흰 푸른 별 하나가 또렷하게 반짝이며 빛을 냈다.

***

“안녕하세요, 주임님.”

다정은 사무실로 들어오는 윤 주임을 향해 인사했다.

그녀가 다정에게로 다가오며 물었다.

“다정 씨. 어제 병가 냈었지? 어디가 아팠던 거야?”

“아……. 그냥 감기 몸살이었어요.”

“이제 괜찮고?”

“네. 이제 괜찮아요.”

“그래. 다행이다. 하루 쉬어서 그런지, 얼굴색이 좋아 보이네.”

그녀의 말대로 다정의 얼굴은 봄꽃처럼 화사한 기운을 띠었다.

다정은 윤 주임을 향해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시선이 도훈이 있는 팀장실로 향했다.

‘내가 아버지 몫까지…… 한다정 씨 사랑할게요. 당신이 힘든 순간에도, 기쁜 순간에도, 그 어떠한 순간에도 내가 함께할게요.’

‘평생 곁에 머물면서 당신 지켜줄게요.’

어젯밤 도훈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이후로, 머릿속에 내내 자리 잡았던 통증이 마법처럼 사라졌다.

더는 둘 사이를 가로막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행복에 겨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앞으로 도훈과 함께할 모든 순간들이 핑크빛으로 보였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잠시 나가있었던 도훈의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도훈은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다정의 자리를 스쳐지나갈 즈음, 그가 말했다.

“한다정 씨. 홍콩 건설 현황 보고서 들고, 사무실로 오도록 해요.”

“아, 네.”

다정은 보고서를 챙겨 그를 뒤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에 먼저 들어온 도훈은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 서있었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슈트에 세련된 색감의 타이를 맨 도훈. 그 근사한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다정은 보고서를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어제 검토했던 보고서인데, 추가로 수정할 사항이 있을까요?”

도훈은 그녀가 건넨 보고서를 들고 낮게 읊조렸다.

“이건 그냥 핑계인데.”

“네?”

그의 읊조림을 제대로 듣지 못한 다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도훈이 픽, 웃었다. 그리고 보고서 아무 페이지나 확 펼친 후, 그녀에게 말했다.

“잠깐 이것 좀 보죠.”

“보고서에 무슨 문제라도…….”

다정이 그에게 다가와 서류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는 그 순간이었다. 도훈이 그녀의 허리를 제 쪽으로 잡아당기며,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쪽, 소리와 함께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 당혹스러운 다정이 눈을 크게 떠 보였다.

“뭐…… 하시는 거예요?”

도훈이 아주 당당하게 대답했다.

“물어봐야 압니까? 예뻐서 뽀뽀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왜 뽀뽀를 하느냐고요.”

“애인한테 뽀뽀도 못 하나?”

“그게 문제가 아니라, 사무실이니까 그렇죠.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블라인드 쳐서 아무도 못 봐요. 이 사무실에 노크 없이 들어올 사람도 없고.”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기가 차는 다정.

아무리 공개 연애라지만, 도훈과의 낯 뜨거운 장면까지 사원들에게 들키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미 노래방에서 들킨 전적이 있어서 조심에 또 조심을 하고 싶은데, 도훈은 그런 쪽으로는 경각심이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대담해지는 그였다.

다정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닫힌 블라인드를 꼼꼼히 살피며 말했다.

“회사에서는 조심 좀 해요. 노래방 때처럼 또 누구한테 들키면 어쩌려고요?”

핀잔을 주는데도 도훈은 뭐가 그리 좋은지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는 또 한 번 다정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럼 이렇게 예쁘지를 말든지.”

다정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올 때마다 속절없이 무너지는 자신이 싫었다. 그걸 아는지, 도훈은 그녀가 주저할 때마다 되레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다정의 귓가에 대고 그가 나직이 말했다.

“오늘 늦게 들어가도 됩니까?”

오늘도 그의 매력적인 중저음과 뜨거운 눈빛에 넘어간 다정.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아마도요.”

그녀의 말에 도훈이 녹아들 것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근사한 미소를 마주 본 다정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곳에 그와 더 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자신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다정이 황급히 보고서를 챙겼다.

“전 이제 그만 나가볼게요.”

“한다정 씨.”

도훈은 나가려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몸을 돌려 자신을 응시하는 다정에게 말했다.

“다음 주에 여행 가기로 한 거 안 잊었죠?”

다음 주 주말은 도훈과 다정이 처음으로 여행을 가려고 계획을 세운 날이었다. 당연히 잊지 않고 있었던 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훈이 이어 말했다.

“1박이니 멀리는 못 가고, 다정 씨가 가고 싶었다는 여행지에서 골라 갈 거예요. 자세한 스케줄은 이따 저녁에 이야기하죠.”

왜 그 많은 말 중에 1박이라는 말만 귀에 쏙 들어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정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네. 좋아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돌아서려는데, 도훈의 나긋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날, 예쁘게 하고 와요.”

다정은 다시 한번 그를 바라보았다. 도훈은 근사한 미소와 함께 한마디를 덧붙였다.

“뭐, 어떻게 하고 와도 내 눈엔 예쁘겠지만.”

***

사무실에서 나온 다정은 자신의 책상으로 향했다. 그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세아의 모습이 보였다. 다정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아주 작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누가 봐도 형식적인 인사였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로 가 앉는 세아. 그녀는 무덤덤한 얼굴로 일할 준비를 했다.

세아는 한때 도훈과 다정의 사이를 방해하려고 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예전처럼 다정에게 불쑥 기분 나쁜 말을 내던지지도 않았고, 못마땅하다는 시선으로 노려보는 일도 줄었다. 그렇다고 뒤에서 몰래 나쁜 일을 꾸미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다정은 놀라울 정도로 잠잠한 그녀의 태도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다정은 문득 언니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동생 눈에 눈물 나게 했으면, 그 여자 눈에는 피눈물 흐르게 만들어줘야지. 그것도 아주 철철.’

그녀는 얌전하게 앉아있는 세아를 보며 생각했다.

‘언니들은 대체 무슨 일을 벌일 생각인 거야.’

언니들이 벌써 무슨 수를 쓴 것은 아닐까. 조금은 걱정스러운 마음도 밀려왔다.

다정과 세아의 사이는 폭풍전야처럼 고요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 때문에 회사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벌어졌다.

***

다정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따스한 햇볕 아래 다정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조차 즐거운 듯, 입술 사이로는 콧노래가 나왔다.

집 앞으로 나온 지 10분 정도 지났을까. 골목길로 들어서는 입구에 낯익은 차 한 대가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다정이 환해진 얼굴로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골목 한쪽에 차가 멈춰 서고, 운전석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누가 봐도 훤칠한 외모의 주인공은 바로 도훈이었다. 잘 차려입은 감색 슈트가 몹시도 근사했다. 다정은 반가운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왔어요?”

도훈의 손에는 고급스러운 색감의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오늘은 길순의 생일로, 도훈이 다정의 집에 초대받은 날이기도 했다.

다정이 그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뒤로 넘긴 검은색 머리카락은 평소보다 더 깔끔한 스타일이었다. 단정한 디자인의 슈트는 색감이 짙어 점잖은 느낌을 주었다. 짙은 갈색 구두도 새것처럼 광이 났다.

“오늘 저 몰래 선이라도 봐요?”

그녀의 말에 도훈이 옅게 미소 지었다.

“오늘 잘 보여야 할 사람이 많아서.”

그는 살짝 긴장된 표정으로 옷매무시를 다듬더니 물었다.

“나 어때요?”

어떠냐니요?

도훈이 이런 질문을 한 건 처음이라 잠시 멍해 있던 다정이 말했다.

“강동운, 송증기, 소지솝보다 더 멋있어요.”

그가 너무 과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는 다정.

“진짜인데.”

배시시 웃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도훈도 미소가 번졌다.

“다정 씨 가족들 눈에도 그렇게 보여야 할 텐데 말이죠.”

“별 걱정을 다 하시네요. 이미 우리 가족들은 팀장님 팬클럽 소속이라고요.”

뭐가 그리 좋은지 이야기를 하는 내내 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 그리고 손을 꼭 잡은 채로, 철제문을 열고 다정의 집으로 들어갔다.

***

길순의 생일상은 거하게 차려졌다. 물론 길순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도훈이 온다는 소식에 봉해가 더욱 실력을 발휘한 것도 있었다.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가짓수 많고 맛도 훌륭했던 점심을 먹은 후, 도훈과 다정의 가족들은 거실에 모여 앉았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길순은 도훈이 건넨 쇼핑백을 열어보았다. 봄과 잘 어울리는 화사한 느낌의 스카프와 홍삼세트였다.

“어휴, 뭘 이런 걸 다 사오고 그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길순은 꽃무늬가 새겨진 스카프가 마음에 쏙 들었는지 눈을 떼지 못했다. 한참 동안 바라보던 그녀는 스윽 선물을 옆으로 밀어내더니 한마디를 내뱉었다.

“난 이런 선물 필요 없고, 내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라니께.”

설마…….

다정이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네 같은 증손자를 죽기 전에 보는 게 소원이여!”

예상대로 오늘도 그녀의 입에선 어김없이 증손주 이야기가 나왔다.

듣기 좋은 말도 수십번 들으면 지겹다는데. 이렇게 부담스러운 말을 가족들을 볼 때마다 듣는 도훈을 보며 다정은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때, 묵묵히 듣고 있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사실…… 할머니의 소원은 제 소원과 같습니다.”

‘?!’

다정을 포함한 모든 가족들이 입을 떡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다정은 당혹감에 입이 벌어졌다면, 나머지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입이 벌어졌다.

폭탄과도 같은 말을 내뱉은 도훈은 너무도 차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전에 말했던 것처럼 교제 기간이 짧은 편이고, 다정 씨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조금 더 저에 대해 알아갈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강렬하면서도 확고한 눈빛으로 가족들을 응시했다.

“저와 평생 함께하고 싶다는 확신이 들 수 있도록, 앞으로도 다정 씨에게 최선을 다할 겁니다. 물론 가족분들께도 제가 다정 씨를 맡겨도 충분히 안심이 될 사람이라는 걸 보여드릴 겁니다.”

그 말에 가족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지만 그녀들과는 달리 도훈의 낯빛은 점차 어두워졌다. 그가 어렵게 입술을 떼었다.

“가족분들께 믿음을 얻기 이전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굳어진 눈매와 지그시 깨무는 입술. 그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급격히 달라진 표정에 가족들도 입술을 달싹였다. 다정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언젠가 가족들에게도 이야기하겠다고 했지만, 그날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이미 각오를 다진 도훈은 곧은 얼굴로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시작해나갔다.

“저는 아버지와 함께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열 살 때 돌아가셨고요.”

“…….”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유는 교통사고입니다. 사고 당시, 저는 어머니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섣불리 말을 잇기 힘든 듯, 도훈의 눈매가 얕게 흔들렸다.

“사고 당시 제가 도움을 청한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다정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못지않게 긴장한 다정은 두 주먹을 꽈악 쥐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가족들이 충격을 받지 않을 리가 만무했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쓰러지기라도 하시면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그를 말려야 하나 고민하던 그 순간이었다.

“말하기 힘겨워 보이는데,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네.”

길순의 나직한 목소리가 거실 가득히 울려 퍼졌다.

“자네가 말하지 않아도, 우린 다 알고 있어.”

“……?!”

“어멈이랑 나는 진작 다 알고 있었단 말이네.”

그 말에 도훈은 물론 다정까지 놀란 눈으로 길순을 응시했다. 곁에 있는 봉해와 언니들의 표정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거짓이 아닌 듯했다.

“우리 대영이가 그렇게 되고 나서, 자네 아버님이 달마다 돈을 부쳤던 것은 아는가?”

길순은 길게 숨을 내뱉은 후, 회상에 잠긴 듯한 얼굴로 말했다.

“가장 없이 자식 셋을 키우려면 힘들 거라고 생활비로 쓰라며 참 꾸준히도 보냈지. 도로 돌려줘도 보내고, 다시 돌려보내도 또 보내더만.”

“…….”

“저 마누라를 구하려다가 떠난 것이 미안했는지, 우리 대영이 장례식 때도 찾아오고, 납골묘 앞으로도 몇 번 찾아왔어. 자네 아버지도 갑작스러운 이별에 정신이 없었을 텐데, 어찌 그렇게 우리까지 챙겼는지 몰러.”

도훈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고, 들은 적도 없는 이야기인지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어멈아. 그것 좀 가져와봐라.”

길순의 말에 봉해가 안방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다. 길순은 그녀가 건넨 것을 받아 도훈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자네 아버지가 보낸 편지여. 호주로 가고 난 후로는 매달 생활비와 편지를 함께 부쳐줬어.”

그녀의 손에는 빛이 바랜 편지부터 최근에 보낸 것처럼 보이는 편지까지 들려있었다.

“편지에는 자네 이야기가 절반은 넘었지. 그래서 자네가 어떻게 크고 있는지 눈으로 안 봐도 보는 것처럼 생생했어.

편지를 바라보던 도훈의 눈빛이 애틋하게 떨려왔다. 그 모습을 보며 짐작했다는 듯 길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을 보니, 아버지가 한 일은 전혀 몰랐나 보구먼.”

“……네. 전혀 몰랐습니다.”

도훈은 편지에 빼곡하게 쓰인 아버지의 글씨를 바라보았다. 감정 표현이 서툴고 무뚝뚝했던 아버지가 이 같은 편지를 썼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머니를 잃고 나서, 한동안 폐인처럼 지냈던 아버지에게 도훈은 어머니 이야기를 차마 꺼낼 수 없었다. 당연히 다정의 일도 말하지 못했고, 아버지 또한 어머니의 일은 한시라도 빨리 잊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아버지가 저 몰래 한 일이 놀라우면서도, 동시에 감격스러웠다.

편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를 보며 길순이 입을 열었다.

“편지를 통해 자네가 공부를 얼마만큼 잘했고, 얼마나 듬직하게 자랐는지, 또 언제 한국에 들어왔는지 다 알고 있었다네.”

“…….”

“하지만 자네가 우리 다정이랑 같은 회사를 다닐 줄은 몰랐제. 그리고 우리 다정이를 이렇게 아껴주게 될지도…….”

“죄송합니다. 조금 더 빨리 말씀드려야 했는데, 쉽게 말이 안 떨어졌습니다.”

“영영 비밀로 해도 상관없었는디, 우리 팀장님 참말로 순해 터졌구먼.”

허허 웃어 보이는 길순의 모습에 도훈의 눈가가 구슬프게 흔들렸다.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밉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그녀는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해질 정도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자넬 왜 미워하는가. 이렇게 듬직하게 커서는 우리 손주까지 예뻐해 주는데. 내가 자넬 왜 미워하겄어?”

그렇게 말하는 길순의 표정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그래도 도훈은 푹 숙인 고개를 올릴 수가 없었다. 길순은 나긋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일로 마음 아파해봤자 뭣이 남겄는가.”

“…….”

“우리 대영이도 그건 바라지 않을 거네. 그러니 괜한 죄책감도 갖지 말고, 미안한 마음도 갖지 말어. 고것이 나도, 대영이도…… 우리 모두가 원하는 길인께.”

그녀의 말에 옆에 있던 봉해도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 숙인 도훈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길순은 모두 이해한다는 듯한 얼굴로 그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그녀의 따스한 손길이 어깨에 닿자, 고인 둑이 터지듯 도훈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옆에 있던 식구들도 모두 애틋한 눈물을 흘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 도훈의 어깨를 다독이던 길순이 입을 열었다.

“그려. 그건 그렇고…….”

“…….”

“이제 어쩔 것이여?”

고개를 든 도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네?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잘…….”

“날은 언제 잡을 것이냐고?”

그녀의 말에 훈훈했던 분위기가 금세 가라앉았다. 그리고 식구들 눈가에 고여있던 눈물도 쏙 들어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길순은 진지했다.

“소원 들어줄라믄 날부터 잡아야 할 거 아니여?”

“…….”

“뭐, 애부터 생겨도 상관은 없다만서도. 요즘은 그게 뜨랜드인가 뭔가라면서?”

다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나 이 집에서 나올 이야기의 끝은 정해져 있었다.

기승전 결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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