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놓고 사내연애 -13화 (13/32)

Chapter. 13

오전 회의를 마치고 휴게실에 앉아있는 다정. 그녀는 누군가와 통화를 마치며 핸드폰을 힘없이 내려놓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족들에게 전화해보았지만, 꽃 배달을 시킨 사람은 역시나 없었다.

꽃바구니를 뒤져보아도 누가 보냈는지 카드 한 장 없었고, 꽃 배달 업체의 정보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아무런 정보도 캐내지 못한 다정이 한숨을 쉬며 읊조렸다.

“대체 누가 나에게 꽃을 보낸 거지?”

고심하던 다정의 머릿속에 문득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건 바로 현우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세아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현우 씨가 내게 꽃을 보낼 리가 없잖아.’

그를 떠올리기 바쁘게 다정이 고개를 휘휘 옆으로 저으며 부정했다.

다정은 팀장실에서 나올 때 보았던 도훈의 얼굴을 떠올렸다.

‘팀장님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보이던데…….’

어제 현우와의 일로 심기가 불편했던 마당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늘 꽃다발 사건까지 더해졌으니 그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꽃을 누가 보냈는지만 알아도 오해가 더 빨리 풀릴 텐데, 그조차 알 수 없는 다정은 답답할 노릇이었다. 꼬일 대로 꼬여버린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또각, 또각. 날카로운 구두 소리가 다정의 귓가를 울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에 다정이 고개를 돌렸다. 복도에서 휴게실로 걸어오는 이는 다름아닌 세아였다.

그녀가 휴게실에 도착하자, 다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정이 자리를 피하려는 것을 눈치챈 세아가 잽싸게 그녀의 앞에 마주 섰다.

“할 말이 있어요.”

앞길을 가로막은 그녀를 다정은 매섭게 바라보았다.

“사적인 이야기라면 듣기 싫어.”

“듣기 싫어도 들어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녀가 거침없이 받아치며 말했다.

“선배도 내가 현우 씨와 왜 헤어졌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그녀의 말에 다정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조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아는 꿋꿋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첫 번째 이유는 내 마음이 변했기 때문이에요.”

“…….”

“현우 씨보다 더 탐나는 남자가 생겼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붉은색 입술을 씩 올려 보이는 세아. 그녀의 도발적인 표정에 다정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이유가 뭐야?”

“일종의 선전포고라고 생각하면 돼요.”

“?”

“선배가 현우 씨 때처럼 나오면 나도 곤란하니까요.”

세아는 너무도 당당한 태도로 말을 이어나갔다.

“본인의 매력이 부족한 걸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란 뜻이에요.”

“……!”

그녀의 거침없는 말을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던 다정이 목소리를 높였다.

“민세아! 난 네 선배고, 직장 동료야. 말 가려서 안 해?”

“벌써 흥분하면 곤란하죠. 내 말 아직 안 끝났어요.”

세아는 작정하고 나온 듯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한 발자국 더 다정에게 다가가 도발했다. 새까만 눈동자가 다정을 쌀쌀맞게 응시하며 말했다.

“현우 씨와 내가 헤어진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선배 때문이에요.”

“뭐?”

그녀의 말이 우습다는 듯 다정이 찬웃음을 지어 보였다.

“너 이제 완전히 막 나가기로 결심했나 보구나.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까지 날 괴롭히고 싶니?”

“후훗. 내가 얻을 게 뭐가 있다고 이런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세아의 표정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당당함에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 다정.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며 세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가 말했다.

“궁금하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말해줄게요. 너무 긴 스토리라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고민되긴 하지만.”

“민세아.”

다정이 그녀의 말을 끊고 말했다.

“내가 말했지. 나한테 다시는 아는 척하지 말라고.”

자신을 마주하는 그녀의 차가운 눈빛에 세아가 살짝 움찔했다.

“고작 이런 이야기를 할 거였다면, 말을 걸지 말았어야지.”

다정은 그녀의 당당한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를 잡아먹을 기세로 매섭게 응시하며 말했다.

“넌 나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다 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

“난 너와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조차 불쾌하거든.”

낮게 깔린 목소리가 더욱 싸늘하게 느껴졌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를 홱 지나치는 다정.

혼자 남은 세아가 붉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

다음 날 아침.

다정은 도훈에게 제출할 보고서를 손에 들고, 팀장실 문을 열었다.

도훈은 블라인드 틈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봄 햇살을 마주하며 서류를 보고 있었다. 말끔하게 넘긴 머리카락과 깔끔함의 정석을 보여주는 검은색 슈트까지. 팀장으로서 마주하는 그는 언제나 한 치의 모자람도 없이 완벽했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그의 자태에 잠시 넋을 잃은 순간, 도훈이 말했다.

“무슨 일이죠?”

그의 외모를 감상하다가 먼저 말할 타이밍을 놓친 다정. 그녀는 당혹감을 감추고 도훈에게 다가가 보고서를 건네었다.

“말씀하셨던 홍콩 수주 실적 보고서입니다.”

“수고 많았어요.”

그렇게 말하며 보고서를 받는 도훈은 평소와 다른 점이 없었다.

반듯한 자세도, 강인한 눈빛도, 담담한 목소리도…… 지극히 똑같았다.

자신을 대하는 모습에 변한 것이 없어 보였지만, 다정은 둘 사이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꼈다.

‘팀장님은 평소랑 똑같은데, 왜 마음이 이렇게 불안할까.’

다정은 생각했다.

‘팀장님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인 걸까……?’

다정은 왜 자신의 마음이 이토록 복잡하고, 불안한 지를 그 때까지만 해도 알아채지 못했다. 보고서를 훑는 도훈에게 그녀가 물었다.

“팀장님 다음 주에 부산으로 출장 가시죠?”

“네.”

“윤 주임님과 민세아 씨가 함께 가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

부산 공장 답사는 한 달 전부터 이미 기획된 출장이었다. 도훈과 윤 주임 그리고 세아가 출장 멤버로 내정되었고, 출장 기간은 2박 3일이었다. 그리고 여태껏 출장 멤버는 특별한 사항이 있지 않은 이상 변경한 적이 없었다.

다정의 표정에 근심이 짙자, 도훈이 물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다정은 잠시 고민했다. 출장 멤버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했다. 여시 같은 세아가 함께 가는 게 마음에 안 든다고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었다.

다정은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아니요. 조심히 잘 다녀오시라고요.”

다정은 세아가 신경이 쓰였지만, 단둘이 가는 것도 아니고 윤 주임이 함께 간다는 사실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기로 했다.

“고마워요. 다녀와서 연락할게요.”

도훈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자, 가슴 한편에 응어리졌던 감정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다행이다. 팀장님 마음이 풀렸나 봐.’

최근 연달아 벌어진 사건에 마음이 편치 않았던 다정의 얼굴이 그제야 밝아졌다.

그녀의 밝아진 얼굴을 보며 도훈도 제 마음을 다독였다.

현우의 일과 꽃다발 사건을 길게 끌고 가봤자, 불리한 건 자신이었다.

그녀는 상사인 자신이 갑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남녀 관계에서는 언제나 마음이 더 큰 쪽이 을이 되었다.

그녀가 저 때문에 곤란해하지 않게 하는 것.

어떻게든 그녀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만드는 것.

을의 처지에서는 이것이 늘 최선의 목표였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거나 홀로 다스려야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아직도 현우가 그녀를 끌어안았던 모습을 떠올리면 저절로 두 주먹을 꽉 쥘 정도로 울컥하지만 말이었다.

변함없는 도훈의 모습에 안심하며 팀장실을 나온 다정. 그녀의 시야 안으로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세아의 모습이 들어왔다.

오늘 그녀는 브이넥 원피스 차림이었다. 원피스의 화려한 색감과 몸에 달라붙는 디자인은 보는 이의 시선을 단박에 끌기 충분했다.

다정이 그녀의 옷차림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세아는 팀장실 앞으로 다다랐다. 그리고 다정을 빤히 마주보았다. 가까이에서 본 그녀의 원피스는 생각보다 목이 더 깊게 파여 있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면, 가슴골이 훤히 보일 수도 있는 디자인이었다.

문득 다정의 머릿속에 앞으로의 장면들이 상상되기 시작했다.

세아가 팀장실로 들어가 지금 들고 있는 서류를 도훈에게 건네는 장면.

자연스레 그녀의 가슴골이 노출되며 도훈의 시선을 끄는 장면.

세아가 싱긋 눈인사를 하며 화룡점정을 찍는 장면…….

상상을 끝낸 다정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여자인 자신도 저절로 시선이 가는데, 남자인 도훈이 이 모습을 지나치긴 어려울 것이었다.

다정의 표정이 점점 더 암울해지던 그때, 세아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한다정 씨.”

“?”

“그렇게 서있으면 저보고 어떻게 들어가라는 거예요?”

그녀는 도도한 눈빛으로 팀장실 바로 앞에 서있는 다정을 응시했다.

“이만 비켜주시죠?”

그녀의 말에 팀장실 문에서 걸음을 떼는 다정.

기분이 묘했다. 마치 달려오는 공격수에게 골대를 냅다 내주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옆으로 비키자, 세아가 당당한 걸음으로 팀장실 앞에 섰다. 가까이 온 그녀에게선 짙은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노크와 함께 팀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세아를 뒤로한 채, 다정은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자리로 걸어가는 내내, 세아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현우 씨보다 더 탐나는 남자가 생겼거든요.’

‘일종의 선전포고라고 생각하면 돼요.’

어제 세아 앞에서는 당당하게 굴었지만, 사실 그녀와 멀어지자마자 애써 유지했던 침착함은 단박에 무너졌다.

자신에게 선전포고라고 말했던 의미를 생각해보면, 그녀가 현우보다 더 탐이 난다는 남자는 바로 도훈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아무리 도훈과 자신이 계약 연애라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어엿한 커플이었다. 그런데 애인이 엄연히 있는 남자를 유혹하겠다는 세아의 저의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난한 표정으로 자리에 돌아오는 다정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다정 씨. 어제 나눠주었던 회의 자료 한 장 더 부탁해도 될까요?”

나긋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그는 바로 현우였다. 다정은 혹시 몰라 여유 있게 출력했던 회의 자료를 그에게 건네었다.

“여기요.”

“고마워요.”

그가 부드럽게 입매를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음료 한 캔을 그녀의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그 음료는 다정이 평소 즐겨마시던 이온 음료였다.

“오늘 하루도 힘내요. 그럼.”

환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넨 그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책상 위에 놓은 음료캔을 보며 다정은 어제 세아가 했던 또 다른 말을 떠올랐다.

‘현우 씨와 내가 헤어지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선배 때문이에요.’

다정은 책상 한쪽에 음료캔을 밀어놓고,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일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문서의 어떤 내용도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

다음 날, 출근 준비를 하던 다정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네이비색 셔츠에 베이지색 바지. 그리고 클래식한 검은색 코트.

자신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던 다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아니야……. 딱 봐도 삶에 찌든 직장인 스타일이잖아.”

그동안 회사에 다니면서 옷차림에 신경 쓴 적이 별로 없었던 다정이었다.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꾸미고 갔지, 평소에는 편안한 옷차림을 추구했다. 하지만 어제 섹시한 느낌이 물씬 풍기던 세아의 옷차림이 자꾸만 떠올랐고, 제 옷차림과 저절로 비교가 되었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 다정이 바로 옆 소정의 방으로 향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소정의 옷장에는 색감이 독특하고 섹시한 스타일의 옷이 많았다. 다정은 고심 끝에 그녀의 옷장에서 그나마 무난한 디자인의 옷을 빌려왔다.

***

똑똑.

팀장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도훈이 말했다.

“들어와요.”

도훈은 서류에서 시선을 뗀 후, 문을 열고 들어오는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수줍게 인사하는 그녀는 바로 다정이었다. 그녀를 본 도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옅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반겼겠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바로 그녀의 옷차림 때문이었다.

다정은 새하얀 오프 숄더 블라우스와 화려한 색감의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어깨선이 깊게 파인 블라우스 때문에 그녀의 깊은 쇄골이 그대로 드러났고, 짧은 스커트는 그녀의 하얀 허벅다리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그녀의 옷차림을 본 도훈은 곧바로 시선을 서류로 내렸다.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그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다정은 서류를 들고 도훈의 앞으로 향했다.

“어제 회의 때 말씀하셨던 보고서입니다.”

다정이 서류를 건넬 때조차, 도훈은 그녀를 똑바로 마주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계속 숙인 채로 그녀가 준 서류를 훑어볼 뿐이었다.

“잘 정리했군요. 수고 많았어요.”

빠른 속도로 서류를 훑은 도훈이 고개를 든 순간, 다정과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녀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변한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가까운 거리에 있다 보니, 그녀의 매끄러운 어깨선과 새하얀 살결이 더욱더 도훈의 시야에 잘 들어왔다.

“옷이……. 아닙니다.”

도훈이 말을 잇지 못하고, 홱 고개를 돌렸다.

예쁘다는 말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분위기가 바뀐 것 같다, 화사해 보인다는 정도의 말은 기대했던 다정은 당혹스러웠다. 도훈의 반응이 예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라, 다정이 그에게 물었다.

“옷이 이상한가요?”

“이상한 게 아니라……. 스타일이 평소와 많이 다른 것 같아서.”

“이런 스타일 싫어하세요?”

“아니요. 싫어하지 않습니다.”

싫다는 거야, 좋다는 거야?

그와 이야기를 한 후, 더욱 미궁으로 빠지는 다정.

그런 그녀를 끝까지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도훈이 말했다.

“더 할 이야기 없으면, 이만 나가봐요.”

***

팀장실을 나온 다정은 터벅터벅 맥없는 걸음으로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나름 고심해서 입은 옷인데, 도훈의 반응이 시원찮았던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다정은 마침 그녀를 지나치던 춘희를 불렀다.

“저기, 춘희 씨.”

“응?”

“오늘 제 옷차림 어때요?”

“너무 예쁘다~ 주위까지 화사해지는 느낌인데?”

“그래요?”

“응. 그 스커트 어디서 샀어? 나도 10kg만 더 빼면 입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춘희는 그 뒤로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옷차림을 칭찬했다. 주위 여직원들도 옷이 예쁘다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녀들의 말에 다정은 기분 좋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다들 옷이 예쁘다고 하는데…… 뭐가 문제지?’

제 자리로 돌아가던 다정은 문득 사무실 한편에 놓인 전신 거울을 마주했다.

다시 한번 제 모습을 살피던 다정은 예쁜 디자인의 옷에 눈이 멀어 자신이 놓친 끔찍한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섹시한 옷을 입는다고, 몸까지 섹시해지는 게 아니라는 현실을 말이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팽팽한 스커트와 그 밑으로 보이는 통통한 허벅다리…….

다정의 눈에는 거울 속에 웬 돼지 한 마리가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경악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옷이 문제가 아니라 몸매가 문제였어!’

그래서…….

다정은 계속 시선을 회피했던 도훈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그는 당황한 것이 분명했다. 그저 살짝 통통한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눈앞에서 깨닫고 당황한 것이었다.

‘차마 바로 마주 볼 수 없었을 만큼, 내 몸매가 못 봐줄 정도였다는 거야…….’

다정은 근처에 있는 다른 여직원들의 모습을 보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노출이 있는 원피스를 입은 여직원도 있고, 저보다 더 짧은 치마를 입은 여직원들도 있었다. 중요한 건 그들은 모두 늘씬한 몸매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저런 여직원들만 보다가 내 모습을 보았으니 얼마나 더 비교되었을까…….’

다정은 뒤늦게 밀려온 창피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내 무덤을 내가 팠어!’

그날 다정은 종일 사무실에서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사람들이 덥지 않냐고 물어봤지만,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잠시 끊었던 헬스장을 다시 등록했다.

***

그 시각.

다정이 사무실을 나간 후, 도훈은 서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서류로 향해있는 건 시선뿐이었고, 머릿속은 계속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방금 보았던 다정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는 듯, 도훈이 잠시 서류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혀 의자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사실 사내에서 누가 뭘 어떻게 입고 다니든 여태껏 신경 쓰지 않았던 그였다. 아예 홀라당 벗고 다니는 것만 아니라면 제가 관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외국 기업에선 더욱 자유분방한 옷차림도 많이 보아왔기에, 옷차림에 관해서는 다른 상사들보다 관대했다.

하지만 한다정에게만큼은 예외였다.

그녀는 오늘 평소와는 너무 다른 스타일로 옷을 입고 왔다. 그 스타일이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색다른 매력을 표현하기 좋은 차림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직원들에 비하면 노출이 심한 옷도 아니었는데, 그녀가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곤란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옷을 입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을 괴롭힐 작정으로 입고 온 거라면 이백 프로 성공한 셈이다.

다정이 사무실을 나간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자꾸만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며 그를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매끈한 어깨선과 깊은 쇄골, 그리고 새하얀 허벅지…….

“미친놈.”

또 한 번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녀의 야릇한 이미지에 도훈이 고개를 휘저었다. 그의 뺨 끝이 붉게 물들었다. 자기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면 그녀는 저를 변태 보듯이 볼 것이다.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대체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는 도훈. 또한 저 모습을 다른 남직원들도 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도훈은 애써 그녀의 생각을 떨치며, 다시 서류를 보았다. 오늘 마쳐야 할 업무가 태산이었기에, 더는 이런 일로 시간 낭비를 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서류를 몇 글자 읽기도 전에 또 떠오르는 그녀의 모습. 도훈이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겠네, 정말.”

***

“야. 한다정.”

소파에 앉아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던 다정이 고개를 들었다.

“으응?”

그녀에게 다가온 소정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별 생각 안 했는데.”

“그런데 왜 대답을 안 해?”

“나한테 뭐 물어봤는데?”

소정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후라이드 시켜, 양념 시켜?”

“아무거나 시켜. 언제 내 의견을 물어봤다고…….”

다정이 시큰둥한 얼굴로 다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소정이 목소리를 높였다.

“언니는 후라이드 먹고 싶어 하는데, 난 양념 먹고 싶단 말이야. 우리 집은 뭐든지 다수결이 원칙인 거 알지? 네 의견에 달려 있어.”

“그럼 반반 시키면 되잖아.”

다정의 지혜로운 답변에 소정은 그녀를 솔로몬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눈을 반짝이는 그녀를 보며 다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둘째 언니 소정은 다 좋은데, 뇌가 너무 청순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티끌 하나 없는 백지처럼 맑고 깨끗했다. 다정은 그런 언니가 가끔은 부끄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배달앱으로 주문을 하던 소정은 그녀에게 물었다.

“근데 넌 배 안 고프냐?”

퇴근하자마자 헬스장을 다녀온 다정은 오늘 저녁에 먹은 음식이라곤 고구마 한 개가 전부였다. 다정은 말할 기운도 없다는 듯 맥없이 말했다.

“당연히 배고프지.”

“그럼 치킨 한 마리 더 시킬까?”

내 핑계 대기는.

“나 치킨 안 먹어. 오늘부터 다이어트야.”

그녀의 말에 온 가족이 푸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다정의 가족 중 다이어트를 한다고 말해놓고 여태껏 한 달 이상 버틴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의 비웃음이 기분 나쁜지 다정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엔 진짜야. 나 정말 살 뺄 거야.”

“왜? 팀장님이 늘씬한 스타일이 좋대?”

“아… 아니야. 팀장님 때문에 살 빼는 거 아니거든.”

다정은 퉁명스럽게 말한 후, 다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도훈이 출장을 간 지 이틀째 되는 날. 오전에 몇 번 문자를 나눈 그는 아직까지 연락이 없었다.

‘많이 바쁜가?’

다정이 그와 나누었던 문자를 살펴보고 있던 사이, 옆에서 구멍 난 양말을 꿰매고 있던 봉해가 그녀에게 한마디 내뱉었다.

“너 팀장님이랑 싸웠니?”

“네? 아니요.”

“전화만 계속 쳐다보고 있길래.”

봉해는 흐뭇하게 웃으며, 한마디를 더 했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먼저 걸어보지 그래.”

“보, 보고 싶기는 무슨…….”

그녀의 말에 홍당무가 된 다정의 얼굴.

그녀는 괜스레 민망해져, 아무 관심 없다는 듯이 핸드폰을 소파에 놓고 부엌으로 갔다.

“물이나 마셔야겠다.”

그때, 부엌으로 향하는 다정의 뒤로 언니 애정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어! 팀장님한테 전화 왔다!”

“뭐?”

그녀의 목소리에 즉각 반응한 다정이 잽싸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소파에 두었던 자신의 핸드폰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고, 부재중 전화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애정의 장난이었던 것이다.

“…….”

허망한 동생의 얼굴이 재밌는지 두 자매가 까르르 웃어댔다.

다정의 주먹이 소리 없이 울었다. 언니들 팔뚝이 조금만 덜 굵었더라도 덤볐을 텐데…….

“유치하게 진짜!”

다정이 그녀들을 한번 째려본 뒤,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정이 소리쳤다.

“어! 팀장님한테 전화 왔다.”

“안 믿어.”

“진짠데? 안 받을 거야? 그럼 내가 받는다?”

그녀들의 장난은 초딩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짓궂음이 하늘을 찔렀기에, 다정은 소정의 말을 무시하고 부엌으로 갔다. 그녀가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꺼내는 순간, 소정의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훈 씨. 어쩌죠. 우리 다정이가 지금 통화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데요~ 그동안 저랑 통화를 나누시는 게 어떨까요?”

‘참나. 내가 또 속을 줄 알고?’

다정이 코웃음을 치며 컵에 물을 따랐다. 졸졸 물 따르는 소리와 소정의 쾌활한 목소리가 겹쳤다.

“아하. 출장 중이시구나~ 부산이라고요? 부산 어디요?”

“…….”

“아~ 서면이요. 서면에 제가 잘 아는 맛집 있는데 알려드릴까요?”

“…….”

어쩐지 이번만큼은 장난이 아닌 것 같아, 다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물잔을 내려놓고 재빨리 언니들 곁으로 뛰어왔다. 그리고 소정이 들고 있는 핸드폰을 냅다 가져갔다. 다정은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거친 호흡과 함께 전화를 받았다.

“티…… 팀장님?”

[이제야 주인공이 받는군요.]

굵은 음성이 귓가에 닿자, 다정은 당혹스러웠다. 지금껏 소정이 통화한 상대는 정말로 도훈이었다.

[전화 받기 곤란한 상황이면 조금 있다가 하죠.]

“아, 아니에요. 지금 받을 수 있어요. 언니들이 장난을 좀 친 것뿐이에요.”

[하하. 누님들은 여전하시군요.]

당황한 동생의 모습이 재밌는지, 두 자매는 손뼉을 치며 까르르 웃어댔다.

“잠시만 기다려주실래요? 방에 가서 받을게요.”

다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애정과 소정이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서 받지 그래.”

“그래. 얼마나 닭살 돋는 통화를 하는지 우리도 한번 구경해보자.”

다정은 도훈이 들리지 않게 입 모양으로 그녀들에게 말을 전했다.

-내 방에 올라오기만 해.

말없이 씰룩거리는 그녀의 입술을 본 두 자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니. 방금 쟤 우리한테 욕한 거 같은데?”

***

방에 도착한 다정은 언니들 때문에 울컥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전화를 받았다.

“죄송해요, 팀장님. 많이 놀라셨죠?”

[아니요. 덕분에 많이 웃었는걸요.]

“언니들 장난 받아주지 마세요. 한 번 받아주면 끝도 없다니까요.”

그녀의 말이 재밌는지 도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정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어디세요? 일은 잘 마쳤어요?”

[네. 방금 저녁식사 마치고 호텔에 도착했어요.]

그때, 수화기 너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팀장님. 이쪽이에요.]

높은 톤의 목소리를 들은 다정의 귀가 쫑긋했다.

분명 세아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뒤이어 그녀에게 말하는 듯한 도훈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먼저 올라가세요. 전 통화 좀 하고 가죠.]

[네. 그럼 천천히 오세요.]

상냥하고 애교가 넘치는 목소리.

세아 특유의 음성이 귓가를 지나쳐 다정의 가슴을 콕콕 찔러왔다.

‘신경 쓰여, 진짜…….’

신경 쓰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이렇게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답답한 마음이 밀려왔다. 다정이 물었다.

“내일 몇 시쯤 도착하세요?”

[오후에도 공장에 한 군데 더 들러야 해서, 서울에는 늦게 도착할 것 같군요.]

“그렇구나…….”

[목소리가 왜 이렇게 힘이 없습니까?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아니에요. 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 답답한 감정을 설명할 수가 없어, 다정은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다.

“피곤하실 텐데 얼른 쉬세요. 내일도 스케줄 있다면서요.”

[그래요. 내일 도착해서 연락할게요.]

“네.”

[잘 자요, 그럼.]

새벽 라디오에서나 들릴 법한 근사한 음성에 다정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왔다.

통화를 끝낸 다정은 아직도 콱 막힌 듯 답답한 가슴을 어루만져보았다.

어쩐지 잠이 쉽게 들지 않을 것만 같은 밤이었다.

***

눈부신 야경을 배경으로 도훈과 세아는 호텔 룸 안에 마련된 바에 앉아있다.

세아가 자줏빛이 도는 와인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팀장님.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세아 씨도요.”

도훈이 나긋이 웃으며 건배를 했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세아의 입술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그녀가 잔을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려는 순간, 와인잔이 그녀의 손에서 미끄러졌다. 넘어지는 와인잔을 잽싸게 도훈이 잡은 덕분에 잔이 깨지는 것을 모면했다. 하지만 잔에 있던 와인이 모두 쏟아져 그의 셔츠와 바지를 적셨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실수로 엎질렀네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가 닦아드릴게요.”

세아가 냅다 손수건을 들어 그의 젖은 셔츠를 닦아주었다. 새하얀 셔츠는 안으로 그의 탄탄한 가슴이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얇았다.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도훈이 손을 뻗어 손수건을 가져가려는 순간, 그녀의 손이 맞닿았다. 그러자 세아가 농염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팀장님…….”

“민세아 씨…….”

서로의 뜨거운 시선이 오고가고, 세아가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도훈도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며, 얼굴을 천천히 가져갔다. 그리고 서로의 입술이 부딪치려는 그 순간이었다.

“헉!!!!”

다정이 번뜩 눈을 뜨며 짧게 비명을 질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새파래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자신의 방이었다.

도훈과 세아의 야릇한 장면은 다행히도 그녀의 꿈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다정이 기가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무슨 이런 꿈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꿈 내용이 민망하긴 했지만, 이로써 확실해진 것이 있었다. 그 둘이 꿈에 나올 정도로 세아가 신경이 쓰였다는 것이었다.

어두운 안색의 다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댔다.

‘지나친 걱정이야. 단둘이 간 것도 아니고, 주임님도 같이 갔는걸.’

다정은 침대 맡에 두었던 핸드폰을 들었다.

오후 11시 40분. 열두 시가 다 되어갔지만, 아직 도훈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도착하면 연락해준다고 해놓고선.’

다정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설마…… 아직도 세아랑 있는 걸까?’

늦은 시각이긴 했지만, 이대로는 도저히 잠이 들 수 없을 것 같아, 다정은 그에게 먼저 연락을 해보기로 했다.

도훈의 연락처를 찾아 그에게 문자를 보내려는 순간이었다. 짧은 진동음과 함께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자요?

메시지를 본 다정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바로 도훈의 메시지였다. 그녀는 바로 문자를 보냈다.

-아니요. 안 자요. 서울엔 도착하셨어요?

막상 문자를 보내고 나니, 기다린 게 너무 티가 났나 싶어 다정은 살짝 민망해졌다.

문자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서 다시 답장이 왔다.

-통화 가능해요?

-네. 제가 걸게요.

다정은 곧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윽고, 듣기만 해도 저절로 가슴이 진동하게끔 하는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여보세요.]

“팀장님.”

[아직 안 자고 있었군요.]

“잠들었다가 방금 깼어요.”

[나 때문에 깬 거 아닙니까?]

“아니에요. 그 전에 깼어요.”

다정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살짝 들뜬 얼굴로 방 안을 걸어 다니며, 통화를 이어나갔다.

“출장은 잘 다녀오셨어요?”

[네. 예상보다 스케줄이 늦어져서, 서울 도착 시간도 늦어졌네요.]

순간 꿈속의 장면이 떠오른 다정이 조심스레 물었다.

“별일…… 없으셨죠?”

[무슨 일이라도 있어야 합니까?]

피식, 나직한 웃음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도훈이 웃는 모습을 제법 많이 보아온 다정은 머릿속에 저절로 그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 이후로 둘은 서로 오늘 있었던 일을 간단히 이야기했다.

다정의 가슴이 뛰었다. 고요한 밤, 귓가를 울리는 굵은 저음이 묘한 설렘을 주었다. 이렇게 통화를 하고 있으니, 마치 그와 진짜 연인이 된 기분이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군요.]

“?”

[얼른 다시 자요. 내일 다시 통화하죠.]

‘벌써?’

통화가 끝나가는 분위기가 되자, 다정의 얼굴에 못내 아쉬운 감정이 번졌다.

‘조금 더 통화하고 싶은데…….’

다정은 시간을 확인했다. 시곗바늘은 어느덧 열두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여기서 이만 전화를 끊기로 했다. 긴 출장으로 피곤할 그를 보챌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알겠어요. 팀장님도 피곤하실 텐데 얼른 쉬어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창밖에서 요란한 소음이 들려왔다.

부우우웅-

집 근처를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인 듯했다.

문제는 수화기 너머로도 똑같은 소음이 동시에 울리고 있다는 것.

“……?”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다정이 창가로 바로 다가갔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보았다.

창밖을 내려다본 다정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흔들렸다.

창밖에는 낯이 익은 슈트차림의 한 남자가 서있었다. 길쭉한 실루엣의 주인공은 바로 도훈이었다.

“팀장님?”

때마침 2층을 올려다보고 있던 도훈과 눈이 마주쳤다. 다정은 옷걸이에 있는 외투들 중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한 벌을 들고, 방 밖으로 나갔다.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온 다정. 그녀의 시야 안으로 집 앞에 서있는 도훈의 모습이 들어왔다.

“팀장님!”

‘서울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했는데…….’

다정은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여기는 어떻게…….”

그녀를 마주한 도훈은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렸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지나가다가…….”

“…….”

“……라는 말은 거짓말이고.”

도훈의 짙은 눈동자가 그녀에게 향했다.

이어 그의 묵직한 음성이 다정의 가슴을 울렸다.

“보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며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는 그.

그를 바라보는 다정의 눈망울이 애틋하게 떨려왔다.

다정은 그제야 깨달았다.

요즘 들어 아침마다 화장대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진 이유를.

어디를 가든 핸드폰을 놓지 않았던 이유를.

자신과 떨어져 세아와 함께 있는 그가 계속 신경 쓰였던 이유를.

그 모든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팀장님이…… 좋아졌어.’

그것도 아주 많이.

[2권에서 계속]

(공금)ⓒ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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