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
“다정아. 잠깐만!”
신발장에서 구두를 신고 있던 다정이 고개를 돌렸다.
주방 쪽에서 그녀의 엄마 봉해가 뛰어오고 있었다. 숨이 차오르도록 뛰어온 그녀는 다정에게 텀블러를 주며 말했다.
“왜 아침을 안 먹고 가?”
“그냥. 입맛이 없어서요.”
“이거 미숫가루랑 우유 탄 거니까, 회사 가면서 마셔. 빈속으로 일하면 나중에 현기증 나.”
“괜찮은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꼭 먹어!”
“알겠어요. 고마워요.”
다정은 미숫가루가 든 텀블러를 커다란 숄더백에 넣었다. 그녀가 허리를 굽혀, 다시 구두에 달린 끈을 묶고 있는 동안 봉해가 물었다.
“팀장님보고 식사 하자고 이야기는 해봤니?”
“…….”
다정의 눈매가 가늘게 흔들렸다. 구두끈을 모두 맨 그녀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봉해를 향해 말했다.
“기다리지 말아요. 앞으로 팀장님 우리 집에 올 일 없어요.”
“아니? 왜? 우리가 너무 부담스럽대?”
문을 여는 그녀를 향해 봉해가 물었지만, 다정은 아무런 답도 주지 않고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봉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왜 저러지…….”
그러자 어느새 옆으로 온 소정이 빵 한 조각을 입에 문 채로 말했다.
“팀장님이랑 싸웠나 봐.”
“싸웠다고?”
“응. 워크숍 다녀온 이후로는 계속 저기압이던데?”
“그래? 둘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걱정하지 마, 엄마.”
봉해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자, 소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남녀관계가 다 똑같지, 뭐. 싸우다가 화해하고, 또 지지고 볶다가 화해하고 그러다가 정들어서 결혼하는 거야지, 뭐.”
***
“방금 공사 기간을 단축하자고 말했습니까?”
회의실 안에 울려 퍼지는 냉랭한 목소리에 팀원들의 상체가 동시에 움찔했다.
차가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오늘 회의 내내 미간이 구겨져있던 도훈이었다. 방금 안건을 제시한 남직원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했다.
“아니……. 완공 일정에 차질이 없게 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는 것 같아 말씀드린 겁니다.”
“1년 전, 해당 나라에서는 한국 건설 기업이 댐 건설 준공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공사 기간을 4개월 단축하는 과정에서 부실시공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공사 기간 중에 댐이 무너지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도훈은 더욱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 사건으로 수백 명이 사망했고 6700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도 공사 기간을 단축하자는 말이 쉽게 나옵니까?”
호랑이도 마주치면 도망갈 그의 매서운 눈빛에 남직원은 곧바로 제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다른 팀원들은 괜히 제게 불통이 튈까, 도훈의 시선을 회피하며 죄인처럼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도훈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안건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 마디도 못 하는군요. 말로 안 된다면 손으로라도 써야죠. 모두 오늘 퇴근 전까지 대안 보고서 제출하도록 해요.”
그렇게 말한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회의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회의실은 그가 나가고 난 후로도 1분 정도 고요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팀원들이 휴우- 하고 크게 숨을 내뱉었다.
그에게 혼난 남직원이 울상이 되어 말했다.
“팀장님 오늘 왜 이렇게 무서운 거예요? 저 바지 적실 뻔했어요.”
그는 아직도 도훈의 눈빛을 생각하면 오금이 저리는 듯 치를 떨었다.
“이거 원, 무서워서 함부로 안건도 못 내겠어.”
“전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 지은 기분이었어요.”
“팀장님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이렇게 분위기가 살벌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마디씩 내뱉던 팀원들의 시선이 문득 다정에게로 향했다.
“다정 씨. 팀장님 오늘 왜 저러시는 거야?”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주목하는 사이, 윤 주임이 다정에게 물었다.
“혹시 팀장님이랑 싸웠어?”
다정은 제 서류를 챙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글쎄요. 저도 모르겠는데요.”
“다정 씨가 모르면, 누가 알아? 한번 팀장님께…….”
“윤 주임님.”
다정이 서류를 챙기던 손짓을 멈추고, 윤 주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높낮이 없는 어투로 말했다.
“앞으로 저에게 팀장님 이야기 묻지 말아주세요.”
“…….”
그녀의 냉랭한 눈빛이 다른 팀원들에게도 향했다. 그 눈빛에 흠칫 놀라는 팀원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고요.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다정은 서류를 마저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먼저 나가볼게요.”
다정이 인사한 후 회의실을 나갈 때까지 팀원들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 눈치만 보았다.
회의실 문을 닫고, 복도를 걷는 다정. 회의실 안에서 팀원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도 어김없이 들려왔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듣지 않아도 뻔했다.
둘이 싸웠나 보다, 또는 둘이 헤어진 게 아니냐. 더 나아가 왜 헤어졌는지, 누가 잘못을 한 것인지 마치 자신들이 둘의 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흥분하여 이야기할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부로 도훈과 다정은 그들의 가장 훌륭한 안주거리가 되어, 시도 때도 없이 입 에 오르내릴 것이 분명했다.
다정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훈과 사귀기 시작할 때보다 더 큰 피곤함이 예상되었다.
[공개 사내 연애의 단점 : 사귈 때는 좋으나, 헤어진 후엔 누구 한 명이 회사를 나가지 않는 이상 지독한 불편함이 지속되리라.]
언젠가 잡지에서 보았던 글귀가 다정의 가슴에 사무쳤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
점심시간.
온종일 눈치를 받는 게 힘겨워진 다정은 구내식당에서 팀원들과 밥을 먹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회사 매점에서 빵을 사 와, 휴게실로 향했다.
모두가 점심을 먹으러 간 후인지라 휴게실에는 다정 혼자뿐이었다.
봉지를 뜯은 크림빵을 한 입 무는 다정. 평소 좋아하던 빵이었는데, 오늘은 무슨 맛인지 모를 정도로 퍽퍽하기만 했다.
그때 유리창으로 된 휴게실 칸막이를 누군가가 두드렸다. 다정이 고개를 돌려보니 칸막이 너머로 현우의 모습이 보였다. 휴게실 안으로 들어온 그는 편의점 봉지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저도 오늘 점심은 빵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다정 씨도 여기 있었군요.”
그는 다정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테이블에 빵과 음료를 꺼내었다.
현우의 얼굴을 보니, 다정은 안 그래도 답답했던 속이 더욱 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현우를 보면 자동으로 세아와 도훈도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늘진 다정의 얼굴을 보던 현우는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팀장님과는…… 결국 헤어진 건가요?”
다정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네.”
그녀의 대답에 현우의 낯빛 역시 씁쓸함으로 물들었다. 그는 잠시 주저하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많이…… 힘들죠?”
“…….”
“제가 경험해보니, 결국엔 시간이 약이더라고요. 시간이 지나면 결국엔 잊히게 되어있어요. 한때의 추억도, 지금의 상처도 모두 다요.”
다정은 말없이 고개를 작게 끄덕일 뿐이었다.
현우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
“연수원에서 제가 다정 씨에게 한 말은 진심이었어요.”
현우는 애틋한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했다.
“난 다정 씨를 좋아해요. 아주 오래전부터 지켜봤어요.”
그의 말에 다정의 눈망울이 크게 좌우로 흔들렸다. 그녀는 조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해가 가질 않네요. 현우 씨는 세아랑 사귀던 사이였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절 오랫동안 좋아했다는 말을 할 수 있죠?”
현우는 잠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연이 많아 보이는 눈빛이었다.
현우는 과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울컥해지는 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정 씨를 처음 본 순간부터 계속 호감을 갖고 있었어요. 다정 씨의 배려심 깊은 모습과 따뜻한 모습에 반해, 언젠가는 다정 씨에게 꼭 고백하리라 마음먹었죠. 하지만 다정 씨는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어 보였고, 저와 눈이 마주쳐도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고개를 돌렸던 건, 눈이 마주치면 부끄러워서였을 뿐이었는데.
다정은 과거 자신의 행동이 그에게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현우가 처음부터 자신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입으로 들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다정은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지만, 일단은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기로 했다.
“다정 씨의 마음을 어떻게 얻어야 하나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 세아 씨가 먼저 나에게 다가왔어요. 세아 씨는 말했죠. 다정 선배를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그리고 당신과 연결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이야기했어요.”
세상에!
다정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세아는 제게도 먼저 다가와 똑같은 말을 했었다.
현우를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세아 씨는 다정 씨와 많이 친해 보였기에, 절 도와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래서 전 세아 씨를 믿고, 많이 의지하게 되었죠.”
그의 말이 계속될수록 충격의 연속이었다. 너무도 어이가 없어 다정이 점점 넋이 나가려는 순간, 현우는 더 충격적인 말을 꺼내었다.
“하지만 고백할 계획을 함께 세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슬픈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어요. 바로 다정 씨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소식이었죠. 같은 회사 직원은 아니고, 가족 소개로 만났다고 하더군요.”
그의 말을 가만히 듣다 못한 다정이 흥분하며 끼어들었다.
“네? 전 그 당시 남자를 만난 적이 없어요. 왜 그런 거짓말을……!”
“그러니까요. 바보 같게도 전 세아 씨가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죠. 그리고 결국은 당신을 포기하기로 했고요. 그 후로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늘 제 곁에서 힘이 되어주었던 사람은 세아 씨뿐이었어요. 허전했던 제 마음은 세아 씨에게로 점점 향했고, 우리 둘은 사귀게 되었죠.”
“…….”
점입가경이었다. 다정은 충격적인 그의 이야기에 말을 잃었다.
세아가 못된 여자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토록 악랄하고 계획적으로 현우와 제 사이를 방해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녀의 낯빛을 살피던 현우는 다시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팀장님에게 고백하는 다정 씨를 보게 되었고, 거기서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죠. 세아 씨는 다정 씨에게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가 있다고 했었는데, 다정 씨는 팀장님께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다고 고백했어요. 팀장님을 처음 본 순간이면 시간상으로 2년 전인데 말이죠.”
“…….”
“세아 씨를 추궁하니, 그녀는 되레 제 마음이 식었다는 둥, 다정 씨에게 마음이 다시 돌아간 거 아니냐며 저를 몰아 세웠어요.
세아 씨와 계속 다툰 끝에 그녀가 절 속였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한 번 믿음이 깨진 상대와 계속 연애를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그리고 그녀 역시 이미 저에게서 마음이 떠나고, 다른 남자를 노리고 있더군요. 그 사람이 바로…… 팀장님이었어요.”
다정은 어처구니가 없어 허탈한 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동안 이해가 가지 않았던 현우와 세아의 행동들이 이제야 하나둘씩 납득이 되기 시작했다.
“뒤늦게 모든 것을 알아챈 후, 그녀에게 속아 다정 씨를 포기한 게 미치도록 후회되었어요. 이미 다른 남자의 연인이 된 당신을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답답하기만 했죠.”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현우가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하지만 팀장님이 세아 씨에게 넘어가버린 지금, 내가 주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
“이번만큼은 다정 씨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어떻게든 당신의 마음을 붙잡고 싶어요.”
현우의 진정성 있는 고백에도, 다정의 어두운 낯빛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2년 전의 자신이었다면, 이 고백에 어쩔 줄 몰랐을 것이었다. 어쩌면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눈물을 펑펑 쏟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도훈을 만나기 전의 이야기였다.
도훈을 만나고 난 이후로, 다정은 저 자신도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현우를 잊었다. 배신과 이별로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가 심장을 계속 두들겨댔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도훈의 존재가 제 마음속에 가장 크게 자리 잡았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그의 고백이 기쁘기보다는, 허망하고 씁쓸하기만 했다.
“현우 씨, 미안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 현우가 다정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내 말을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아요. 지금 당장 내 고백을 받아달라는 말은 아니니까요.”
“…….”
“다만…… 한다정 씨 주위엔 당신을 배신한 남자만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는 남자도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해요. 나의 존재가 다정 씨의 상처가 빨리 아무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끝까지 차분하게 제 이야기를 마친 현우는 편의점 봉투 안에서 무언가를 하나 더 꺼내었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할 텐데, 내가 더 힘들게 만든 건 아닌가 모르겠군요. 이거 마시면서 머리 식혀요.”
그가 다정에게 건넨 건 바로 음료수였다. 다정이 늘 자판기에서 뽑아 먹던 이온음료였다.
현우가 그동안 종종 자신에게 이 음료수만을 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을 다정은 오늘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다정이 음료를 받는 순간, 복도 쪽에서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바로 점심을 먹고 온 팀원들이 수다를 떠는 소리였다. 다정은 칸막이 너머로 팀원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휴게실을 지나치는 팀원들 사이에는 도훈도 있었다.
그는 휴게실에 있는 현우와 다정 쪽을 한 번 바라본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앞으로 나아갔다.
짧은 순간 마주친 그의 눈빛은 차갑고 무미건조했다. 그 냉랭한 눈빛이 가슴에 박힌 다정은 씁쓸함이 얼굴에 번졌다.
이렇게 쉽게 변해버릴 눈빛이었으면서, 한때는 왜 그렇게 따스하게 자신을 바라봤을까.
한때 자신을 향해 지었던 그의 미소가 떠오르자, 더욱 마음이 괴로워졌다.
멀어져가는 도훈의 뒷모습을 보며 다정은 바라고 또 바랐다.
현우의 말대로 시간이 약이기를.
하루 빨리 시간이 지나, 그를 마주쳐도 심장이 아프지 않은 날이 오기를.
***
그날 오후, 다정은 비품실에서 사무용품 목록을 체크하고 있었다.
팀원들이 서로 미루던 비품 목록 체크를 다정이 먼저 하겠다고 나섰다. 도훈이 있는 사무실에 있는 것보다 홀로 비품실에서 일하는 게 더 낫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홀로 묵묵히 목록을 체크하는 동안, 비품실 문이 끼익,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품실 한쪽 구석에 있던 다정이 고개를 돌렸다. 원치 않았던 방문객은 바로 세아였다.
그녀가 다정의 앞에 서며 말했다.
“도와줄까요?”
“네가 날 도와준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선배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세아는 도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한 가지만 물을게요. 팀장님이랑 헤어진 거 확실해요?”
너무도 당당한 세아의 질문에 다정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세아는 작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요. 나로선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니까요.”
다정의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다.
“재밌니?”
확 가라앉은 다정의 목소리가 비품실 안을 울렸다.
“온갖 거짓말로 사람 뒤통수 치고, 남의 남자 빼앗는 게 너는 재밌어?”
“…….”
“현우 씨에 이어 팀장님까지 빼앗고 나니, 이제야 좀 만족스럽니?”
세아는 냉담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러게 내가 미리 경고했잖아요.”
그 순간이었다.
“짝!!!”
커다란 마찰음이 울리며, 세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녀의 볼 한쪽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바로 다정이 그녀의 뺨을 세게 내리친 것이었다.
그녀는 처음 겪는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떨리는 손으로 제 볼을 부여잡았다. 여태껏 자신을 때린 사람은 부모, 스승을 포함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게 무슨…….”
“똑바로 들어.”
다정은 흐트러짐 없는 강인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지금은 네가 굉장히 대단한 사람 같고, 앞으로도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
그녀는 지독하리만큼 담담한 어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언젠가 네가 얼마나 잘못된 삶을 살았는지 후회하는 날이 올 거야. 후회가 들 때쯤이면 이미 늦었을 테지만 말이야.”
“……!”
“장담컨대, 그때 가서 아무리 후회해봤자, 지금 이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을 거야. 그때 네 곁에 머무는 사람이 있다고 한들, 진정한 네 편은 아무도 없을 테고 말이야.”
세아는 여전히 얼얼한 한쪽 뺨을 매만지며, 분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다정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또렷한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했다.
“이렇게 이야기해봤자, 넌 내 말이 우습게 들리겠지. 너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니까.”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이건 한때 너의 가장 친했던 동료로서, 선배로서, 같은 여자로서 내가 너에게 마지막으로 한 조언이야.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는 네 몫이야. 그리고…….”
똑 부러지게 말을 이어나가던 다정이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세아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아마도 또 맞을까 봐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바로 눈 앞에 다가선 다정은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
“너랑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야. 지금 이 순간부로 또다시 내 눈 앞에서 얼쩡거리면…….”
그녀의 온몸에서 퍼져 나오는 살벌한 기운에 세아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어 다정의 싸늘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땐 뺨 한 대로 안 끝날 줄 알아.”
그 한마디로 세아는 이미 온몸을 수십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질렀다.
다정은 계속되는 맹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는 그녀에게 비품실 체크 목록을 홱 넘겼다.
“나머진 네가 정리해서 와.”
그리고는 비품실을 떠나는 그녀였다.
뺨을 맞은 걸로 모자라, 얼떨결에 업무까지 떠맡은 세아는 그녀가 사라진 지 한참 후에야 정신이 돌아온 듯 파일을 바닥에 내던졌다.
“뭐야! 제까짓 게 뭔데 나를 때려? 제까짓 게 뭔데 나를 가르치려 드냐고!”
세아는 뒤늦게 찾아온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나쁜 년. 가만 안 둘 거야!”
한참 동안 다정의 욕을 해대던 그녀는 겨우 제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정이 했던 말을 되새겨보았다. 그녀의 살벌했던 표정과 말에 따르면, 도훈과 다정은 헤어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왜 갑자기 헤어진 거지? 팀장님은 나한테는 전혀 관심 없어 보였는데.”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둘이 헤어질 만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았다.
“혹시 그 일이 제대로 먹힌 걸까?”
세아는 연수원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도훈에게서 쫓겨나다시피 방에서 나온 그날 밤.
문 앞에 선 세아는 그에게 인사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그래요. 그럼.”
그는 마지막까지 세아에게 무심하게 대하며, 무뚝뚝함의 끝을 보여주었다.
그대로 떠나기가 아쉬워 망설이던 찰나, 그녀가 곁눈질을 하며 복도 끝 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고개만 살짝 내밀고 서 있는 여자는 바로 다정이 분명해 보였다.
‘뭐야. 우릴 지켜보고 있었어?’
그녀의 존재를 눈치챈 이상, 가만히 있을 세아가 아니었다.
예전에 현우와 자신이 껴안고 있는 모습을 본 그녀는 충격에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자리를 떠났었다.
그와 똑같은 상황이 다시 다정의 앞에서 일어난다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한동안은 도훈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트라우마가 되어, 영원히 남자를 못 믿고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굴리던 세아는 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팀장님…….”
도훈을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그가 방어할 틈도 없이 와락 품에 안겼다.
세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애달픈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지금…… 너무 힘들어서요.”
“…….”
“잠시만 이렇게 위로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의 샤워 로브가 세아의 눈물로 물들었다. 세아는 눈을 슬며시 뜨고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어디 이래도 안 넘어오는지 두고 보자.’
남자가 가장 약하다는 눈물과 스킨십 공격이 동시에 들어갔으니, 이제 그의 절제심이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그의 냉담한 목소리뿐이었다.
“위로해줄 남자가 필요한 거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군요.”
그렇게 말하며 도훈은 제 허리를 끌어안은 세아의 손을 떼어냈다. 세아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내가 누구의 애인인지 뻔히 알면서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거, 이해도 가지 않을 뿐더러 불쾌합니다.”
‘뭐……. 부……불쾌?’
세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화끈거렸다.
“민세아 씨의 이런 무례한 행동을 넘어가주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
“그럼.”
도훈은 그 즉시 문을 닫고, 방 안으로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복도에 멀뚱히 서있던 세아는 소리 없이 외쳤다.
‘이 남자는 남자가 아니야. 그냥 돌이야. 아니, 돌도 이렇게 딱딱하진 않아!’
그렇게 도훈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후, 그날 밤은 억울하고 창피해서 한숨도 못 잤다. 워낙 굳건한 도훈이라 둘 사이에도 아무 일 없을 줄 알았는데…….
회상을 끝낸 세아는 커다란 눈을 부릅떴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지금 둘 사이가 깨진 것은 확실해 보였다. 세아의 한쪽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어쨌든 내게 다시 기회가 생겼다는 뜻이지.’
***
[띵! 14층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다정이 기획팀 사무실로 걸어갔다.
며칠 전부터 그녀는 일부러 평소보다 늦게 출근했다. 항상 두 번째로 일찍 오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팀원들로 사무실이 북적해질 때쯤에야 도착했다.
일찍 와봤자 도훈과 단둘이 있어야 할 테고, 그 불편한 시간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다정이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사무실에서 팀원들이 쑥덕거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팀장님이랑 한다정 씨 말이야. 정말 완전히 끝났나 봐. 벌써 5일째 둘이 아무런 말도 안 하잖아.”
“맞아. 퇴근도 같이 안 하고, 회의 때도 딱 사무적인 말만 하고, 눈도 안 마주치던걸.”
“근데 둘이 왜 헤어진 걸까? 저번 등산 갈 때만 해도 굉장히 사이가 좋아 보였잖아.”
“원래 그렇지, 뭐. 하루아침에 좋아졌다가, 하루아침에 싫어지는 게 남녀 사이야.”
“혹시 팀장님 집에서 반대한 건 아닐까? 소문에는 팀장님 집도 잘산다던데.”
그 순간, 문 앞에 서있던 다정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술렁이던 사무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다정 씨 왔구나.”
“안녕하세요.”
팀원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정과 인사를 나눈 후, 제자리로 돌아가 자기 일을 하기 시작했다. 다정은 자신의 책상으로 가 컴퓨터를 켜고, 자리를 정돈했다.
다정은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눈치를 슬쩍 보고 있다는 것을.
그들의 시선이 불편하고 피곤했다. 다정은 언제까지 이런 나날이 계속될지 문득 걱정이 되었다.
실제로 사귄 건 두 달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후폭풍은 예상보다 길어질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방이 사내 여직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남자인 데다가, 여자에는 관심도 없어 보이는 그가 떳떳하게 선보인 공개 연애였기 때문이었다.
다정은 책상 위에 있는 작은 달력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4월 6일.
창밖의 나무들은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바람은 따스하고, 햇빛은 찬란했다.
그와 연애를 시작할 때만 해도 제법 바람이 차가웠는데, 눈 깜짝할 새에 봄이 찾아왔다.
이제 6개월 후면 그는 떠난다.
그가 회사를 옮기고 나면, 이 불편한 시선들도 함께 떠날 것이다.
다정은 빨리 그날이 오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시간이 더디길 바라는 자신이 우스웠다.
***
그날은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기획팀 회식이 있을 때마다 단골로 찾던 호프집에 팀원들이 모두 모여 앉았다.
다정은 동기들과 함께 테이블 끝 쪽에 앉아있었다. 모두가 기피하는 부문장은 다행히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동기들과 술잔을 기울이던 다정의 시선이 힐끗 누군가에게로 향했다. 바로 테이블 맞은편 끝 쪽에 앉아있는 도훈이었다.
말쑥한 슈트 차림의 도훈은 반듯한 자세로 앉아, 팀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결같은 외모와 한결같은 표정.
말끔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는 도훈의 모습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어 보였다.
똑같이 이별을 했는데, 저 남자는 왜 저리 멀쩡해 보이는 건지…….
왠지 분한 마음이 밀려왔다. 다정은 벌컥 술을 입 안으로 넘겼다.
술잔을 내려놓은 다정의 시선이 도훈의 옆자리로 향했다. 그의 옆자리에는 세아가 눈웃음을 지으며 끊임없이 쫑알대고 있었다.
‘이제 대놓고 티를 낼 생각인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가슴 한편에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울컥한 다정이 잔에 술을 따르던 때였다.
“이제 완연한 봄이로군!”
오늘도 얼큰하게 술에 취한 부문장이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오늘 날씨가 정말 죽이지 않나?”
이 좋은 날씨에 회식 자리에 앉아있는 팀원들의 표정은 안중에도 없는 듯 부문장이 웃어댔다.
도훈과 다정이 헤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부문장은 다정에게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호의적으로 대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어이가 없기도 하고 분하기도 했지만, 다정은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러려니 넘겼다.
“저번 주만 해도 추워서 난방을 틀고 잤는데, 이번 주는 반팔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더라고.”
그는 뭐가 그리 기쁜지, 내내 웃음을 머금고 말을 이었다.
“바야흐로 봄은 새로운 인연을 만들기 딱 좋은 계절이지. 그렇지 않나?”
팀원들이 좀처럼 반응이 없자, 부문장은 가장 어리고 힘이 없는 신입사원을 쿡 찌르며 물었다.
“소윤 씨는 애인 있어?”
“아니요. 없습니다.”
“어허. 젊은 나이라고 넋 놓고 있다간 큰일 나. 금방 서른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노처녀가 되어있는 거야.”
그놈의 노처녀 타령이 또 나왔다. 팀원 여성의 절반이 30대고, 그중 절반 이상이 결혼하지 않았음에도 부문장은 그런 이야기를 쉽게도 내뱉었다. 부문장의 말에 신입사원이 불편함을 숨기고 어색하게 웃고 있는 동안, 이미 적응한 다른 팀원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는 스킬을 선보였다. 다정 역시 그의 말을 머릿속에서 필터링을 시키고 있던 때였다.
“아참. 내가 우리 다정 씨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깜빡했군.”
갑자기 신입사원에서 자신으로 타깃이 바뀌자, 움찔하는 다정.
부문장이 걸쭉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아니, 내가 다니는 교회에 총각이 한 명 있거든. 아주 성실하고, 능력도 좋은 친구야. 나이는 서른다섯이던가, 여섯이던가……. 에잇, 남자가 돈 잘 벌면 됐지,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
“아무튼 그렇게 괜찮은 친구가 결혼을 못 하고 있어서 내가 마음이 아팠는데, 가만 보니 다정 씨랑 참 잘 어울리겠더라고.”
그의 말에 눈매가 일그러지는 다정.
부문장은 선심 쓴다는 듯이 그 다음 말을 이어가며, 다정의 분노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내가 다리 한번 놔줄 테니, 주말에 시간 좀 내봐.”
다정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무리 직장 상사라고 해도 할 말, 못 할 말이 따로 있다.
부문장이 지금 자신에게 뱉은 말은 상대가 누구여도 참을 수가 없는 발언이었다.
그 광경을 모두 보고 있던 팀원들은 작은 목소리로 쑥덕거렸다.
“와……. 부문장님 너무한다. 다정 씨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저런 말을 하냐.”
“지독한 사람이야, 정말……. 다정 씨는 무슨 죄야.”
팀원들은 동정하는 눈빛으로 다정을 바라보았다.
그늘진 얼굴의 다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지금은 누굴 만날 생각이 없어서요.”
“그래? 허허. 아쉽구만! 정말 괜찮은 남자인데, 나중에 후회해도 난 몰라.”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어요.”
다정은 또렷한 눈빛으로 부문장을 마주보았다. 이윽고 당찬 목소리로 말했다.
“부문장님이 회식 자리에서마다 여직원들에게 연애는 언제 할 건지, 결혼은 언제 할 건지 물으시는 거 듣기 불편하고, 불쾌합니다. 여자는 서른 지나면 여자도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시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녀의 말에 부문장은 미간을 깊게 찌푸리며 대꾸했다.
“나 참. 관심이 없으면 그런 말도 안 해! 내가 여직원들이 우리 딸 같아서, 진심으로 걱정돼서 한 말인데, 그걸 또 아니꼽게 들을 줄이야.”
“정말 제가 따님처럼 느껴지신다면, 더더욱 이러시면 안 되죠.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부문장님 따님보고 왜 아직도 시집을 못 갔냐고 간섭하면 기분이 좋으시겠어요?”
“뭐…… 뭐라고?! 자네 지금 말 다 했어?”
부문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자, 팀원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혹여 불똥이 튈까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숨을 죽인 채 상황을 지켜보는 그들이었다.
“기분 나쁘시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회식 때마다 부문장님 말에 상처받고 기분 나빴지만, 참았습니다. 하지만 더는 참기가 힘들어지네요.”
다정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부문장의 눈빛에도 흔들리지 않고, 제 할 말을 마저 이었다.
“부문장님이 제 직장 상사라고 해서, 제 사생활까지 터치하시고 관여하실 자격은 없습니다.”
“…….”
“더는 제 연애와 결혼에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끝까지 강인한 눈빛으로 부문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저희를 친딸처럼 생각하신다면 말이죠.”
***
남자 화장실에서 나온 부문장의 낯빛은 아직도 벌건 기운이 가득했다.
그는 다정의 발언을 다시금 떠올리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나 원 참. 어이가 없어서……!”
분수에 맞는 남편감을 소개해주려고 했건만,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는 다정의 태도가 괘씸하게 느껴졌다. 분이 쉽게 가시질 않는 듯 그가 씩씩거리며 회식 장소로 걸어가던 때였다. 복도 한쪽에 서있던 도훈과 눈이 마주쳤다.
그를 보자마자 부문장은 성큼 다가가, 속에 품은 말을 바로 내뱉었다.
“자네 정말 한다정이랑 헤어지길 잘했어!”
“…….”
“그렇게 예의 없는 여자랑은 진작 끝냈어야 했는데 말이야.”
그의 말에 날카로운 도훈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전 한다정 씨가 틀린 말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
“예의는 부하직원이 상사에게 차리는 것만이 아니죠. 상사 역시 부하직원에게 기본적인 예의를 갖춰야 한다고 봅니다.”
그를 바라보는 도훈의 눈빛에는 멸시와 분노의 감정이 가득 차있었다.
“하지만 부문장님이 회식 때마다 여직원들에게 일삼는 행동과 말은 예의에 어긋남은 물론 몰상식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모…… 몰상식?”
부문장은 귀를 의심하며 도훈에게 소리쳤다.
“자네 지금 말 다 했나?”
“아니요. 한마디 더 말씀드리죠. 오늘 있었던 일을 들먹이며 한다정 씨를 괴롭힌다거나, 업무상 불이익을 주는 일은 없어야 할 겁니다.”
“이제 보니 싹수없는 사람끼리 제대로 만났군! 자네 내가 누군지 몰라? 회사 관두고 싶어?!”
“그런 말은 이 회사가 아니면 안 되는 사람에게나 통할 협박이죠. 예를 들면 부문장님처럼요.”
“뭣?!”
“제가 이 회사를 나갈 때쯤엔, 결코 저 혼자 나가진 않을 겁니다.”
도훈의 강인한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너무도 당찬 태도와 냉기 가득한 눈빛에 부문장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당혹감을 애써 감추며, 큰 소리로 말했다.
“기도 안 차는군! 상사인 나에게 지금 경고하는 건가? 함께 짤릴 각오로 날 끌어내리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경고는 이미 여러 번 드렸습니다.”
그의 서늘한 눈매가 가까이 다가왔다. 주위의 모든 것이 얼어붙을 듯한 느낌이었다.
낯빛이 창백해진 부문장의 귓가로 도훈의 음성이 굵게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경고가 아니라 통보입니다.”
그렇게 말한 도훈은 그를 지나쳐 다시 회식 장소로 걸어갔다.
부문장은 골치가 아팠다. 도훈이 맘먹고 자기를 끌어내린다고 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불안한 마음에 그에게 책잡힐 만한 행동이 뭐가 있었는지 되짚어보았다.
“젠장.”
머릿속이 복잡해진 부문장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도훈의 말대로 제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해도, 그건 다정에게 한 행동인데 왜 그가 화를 내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뭐야, 둘이 분명 헤어졌다고 들었는데…….’
부문장은 점점 멀어져가는 도훈의 뒷모습을 보며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저놈은 대체 왜 저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