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
다음날 기획팀 사무실.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던 다정의 입이 벌어졌다. 참을 새도 없이 자꾸만 나오는 하품.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다정 씨 많이 피곤한가 보네.”
그녀가 하품하는 모습에 옆자리에 앉은 여직원이 물었다.
“어제 잠 별로 못 잤어?”
다정이 힘없이 대답했다.
“……네.”
“왜? 요즘 불면증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다정은 어젯밤 도훈과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동안 쌓였던 욕망을 모두 분출하기라도 할 셈이었는지, 그는 다정을 안고 또 안았다. 끝났나 싶으면 다시 몸을 겹쳤고, 정말 끝났나 싶으면 비로소 시작이었다. 새벽이 거의 지나갈 즈음, 그녀가 쓰러지다시피 잠든 후에서야 그는 다정을 놓아주었다.
그 덕에 다정은 아침부터 졸린 눈을 비비며 몽롱한 정신으로 겨우 업무를 이어나갔다. 평소엔 마시지 않는 커피를 훌쩍 마시며 다시 컴퓨터를 보려던 때였다.
팀장실에서 나온 도훈이 팀원들을 주목시켰다.
“오전 조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침대에 붙어있었던 남자가 지금은 빈틈없는 상사의 모습으로 바뀌어있었다. 그는 머리를 말끔히 넘기고, 단정한 슈트 차림으로 팀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젯밤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온몸이 땀으로 젖어있었던 그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중국 사업 기획 발표를 10시, 제1소회의실에서 시작하겠습니다. 발표 자료를 준비해서 모여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주에 있을…….”
다정은 차분하면서도 힘 있는 어조로 조회를 이어나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일로 맥을 못 추는 자신과는 달리, 그는 평소와 다른 점이 없어 보였다.
‘팀장님은 안 피곤한가?’
분명 저보다 더 나이도 많고 체력도 훨씬 많이 썼는데도, 그의 낯빛에는 지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아니, 피부에서 광이라도 나는 것처럼 오늘따라 유난히 매끈하고 상큼한 얼굴을 자랑하기까지 했다.
다정은 오래전 도훈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굳이 따지자면, 난 낮져밤이입니다.’
그 말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 다정이었다. 그는 밤에는 절대 져주질 않는 남자였다.
다정은 조회 중인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깔끔하면서도 이지적인 분위기의 그는 그 모습대로 멋졌다. 그녀의 시선이 도훈의 얼굴에서 굵은 목울대로, 널찍한 가슴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다정의 머릿속이 도훈의 슈트를 멋대로 벗기고, 군살 하나 없이 탄탄했던 그의 몸을 떠올렸다. 자신도 모르게 맨몸의 도훈을 떠올린 다정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다정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도훈에게 집중했다. 그녀의 눈빛은 얼마 가지 않아 또 도훈을 야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장미색처럼 선명한 붉은 기가 도는 입술은 물론, 기다란 손끝마저 섹시했다. 저 입술과 저 손으로 자신의 몸을 격렬하게 탐했던 순간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순간을 떠올리기만 해도 숨이 뜨거워지고, 몸이 달아올랐다.
‘또 한 번 안기고 싶어…….’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도훈과 눈이 마주쳤다. 다정이 살짝 당황해 눈을 껌뻑였다. 그는 아주 잠시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다정이 입술을 달싹였다. 괜스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들킨 것 같아, 귀 끝이 화끈거렸다.
***
퇴근 후, 다정은 팀원들의 눈을 피해 슬며시 후문 쪽으로 걸어갔다.
한쪽에 주차된 도훈의 차를 발견한 그녀는 다시 한번 주위를 살핀 후, 차에 올라탔다. 조수석에 앉은 다정은 옆을 바라보며 말했다.
“몰래 연애하는 것도 나름 힘드네요.”
도훈은 시동을 걸며 말했다.
“이럴 바에 공개하는 게 편하지 않겠어요? 매번 이렇게 숨어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텐데.”
“아니요. 조금 힘들더라도 비밀 연애가 나아요. 팀장님과 사귈 때 제가 얼마나 팀원들에게 시달렸는데요.”
그와 대놓고 연애했을 때, 사실 진심으로 그녀를 축복해주는 팀원들은 별로 없었다. 말로는 축하한다면서, 속으로는 못마땅해 하거나 시기 어린 마음을 갖는 팀원들을 여럿 겪었던 그녀였다. 게다가 도훈의 직급이 높다 보니, 공개 연애가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도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대신 언제든 힘들어지면 말해요.”
“네. 그럴게요.”
“오늘 많이 피곤해 보이던데, 몸은 괜찮아요?”
“괜찮…….”
다정이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을 리가 있겠어요? 누가 어제 밤새도록 괴롭혔는데.”
뭐가 그리 좋은지 도훈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안 그래도 어젠 내가 다정 씨에게 너무 심했던 게 아닌가 생각했던 참이었어요.”
“그걸 알아주다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오늘은 얼른 집에 들어가서 쉬어요. 푹 쉬다 보면 나아질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도훈은 그녀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다가온 그의 상체에서 시원하면서도 기분 좋은 향이 흘렀다. 마치 그에게 안겨있는 듯한 착각을 일게 하는 달콤한 향이었다.
다정의 시선이 그의 넓은 어깨와 가슴으로 향했다. 또다시 그녀의 눈이 제멋대로 그의 옷을 벗기고, 맨몸으로 만들었다. 근육이 촘촘하게 자리 잡은 그의 상체가 눈앞에 아른거리자, 다정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미쳤어……. 또…….’
다정이 야릇한 상상에 빠져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훈은 차를 움직이기 위해 사이드브레이크를 풀고 있었다. 그가 핸들을 잡고 액셀을 지그시 밟으려는 그 순간이었다.
“팀장님.”
다정의 작은 손이 그의 손 위를 덮었다. 도훈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뺨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다정의 주홍빛 입술이 수줍게 열렸다.
“저 아직…… 집에 안 들어가고 싶어요.”
그녀의 말에 도훈의 발이 액셀 대신 브레이크를 밟았다. 도훈이 물었다.
“피곤한 거 아니었어요?”
“당연히 피곤하죠. 당장 침대에 누워 자고 싶은데…….”
살며시 떨리던 다정의 눈망울이 또렷하게 그를 응시했다.
“팀장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더 커요…….”
그녀의 적극적인 태도에 도훈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놀란 건 다정도 마찬가지였다. 본인이 이렇게 사랑스러운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인지 몰랐으니까.
사랑의 힘이 실로 위대하다고 느끼는 순간, 도훈이 말했다.
“다정 씨는 한 번씩 굉장히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거 압니까?”
“……그래서 싫어요?”
“그럴 리가요.”
그가 다정을 향해 입가를 부드럽게 올려 보였다.
“이래서 내가 당신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의 미소에 다정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왔다. 도훈이 이어 물었다.
“그런데 오늘도 외박하면 집에서 뭐라고 안 해요?”
“우리 가족들 어떤지 아시잖아요. 팀장님 집에서 아예 뼈를 묻길 바라고 있을걸요.”
“하하.”
그녀의 말이 재밌다는 듯 도훈이 크게 웃었다. 그가 액셀을 밟아, 차를 움직였다. 차가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동안, 다정이 그에게 말했다.
“팀장님 집으로 가는 대신…… 부탁 하나 들어줘요.”
운전하던 도훈이 흘깃 시선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
“오늘은 조금…….”
“?”
“조금 적당히 하는 걸로 해요.”
다정은 홍당무처럼 빨개진 얼굴로 덧붙였다.
“내일도 회사에서 꾸벅꾸벅 졸 수는 없잖아요.”
“…….”
“같이 밤새웠다고 상사가 업무를 줄여주는 것도 아니고요.”
도훈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알겠어요.”
그가 그윽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오늘은 적당히 할게요.”
하지만 그의 말은 머지않아 곧…… 거짓말이 되어버렸다.
***
강남에 위치한 호텔 라운지 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이곳은 연예인들이 많이 찾기로도 소문난 곳이었다.
은은한 주홍빛을 머금은 샹들리에 아래, 가녀린 실루엣을 가진 한 여자가 앉아있었다. 바 테이블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여자는 바로 세아였다.
세아의 앞에 놓인 위스키는 제법 많이 비었고, 새하얀 볼은 붉어져 있었다. 쓰디쓴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켠 그녀는 며칠 전 도훈이 자신에게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민세아 씨. 왜 화이트데이에 그 여자는 같은 여자 동료의 책상 위에 꽃을 올려놓았을까요?’
그는 다정에게 꽃바구니를 준 사람을 자신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아니, 그의 눈빛은 이미 확신에 차있었다.
“젠장…….”
세아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의 말대로 화이트데이 때, 다정의 책상 위에 꽃바구니를 올려놓은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세아는 화이트데이를 며칠 앞둔 회식 날, 도훈과 현우 그리고 다정이 다투는 모습을 목격했다. 두 사람은 서로 믿음이 흔들리고, 마음이 불안한 상태였다. 어쩌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살짝 갈라진 틈을 파고들어, 두 사람 사이를 완벽하게 갈라야만 했다.
그래서 세아는 마치 현우가 준 것처럼 보이도록, 꽃바구니를 배달시켰다.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의 골이 더욱 깊어지길 바랐다. 그녀의 예상대로 도훈과 다정은 화이트데이 이후로 분위기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둘이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데…….
‘그렇게 구차한 방법을 써가면서까지 날 갖고 싶었던 겁니까?’
‘아니면 그저 한다정 씨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즐기고 싶었던 겁니까?’
이유는 둘 다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도훈을 갖고 싶었고, 다정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난 그저 탐이 나는 남자를 가지려고 노력했을 뿐인데, 왜 그는 나를 책망하듯이 말했을까.’
세아는 제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냉기 도는 도훈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을 뿐이었다.
‘만약 민세아 씨가 이 일에 관련이 있다면, 다시는 내 눈 앞에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치워버렸을 테니까.’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의 차가운 눈빛과 서늘한 목소리를 생각하면, 아직도 식은땀이 절로 맺혔다.
‘팀장님이 그렇게 심하게 말하는 건 처음 봤어.’
그 말뜻은 결국 자신에게 얼씬거리지 말라는 경고와도 같았다.
또한 그녀에게 일말의 감정도 없다는 뜻이기도 했고.
울컥한 세아가 술잔을 거칠게 잡아 들이켰다. 독한 향이 식도를 타고 온몸으로 알싸하게 퍼졌다.
“대체 이유가 뭐냐고.”
세아는 분하다는 듯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한다정에게는 넘어가놓고, 나에겐 죽어도 안 넘어오는 이유가.”
세아는 다정을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처럼 예쁘지도 않았고, 자신처럼 날씬하지도 않았고, 가정 형편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그녀는 너무도 밝고 태연했다. 별 볼 일 없는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며 살았고, 아무리 힘든 상황이 찾아와도 늘 침착하고 담담하게 일을 처리했다.
자신은 남자들에게만 인기가 있는 반면에, 그녀는 주위 사람들과 두루두루 어울리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정을 아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녀에게 호감을 표했다.
대학 시절 한번은 다정이 살짝 호감을 갖고 있는 듯해 보였던 남자를 일부러 자신이 낚아챈 적이 있었다. 다정의 앞에서 그를 자신의 애인이라고 소개했을 때, 세아는 그녀가 조금은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늘 그랬듯이 담담한 모습으로 연애를 축하해주었다.
세아는 분했다. 한결같은 그녀의 모습이 싫었다.
자신은 많은 것을 가졌어도 불행한데, 저에 비하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그녀가 행복해하는 게 싫었다.
‘어디 언제까지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
세아는 작전을 바꿔, 다정에게 먼저 진심 어린 모습을 보여주며 그녀의 마음을 얻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믿음이 최고치로 올랐을 때, 현우와 자신의 관계를 보여주며 그녀를 배반했다.
그 결과, 그녀는 무너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소리쳤다. 그때 느꼈던 희열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짜릿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정이 현우보다 훨씬 능력도 좋고 인물도 좋은 도훈과 사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훈은 너무도 완벽한 데다가,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기로 소문난 냉철남이라 차마 건드릴 생각도 못 했던 남자였다.
그런 남자를 다정이 가지다니…….
도저히 납득할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세아는 현우를 헌신짝 버리듯 떠났고, 도훈을 목표로 삼았다. 현우에 이어 도훈까지 자신이 빼앗아간다면 다정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그 통쾌한 순간을 꿈꾸며 계속해서 도훈에게 작업을 걸었지만, 결과는 처참하기만 했다.
‘짜증 나. 결국 한다정 때문에 둘 다 놓친 꼴이 되었잖아!’
지도훈과 서현우.
사내에서 가장 멋진 두 남자를 이제 가질 수 없다는 것에 세아는 울분을 토했다. 하다못해 현우만 잘 붙들고 있었어도, 이토록 원통하진 않았을 것이다.
도훈과 현우 때문에 눈만 높아져, 이제 웬만한 남자는 그녀의 마음에 차지도 않았다. 그 둘을 대신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는 생각이 들며, 머릿속이 후회로 물들었다.
헛헛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그녀가 술잔에 위스키를 따르려던 그 순간이었다. 위스키를 든 세아의 손이 누군가에게 잡혔다. 세아는 제 손 위에 올린 커다란 손을 바라보다, 고개를 올렸다. 그녀의 앞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서있었다.
“이렇게 독한 술을 빨리 마시면, 내일 아침에 후회할 겁니다.”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에 세아의 귓바퀴가 쫑긋 섰다. 큰 키에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는 그 누가 봐도 잘생긴 외모를 갖고 있었다. 세아의 가늘게 뜬 눈이 남자를 빠르게 스캔했다.
말끔하게 넘긴 머리카락과 고급스러운 질감의 슈트.
일반인은 구경도 하기 힘들다는 시계와 명품 중의 명품이라 불리는 브랜드의 구두.
잘 다듬은 손톱과 고생이라곤 눈곱만큼도 몰랐을 것 같은 매끈한 피부.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티가 흐르다 못해 넘치는 남자였다.
그가 여유 있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일행이 없다면 옆에 앉아도 될까요?”
이게 웬 떡이야?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세아는 새침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옆으로 앉자 은은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 향기조차 고급스러움이 물씬 묻어나왔다.
옆에 앉은 남자가 강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성분은 처음 뵈었습니다. 성함과 연락처를 알려줄 수 있을까요?”
‘어머. 남자답기도 하지.’
세아는 적극적인 그의 모습에 가슴이 설레었다.
“저는 민세아라고 해요. 그쪽이 싫은 건 아니지만…… 처음 보는 분에게 연락처를 줘도 될지 고민스럽네요.”
그녀가 살짝 튕기듯이 말하자, 남자는 옅게 입매를 올렸다. 그가 재킷 안에서 명함을 꺼내었다.
“저는 차성욱이라고 합니다.”
그가 젠틀한 미소를 덧붙이며 말했다.
“부담스럽다면 연락처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됩니다. 제 연락처는 여기 적혀있으니, 세아 씨가 편할 때 연락주세요.”
세아는 그가 준 명함을 바라보았다.
[삼진 그룹 대표이사 - 차성욱 ]
삼진 그룹?! 그것도 대표이사?!
세아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대표이사직을 맡았다는 건, 삼진 그룹 일가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과 같았다. 삼진 그룹은 한신 건설처럼 큰 기업은 아니지만, 식품 및 외식 사업을 중심으로 최근 무섭게 성장해가고 있는 회사였다.
·
세아는 불과 몇 분 전 현우와 도훈을 놓치고 후회한 자신이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이 남자는 도훈과 현우와는 스케일이 달랐다. 그 두 사람과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남자였다.
세아는 명함을 매만지며, 입술 끝을 살며시 올렸다.
잘나가다가도 늘 마지막에 미끄러지는 인생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을 빛내줄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이 남자만큼은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세아는 그에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
햇살이 눈부시던 어느 주말 오후.
다정의 집은 그토록 고대하던 손님의 방문에 종일 떠들썩했다. 바로 도훈이 집에 찾아온 것이었다.
다정이 다시 도훈과 사귀게 된 것을 안 가족들은 집에 한번 데리고 오라며 노래를 불렀다. 그것을 눈치챈 도훈은 주말에 집에 찾아가겠다고 말했고, 다정의 가족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어서 와요, 도훈 씨~”
“어서 오세요, 팀장님~ 너무 오랜만에 뵈어요~”
현관 앞에서 마치 이산가족을 만난 것처럼 반기는 가족들에게 도훈은 반듯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려 죄송합니다. 그간 잘 지내셨죠?”
“우리야 잘 지냈는데…… 도훈 씨는 못 본 사이 얼굴이 반쪽이 되었네!”
봉해는 그의 얼굴을 살피더니, 속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의 말에 옆에 있던 다정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팀장님이 살 빠졌다고?’
엄마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또 얼굴선이 더 날렵해진 것 같기도 했다. 다정은 속으로 생각했다.
‘혹시 요즘 나 때문에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도훈과 다시 본격적으로 사귄 이후로 둘은 하루도 빠짐없이 뜨거운 밤을 보냈다. 도훈과 몸을 섞을 때마다 그는 마치 그날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열정적으로 임했다.
다정은 그토록 격렬한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다가 도훈의 몸이 상하는 건 아닐까 하는 작은 우려심이 밀려왔다. 그녀가 걱정 안 해도 될 일을 걱정하는 사이, 봉해가 도훈에게 받은 과일바구니를 보며 말했다.
“뭘 이런 걸 다 사왔어요.”
“별 거 아닙니다. 과일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고마워요. 다음번엔 이런 거 안 사와도 되니, 부담 갖지 말고 와요. 배고프죠? 얼른 밥부터 먹어요.”
도훈은 봉해의 안내에 따라 부엌 쪽으로 향했다. 부엌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놓인 탁자 위에는 빈곳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음식이 가득 차있었다.
상다리가 휘어질 것 같은 상차림에 도훈은 물론 다정도 놀라 입이 벌어졌다. 자리에 앉은 길순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대통령이 와도 이렇게는 안 차릴 거여. 자네 온다고 어멈이 새벽부터 준비했다우. 많이 먹게.”
***
거실 한가운데 커다란 상을 두고, 도훈과 다정의 가족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봉해는 먹기 좋게 자른 과일을 상 위에 올려놓았다. 점심 내내 말 한 마디 않고 음식을 집어 먹던 애정과 소정은 소화가 안 되는 듯 배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가족들이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며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이었다. 평소와 달리 조용했던 애정과 소정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
“?”
“그날은…… 정말 죄송했어요.”
소정은 도훈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며 말했다.
“그때 제가 너무 욱한 나머지 팀장님께 너무 심한 말을 했어요. 많이 기분 나쁘셨죠? 정말 죄송해요.”
그녀는 지난번에, 도훈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사정없이 내뱉었던 사건을 사과하고 있었다. 주인의 집을 난장판으로 해놓고 꼬리를 내리는 강아지처럼, 소정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옆에 있던 애정도 미안한 얼굴로 대화를 거들었다.
“언니인 제가 적극적으로 말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해요. 저희 둘 모두 팀장님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줄로 오해하고 있었거든요. 이유가 어찌 되었든, 그렇게 심한 행동을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정말 죄송해요.”
소정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애정을 달래듯 도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그런 오해가 있었다면, 저라도 가만 안 뒀을 겁니다. 이미 지난 일이니 너무 개의치 마세요.”
“하지만…….”
“오히려 그때 화내시는 거 보고, 다정 씨에게 정말 잘해야겠다 하고 정신이 번쩍 들던데요.”
도훈은 그녀들을 향해 나긋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하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모습에 두 자매의 눈동자가 감격으로 젖어들었다.
“우리 다정이가 진짜 복이 많네요. 어떻게 이렇게 좋은 남자를 물어……. 아니, 데리고 왔는지 모르겠어요.
“아닙니다. 다정 씨 같은 여자를 곁에 둔 제가 복이 많은 거죠.”
어쩜 말도 저렇게 다정다감하게 할까…….
그를 지켜보는 다정의 눈에 하트가 넘쳐흘렀다. 언니들의 말대로, 어떻게 자신이 이렇게 멋진 남자를 만나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둘 다 이렇게 잘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우리 다정이가 팀장님이랑 헤어지고 매일 저기압이었거든요.”
소정의 말에 도훈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
“그랬습니까?”
“네. 아주 세상 끝난 것 같은 얼굴로 골골거리기에, 저러다 상사병으로 앓아눕는 건 아닌가 싶었다니까요.”
그 순간, 다정이 얼굴이 새빨개지며 끼어들었다.
“내…… 내가 언제 그랬다고?!”
“부끄러워할 거 없어. 네가 밤마다 우리 몰래 방 안에서 훌쩍이던 건 말 안 할게.”
“지금 했잖아!”
두 자매가 잠시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며 식구들이 웃었다. 분위기가 진정되자 애정이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다정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너와 팀장님을 갈라놓으려고 했던, 그 문제의 인물에 대해서는 걱정 안 해도 된단다.”
“응?”
“언니들이 다 알아서 처리해줄 테니까, 넌 팀장님과 행복하게 지내면 돼.”
대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다정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애정의 눈빛이 살벌하게 바뀌며, 입에선 기괴한 목소리가 흘렀다.
“우리 동생 눈에 눈물 나게 했으면, 그 여자 눈에선 피눈물 흐르게 만들어줘야지. 그것도 아주 철철.”
저승사자도 울고 갈 만큼 섬뜩한 그녀의 눈빛에 다정은 불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하지만 세아에게 하도 많이 덴 덕에 그녀를 걱정할 마음까지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때, 한쪽에 앉아 사과를 먹고 있던 길순이 포크를 내려놓고 말했다.
“이보쇼. 팀장님.”
그녀의 부름에 곧장 자세를 고치고, 길순 쪽으로 몸을 돌리는 도훈.
“내가 곧 생일인데 말이여. 선물 하나만 줄 수 있는가?”
“네. 뭐든지 말씀하시죠.”
“내가 팀장님께 바라는 건 고저 딱 하나여.”
길순은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자네 같은 증손자를 보는 것이 내 죽기 전 소원이여!”
그녀의 말에 다정은 머리가 띵 울렸다. 역시나 할머니 길순은 막강했다.
오늘은 웬일로 결혼 이야기를 안 하나 했더니, 밑도 끝도 없이 손자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한 번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선 마음이 더 급해진 모양이었다. 슬쩍 도훈의 눈치를 보던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길순을 말렸다.
“하…… 할머니도 참!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무슨 말이라니, 이것이 참말로 내 죽기 전의 소원이랑께?”
본보기로 핵폭탄급 발언을 날린 할머니의 뒤를 잇달아 손녀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래, 다정아. 할머니 소원이시라는데, 얼른 이루어드려야지?”
“요즘 만날 늦게 들어오는 거 보면 머지않아 이룰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언니들의 이야기에 다정은 귀까지 빨개졌다.
“어…… 언니들!”
그 후로도 계속 놀려대는 언니들의 말에 다정은 도훈에게 도움을 청했다.
“팀장님도 가만히 있지 말고, 언니들 좀 말려봐요. 내 말은 안 듣는단 말이에요.”
“하하.”
하지만 도훈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도와주기는커녕 마치 이 상황을 즐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문득 다정은 도훈뿐만 아니라, 엄마와 할머니, 언니들 모두 얼굴에 미소가 떠나질 않고 있는 것을 알았다.
도훈과 헤어진 후, 집안 분위기는 늘 가라앉아 있었다. 삭막했던 집 안에 이토록 웃음꽃이 넘쳐흐른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다정은 가족들이 웃는 모습에 제 가슴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결국엔 다정도 그들을 따라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한신 건설 2층에는 널찍한 규모의 카페테리아가 마련되어 있었다.
다정은 점심을 먹은 후, 그곳에서 팀원들과 함께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둥그런 테이블에 모여 앉아 수다를 떠는 팀원들. 오늘의 대화는 상사 뒷담화, 연예인 찌라시, 어젯밤 드라마 내용으로 이어지다가 결국엔 남자 이야기로 주제가 넘어갔다.
“수아 씨. 주말에 소개팅 했다면서? 어땠어?”
“그냥 그랬어요.”
“왜? 삼송 다니는 남자라고 좋아할 때는 언제고? 나이도 젊다면서?”
“나이가 20대 후반이면 뭐 해요? 얼굴이 40대 후반인데.”
주말에 소개팅을 했다는 팀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벌써 머리가 반쯤 벗어지고, 배는 우리 아빠보다 더 나온 것 같았어요.”
“그…… 그래?”
“네. 직장이 좋고 집안도 좋다니까 참고 만나볼까도 싶었는데…….”
“그랬는데?”
“웃을 때마다 보이는 누런 이 때문에 도저히 만날 수가 없겠어요.”
그녀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휴~ 매번 외모가 괜찮다 싶으면 능력이 꽝이고, 직업이 괜찮다 싶으면 얼굴이 꽝이니…….이러다 저 시집 못 갈 것 같아요, 주임님”
그녀의 맞은편에 있는 윤 주임이 냉정하게 말했다.
“수아 씨. 세상에 완벽한 남자가 어디 있어? 모든 걸 가질 수는 없으니, 한 가지는 포기해야지.”
한쪽에서 그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다정.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세상에 완벽한 남자도 있는데……. 바로…….’
그녀는 흘깃 시선을 돌려 테라스 쪽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기획팀 남자 사원들 몇 명이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한 남자가 있다.
몸에 살짝 피트 되는 슈트를 입고, 마치 커피 CF를 찍듯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남자. 바로 자신의 상사이자 애인인 도훈이었다.
윤 주임은 완벽한 남자를 만나는 건 힘들다고 했지만, 다정에겐 이미 그런 남자가 있었다.
도훈은 외모, 키, 몸매 중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완벽할 뿐더러, 젊은 나이에 대기업 팀장 자리를 꿰찰 만큼 능력도 갖추었다. 게다가 밤에는 능력치가 더욱더 높아지니,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남자였다.
다정은 그런 남자가 자신의 애인이라는 게 새삼 믿기지 않았다. 전생에 나라를 구해도 수십 번은 구한 게 분명했다.
그녀가 흐뭇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도중이었다.
“저기 저 남자 완전 멋지다.”
“어머, 정말. 어느 부서일까?”
바로 옆 테이블에 앉은 여직원 두 명의 대화가 귓가에 들려왔다. 여자들의 얼굴이 앳되고 낯선 것을 보니, 아마 다른 팀에 새로 들어온 직원인 듯했다.
한신 그룹 한 달이면 도훈의 프로필을 꿰찬다는 말도 있듯이, 기존의 여사원들이라면 도훈의 얼굴을 모를 리가 없었다.
신입사원들은 얼굴이 발그레해진 채로 도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정은 괜스레 으쓱해진 기분도 들었다.
‘우리 팀장님 외모가 좀 대단하긴 하지. 나도 처음 봤을 때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으니까.’
그녀들의 반응을 십분 이해한다는 듯이 다정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여유로운 미소는 그녀들의 다음 대화를 듣고선 싹 사라졌다.
“우리 저 사람 옆 테이블에 앉아볼까?”
“그럴까?”
“그래. 옆에서 은근슬쩍 말도 걸어보자. 혹시 알아? 우리 둘 중 한 명에게 관심을 보일지?”
‘뭐? 이것들이!’
다정의 미간이 구겨지며, 손에 들고 있던 음료 캔이 찌그러졌다. 바로 뒤에서 불꽃이 튀는지도 모른 채 두 신입사원은 로맨틱한 사내연애를 꿈꾸며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녀들은 커피 잔을 들고 도훈이 있는 테이블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들이 도훈에게 조금씩 다가갈수록 다정은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그녀들이 도훈의 옆자리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도훈에게 말을 걸려고 상체를 돌리는 그 순간이었다.
“?!”
골대로 들어가려는 공을 향해 골키퍼가 몸을 던지듯이, 어느샌가 날아온 다정이 잽싸게 도훈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기, 팀장님.”
“?”
순간이동을 의심케 할 만큼 갑작스러운 등장에 도훈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팀원들도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정의 이마에 작게 식은땀이 맺혔다. 이 난감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그녀가 말했다.
“홍콩 리조트 시공 건으로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아……. 여기선 좀 그렇고, 팀장실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보는 이들이 오해하지 않게 다정은 최대한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다행히 팀원들은 그녀의 행동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럼 그렇게 하죠.”
도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다정은 결국 도훈에게 말 한마디 못 건넨 두 신입사원을 한번 바라본 뒤, 그의 뒤를 쪼르르 쫓아갔다.
***
팀장실로 들어온 도훈이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물었다.
“할 이야기가 뭔데요?
“아, 그게…….”
다정은 난감한 얼굴이었다. 뛰어난 순발력을 발휘하여 그를 신입사원들에게서 벗어나게는 했다만,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는 미처 생각을 못 했다. 딱히 변명을 떠올리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홍콩 리조트 시공이 무사히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려고요.”
그녀의 말에 눈매가 가늘어지는 도훈.
“그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겁니까?”
“아니요. 사실은…….”
뽀송뽀송한 신입 여사원들의 유혹을 피해, 이곳으로 데려왔다고 솔직히 말할까?
아니야. 그건 너무 없어 보여!
짧은 순간에 수없이 많은 갈등을 한 다정은 결국 가장 좋은 대답을 선택했다.
“팀장님이랑 단둘이 있고 싶어서 부른 거예요.”
그녀는 없는 애교를 최대한 끌어 모아, 귀엽게 미소 지어보았다. 애교가 제대로 먹혔는지, 도훈의 입가가 살며시 올라갔다. 그가 입매를 위쪽으로 늘어뜨리며, 다정에게로 다가왔다.
“단둘이서 뭐 하려고요?”
도훈은 순식간에 그녀의 바로 앞에 마주 섰다. 딱 한 뼘 거리로 다가온 그의 얼굴에 다정의 몸이 긴장감에 뻣뻣해졌다.
“그, 글쎄요. 할 수 있는 일이야 많죠.”
계획에도 없던 애교를 부렸더니, 뒷수습이 전혀 안 되었다. 노골적으로 빤히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아찔해지려는 순간, 그가 말했다.
“한다정 씨. 여기 회사입니다.”
순간적으로 굵어진 음성에 다정은 그가 화난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제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는 도훈의 손길에 짧은 우려는 그대로 끝이 났다. 그의 열띤 눈빛에 다정의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이런 데서 날 유혹하면 어쩌자는 겁니까?”
다가온 그의 입술에서 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겁도 없이.”
이윽고 다정이 피할 새도 없이 그의 입술이 덮쳐왔다. 작고 탐스러운 입술을 머금고 빨아들이다가, 벌어진 틈새로 부드럽게 혀가 밀려들어갔다. 뜨겁고 말랑한 감촉이 그녀의 혀끝부터 입 안 깊숙한 곳까지 자극했다.
점점 더 격렬해지는 키스에 머릿속이 아득해져갔다. 몽롱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은 다정이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말했다.
“팀장님. 누가 보면……!”
그녀의 뒷말은 끝을 맺지 못하고 입 속으로 잠겼다. 다시 도훈이 그녀의 입술 안을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때론 부드럽게, 때론 강렬하게 그녀의 입술과 혀를 탐닉했다.
오후 햇살처럼 나른하면서도 뜨거운 그의 키스에 취하며 다정도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 후로 한참 동안 사무실 안은 열기로 가득 차올랐다.
***
어떤 상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회사의 회식 문화도 달라진다.
어떤 회사는 술은 본인이 알아서 마실 만큼 마시는 곳도 있고, 1차로 밥만 먹고 깔끔하게 회식을 끝내는 곳도 있다. 또 어떤 회사는 건전한 회식 문화를 위해 술집 대신 뮤지컬이나 연극 관람을 지향하는 곳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술의, 술에 의한, 술을 위한 삶을 사는 부문장을 상사로 둔 탓에 기획팀은 회식이 잡힌 날은 물보다 숙취 해소 음료를 더 많이 마셨다.
어느 장소에서 어느 음식을 먹든 술이 따라왔고, 그 어떤 사원도 부문장이 건네는 술을 피할 수 없었다. 말로는 힘들면 마시지 말라고 하면서, 정작 안 마시면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기 때문이었다. 회식을 할 바에 야근을 하겠다는 팀원들이 속출하기도 했다.
부문장이 평소에는 관심도 없었던 팀원의 생일을 핑계 삼아, 회식을 잡은 어느 날.
하필 부문장과 같은 테이블에 앉는 바람에 과음을 한 다정이 괴로운 얼굴로 화장실 안에 있었다. 다정은 불편한 속을 게우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포기하고 변기 커버를 내렸다.
그녀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문 밖에서 세면대 물이 뚝 끊기는 소리와 함께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요즘 팀장님 말이야. 더 멋있어지는 것 같지 않아?”
‘팀장님’이라는 말에 다정이 움찔하며, 손잡이를 돌리려던 손을 멈추었다. 귀를 긁는 듯한 하이톤 목소리의 주인공은 같은 팀 채영이 분명했다. 그녀는 과거 다정과 비품실 심부름 문제로 다툰 후로 아직도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그녀의 말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팀장님 잘생긴 게 하루 이틀인가.”
“외모는 둘째 치고, 인상이 전보다 부드러워지고, 옷차림도 더 세련된 것 같아.”
“흠……. 그러고 보니, 요즘 별말 아닌 이야기에도 웃어주긴 했어.”
팀장님 인상이 그토록 바뀌었나? 남들 눈에도 확연히 띌 만큼?
같은 팀 여직원들의 수다를 우연히 듣게 된 다정은 아는 척도, 모르는 척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 왔다. 그녀들의 이야기 주제가 바로 도훈이기 때문이었다.
“팀장님 같은 남자가 애인이면 얼마나 좋을까.”
“당연히 좋겠지. 얼굴, 몸매, 능력 모두 갖춘 남자가 어디 흔하니?”
“그럼 내가 한번 도전해볼까?”
채영의 말에 흠칫 놀라는 다정. 곁에 있던 여직원도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뭐?”
“지금 팀장님 옆자리 공석이잖아.”
“야, 그래도 다정 씨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뭐 어때? 오히려 딴 여자가 채가기 전에 얼른 잡아야지.”
뭣?!
다정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당장 문을 부수고 뛰쳐나가 한마디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다. 채영은 아무 거리낌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팀장님이 다가가기엔 벽이 너무 높아 보여서 다들 도전을 못 한 거잖아. 한다정한테 넘어간 거 보면, 딱히 눈이 높은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하긴……. 그 도도한 팀장님이 다정 씨랑 사귈 줄은 아무도 예상 못 했지.”
채영의 말에 옆의 여직원도 금세 설득 당한 눈치였다.
“한다정도 꼬셨는데, 우리라고 못 할 게 뭐 있어?”
자신감 넘치는 채영의 말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화장실을 떠났다. 그제야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온 다정. 세면대 근처는 그녀들의 진한 향수 냄새가 노골적으로 풍겨댔다.
다정은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로, 흐르는 물에 손을 씻었다. 방금 채영이 했던 말이 그녀의 귓가에 남아 떠나질 못했다.
‘한다정도 꼬셨는데, 우리라고 못 할 게 뭐 있어?’
다정은 뒤늦게 살짝 후회가 밀려왔다.
‘괜히 비밀로 연애하자고 했나?’
***
고깃집에서 회식이 끝난 후, 술이 얼큰하게 취한 부문장은 팀원들을 데리고 근처 노래방으로 향했다. 팀원들은 제일 큰 룸으로 자리 잡았다. 분위기 좀 띄워보라는 부문장의 강요 아닌 강요에 신입사원들은 돌아가며 재롱잔치를 벌였다.
모두들 신입사원들의 춤과 노래에 박수를 치며 열광하는 사이, 다정은 홀로 즐기지 못했다. 그녀의 온 신경은 넓은 테이블을 두고 맞은편 자리에 앉은 도훈에게로 향했다. 도훈의 옆자리에는 아니나 다를까, 채영이 앉아있었다. 다른 옆자리에도 여자 팀원이, 그 옆자리에도 여자 팀원이……. 도훈은 여자라는 바다에 둘러싸인 섬처럼 앉아있었다.
여자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하얗게 뜰 정도로 파우더 칠을 하고, 입술을 짙게 바르고 있었다. 그리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슬쩍 도훈에게 말을 걸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맞은편 자리에서 바라보고 있는 다정은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주먹을 쥐었다.
세아가 물러난 이후로는 평화로운 나날이 지속될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사내에는 세아 말고도 도훈을 노리는 여자가 수없이 많았던 것이다.
속이 타는 심정에 맥주잔을 단박에 들이켜자, 옆에 있던 춘희가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다정 씨 오늘 술 좀 받나 본데? 멋지다!”
그녀는 다정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 잔을 또 한 번 거침없이 들이켜며, 다정은 유리컵 뒤로 보이는 도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푹신한 의자에 등을 기대앉은 그는 여자 팀원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왠지 여유가 넘쳐 보이는 그의 모습에 다정의 눈이 활활 불타올랐다.
‘팀장님은 뭐 하고 있는 거야? 왜 다 받아주는 건데?’
팀장으로서 팀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다정은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의 주위를 둘러싼 여자들의 눈빛이 흑심으로 가득해 보였다.
‘뭐 어때? 오히려 딴 여자가 채가기 전에 얼른 잡아야지.’
바로 몇 분 전, 화장실에서 들은 대화만 아니었다면 그녀도 이토록 마음이 답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정이 속 타는 가슴을 식히려고 차가운 맥주를 삼켜대던 그 순간이었다.
신입사원들 틈에서 육중한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철 지난 춤을 추던 한 대리가 다정에게로 불쑥 마이크를 넘겼다.
“자. 이번엔 우리 다정 씨 노래 좀 들어보자고!”
“네? 아, 아니. 저는 잘 못 불러요.”
다정이 당황하며 양손을 세차게 저었다.
“에이, 그러지 말고~ 다정 씨 노래 잘 부르는 거 다 아는데!”
자신도 몰랐던 사실을 그가 안다니 할 말이 없어졌다. 그는 흥이 한껏 달아올라 다정을 부추겼다.
“자, 그만 빼고 얼른 나와 봐~”
한 대리가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무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다정은 마지못해 그가 준 마이크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뭘 부르지……?’
최근 유행하는 걸 그룹 노래를 부르려니 아는 노래도 없고, 앞서 부른 신입사원들과 비교만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철 지난 댄스곡을 부르려니, 지겹다고 한 소리를 듣거나 노땅 소리를 들을까 봐 무서웠다.
신입사원들이 힘들게 올려놓은 분위기를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고심하던 찰나였다. 가장 앞자리에 앉아있던 남직원이 벌떡 일어나며 다정에게로 다가왔다.
“선배님. 혼자 하기 힘드시면, 저랑 같이 불러요.”
말끔한 외모와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그는 언변이 뛰어나고, 붙임성이 좋기로 소문난 신입사원 서준이었다. 몇 분 전 시원시원한 가창력과 재치 있는 춤사위로 무대를 장악해놓고도, 아직도 더 놀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런 사람이 함께 노래를 불러주면 부담감이 덜하겠다는 생각에, 다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같이 불러요, 서준 씨.”
“부르고 싶은 노래 있으세요? 어떤 노래든 맞춰드릴게요.”
자신감 넘치는 그의 말에 다정은 백만 대군을 얻은 것처럼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녀가 말했다.
“글쎄. 난 요즘 노래는 잘 모르는데……. 추천해줄 노래 있어요?”
“음……. <썸> 어때요?”
적당히 신나면서도 부르기 무난한 듀엣곡 같아 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미로운 전주가 흐르고, 다정과 서준은 자신이 불러야 할 타이밍을 맞추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도훈은 심기가 불편한 듯 미간을 좁혔다.
“요즘 따라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니꺼인 듯 니꺼 아닌 니꺼 같은 나~”
음악이 점점 클라이맥스로 향할수록, 주고받는 둘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며 룸 안을 가득 채웠다. 음악적 감각이 뛰어난 서준이 그녀의 흔들리는 음정까지 잘 받쳐주는 덕에, 둘의 노래는 듣는 이에게도 굉장히 달콤하게 들려왔다.
“두 사람 은근히 잘 어울리지 않아?”
“그러게. 혹시 이미 썸타고 있는 거 아니야? 후훗.”
멀리 앉은 팀원의 수다를 귀신같이 들은 도훈. 그의 낯빛이 점점 굳어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다정은 박자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바빴다. 도훈의 미간에 더욱 깊게 주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
“으……. 속 쓰려.”
화장실에서 나온 다정이 윗배를 어루만졌다. 차디찬 맥주를 쉼 없이 들이켜서일까. 노래방에 있는 내내 다정은 속이 더부룩해서 힘겨웠다.
그녀가 팀원들이 있는 룸으로 가려고 걸음을 옮길 때였다. 옆에서 갑자기 불쑥 손이 나와, 그녀의 팔을 끌어당겼다.
“?!”
강한 손힘에 속절없이 어디론가 향하게 된 다정. 그녀가 도착한 곳은 빈 룸이었다. 그녀가 룸 안에 들어오자마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다정은 눈을 껌뻑이며 앞을 보았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길쭉한 실루엣이 그녀에게로 바짝 다가왔다. 바로 도훈이었다.
“팀장님?”
다정이 커다래진 눈동자로 그의 얼굴을 살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방 안처럼 그의 눈빛에도 어둠이 잠식했다. 그의 위압적인 분위기에 다정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요?”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엔 불쾌감이 서려있었다. 다정이 대답했다.
“별로 안 마셨는데요.”
“내가 본 원 샷만 해도 일곱 잔이 넘는데, 그게 별로 안 마신 겁니까?”
따지듯이 묻는 그의 말에 다정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아니, 술 좀 마실 수도 있지. 그게 이렇게 사람을 붙잡고 인상 쓸 일인가? 게다가 내가 누구 때문에 술을 들이켰는데?’
다정은 퉁명스러운 어투로 맞대응했다.
“팀원들이랑 이야기하느라 바빠 보이던데, 그건 또 어떻게 보셨대요?”
그녀의 말에 도훈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거봐. 당신도 찔리지?’
다정은 질세라 이어 말했다.
“팀장님 자리 쪽만 하하호호, 아주 웃음꽃이 넘치던데요?”
“내가 언제 웃음꽃이 넘쳤습니까? 살기가 넘쳤으면 모를까.”
“제가 다 봤거든요? 아무리 우리가 비밀 연애라고 해도 그렇지, 왜 여직원들 행동을 다 받아주세요?”
다정은 술기운으로 살짝 충혈된 눈을 가늘게 뜨며 덧붙였다.
“말만 아니라 하고, 속으론 은근히 즐기시는 거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기가 차다는 듯 도훈이 반박했다.
“신입사원이랑 커플 듀엣곡 부른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어머. 그게 뭐가 문제라고요?”
“둘이 열댓 번을 불러본 듯 호흡이 척척 맞더군요. 퇴근 후에 둘이 노래방에서 연습이라도 합니까?”
“…….”
“그리고 노래만 부르면 되었지, 눈은 왜 자꾸 마주치는 거예요?”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는지, 도훈은 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나 참. 노래 제목도 기도 안 차서……. 썸? 그 신입이랑 썸타려고, 우리 연애를 비밀로 하잔 거였습니까?”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그의 공격에 다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신입사원과 노래 한 곡 부른 것이 도훈에게 이런 생각을 심어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다정은 언짢은 표정으로 인상을 쓰고 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뺨이 살굿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세상에……. 저 모습이 뭐라고, 귀여워 죽겠지?!’
이래서 콩깍지가 쓰이면 무섭다는 거였구나.
엉뚱한 일에 홀로 울컥해있는 그가 다정의 눈엔 못마땅해 보이기는커녕, 사랑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한때 여자팀원들 때문에 거북했던 감정이 한순간에 사르르 녹아내리기까지 했다.
다정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씰룩거리자, 도훈의 날카로운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그 표정은 뭡니까?”
“팀장님이 귀여워서요.”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내가 언제 귀여운 짓을 했다고…….”
따져 물으려던 도훈의 입술이 멈칫했다. 다정이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배시시 웃어댔기 때문이었다. 취기 때문에 더욱 붉어진 뺨을 한 채로 히죽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도훈의 심장이 뛰었다. 그 역시 콩깍지가 제대로 쓰인 모양이었다. 그의 눈동자에 그윽한 빛이 물결쳤다.
“반칙 쓰지 말아요.”
도훈은 그녀의 분홍빛 뺨을 감싸며 말했다.
“그런 표정을 지으면, 내가 어떻게 화를 내요.”
그는 다정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다가, 도톰한 입술로 손을 옮겼다.
방금까지만 해도 티격태격했던 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뜨거운 시선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제 표정이 어땠는데요?”
“지금 당장 쓰러뜨리고 싶은 표정이랄까.”
짙은 열기를 띤 그의 눈빛에 다정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설마…… 당장 쓰러뜨릴 생각은 아니죠?”
“설마.”
그가 나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녀와 입술을 맞물리면서, 방금 내뱉은 대답과는 모순된 행동을 보여주었다.
따뜻하고 촉촉한 혀가 입 안으로 부드럽게 밀려 들어왔다. 서로의 혀가 얽히고설키며 호흡이 가빠졌다. 그의 손이 다정의 가슴을 강하게 움켜쥐자,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려왔다.
“읏……. 팀장님.”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다정이 말했다.
“누가 보면 어떡해요?”
“여기서 누가 봅니까.”
그렇게 말하며 도훈은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살결을 부드럽게 머금자, 빨간 입술 자국이 새겨졌다. 야릇한 감촉에 다정이 몸을 떨며 말했다.
“……이따 회식 끝나고 하면 되잖아요.”
“그때까지 못 참아.”
열띤 음성이 그녀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다정의 심장이 속절없이 뛰었다.
사귀기 전만 해도 다정에게 그는 질서 있고, 절제력이 강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저런 남자는 연애를 해도 굉장히 무뚝뚝하고 차분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 다정의 큰 오산이었다.
도훈은 예상보다 인내심이 부족하고, 급격한 감정 변화를 보였다. 그저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다가도, 갑자기 눈빛이 뜨거워지다가 다정을 덮치곤 하는 그였다. 연애 초반에는 다 그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지만, 가끔은 정도가 지나친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입술을 부딪치는 그의 모습을 보면 말이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서 쇄골로 차츰 내려갔다. 옷 위로 가슴을 주무르던 손길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자극을 견디지 못한 정점이 곤두섰다. 다정의 입술에서 여린 신음이 흘렀다.
“하아…….”
아득해지는 감각에 다정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던 걱정들이 점차 사라졌다.
도훈의 손이 그녀의 다리를 매만지다, 치마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살결을 지분대는 손끝이 점점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서더니, 다정의 속옷에 닿았다. 축축한 촉감을 느낀 도훈이 입매를 올렸다.
“엄청 젖었네.”
“!”
“이 정도면 물도 떨어지겠는데.”
그의 노골적인 말에 다정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무슨……!”
다정은 대꾸가 불가능해졌다. 도훈의 손가락이 그녀의 젖은 속옷을 지분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굵은 손가락이 예민한 부위를 길게 쓸어내리기를 반복했다. 젖은 상태인 얇은 속옷 너머로 그가 전한 자극은 다정의 음부에 그대로 전해졌다.
“읏!”
온몸에 퍼지는 야릇한 감각에 다정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 순간 도훈의 손이 속옷을 옆으로 밀치며 맨살에 맞닿았다. 그는 잔뜩 흘러나온 애액을 윤활제로 삼아 다정의 꽃잎을 위아래로 어루만졌다. 그리고 한껏 예민해진 음핵을 지그시 누르자 다정이 곧바로 신음을 토했다.
“아앗!”
여기서 이러면 안 되는데.
머릿속의 생각과는 달리 몸은 그의 애무에 맞춰 들썩거리고 있었다. 도훈은 그녀의 뜨거워진 속살로 손을 밀어 넣었다. 내벽을 부드럽게 긁으며 그녀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건드렸다.
“으읏!”
다정은 자꾸만 흘러나오는 신음을 억누르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벽 너머로 팀원들의 노랫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누군가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긴장감과 밀폐된 공간이 주는 흥분감에 둘의 몸은 더욱 빠르게 달아올랐다.
도훈의 손 위로 애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제 손가락을 끊어먹을 것처럼 움켜쥐는 내부를 느끼며, 도훈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하.”
더는 견디기 힘들다는 듯 도훈이 바지 버클로 급히 손을 가져갔다. 버클을 내리자, 터질 것처럼 팽창된 그의 페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봐도 적응이 잘 되지 않는 크기와 굵기였다. 도훈은 그녀의 한쪽 다리를 손에 쥐고, 제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자신의 것을 밀어 넣으려던 그때였다.
달칵, 하고 손잡이 돌리는 소리와 함께 방 밖에서 속삭이듯 말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아이참. 누가 보면 어쩌려고.”
“아무도 안 온대도.”
몇 분 전 도훈과 다정이 나누었던 대화와 별다를 게 없는 말이었다. 인기척에 당황한 두 사람이 상황을 수습할 새도 없이, 문이 열렸다. 도훈과 다정이 그대로 굳은 채 문 쪽을 바라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녀는 바로 문을 닫고 기대서서 뜨거운 키스를 나누기 시작했다. 물론 같은 공간 안에 다정과 도훈이 함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채 말이었다.
고요한 방 안에 입술을 물고 빠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려 퍼졌다. 다정은 어둠 속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의 얼굴을 살폈다.
아뿔싸. 그들은 다름 아닌 기획팀 팀원이었다.
‘이 둘이 사귀고 있었던 거야?? 어쩜 그렇게 감쪽같이…….’
앞에선 솔로라 외롭다고 투덜대던 선배 여직원이 실상 신입사원과 뜨거운 관계였다는 것을 제 눈으로 확인한 다정은 입이 떡 벌어졌다.
이대로 숨을 수도, 아는 체도 할 수 없었던 도훈과 다정이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그 순간 애정행각을 벌이던 여직원이 소리쳤다.
“헉! 팀장님?!”
뒤늦게야 도훈을 발견한 두 커플은 사색이 되었다. 그리고 도훈 바로 뒤에 있는 다정을 보고선 눈을 가늘게 떴다.
“……다정 씨??”
지독하리만큼 어색한 정적이 네 사람을 뒤덮었다.
***
다음날 아침.
한신 건설 기획팀 사무실에 출근한 팀원들은 다정의 자리로 모여들었다.
“다정 씨. 팀장님이랑 다시 사귄다면서?”
그럼 그렇지…….
다정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다정은 노래방 빈 룸에서 도훈과 딱 달라붙어있는 모습을 같은 팀원에게 들키고 말았다. 하필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