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놓고 사내연애 -11화 (11/32)

Chapter. 11

“죄송해요.”

철제로 된 검은색 대문을 열고 나온 다정은 우산을 펼치는 도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도훈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한다정 씨는 나한테 뭐가 그렇게 죄송한 게 많습니까?”

“저희 가족들 때문에 정신 없으셨잖아요.”

“아니요. 사람 사는 집 같아서 좋던데요.”

도훈은 미소를 씩 지어 보였지만, 다정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사실 저희 언니들이 살짝 푼수기가 있어요. 아니, 살짝이 아니라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아무튼 기분 나쁜 행동이나 말이 있었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사과할 필요 없어요. 두 분 다 유쾌하셔서 오히려 즐거웠어요. 가족분들 모두 한다정 씨를 많이 아끼고 사랑하는 게 눈에 보이더군요.”

“그건 제대로 안 보셔서 그래요. 언니들이 얼마나 절 놀리고, 괴롭히는데요.”

“하하.”

뭐가 그리 재밌는지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계속 맺혀있었다.

“누님들이 다정 씨 연애에 굉장히 적극적이시더군요.”

“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 될 거예요.”

“자고 가란 말에 내가 무척 고민한 거 알아요?”

그가 입술 끝을 씩, 올리며 말했다.

“다음엔 사양 안 하고 자려고요.”

“뭐라고요? 팀장님까지 왜 이러세요? 정말.”

다정은 얼굴이 빨개지며 그를 나무랐다. 그 모습조차 재밌는지, 도훈은 또 한 번 웃어 보였다.

그에게 자꾸 말려드는 기분이 들어, 다정이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지금 웃을 때가 아니에요. 대체 가족들에겐 왜 애인이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끝까지 잡아떼면, 넘어갈 수도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 장면을 보여 놓고,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웃기잖습니까.”

그런 장면이란 바로 대문 앞에서 키스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자, 다정의 볼이 자동으로 빨갛게 물들었다.

“그건 그렇지만…….”

다정은 도훈을 바라보는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며,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던 얼굴들. 살면서 가족들이 그렇게 흡족해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의 그런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족들에게 처음으로 소개해준 남자가 도훈처럼 멋진 사람이라 다행이라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다정은 그를 똑바로 마주한 채로 말했다.

“팀장님은 8개월 후면 호주로 가시잖아요. 어차피 떠날 사람에게 가족들이 헛된 기대심을 품게 하고 싶진 않아요. 나중에 팀장님이 떠나고 나면, 가족들 모두 무척 씁쓸해할 게 분명하니까요.”

그건 괜한 우려가 아니었다. 가족들이 그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은 추후 그와 헤어지게 될 때 상심도 크다는 의미였으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진짜 연인도 아니잖아요.”

그녀의 말에 도훈의 눈빛이 짙어졌다.

이윽고 그의 굵은 음성이 밤공기 사이로 흩어졌다.

“그럼 진짜로 연애하면 되잖습니까.”

“네?”

잘못 들었나 싶어 다정이 눈을 가늘게 뜨는 순간, 그가 한 번 더 확실하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나랑 사귑시다. 한다정 씨.”

“?!”

“보여주기식이 아닌 진짜 연애로.”

도훈의 곧은 눈빛이 그녀를 강렬하게 응시했다.

“이번엔 내가 고백하는 겁니다. 한다정 씨에게.”

다정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온몸에 작은 전율이 일었다.

‘팀장님과 진짜 연애를……?’

뜻밖의 고백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둘 사이의 정적을 채우는 건 오직 빗소리뿐이었다.

그녀가 아무런 말이 없자, 도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정도면 연애 상대로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는데.”

“…….”

“한다정 씨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는 목소리에 더 힘을 주어 물었다.

“아직도 난 당신에게 직장 상사일 뿐이에요?”

블랙홀처럼 짙고, 타오르는 불처럼 뜨거운 눈동자.

그의 눈빛은 결코 농담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정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가 진정성 있게 마음을 고백한 지금, 저 자신도 솔직해져야 했다.

“저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입술을 달싹이고만 있던 다정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는 팀장님이 멋진 분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여자들이 사귀고 싶어 하는 스타일이라는 것도, 뭐 하나 빠지는 부분이 없다는 것도 모두 인정해요.”

“…….”

“팀장님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릴 때도 있고, 정말 근사한 사람이구나 하고 감탄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이런 감정이 정확히 어떤 마음인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다정은 자신의 감정을 꾸밈없이 전했다. 모든 이야기는 진심이고, 일말의 거짓도 없었다.

그가 정말 멋있는 사람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지만, 그런 그를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아직 제 감정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그가 멋진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연애를 시작할 수는 없었다.

다정은 그를 응시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여느 여직원들처럼 팀장님을 좋아하는 마음인지, 그저 상사로서 동경하는 마음인지, 그것도 아니면 커플 연기에 빠져 마음을 착각하고 있는 건지…… 저도 아직 제 마음을 확실히 모르겠어요.”

“어떻게 자신의 감정을 모를 수가 있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도 그럴 게, 함께한 시간이 아직 부족하잖아요. 제가 팀장님을 제대로 보기 시작한 건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걸요.”

“그 정도면 충분한 시간 아닙니까?”

“한 달밖에 안 되었는데요?”

“나에겐 ‘한 달이나’였는데, 한다정 씨에게는 ‘한 달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군요.”

대화를 하면 할수록 답답해지는 건 도훈이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다간 결말이 나오지 않을 듯했다.

도훈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의 크기가 다르고, 서로가 원하는 것이 다른 지금, 먼저 굽히고 들어가야 할 사람은 아쉽게도 감정이 더 큰 사람 쪽이었다. 고심하던 그가 입술을 열었다.

“그럼 내가 시간을 좀 더 주면 되겠습니까?”

“…….”

“한다정 씨 감정이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죠.”

다정은 잠시 갈등이 되었다. 그녀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감정이란 게 확실히 보장되는 게 아니잖아요. 무턱대고 팀장님을 기다리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팀장님같이 멋진 분이 뭐가 아쉬워서 저를 기다려요?”

사실은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이렇게 멋진 남자를 자신에게 매이게 두는 것 또한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말에 도훈은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난 기다림에 제법 익숙해졌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다정 씨는 나에게 시간이 얼마큼 걸리든, 충분히 기다릴 만한 여자예요.”

그의 그윽한 눈동자를 마주치자, 다정의 가슴이 속절없이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는 늘…… 이렇게 멋진 말만 하는 걸까.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어떤 대답을 할지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처럼.

그를 바라보는 다정의 눈동자에 애틋함이 번졌다.

지금 이 순간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는 멋지고 벅찬 사람이었다.

문득 이런 남자를 정말 기다리게 해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들 때쯤, 도훈이 입을 열었다.

“다가오기 힘들면, 그냥 서있어요.”

“…….”

“내 쪽으로 오지 않아도 좋으니까, 물러나지만 말아요.”

그가 다정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바로 앞에 마주친 그의 눈빛에 다정의 심장이 또 한 번 진동했다. 한 걸음만 더 다가가면 품에 안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도훈이 그녀를 응시했다. 눈빛만큼 뜨거운 숨결이 얼굴을 스쳤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그 누구를 보고 있든…….”

그의 나직한 음성이 빗속을 거닐었다.

“내가 꼭 붙잡을 테니까.”

***

월요일 아침.

다정은 출근 준비에 한창이었다.

다정이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걸치려는 순간, 노크 소리도 없이 방문이 왈칵 열렸다.

다정이 미간을 찌푸리며 방문 쪽을 바라보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애정과 소정이었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두 자매가 제 방을 찾는 일은 처음이었기에 다정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뭐야. 아침부터?”

동생의 말을 무시한 채, 애정과 소정은 마치 검문하듯이 다정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었다.

무늬 없는 하얀색 블라우스에 회색 팬츠. 그리고 유행이 한참 지난 디자인의 트렌치코트.

그 모습을 본 소정이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지금 그 차림새로 출근하겠다고?”

“회사에 이렇게 입고 가지, 어떻게 입고 가?”

퉁명스러운 동생의 대답에 두 언니가 눈이 뒤집히며 소리쳤다.

“그거야 유부남만 잔뜩 있는 회사 다닐 때나 입는 옷이고!”

“넌 회사에 애인이 있잖아! 그것도 초절정 꽃미남 애인이!”

둘은 태어나 처음으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 마치 한 사람이 말하는 듯한 착각이 일게끔 외쳐댔다.

“도훈 씨 직급이 팀장님이라며? 능력도 좋은데, 잘생긴 데다가 키도 크고 말도 잘하고, 나이까지 젊어! 이런 남자를 여자들이 가만두겠어?”

“여직원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고.”

그녀들의 목소리가 시끄럽다는 듯이, 다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말했다.

“말도 안 돼. 팀장님은 이미 나랑 사귀는 사이라고 회사에 소문 다 났는걸.”

“나 참.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니? 게다가 골키퍼가 이렇게 부실한데?!”

그렇게 말하며 애정이 위아래로 그녀를 훑었다.

친가족에게 당한 팩트 폭력에 다정은 잠시 정신을 못 차리다가,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언니들 내 친언니 맞아?”

“친언니니까 이렇게 발 벗고 나서는 거 아니야!”

애정과 소정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언니들 말 명심해라. 너 이렇게 입고 다니다간, 팀장님 눈 돌아가는 건 순식간이다.”

“예전에 너희 회사 가보니까 예쁜 여자가 아주 수두룩하던데.”

그녀들의 말을 듣고 있다 보니, 전혀 틀린 말 같진 않았다. 회사에 자신보다 예쁘고 능력 있는 여자는 넘치고 넘쳤다. 도훈도 남자인 이상, 아름다운 여자들에게 마음이 넘어가는 건 언제든 가능한 이야기였다.

“…….”

도훈이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상상을 하자, 다정은 어쩐지 가슴 한편에 불편한 느낌이 밀려왔다. 그때, 소정이 가져온 옷 뭉치들 중 한 벌을 꺼내 다정에게 내밀었다.

“이 언니가 남자들이 반할 수밖에 없는 옷을 추천해줄게.”

다정은 그녀들이 자신 있게 꺼내 든 의상을 바라보았다.

“이걸 입고 가라고?”

“응. 내가 살쪄서 못 입고 있었던 원피스인데, 특별히 너에게 하사할게! 완전 예쁘지?”

의상을 본 다정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녀들이 추천한 옷은 색감과 패턴이 화려한 원피스였다. 상의는 가슴이 거의 반쯤 드러날 만큼 깊게 파여 있었고, 치마 길이는 차라리 벗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짧았다. 클럽에 입고 가도 모두가 쳐다볼 의상이었다. 다정은 피곤함이 급격히 몰려와 맥없이 말했다.

“그거 입고 갔다간 나 짤려…….”

기운이 쭉 빠진 그녀의 모습에 두 언니가 소리쳤다.

“짤리는 게 대수야? 일보단 사랑이 우선이지!”

“위기감을 가져! 팀장님이랑 결혼 안 할 거야?!”

다정은 시큰둥한 얼굴로 대꾸했다.

“아직 사귄 지 한 달도 채 안 되었는데 무슨 결혼이야?”

“어머나! 한 달이나 사귀었어? 이 언닌 만난 지 일주일 만에 결혼하자고 프러포즈 받았단다.”

소정의 말에 옆에 있던 애정이 끼어들었다.

“그럼 뭐 해. 결혼한 지 1년도 안 돼서 헤어졌는데.”

“우씨! 언니는 내 편을 들어줘야 할 거 아니야!”

잠시 투덕거리던 둘은 다정에게 다시 바짝 다가가며 본론으로 들어섰다.

“자. 언니들이 팀장님을 완벽하게 내 남자로 만드는 법을 알려줄게.”

둘은 만담을 하듯 서로 돌아가며 한마디씩 내뱉었다.

“오늘 밤 팀장님과 집 앞에서 헤어질 때, 이렇게 말해봐.”

“팀장님. 저희 집에서 커피 한잔하고 갈래요? 아참, 우리 집엔 철없는 언니들이 있죠. 어떡한담.”

“그럼 팀장님이 분명 아쉬워하겠지. 그 순간 네가!”

“우리 집 말고…… 팀장님 집으로 가요♥”

“그 말에 팀장님 눈이 뒤집히고, 몸이 막 후끈거려서 어쩔 줄을 몰라 할 거야.”

“그렇게 되면, 집으로 가고 말 것도 없어! 그냥 가까운 데 아무데나 가서 확……!”

두 자매가 다정의 코앞으로 다가오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자빠뜨려버려.”

혹시나 건질 게 있나 싶어, 그들의 만담을 잠자코 듣고 있던 다정이 베개를 홱 던졌다.

“어휴, 진짜! 그게 동생한테 할 말이야?!”

잠깐이라도 저 두 명을 진심으로 상대하려고 한 내가 등신이지, 라고 생각하며 다정은 그녀들을 방 밖으로 내쫓았다.

“내 방에서 나가. 다신 들어오지 마!”

그녀들을 내보내마자, 다정은 재빨리 문을 잠갔다.

“야. 한다정!! 언니들 말 안 끝났어!”

문 밖에서 시끌벅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다정은 다시 거울 앞에 섰다.

옷매무시를 살피던 그녀는 잠시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정이 중얼거렸다.

“내 옷차림이 그렇게 밋밋한가?”

거울 속의 수수한 제 모습을 보니, 언니들 말대로 그동안 자신이 너무 꾸밈 없이 회사를 다닌 것 같기도 했다.

“귀걸이라도 좀 바꿔볼까?”

다정은 늘 차고 다니던 작은 귀걸이를 빼낸 후, 액세서리함을 뒤지기 시작했다. 작년 생일 때 선물 받았던 꽃모양 귀걸이를 걸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귀걸이 하나만 바꿨을 뿐인데, 제법 화사한 분위기가 나는 듯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귀걸이에 맞춰 좀 더 여성스러운 옷을 입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 다정. 그녀는 입을 만한 옷이 뭐가 있는지 옷장을 뒤졌다.

***

“할머니, 엄마. 저 회사 다녀올게요.”

다정은 현관문을 나서기 전, 거실 쪽을 보며 크게 말했다.

아침에 옷을 바꿔 입은 그녀는 하늘색 블라우스에 잔잔한 패턴이 새겨진 스커트 차림이었다. 겉옷은 마땅히 입을 옷이 없어, 결국 원래 입었던 트렌치코트를 걸쳤다. 나름 고르고 골라서 입은 옷이었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크게 변한 것이 없어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그래도 제게는 화려하게 느껴지는 차림새가 어색한 듯 다정이 다시 한번 매무시를 살피는 순간이었다. 엄마 봉해가 현관으로 뛰어오며 소리쳤다.

“다정아, 잠깐만!”

헐레벌떡 뛰어온 그녀는 다정에게 무언가를 건네었다.

무언가가 가득 담긴 쇼핑백을 바라보며 다정이 물었다.

“이게 뭐야?”

“밑반찬 좀 만들었어. 마른 반찬이라 냄새는 안 날 거야.”

“?”

“팀장님 드려. 도훈 씨 혼자 산다면서? 남자 혼자 살면 이런 거 챙겨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보니까 살은 좀 더 쪄도 되겠더라.”

이럴 수가. 엄마까지 왜 이래…….

다정이 울상이 되어 고개를 저어댔다.

“……아니야. 제발 이러지 마요, 엄마.”

봉해는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쇼핑백을 보며 뿌듯한 얼굴이었다.

“언제 시간 내서 집에 놀러오라고 해. 엄마가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놓을 테니까.”

“엄마. 이러면 팀장님이 부담스러워 한다고요. 왜 이렇게 남자 맘을 몰라요?”

딸의 대꾸에 봉해는 그녀의 등짝을 한 대 때리며 말했다.

“으휴! 남자 맘을 모르는 건 너지! 어제 보니까 인물도 훤칠하고, 말도 잘하고, 능력도 좋고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더만! 누가 뺏어가기 전에 잘 붙들어놔야 될 거 아니야!”

파도처럼 와르르 쏟아지는 엄마의 잔소리에 다정이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봉해의 또 다른 아군이 합세하며 그녀를 공격했다. 바로 할머니 길순이었다.

“그려. 어멈 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 지 서방보고 집에 또 오라고 혀. 할미가 이번엔 결혼 날짜를 확실히 잡아놓을 테니.”

“할머니도 참. 지 서방이라니요. 저희 아직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요.”

“그려, 알겄어. 지지배, 속으로는 좋으믄서 유난 떨기는…….”

“…….”

다정은 울고 싶어졌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제 가족들은 자신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든 도훈에서 시작해서 도훈으로 끝날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공격은 도훈과 결혼하든지, 헤어지든지 어떻게든 끝을 봐야 멈출 것이었다.

다정은 앞으로 어떻게 버텨야 할지 고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저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나오지 않았다.

***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한 남자의 얼굴에 드리웠다. 매끄럽게 뻗은 콧날이 빛을 받아 날렵함을 뽐냈다. 입체감을 더한 남자의 얼굴은 박물관에 전시된 예술 작품처럼 아름답고 고고했다.

똑똑.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서류를 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올렸다.

“들어와요.”

그의 말에 한 여자가 들어왔다. 밤새 한숨도 못 잔 듯한 얼굴로 들어오는 그녀는 바로 팀에서 가장 말이 많기로 소문난 춘희였다.

춘희는 책상 앞에 앉은 남자를 흘깃 바라보았다. 남자는 늘 그렇듯 깔끔한 슈트 차림에 반듯한 자세로 그녀를 마주하고 있다. 칠흑처럼 검은 눈동자는 자신을 모두 꿰뚫어볼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눈빛 하나만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기술을 가진 그는 바로 사내에서 가장 잘생기기로, 또한 가장 무섭기로 소문난 상사 지도훈이었다.

“무슨 일이죠?”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도훈이 먼저 높낮음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시간을 끌어봤자 그녀만 손해였다. 춘희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팀장님. 제 과오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녀는 정말 죄송한 얼굴로 이어 말했다.

“제가 1년에 한 번씩 신랑도 못 알아볼 만큼 취할 때가 있는데, 바로 저번 주 금요일이 그날이었습니다. 제가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팀장님께 무례하게 군 점 정말 죄송합니다.”

절절함이 묻어나오는 사과를 마치고, 그녀가 도훈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말없이 덤덤한 얼굴로 춘희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더욱 무서워 춘희는 오금이 저려왔다.

그녀는 다급해졌다. 본능적으로 슬픈 결말을 직시한 그녀는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팀장님께 했던 실수가 쉽게 넘어갈 수 있는 행동이 아니라는 거 압니다. 저도 쉽게 용서 받을 생각 없습니다. 석고대죄를 하라면 지금 당장 여기서 무릎을 꿇겠고, 삼보일배를 하라면 회사에서 북한산까지 절하고 오겠습니다.”

도훈이 미간을 살짝 좁히며 대꾸했다.

“겨우 북한산이요?”

그녀의 눈망울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럼…… 백두산까지 찍고 올까요? 그랬다간 저 총살당할지도 모르는데…….”

목소리까지 떠는 그녀의 모습에 씩 웃어 보이는 도훈. 참아왔던 웃음이 드디어 터져버렸다.

“뭘 자꾸 용서를 하라는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서춘희 씨가 잘못한 일이 있어야 제가 용서를 하든가 하죠.”

“?”

예상치 못했던 도훈의 반응에 춘희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훈은 특유의 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그때 전 팀장이 아니라 한다정 씨 애인 자격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서춘희 씨 역시 저를 팀장이 아닌 다정 씨의 애인으로 대했기에 그런 일이 생겼던 것뿐이고요.”

“…….”

“장난이 조금 짓궂긴 했지만, 그렇다고 회사에서까지 그 일을 끌어들여 논할 수준은 아니라고 봅니다. 무엇보다 회사 밖에서 벌어진 일이 회사 일로 이어지는 건 옳지 않으니까요.”

그의 말에도 춘희는 아직 긴장을 풀지 못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땐 팀장님이 무척 화나셨던 것 같아서…….”

“화낸 게 아니라, 한다정 씨가 곤란해 보여서 도와주려고 한 것뿐입니다.

“네?”

“서춘희 씨 저한테 잘못한 거 없으니, 그렇게 기죽은 표정 안 지으셔도 된다는 뜻입니다.”

영문을 몰라 하는 그녀에게 도훈이 씩 웃어 보였다.

“오히려 잘하셨어요.”

그는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말했다.

“앞으로도 한다정 씨가 어디선가 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면, 몇 시가 되었든 상관없으니 저에게 연락하세요.”

“……새벽 네 시, 다섯 시라도요?”

“네. 상관없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한 가지 더 부탁을 하자면.”

‘부탁?’

도훈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춘희는 눈을 크게 뜨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사뭇 진지해진 얼굴의 도훈이 입을 열었다.

“제가 지켜본 결과, 한다정 씨는 술에 약한 편입니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더라고요. 술자리를 갖는 건 상관없지만, 너무 많이 먹이지는 말아주십시오.”

“…….”

“아, 이것도 물론 팀장이 아닌 애인으로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춘희는 살짝 충격받았다. 도훈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부탁한다는 것 자체도 놀라웠지만, 그 부탁의 내용이 여자 문제가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

춘희가 여전히 진지한 눈빛의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다정 씨가 왜 팀장님께 빠졌는지 이해가 가네요.”

“무슨 말입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신다고요.”

이제야 긴장이 풀리는 듯 춘희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저는 언제나 팀장님과 다정 씨의 연애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혹시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그녀의 당찬 목소리에 도훈이 흡족한 미소를 입가에 지어 보였다. 춘희가 이렇게 화기애애하게 대화가 마무리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도훈이 입가에 은은하게 맺혀있던 미소를 지운 채, 담담하게 말했다.

“후배 애인으로서의 이야기는 끝났고, 이제 팀장으로서 묻죠.”

“예?”

“인도네시아 정유공장 건설 보고서는 언제 제출할 겁니까?”

그의 눈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매섭고 똑 부러졌다. 순식간에 뒤바뀐 분위기에 춘희는 적응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거렸다.

“아……. 그건 오늘, 아니 내일 안으로 완성하겠습니다.”

“분명 오늘 오전까지 제출하기로 약속되지 않았습니까?”

쏘아보는 눈빛이 심장을 관통할 것처럼 차가웠다. 춘희의 어깨가 저절로 움찔했다. 저 호랑이 같은 남자를 몇 분 전 자상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우스울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내일까지 기한을 미루면, 제 컨펌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할 겁니다. 내일 나에겐 서춘희 씨 보고서를 붙잡고 있을 여유가 없으니 말입니다.”

“아니, 그럼……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까지 끝내겠습니다.”

“좋습니다. 오후 세 시까지 제출하도록 해요.”

“네. 알겠습니다.”

춘희는 하얘진 얼굴로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와 단둘이 있는 공간에서 1분1초라도 빨리 빠져나오고 싶은 마음에 춘희는 부리나케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마침 팀장실에 들어가려던 다정과 눈이 마주쳤다.

다정은 놀란 얼굴로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는 영혼까지 탈탈 털린 얼굴이었다.

“춘희 씨. 낯빛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으세요?”

춘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다정 씨……. 역시 팀장님은 무서워.”

그렇게 말하며 힘없는 걸음걸이로 터벅터벅 자리로 향하는 춘희. 그녀의 맥없는 뒷모습을 보며 다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몸을 돌려 팀장실 문 앞에 선 다정이 노크를 했다.

똑똑, 소리가 울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다정은 서류파일을 들고 팀장실 문을 열었다. 그의 공간 안으로 들어가는 이 순간이 왠지 모르게 가슴이 설레어왔다.

하늘색 블라우스에 무릎 위까지 오는 스커트를 입은 다정이 팀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주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마치 화보의 한 장면처럼 슈트 차림이 잘 어울리는 남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근사함이 넘쳐흐르는 남자.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만큼 압도적인 분위기를 가진 남자.

‘이런 남자가 나를…….’

도훈을 바라보던 다정은 문득 지난밤의 일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멋진 남자가 자신에게 고백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녀가 새삼 도훈의 외모에 감탄하는 사이,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 네. 좋은 아침입니다.”

감상에 젖어있던 다정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방금 춘희 씨를 마주쳤는데요. 꼭 울 것 같은 표정이던데……. 혹시 무슨 일 있었나요?”

“별말 안 했습니다. 느닷없이 삼보일배를 하겠다던데.”

“후훗. 아무래도 저번 주에 있었던 일이 죄송스러웠나 봐요.”

그렇게 말하며 다정이 피식 웃어 보였다.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도훈.

그 시선이 낯 뜨거워 다정은 얼굴을 붉혔다.

‘눈빛이 예전보다 더 뜨거워진 느낌이야…….’

그녀는 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한쪽 팔에 끼고 있던 서류를 그의 앞에 놓으며 말했다.

“오늘까지 제출하기로 했던 터키 시장 동향 및 수주 전략 보고서입니다.”

도훈은 그녀가 준 서류를 빠르게 정독했다. 그는 눈으로 읽는 속도가 빠른 편이었다. 그럼에도 문서의 어느 부분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파악하곤 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잘했군요.”

서류의 마지막 장을 넘기던 도훈이 말했다.

“다만 세 번째 페이지의 실적 그래프에 작년과 비교한 수익 수치를 넣어주면 좋을 듯합니다.”

“네. 시정하겠습니다.”

“수고 많았어요. 내일 오전 회의 자료로 쓸 수 있게 준비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다정은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 돌아서 걷던 다정이 걸음을 멈추었다. 몸을 다시 돌려 도훈을 바라보았을 때, 근사한 미소와 함께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볼 수 있었다.

“오늘 예쁘네요.”

입술 끝을 매력적으로 씩, 올리며 그가 덧붙였다.

“물론, 원래도 예뻤지만.”

두근두근.

가슴 한가운데 퐁당 떨어진 돌이 물결을 치며, 빠른 속도로 파장을 일으켰다.

그의 미소를 보며 다정은 직감했다.

이대로라면 그에게 빠져드는 건 한순간일 거라고.

***

“다정 씨. 무슨 좋은 일 있어?”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던 다정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춘희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다정의 눈썹이 둥글게 휘며 대답했다.

“네? 아니요.”

“후후. 콧노래를 부르길래.”

“제가요?”

“응. 계속 흥얼거렸잖아.”

내가 그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콧노래를 부른 듯했다.

다정이 멋쩍은 얼굴로 웃어 보이자, 춘희가 한마디 덧붙였다.

“팀장님께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그런가? 피부도 좋아지고, 얼굴도 갈수록 예뻐지는 것 같아.”

그녀의 칭찬에 다정은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예쁘기는요.”

인사치레인 줄 알면서도, 은근히 기분이 좋은 말이었다. 다정과 춘희가 엘리베이터를 탔고, 각자 가야 하는 층수 버튼을 눌렀다. 승강기가 3층에서 멈춰서고, 춘희가 먼저 내리며 말했다.

“나는 자료실에 들렀다 가려고. 먼저 올라가.”

“네.”

서로가 인사한 후, 엘리베이터가 닫히려는 순간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정의 환했던 낯빛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바로 다정이 사내에서 부문장 다음으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 세아였다.

세아는 딱 달라붙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위에 재킷을 걸쳤지만 콜라병같이 볼륨감 있는 몸매가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녀는 한쪽 팔엔 파일을 낀 채 도도한 자세로 정면을 응시했다.

세아는 예나 지금이나 인기가 많았다. 세아가 회사 건물 안으로 들어오면 모든 남자들이 그녀를 흘깃 보곤 했다. 예쁘장한 얼굴과 날씬한 몸매를 소유한 그녀는 여자들의 시선도 훔칠 만큼 매력적인 인물이긴 했다.

세아가 타자마자, 엘리베이터 안은 정적으로 휩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엘리베이터 안에는 세아와 다정 단 둘만 타고 있었다.

“선배가 좋아할 만한 소식이 하나 있어요.”

고요함을 깨고 울리는 세아의 목소리에 다정이 흠칫했다. 세아는 여전히 도도하게 정면을 응시하며 말했다.

“나 현우 씨랑 헤어졌어요.”

‘?!’

다정은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 움찔한 그녀의 표정을 놓치지 않은 듯, 세아가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가 다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헤어졌는지 안 궁금해요?”

다정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냉정하게 답했다.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듣지 않으면 후회할지도 몰라요.”

다정의 어깨가 또 한 번 작게 움찔했다.

듣지 않으면 후회할지도 모른다니…….

그녀의 자극에 신경이 곤두섰다. 하지만 다정은 그녀를 진심으로 상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깨달았다.

한 번 믿음이 깨진 그녀에게서 무슨 말이 나온들 이제 다정에게는 와 닿지가 않았다.

지금도 좋은 의도로 꺼낸 이야기가 아닐 게 분명했다. 그녀의 말은 무시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한 다정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획팀이 있는 15층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렸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세아가 중얼거렸다.

“정말 후회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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